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27화 (127/250)

< 46장 - 작가 박무열 (2) >

‘이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신부와 수녀 사이의 관계로 잉태된 그는, 공식적으로는 고아였지만, 두 성직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그리고 평범하게 공부하고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며 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끝물인 고3 시절. 남들은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한 시기에, 그는 삶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인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새하얀 피부의 전학생 ‘김자영’이 그 주인공.

고3인데 왜 전학을 왔냐는 물음에 해맑게 웃으며 ‘하늘의 뜻’이라 답한 그녀가, 소년에게는 마치 성모처럼 보였다.

따뜻한 봄날의 전원(田園). 풋풋한 소년소녀는 서로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방학에 즈음해 연락이 끊기더니,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는 김자영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겨울이 왔을 때, 이수는 살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소녀는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했다. 짐이 가득 담긴 가방을 멘 상태였는데, 그 안에 이수의 흔적이 있었다.

애정을 담아 쓴 러브레터. 비가 많이 내리던 날 갈아입었던 속옷. 그의 손으로 직접 조각한 성모마리아상.

그 성모상에서 검출된 혈흔이 김자영의 것으로 밝혀졌다.

하필 소년이 가출했던 날 살해된 소녀는, 최근에 해산(解産)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경찰은 그게 이수와의 관계로 태어난 아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치정으로 인한 살인과 유기가 사건의 진상이라고 결론지었다.

법리적으로 가족이 없는 소년은 언론의 먹잇감이 되었다. 범인의 잔인한 살해수법이 가정교육 문제로 치환되어, 대중은 이수를 두고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며 매도했다.

법정에서도 소년은 무력했다. 그를 가리키는 무수한 증거들이 검고 깊은 늪처럼 발을 잡아당겼다.

다행인 건 겨울에 태어난 그가 소년법의 대상자였다는 점.

아직 만 18세가 되지 않은 소년은, 끔찍한 죄질에도 불구하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이감된 교도소에서 이수는 마침내 고민했다.

누가 죽였을까- 누가 나의 마리아를 살해하고 그 화살을 내게로 돌렸을까- 어떻게 내가 가출한 날짜에 맞춰 내가 머무르던 모텔 인근에서 그 소녀를 죽일 수 있었을까-

해답은 억울할 정도로 금세 떠올랐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녀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자. 소녀의 전학을 추진하고 후견인으로써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자. 그리고 가출한 소년을 찾아내 성당으로 돌려보냈던 자.

그 모든 조건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담임교사인 ‘신주원’이었다.

그날, 이수의 마음은 악마가 되었다.

수용시설 내부에는 교도관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시공간도 제법 있기 마련이다. 주로 노역 시간의 작업장에서 은밀한 충돌이 벌어지곤 했다.

이수는 그 안에서 억눌려 있던 폭력성을 드러냈다.

젊고 건강한 신체가 오직 분노로 날뛰자, 날고 기는 범죄자들도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와 일곱 명의 수감자가 함께 의무실에 실려간 밤.

붕대를 칭칭 감은 이수에게, 신성한 목소리가 강림한다.

나의 아들아. 네 마음의 아픔을 내가 안다. 진실로 이르노니, 죄를 지은 자는 심판받을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소년은 엉엉 울며 하늘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렇지만 침은 그대로 떨어져 자신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치면 가석방은 절대 안 될 것’이라는 소장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이수는 이후 자중하려 애쓴다.

그러는 동안 간악한 목소리가 자주 귓가를 간지럽혔다.

착한 아이야. 어찌나 착한지, 원수는 바깥에서 영화롭게 어린 여아들과 놀아나고 있는데도, 음습한 형무소 안에서 선물봉투를 접으며 울분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구나. 네가 사랑했던 여아는 뒤꿈치가 잘리고 얼굴이 짓이겨져 사망했는데, 너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도 하려고 하지 않는구나.

그런 소리가 들릴 때면 소년은 킥킥거리며 웃곤 했다.

순진한 악마의 순전한 오해였기에.

소년은 이미 끔찍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 그저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가석방을 노릴 뿐, 단 한 순간도 자신의 하나뿐인 사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성자가 되었다.

교도관과 수감자와 봉사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대했다. 똥오줌을 받아주고 자신의 신장까지 떼어주며 그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그건 순수한 소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모든 악의는 오직 한 사탄을 향하게 되었다. 그 외의 인간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선인으로 불리건 악인으로 불리건, 그저 불쌍한 어린 양에 불과했다.

그렇게 처절한 복수를 구상하며 성스럽게 보낸 세월의 끝.

마침내 가석방으로 인간세상의 흙을 밟은 청년에게, 눈물을 머금은 신부가 다가온다.

어린 시절 삼촌이라 불렀던 중년의 신부 체사리오. 그가 친부와 친모의 사망을 알려줬다.

난민구호활동 중 함께 폭격을 당했다고.

그들의 서랍장에서 유서를 찾았는데, 그 내용은 이수가 평생 아무런 죄 없이 살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였다고.

자유와 함께 찾아온 비보. 그리고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뭉개는 유언.

새하얀 편지지 두 장을 접으며, 청년은 질문한다.

순백의 두부는, 앞으로 하얗게 살라는 뜻으로 먹이는 거죠? 삼촌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진흙탕 같은 지옥에서 나 혼자 하얗게 사는 게, 정말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 신부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 대신 보속(속죄의 실천)을 지시한 건, 예의 신성한 목소리였다.

나의 아들아.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마침내 복수하지 않는 복수자가 탄생하는 발단부.

바로 거기까지 읽은 뒤에, 이찬은 외쳤던 것이다.

“이건 진짜 너무 갔잖아요? 이거, 이수라는 이름이 설마 절 염두에 두고 만드신 건 아닐 거고, 예수를 차음(借音)한 것 같은데. 맞죠?”

박무열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일정 정도는 영향이 있지.”

“그러면 이건······ 신성모독 아니에요? 재림예수라니. 인문학적 상상이라곤 해도, 너무 스케일이 커지잖아요?”

“일종의 상징성이야. 정말로 예수님을 상정한 건 아니고.”

“그래도 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감독님, 아무리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던 거지만, 이건 너무 가신 것 같아요. 야훼와 사탄의 목소리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성인이 되는 주인공이라뇨. 너무 특이하잖아요?”

박무열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자, 신유벽이 낄낄대며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그 B급 감성이 이 작품의 포인트야. 봤다시피 이렇게······ 이수의 내레이션을 위주로 발단부가 전개되는 거고, 그 뒤부터는 끔찍한 액션활극이 말도 안 되는 휴먼드라마로 디졸브(기존 화면이 흐려지는 동안 다음 장면이 섞여서 드러나는 화면전환법) 되는 거고. 거기까지 읽어봐야지.”

“거기까지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휴, 이 섣부른 꼬맹이. 읽어봐. 보면 알아. 진짜 웃길 거야. 아니, 웃기다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고, 관객들은 웃기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보는 내내 입을 다물 수 없는 스토리가 될 거거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이건 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고개를 저을 만한 괴작이라고 이찬은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 타이밍에 룸의 문이 열려, 원고지를 내려둔 채 식사를 시작하게 됐다.

“먹으면서 들어, 찬아. 무열이 형님이 초고를 다 쓴 건 최근이지만, 시놉시스는 두 달 전에 완성을 하셨대. 그래서 이후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여기저기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보여줬대. 그랬더니, 겨우 A4 네 장짜리 시놉을 보고 당장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서른 명이 넘었다는 거야. 그만큼 세계에 먹히는 아이템이라는 거지.”

“음······ 음. 이게요? 전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한국시장 생각하면 황당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너도 알아야 돼. 마스터피스란 언제나 대중성을 위배하는 법이야. 가장 파격적이고 신선한 도전만이 예술가들을 감동시켜. 그러니까 이건 너한테 좋은 기회가 될 거야. 그동안 가족영화나 블록버스터······ 그러니까 상업성 넘치는 영화들에만 출연했잖아? 이제는 이런 괴작에도 참여할 때가 됐다는 거지.”

괴작도 괴작 나름이지- 이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응에 신유벽이 낄낄거리고, 뒤통수를 긁적인 박무열이 대치상황의 해소에 나섰다.

“일단 이건 초고일 뿐이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전에도 말했다시피 네 의견을 얼마든지 수용할 생각이 있어. 앞으로 찬찬이 읽어보고, 거기에 네 생각을 메모해서 들려줬으면 해. 그러면 내가 수정할 테니까.”

“아니 형님, 뭘 또 그렇게 받으십니까? 이거 지금 딱 좋다고요. 열여섯짜리 꼬마 의견을 수용하실 건 또 뭐예요?”

“이게 내가 혼자 쓴 거면 내 마음대로 하겠는데, 말했잖아? 처음에 아이디어를 준 게 찬이란 말이야. 그러면 당연히 상의해서 만들어가야지. 거기에 난 아무 불만이 없다.”

최고의 국제영화제에서 권위 있는 경쟁부문을 수상한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면 고치겠다고까지 이야기하는 상황.

거기까지 들은 뒤에는 이찬도 더 뻗댈 수 없게 됐다.

“일단 알겠어요. 가져가서 차분하게 살펴보고, 제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으면 적어볼게요.”

“그래, 그러면 돼. 그러면 이제부턴 편하게 식사할까? 시간이 늦어져서 빨리 처치해야 될 것 같다.”

*

PiFan의 폐막식은 그 명성에 비해서도 훨씬 성대했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국제영화제 중에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개최되는 까닭이지만, 8회 PiFan의 경우엔 결정적인 요인이 따로 있었다.

“박 감독님! 여기 좀 봐주십쇼!”

“아이고, 박무열 감독님! 귀국하고 어떻게 지내십니까?”

“박 감독, 축하해요. 이제는 내가 후배라고 함부로 대할 수가 없겠어.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거장이니까 말이야.”

‘칸이 인정한 거장’ 박무열이 귀국 후 처음을 모습을 드러낸 공식석상.

자연히 기자들의 취재열기와 영화인들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이례적으로 많은 관계자들이 폐막식장에 몰려들어, 박무열의 존안을 마주하는 행운을 기대했다.

그들 중 일부가 또 다른 행운을 만났다.

“박무열 옆에 누구지? 모자 쓴 키 큰 애.”

“어? 글쎄······ 엇!? 야, 이찬이다!”

“뭐? 진짜로? 이찬이 여길 왜 와?”

“이찬이, 박무열하고 PiFan에? 이건 설마······ 차기작?!”

그렇게 소란이 벌어지는 동안, 소년은 박무열을 찾아온 젊은 감독에게 인사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찬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다. 정준범이야. 아마 내 작품 본 적 없을 텐데.”

“봤어요. <지구를 구해라!> 감독님이시잖아요?”

“······그거 청불인데?”

“공부를 위해서 본 거니까, 양해 부탁드려요.”

작은 민망함도 없이 둘러대는 소년. 칸의 거장 박무열 옆에서 껄렁껄렁 팔자걸음을 걷더니, PiFan 심사위원장 앞에서도 조금도 긴장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에 정준범은 눈을 길게 만들며 웃었다.

아역 출신 배우들이 조숙한 건 자주 겪어 아는 바지만, 이찬은 거기서 몇 걸음은 더 나아간 것 같았다.

“재밌는 녀석이라더니. 준원이한테 네 얘기 가끔 들었다.”

“제준원 감독님요? 두 분 친하세요?”

“대학 동기야. 그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감독 일 하면서 자주 연락하게 됐지. 예전엔 종종 ‘한미모’에도 나갔고.”

“그건 몰랐네요.”

“그래서······ 얘가 ‘이수’라는 거죠, 선배님?”

미묘한 눈빛으로 소년을 살핀 뒤, 정준범은 또 웃었다.

“하하. 완벽하네. 완벽해요. 또 걸작이 하나 나오겠어.”

“그래? 그럴 것 같아?”

“예. 준원이한테 메일 받고 밤새 그것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을 매칭해봤는데······ 안 되네요. 이 꼬마가 아니면 안 되겠어요. 사탄과 예수가 공존하는 얼굴은 이찬 아니면 전무하죠. 이 전에 한번 악역도 해보면 좋긴 하겠는데.”

“악역까진 아니지만, <고등형사>에는 폭력성으로 움직이는 시퀀스도 꽤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요? 그게 오덕환 감독님 작품이었지. 기대가 되네요. 그 작품까지 지금 드라마처럼 인기를 끌고, 그 다음에 <친절한 살인자>가 개봉한다면······ 흠. 흐음. 정말 기대가 돼요.”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감독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찬은 속으로 구시렁댔다.

‘기대가 되긴 개뿔. 해괴한 외계인 설정으로 괴작 중의 괴작을 만든 이 아저씨가 기대한다고 해봤자, 그보다 더한 괴작밖에 더 나올까. 하지만······ 그만큼 예술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평론가들이 참 좋아하는 감독이니······.’

폐막식이 시작된 이후 뚱하니 식순을 구경하고 있자, 이내 신유벽이 대상에 해당하는 초이스 상을 수상했다.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단상에 오르는 그를 보며 소년은 또 생각했다.

‘신유벽 감독도······ 평단에서 항상 인정받는 축에 속하지. 독립영화 만들던 시기에도 천재 소리만 듣던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친절한 살인자> 시나리오를 보고 마스터피스 소리까지 한 상황이야. 그렇다면, 내가 못 보는 뭔가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마음이 복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신성모독이나 B급 감성의 내레이션 때문이 아니었다. 소년은 ‘이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의 유언으로 인해 악의를 묻고 성인을 목표하게 된 그 캐릭터에게서, 윤대흥의 유지를 받아들던 열두 살 이찬을 떠올리고 말았다.

‘난, 형이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기 때문에, 허성윤이 죽음에 이르는 최선의 시나리오를 폐기해야 했어. 박무열 아저씨의 제안에 복수하지 않는 복수자를 제시했던 것도 다 그 유서 때문이었고. 그러니까······ 이수는 날 닮았어. 그게 좀 별로야. 더 이상 나 자신을 연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평범한 배역인데, 왜 이렇게 멍청하게 뒤틀린 캐릭터를 받아야 하냐는 거야.’

그런 생각에 절로 입술을 삐죽이게 됐던 것이다.

옆자리에서 그 소년을 힐끔거리던 박무열은, 뭔가를 한참 고민하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생각한 건데, 교도소 안에서 보속이 약한 게 좀 아쉽다. 자학으로 소녀의 영생을 기원하는 시퀀스를 넣어볼까?”

소년의 입술이 댓 발은 더 튀어나왔다.

< 46장 - 작가 박무열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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