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29화 (129/250)

< 47장 - 회장 계진행 (1) >

2004년 영화계의 주인공을 꼽자면, 장년의 감독 계진행이야말로 0순위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엔 이견조차 있을 수가 없었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전례가 없던 천만 관객 동원의 대기록을 일궈낸 인물이니.

그런 계진행이 기존의 영화제작 일정을 모두 미루고 배급사를 차렸을 때, 영화인들은 몹시 당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잘하는 본업을 팽개쳐두고 한정된 파이의 옆 시장에 뛰어든 셈이었으니.

그렇지만 계진행 본인의 의지는 굳건했다.

‘당장 영화 한 편 더 만드는 게 문제가 아냐. 내 영화라고 해봤자 미래가치는 없는 상품이란 말이지. 최초의 천만감독이라곤 하지만, 나는 한국 대중의 집단정서에나 어필하는 필부. 평생 칸에 가볼 일은 없을 거야.’

그건 겸양이 아닌 객관적 자기인식이었다.

그가 잘 만드는 장르는 사회문제를 다룬 액션 블록버스터. 그 외에는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세계 블록버스터 시장은 헐리우드의 전유물이다. 들어가는 돈의 차원이 다르고 스타 배우들의 네임밸류가 다르니, 그가 만드는 영화로는 해외에 어필하기 힘들 터였다.

그렇지만 안정록은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박무열은 심사위원대상을 따냈다. 그 외에도 국제영화제에 진출한 작품이 수십 편이었다.

한국에는 그토록 재능 있는 감독이 많았다.

‘인적자원 타령 하는 게 웃기다고 늘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자원들이야. 한국영화는 더 크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어. 이 시장이 많이 커졌다곤 해도 좁은 반도일 뿐. 총 객수가 1억을 돌파했다고 다들 난리가 났지만, 인구의 한계가 있으니 기껏해야 2억 수준에서 정체될 거야. 이대로는 한정된 장르의 작품들만 독과점으로 사랑받게 돼. 그러니까 세계를 공략해야 되는 거야. 멍하니 누군가 사주길 기다리지 말고, 앞장서서 직접배급으로 해외를 공략해야 해.’

처음에는 뜬구름 잡는 것 같았던 바람은, <684>의 해외 실적을 보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로컬라이즈를 위해서 현지 배급사를 끼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막상 감독 겸 제작자로서 바라본 일본의 배급전략은, 엉망진창이었다.

‘휴가 대목도 아닌 6월에, 그것도 대작 외화들이 줄줄이 출격하는 시기에 개봉시키다니!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이야. 안 그래도 낯선 이야기인데, 볼거리 넘치는 블록버스터들과 경쟁이 될 리가 있겠냐고. 홍보전략도 한심했단 말이야. 끈끈한 전우애와 휴머니즘 위주로 풀어냈다면 적어도 100만 이상이 더 들었을 거야. 대충 하는 녀석들 같으니. 그저 한국에서 잘 팔렸으니 한번 던져보자는 마인드로 배급을 하니까,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직접배급- 약칭 직배.

이미 헐리우드의 수많은 배급사들이 한국에 직배를 시작해,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 등으로 많은 수익을 올린 바 있다.

계진행은 자신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기업들은 안정적인 수익만을 추구해. 그러니까 박무열 감독의 <오이디푸스>처럼 국제영화제에서 검증된 아이템이 아니면 해외 배급에 나서려 들지 않아. 그러니, 신예 감독들한테서 외국에 먹힐 만한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해도, 일단 한국시장을 뚫기 힘들기에 기각되고 말지. 내가 나서야 해. 직접 이 바닥의 감독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투자해서 세계 동시배급에 나서야 해. 그 시작이 바로 이찬의 <고등형사>.’

일본에 개봉된 <684>가 비록 300만에도 못 미치는 흥행실적을 거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배우 이찬을 소개한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소기의 목적 이상을 달성했다.

‘자체적으로 각지에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각종 굿즈가 제작될 예정이라고 했지. 영화의 내용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찬의 압도적인 연기만큼은 알아봤다는 거야. 자연히 그 아이의 차기작에도 관심이 쏠릴 터. 한국과 동시개봉으로 배급하더라도 충분히 입소문을 끌 수 있어.’

<684>야 이념갈등과 분단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개인들의 비극이 주제였으니 평이 안 좋았지만, <고등형사>의 중심소재는 일본에 먹힐 만한 아이템이었다.

그곳 역시 야쿠자를 선망하는 청소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라니까.

그렇기에 계진행은 이미 일본 내에 지사를 설립하고 최고의 인력들을 스카웃했다.

‘그렇게 한일 동시개봉한 <고등형사>를 이후에 미국으로 보내는 거야. 그쪽에선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겠지만······ 영혼이 바뀐다는 소재는 희소성이 있으니까, 적어도 이찬을 알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동양의 신비 같은 소년이 인지도를 갖기 시작하고, 박무열과 이찬의 차기작이 내년 칸에서 커다란 화제를 끌면, 그때 한미일 와이드릴리즈 동시개봉으로 딱······!’

이쪽은 객관적인 예측이라기보다 설레발이었지만, 계진행은 가능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찬이니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684> 예고편 속의 소년 배우를 보며 뭐라고 떠들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몇 달째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였다.

하루빨리 <고등형사>가 완성되어 극장에 걸리기를 고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플랜을 짜느라 하루를 일주일처럼 보내곤 했다.

그런 그를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고등형사>의 크랭크업 일정은 예정보다도 빠르게 다가왔다.

2004년 8월 12일.

시청률 50%대를 유지하고 있는 <연애의 조건> 16부가 방송될 그날에, 4개월에 걸쳐 촬영된 판타지 액션 학원물의 마지막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계진행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그 크랭크업 현장을 찾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건 아니었다.

투자자든 배급사의 사장이든 촬영장에는 구태여 방문하는 일이 드물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소통이 전화나 서면으로 이뤄졌다.

그렇지만 계진행은 사장인 동시에 감독.

오덕환이 이찬만을 위해 만들었다는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두 눈에 직접 담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계진행만이 아니었다.

동순고 운동장에 차를 대고 내린 순간, 그는 맞은편 밴에서 내려서는 남태형과 신수영과 최정하와 임희재와 명진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이고! 하늘기획 스타들이 다 몰려왔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감독님도 오실 줄은 몰랐어요.”

밝게 답하는 신수영에게 계진행도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히 와야지. 내 페르소나가 크랭크업을 한다는데.”

“앗. 그게 찬이였어요? 조혁수 선배님인 줄 알았는데.”

“아직 내 사랑이 일방통행이긴 하지.”

진심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계진행의 영화세계라는 것이 주로 중장년층의 이야기인지라,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이찬과는 다시 작업을 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렇지만 공격적인 배급을 통해 스타로 만드는 건 가능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던 것이다.

청춘배우들의 뒤를 따라 촬영장으로 걸어가며, 계진행은 그들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연애의 조건>으로 이소연을 압살하고 명실상부 로코의 여신이 된 신수영에, 남태형과 명진아는 <꼬마신부>로 500만을 달성해버렸고, 다른 두 명도 주연작의 개봉을 앞두고 있어. 어리지만 대단한 배우들이야. 이런 친구들이 오직 그 꼬마 한 명을 보고 뭉쳤다는 거지. 거기에 임호준에 소해진에, 안정록 교수님까지. 그리고 한미모 감독들이 그 아이를 못 데려가서 안달이 났단 말이야.’

이찬이 박무열의 차기작 출연을 확정한 일에 한미모 회원들은 웃으면서 축하를 건넸지만, 속마음은 아쉬움 쪽이 더 큰 것으로 보였다.

특히 제준원은 테이블을 치면서 한탄하곤 했다.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에 딱 찬이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하여튼 괴상한 사람이란 말이야. 나로선 대체 어떻게 연출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소재인데, 그걸 <날 보러 와요> 기획하기 전부터 몇 년째 준비하고 있었다니.’

CG를 활용한 크로마키 연기가 주가 될 테니, 촬영기간도 후반작업도 길어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가 이찬과 작업하는 일은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상한 걸로 치면 이용빈 감독도 만만치 않지. 이찬이 끔찍한 범죄자를 단죄하다가 그 본인도 악마가 돼버리면 재밌지 않겠냐고 묻더니, 나중에는 만주를 배경으로 서부극 스타일의 대작을 만들겠다고 소리를 쳐댔지. 거기에 신유벽 감독은, 한물 간 복싱 소재 영화에 이찬 투입하고 싶다고 난리 부리다가, 그게 안 되면 시골 깡패 역할을 맡기겠다고 했지······.’

무엇 하나 흥행할 것 같지 않은 기획들이었지만, 계진행은 그 작품들의 투자배급을 전부 맡을 셈이었다.

칸의 거장 박무열이 엄선한 감독들이다. 언젠가는 그들 하나하나가 흥행성과 예술성을 겸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쓸 예정이었다.

대작 영화 하나의 수익으로 다섯 편의 괴작을 지원하자-

그것이 그가 차린 투자배급사 ‘세계’의 모토이기에.

‘갖은 괴짜 감독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치게 해주자. 그러면 언젠가 세계를 진동시킬 걸작들을 만들어줄 거야. 그리고 그 끝에······ 대기업들을 밀어내고, 나 계진행이 진정한 충무로의 군주가 된다! 그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오덕환 선배야.’

*

“쟤는······ 왜 여기까지 와서 저러고 있는 거람.”

오덕환은 말을 마치고 이를 딱 부딪쳤다.

헤벌쭉 웃으면서 촬영장 곳곳을 돌아다니는 계진행의 존재는, 소심한 그에게 있어서 꽤나 큰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이찬은 대수롭잖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감독님의 작품세계를 존경해서 오셨다고 했잖아요?”

“······아닌 것 같은데. 마치 염탐하는 것 같아.”

“염탐도 관심이 있어서 하는 거겠죠. 아시잖아요, 이제는 투자배급사까지 거느린 회장님인 거.”

“흠. 이번 작품 잘되면 따로 투자받을 일 없을 텐데.”

“그래도 배급은 맡기실 수 있잖아요. 친하게 지내세요.”

“흠······ 그건 이번 일 하는 거 보고 생각해야 될 것 같아.”

이찬의 추천으로 배급사 ‘세계’에 마수걸이 계약을 안겨주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계진행이 못 미더웠다.

“한일 동시개봉이라니. 그게 과연 잘될까. 한국에서 반응 보고 난 뒤에 배급을 타진해도 좋을 텐데. 직배라서 잘못되면 적자 전부 떠안아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 저 친구는 벌써부터 미국 진출을 얘기하고 있어. 너는 그게 걱정이 안 돼?”

“걱정 안 돼요. 분명히 잘될 테니까요.”

“······그렇지.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어. 나조차 내 작품의 성공을 점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넌 그게 천만영화라도 될 것처럼 철석같이 믿어줬지. 그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연출할 수 있었던 거고.”

4년 전을 떠올리는 오덕환의 얼굴에 흐뭇함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서 눈을 떼며, 이찬은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두고 보세요. 한국 일본을 동시에 폭격한 뒤에 북미까지 점령할 테니까. 그쪽은 지금 <오이디푸스>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잖아요? 거기서 제일 인상적인 시퀀스가 롱테이크 장도리 액션 씬인데, 우리는 그걸 오마주해서 그 이상의 씬을 완성했죠.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시장을 열 수 있어요.”

“흠······ 좋아. 나도 그렇게 믿을게. 오늘 촬영이 중요성이 더 커진 셈이야. 강한 여운을 남겨야 해. 이제 진짜 백이한을 보여줘야 되는 거야. 알지?”

“물론이죠, 감독님. 지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 그럼······ 가라, 이찬몬!”

장난스런 리허설 지시에, 소년은 웃으며 운동장을 걸었다.

*

이찬이 연기하는 ‘백이한’은, 극중에서 언제나 ‘홍광억’의 모습이었다. 시퀀스상 후반부까지도 원래의 영혼인 채로 등장하는 씬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전쟁이 끝나고 홍광억의 영혼이 떠나간 순간, 그는 마침내 백이한으로 돌아간다.

그 시퀀스야말로 롱테이크 액션과 함께 오덕환이 가장 공들여 짜낸 씬들.

찰나에 영혼을 되찾은 소년을 가장 충격적으로 선보이기 위해서, 그는 3년간 15개 버전의 마지막 시퀀스를 준비했다.

그리고 대본리딩이 끝나고 촬영 직전에야 완성된 30고에서 마침내 그 결과물이 드러났다.

“와······ 허허······ 이런 거였구나. 백이한이 이런 캐릭터였다니. 뒤통수 심하게 후려갈겨 주시는데? 설마하니- 아얏!”

흥미롭다는 듯 각본을 들여다보던 최정하의 말이 도중에 끊긴 건, 신수영이 정강이를 걷어찬 까닭이었다.

“말하지 마! 나 이거 극장에서 볼 거란 말이야.”

“에이. 이거 본다고 영화가 재미없어지나?”

“너, 진짜 하지 마. 스포일러 진짜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누나, 어차피 오늘 촬영하는 거 보다보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이 올걸? 그리고 이거 알고 보는 게 더 재밌을 거야.”

“아냐! 모르고 한 번 보고, 알고 나서 다시 보면 돼.”

“그것도 그렇긴 한데······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이 개자식아!”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는 건 남태형뿐이었다. 명진아는 그저 공허한 눈으로 이찬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어깨에 임희재의 손이 닿았다.

“우리 공주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아무 일 없어요.”

“그래? 고민거리가 가득하신 눈친데. 내가 오해했나?”

“······언니는, 첫키스 언제 하셨어요?”

임희재가 까르르 웃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하핫. 왜, 키스 씬 있는 대본 들어왔어? 아직 첫키스도 안 해본 우리 공주님이 마음이 복잡한가 봐? 그래도 이제 슬슬 할 때가 됐지 뭐. 너 이제 열여덟이잖아?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진짜 첫키스랑은 다른 거야. 마음 편하게 먹고 해. 찬이 저 꼬마도 다음 주에 수영 언니랑 키스한다는데, 너 정도면 늦은 거지.”

아무것도 모른 채 건네는 그 독려가 명진아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질문의 주요인이었으니.

‘찬이도······ 그건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할까? 그러면, 현실에서의 첫키스는 아직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물론, 괜한 고민이었다.

이미 정신혜에게 기습뽀뽀를 당한 바 있는 소년은, 소녀의 고민을 모른 채, <고등형사>의 마지막 시퀀스를 완성했다.

< 47장 - 회장 계진행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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