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30화 (130/250)

< 47장 - 회장 계진행 (2) >

오덕환 감독에게는 별 걸 다 신경 쓴다는 듯 대꾸했던 이찬이지만, <연애의 조건> 마지막 촬영 때에도 계진행이 나타나자 그 역시 잔뜩 질리고 말았다.

“감독님이 여긴 왜 오셨어요?”

“하하핫. 왜 오긴? 내 페르소나가 키스 씬을 찍는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그게 뭐 대수라고. 별로 찐하지도 않아요.”

“오, 찐한 키스 해본 사람처럼 말을 하네?”

“안 해봤지만, 보긴 많이 봤으니까요.”

“아하. 그래, 너 관람가를 따지지 않는 영화광이었지.”

그렇게 대꾸한 계진행이 낄낄거리고 웃는 걸 보며, 이찬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684> 촬영으로 무인도에서 반 년 가까이 부대꼈던 사이다. 극단 ‘별빛’의 유호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이찬에게 편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바쁘지 않으세요? 이제 그룹을 이끄시는 분이.”

“그룹은 무슨. 지금은 아니고, 너희 영화 프린트 현상 시작되면 그때부터 바빠지는 거지. 외주 광고사랑 홍보영상 및 예고편 미팅 진행해야 되고, 스크린 따내기 위해 극장 사람들 찾아가서 쇼부도 쳐야 되고.”

“쇼부가 뭡니까? 뉴밀레니엄의 신생 배급사 사장님이.”

“하하, 좀 그런가?”

“그렇죠. 아무튼 잘해주세요. 정말 중요한 영화니까요.”

“당연한 거 아니겠냐? 내 인생2막의 시작점인데.”

제작-배급-판매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기 위한 첫걸음.

그 일을 앞둔 계진행은 아주 결연해 보였다.

“거기에 대해서 좀 설명하자면, 일단 내 생각엔 BEP(손익분기점)는 150만 안팎이 될 것 같다.”

“꽤 높게 잡으셨네요?”

“그래. 양국 동시개봉에 현상비랑 홍보비를 잔뜩 편성했지.”

“추가예산은 ‘세계’에서 맡아주신다고 하셨죠?”

“그렇지. 투자가 아닌 비용처리가 될 거고.”

“미묘하네요. 배당을 포기하시는 대신 들어간 비용만큼은 모두 다 받아가시겠다?”

“어허. 그게 아니라 우리 투자자님의 수익에 군침을 흘리지 않겠다는 거지. 얼마나 친절한 배급사냐?”

손익분기점 이후의 흥행이 고스란히 하늘기획과 덕 필름의 수익이 되게끔 발을 빼준다는 얘기로, 소년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영화라고 확신하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저도 홍보 스케줄 열심히 참여할게요.”

“그래주면 고맙고. 그때부턴 너나 나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야. 오늘 촬영 마치면 푹 쉬어둬. 오늘 시퀀스는 키스 씬 말고 또 뭐가 있어?”

“그냥 흔한 에필로그죠. 학생들한테 수영 가르치고 사내연애까지 하게 된 김서준이 행복해지는 장면들이랑, 경찰이 된 이주형이 꽃집의 조수희랑 연결되는 그런 씬들이요.”

“이주형이 그 심요셉이지? 걔랑은 많이 친해졌어?”

“나름대로요. 왜요? 홍보 부탁하시게요?”

“당연한 것 아니겠냐? 잘 말해봐라. T.O.P 팬덤이 그 친구 덕분에 다시 확장세라고 하니까, 효과가 있을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 최고의 보이그룹 아니겠어?”

<연애의 조건> 종영 후 두 달 이내 컴백을 목표로 앨범제작에 돌입한 T.O.P지만, 8월말까지는 토크쇼 일정이 남아 있는 상황.

이찬의 부탁이라면 홍보멘트 한두 번 정도는 해줄 터였다.

“얘기는 해볼게요. 저 슬슬 준비하러 가봐야 되겠어요. 언제까지 계실 거예요?”

“너 키스 씬 찍을 때까지.”

“······씬 앞당길 수 있는지 여쭤볼게요.”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찬이 돌아선 뒤, 계진행은 스탭들 사이를 활보하며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키스 씬을 위해서인지 입을 풀고 있던 신수영과 틈틈이 다음 앨범의 타이틀곡을 연습하던 십요셉 등이 그 면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라마와 무관한 배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찬과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었다.

“어, 태형이 왔구나? 너도 찬이 키스 씬 보러 왔어?”

“예, 감독님. 영화 끝나고 좀 한가해서요.”

“그리고 정하랑 희재도 또 보네.”

“하하. 또 뵙네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저희도 너무 궁금해서 보러 왔지 뭐예요?”

그건 꽤나 희한한 광경이었다.

특유의 유대감 때문에 배우나 감독들의 촬영장 교류가 흔한 영화계와 달리, 드라마 업계는 폐쇄적이다. 스케줄까지 타이트하다보니 타 배우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동시간대에 경쟁 중인 드라마의 주연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어? 아이고, 정후 아냐?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여기서 뵙네요.”

강정후는 아주 공손히 고개를 꾸벅였다.

업계에 널리 알려진 이미지 그대로의 모습. 톱스타이자 최고 기획사의 대표이사로 군림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오만방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물론 겉뿐이었다.

‘이 인간은 여기 왜 와 있는 거야? 더럽게 할 일 없는 모양이네. 아, 젠장. 임희재에 최정하에······ 저것들은 하여튼 이상하게 사이가 좋단 말이야. 나중에 이찬 사단이니 뭐니 말 나오겠는데. 꼴 보기 싫은 것들 같으니.’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한 뒤, 그는 막 키스 씬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이찬에게 다가섰다.

소년의 눈이 동그래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뭐지?”

“뭐지? 이 녀석, 그게 인사냐?”

“아뇨.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런데 웬일이세요?”

“웬일은. 촬영장이 이 근처야.”

“촬영 끝나지 않았어요? 아, 혹시 그 마라톤 영화?”

“그래. 거기 가는 길에 들렀다.”

“우리 사이에요?”

“우리 사이니까.”

이찬이 어색해 하는 것과 달리, 강정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까닭.

바라보는 스탭들 역시 황당함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강정후가 출연 중인 드라마 <스위트 프리즌>이 시청률 10%대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다 그들이 찍는 <연애의 조건> 때문이었으니.

바로 그 포인트가 강정후의 노림수였다.

동시간대 드라마에서 심각하게 밀리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인배다운 풍모를 보였다는 미담이 돌길 바란 것.

그래야 완패 속에서 그나마 작은 체면이라도 건질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게 그의 속내였다.

그런 강정후는, 소년과 함께 세트 뒤쪽으로 이동한 뒤에야 본색을 드러냈다.

“잘하는 짓이다, 키스 씬이나 찍고 있고. 원래 안 찍어도 괜찮은 씬이었다며?”

“아, 제 인터뷰 보셨어요? 작품성을 위해서 희생한 거죠.”

“희생은 개뿔. 꼬맹이가 무슨 키스 씬이야? 명진아가 들으면 참 좋아하겠다.”

“아이, 그 누나 얘긴 또 왜 꺼내요? 진짜 별꼴이네.”

“불쌍해서 그래, 불쌍해서.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니.”

“······저기, 선배도 연애 해본 적 없지 않아요?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여배우들 대시를 다 까셨다던데?”

“익명의 관계자는 무슨, 전태양 실장이겠지. 그리고 해보지 않아도 알아. 뭐 대수라고.”

“뭐 대수도 아닌 걸 조언하시려고 오신 거예요?”

“온 김에 하는 말이야. 목적은 달성했어.”

그 말을 듣고 나자 이찬도 강정후가 온 이유를 이해했다.

“와······ 철저하시네요. 나 같으면 기분 나빠서 이쪽 스튜디오에는 눈길도 안 줄 것 같은데.”

“흥. 뭐 대수라고.”

말하자면, 지금 두 사람의 대화는 그저 요식행위.

강정후는 그저 ‘<연애의 조건> 촬영장에 찾아가 이찬에게 격려를 건넸다’라는 기사 한 줄을 위해 시간비용을 집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신기한 거예요. 감정이 없으신 분은 아닐 텐데, 가면으로 다 덮고 계신 거요. 안정록 이사님 관련된 일이 아니면 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버리시니 원. 이상한 사람이야.”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럴게요. 그 영화는 어때요? 마라톤 힘들지 않아요?”

“힘들 게 뭐 있냐. 그냥 뛰는 건데.”

“그게 아니라, 자폐증 환자가 뛰는 거잖아요? 불편하지 않아요?”

요식행위의 와중에, 강정후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건 선명한 분노였다.

“불편해? 뭐가? 네가 호준 선배 따라하는 건 불편하지 않고, 내가 자폐증 청년 따라하는 건 불편한 거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닌데요?”

“정신에 장애가 있으면, 연기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거냐? 다 똑같아, 이 새끼야. 사람들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인물들인 거지, 정상이니 아니니 범주화해선 안 되는 거라고.”

“아,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급히 대꾸하며, 소년은 강정후의 다른 면모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온통 음흉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런 인간미 있는 생각도 갖고 있었네. 하긴, 아예 인격파탄자였다면 안정록 아저씨가 아끼실 일도 없었을 테지. 그렇지만 과도하게 흥분하는 건 좀 이상해 보여. 왜지? 주변에 자폐증 앓는 사람이 있나?’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면 속의 톱스타가 오랫동안 정신질환 속에 몸부림쳤음을 알지 못하니.

다만 소년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돌아서서 떠나가는 강정후의 뒷모습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진짜 미안해요. 안 그럴게요.”

“······그래야지.”

강정후는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갔다. 다만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꽤 풀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떠난 뒤 진행된 키스 씬 촬영은, 대단히 순조로웠다.

신수영은 견학하러 온 남태형을 의식하며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그랬기에 멜로의 클라이막스인 키스 씬이 고작 세 번의 테이크로 세 개의 OK컷을 확보하며 완성됐다.

정작 남태형은 거기에 좀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보다 이찬에게 집중하면서 멜로 연기를 공부하려던 차였기에.

그런 청춘남녀의 사정과 무관하게, 이찬은 떠나간 강정후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맞는 말이야. 장애가 있건 없건, 그들 모두가 인간이고, 배우에겐 그저 배역일 뿐이지. 서로 다를 뿐 우열 같은 게 아니야. 강정후 선배를 보면서 우스운 배역을 맡았다는 식으로 생각한 건, 정말 나쁜 짓이었어. 그리고······ 꼭 장애가 아니더라도, 내가 맡는 배역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해. 그래야 겉보기만 훔치는 걸 넘어서 마음까지 담아낼 수 있어.’

그런 생각과 함께, 소년은 ‘김서준’이 되어 ‘성지현’을 바라보며 사랑의 감정을 느껴보려 시도했다.

그렇지만 잠시 후에는 명진아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음······ 이게 잘 안 되네······ 흠. 꼭 이 누나한테 연습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오늘 촬영으로 끝이니까. 제대로 몰입하는 건 다음 작품부터 해보자. 살인하지 않는 복수자니까, 그 마음에 푹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

여름의 햇살이 따가웠던 2004년 8월 26일.

시청률이 40%를 넘긴 시점에서 연장이 결정됐던 <연애의 조건>이, 비로소 20부작의 장정을 마무리했다.

유종의 미가 가득한 연장이었다.

방영 중에 급히 집필된 시퀀스임에도 그 하나하나가 짜임새 있었고, 시청자게시판에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18부작으로 어떻게 마무리하려 했냐는 장난스런 질책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선망하는 스타 배우들을 보다 오래 볼 수 있게 된 점에 팬들이 기뻐한 것 역시 당연했다.

그렇게 호평 속에서 공표된 20부의 시청률은, 16부의 종전 최고시청률을 자체 경신한 58.2%.

그건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미니시리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자, 시청률 집계가 시작된 이래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10위인 동시에, 2000년 이후 제작된 드라마 중에서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기에.

“와······ 이건 뭐······ 대단하네. 이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수목 미니시리즈로 58%······ 이건 진짜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 되겠다. 종전 미니 최고가 2000년에 나온 56%였지 아마? 허허······ 대단해. 대단하다, 찬아.”

MSB 드라마국의 전화를 받고 난 뒤로 계속 얼이 빠져 있는 정창영을 향해, 이찬은 보란 듯이 웃었다.

“제가 뭐랬어요. 연기대상 탈 거라고 했잖아요.”

“어? 엇, 헙······! 맙소사, 그것도 있구나!”

“그거 생각해서 놀라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난 그냥 화제성이 이번 영화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데······ 그런데 정말 가능하겠어! 작년에 <서장금>이 57% 시청률 올리면서, 고작 8화 분량 출연한 김은희한테 연기대상 줬던 건데, 이번엔 미니시리즈로 그 이상의 대기록을 수립한 거니까! 이걸 안 주면, MSB가 박살나겠어!”

“그럼요. 안 주면 MSB가 아니라 MBS 되는 거죠. 엠븅신이라는 거예요.”

완전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처럼 음흉하게 웃던 소년은, 잠시 후에 신음하며 말을 바꿨다.

“음······ 말실수. 방금 그건 아니었어요.”

“응? 뭐가?”

“븅신이라고 한 거요. 장애인 비하발언 ‘병신’의 발음을 상스럽게 강화한 표현이 제 입에서 나왔다니, 자괴감이 드네요.”

“······뭐라는 거야? 찬아, 너 괜찮아?”

꼭 이해시킬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화제는 곧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고등형사> 경쟁작은 진정 감독님 작품이 된다, 거기까지 얘기했었죠? 11월 5일 개봉이라고.”

“아, 그렇지. 맞아. <지우개>라고, 진유성에 이소연을 얹은 대박 조합이야. 그 외에도 외화 몇 개가 있긴 한데 대단치는 않고······ 연말은 진정 대 오덕환의 대결이 될 거다.”

“그렇군요. 이번엔 어떻게 예상하세요?”

“흠······ 아무래도 쉽지 않을 거야. 진정이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현대 한국영화의 상징 같은 인물이잖아?”

그의 말은 정론이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충무로의 트렌드세터로 군림해온 진정이다. 그가 <네 친구>의 800만 흥행 뒤 오랜 준비 끝에 꺼내든 작품이니,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58%의 소년에겐 좀 얘기가 달랐다.

“그럼 뭐, 끝난 게임이네요. 이걸로 대종상까지 따내겠어.”

“어?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대표님은 <연애의 조건> 들어갈 때도 30%나 되면 다행이라고 기 빠지는 소리 하신 분이잖아요. 펠레의 저주처럼 촉이 안 좋은 분이시란 말이죠.”

“뭐? 으하핫! 인마, 내 촉이 나쁜 게 아니라, 네가 지나치게 잘하는 거야. 짜식이 이상하게 몰아가고 있어.”

그렇게 8월이 가고, 이찬의 짧은 휴식기가 끝을 고했다.

< 47장 - 회장 계진행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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