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장 - 작가 염수진 (2) >
「 씨네맥 NEW CHECK!
하반기 최대 기대작 중 하나인 <고등형사>가 마침내 VIP시사회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연식, 조혁수, 강정후 등 스타 배우들의 참가로도 화제를 끈 10월 24일의 시사회는, 상영이 끝난 뒤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빠져나오던 스타들의 모습으로 기대를 모았다.
다음은 씨네맥 취재팀이 시사회 참가자들로부터 입수한 한줄평.
영화평론가 임덕진 : 이찬에 의한 액션, 이찬을 위한 반전. 그렇기에 이찬의 영화.
영화평론가 김지은 : 고작 열다섯 살의 배우가 어떻게 연기대상과 남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졌던 이라면, 꼭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대학로의 잠룡이라 불렸던 홍주석의 광기 어린 연기 역시 놓쳐선 안 될 포인트.
영화평론가 신도욱 : 천세영이라는 신인배우의 발견. 나이답지 않게 잘 정제된 연기가 추후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물론, 나이를 떠나 기대를 배신한 적 없는 이찬의 존재감은 명불허전.
JM엔터테인먼트 이철수 실장 : 오덕환 감독의 장기가 다시 한 번 발휘되었다. 자신이 만드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그는, 자칫 실소를 낳을 수도 있는 영혼교체의 소재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뽑아냈다. 배우 이찬을 위한 찬사는 아껴둔다. 대중에게 충분히 듣게 될 테니.
영화사 향 조미향 대표 : 청년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액션 스릴러지만, 나는 이 영화를 소년들과 그 가족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손수건은 필수. 상영 내내 울게 될 것이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은 이찬 때문에.
영화배우 조연식 : 연기자는 배역과 배우를 구분할 수 없이 몰입한 뒤에야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지나치게 높은 허들이다. 나라면 해낼 수 있었을까······? 이찬은 보배 같은 배우다.
영화배우 조혁수 : 20:1의 액션 씬?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만 번 시도하면 한 번쯤은 성공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두 명의 인물을 동시에 살아 꿈틀거리게 만드는 연기를 이찬 외에 또 누가 저만큼 할 수 있을까? 원석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오덕환 감독께 찬사를 바친다.
영화배우 강정후 : 어떤 영화든, 배우로서 욕심나는 배역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이한’ 역은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내가 그 이상의 배역을 선보이고 싶다. 」
마지막 대목을 읽은 뒤, 이찬은 얼굴을 팍 찌푸렸다.
‘이 선배가 까메오 출연작이라고 제멋대로 끼적여놨네. 감탄사만 써도 모자랄 판에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고 하다니.’
그 안에 담긴 함의를 짐작하기에 불쾌해진 일.
그렇지만 객관적으로는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역이 욕심날 만큼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였으니.
소년은 시선을 내려 다음 문구를 읽기 시작했다.
「 이외에도 참석자들은 황상태, 현우정 등의 뉴페이스들을 추켜세웠다. 남태형 이후로 다시 한 번 오덕환의 신인 발굴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
그들은 이 영화를 계기로 하늘기획과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안정록과 임호준과 신수영과 이찬이라는 걸출한 주연군단을 이끌고 있던 하늘기획이, 명품 조연들을 품에 안고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으로 <오이디푸스>의 명장면을 오마주한 액션 씬이 해외의 관심 역시 부르고 있다. 동시개봉이 예정된 일본은 물론, <오이디푸스> 신드롬을 앓고 있는 북미 역시 <고등형사>의 수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 한해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진정의 <지우개>와 오덕환의 <고등형사>. 극장가의 비수기인 11월에 맞붙게 될 두 영화가, 영화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를 기대해본다.
Good! : 두 명의 배역으로 분해 연신 탄성을 뽑아낸 이찬의 연기. 손에 쥔 땀을 의식할 수조차 없게 되는 20:1의 롱테이크 액션. 홍주석, 황상태, 현우정, 천세영으로 이어지는 명품 조연들. 그리고 오덕환이 완성해낸 5분짜리 주인공의 반전.
Bad! : 두 번 봐야 이해되는 불친절한 복선. 반전으로 인한 개운치 않은 뒷맛.
씨네맥 총평 : 스포일러 당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반드시 두 번 볼 것을 권한다. 」
장점은 네 개, 단점은 두 개.
그 단점조차도 하나는 비난이 아닌 투정이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재관람을 고려하게 될 표현이었으니.
그렇기에 이찬은 만족스레 웃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일반시사회 관객들도 스포일러 없이 격찬만 담은 관람평을 올리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지우개>를 깔끔하게 지워낼 수 있겠어.’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경쟁작 역시 호평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 핵심 요인은 극에 달한 연출 솜씨와 영상미.
자칫 뻔한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시나리오지만, 진정의 연출 때문에 신선의 극치로 느껴졌다는 평이 많았다.
거기에 더해 청년층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완벽한 배역 해석을 위해 2개월 동안 목수 일을 배웠다는 진유성이나 환자 역 소화를 위해 12kg 감량을 감행했다는 이소연이나,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트렌디한 미남미녀.
나이 탓에 주로 청소년층이나 장년 이상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찬에 비해 티켓파워는 좀 더 셀 터였다.
그렇지만 소년은 이미 승리를 확신했다.
몇 차례의 무대인사 일정을 통해서, 일반대중의 만족도마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었기에.
‘누구 하나 작은 불만조차 없는 눈치였지. 씨네맥 편집부야 어떻게든 단점 두 개는 써야 하니까 뒷맛이 개운치 않네 어쩌네 했지만, 씁쓸하다기보다는 카타르시스를 통한 승화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어. 그러니까 분명해. 이 영화는 적어도 7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거고, 원톱 영화의 흥행이 내 골수 팬덤을 확장해서, 박무열 감독님과 함께할 다음 작품에 좋은 배경이 돼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데, 마침 박무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 감독님. 오디션 일정 때문에 전화 주셨어요?”
[하하, 그것도 있고, 3고 피드백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네 코멘트들 쭉 살펴보는 중인데······ 좀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친절한 살인자>의 조연 오디션을 추진하는 가운데, 박무열은 이찬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각본의 퇴고에 매진하고 있다.
소년의 역할은 그가 새로이 시나리오를 고칠 때마다 지문과 대사 하나하나에 코멘트를 붙이는 것.
해당 대본으로 연기한다고 가정하고 평소처럼 자신이 체크할 포인트들을 기재하는 것뿐이지만, 그게 완벽주의자 박무열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떤 부분인데요?”
[15씬 옥중 나레이션인데, 거기에 써준 새 대사가 좀 신기하더라. 원래 ‘그때 나는 생각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모른 척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존재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개자식일 거다.’였던 건데, 네가 ‘그때 나는 느꼈다. 신은 존재한다. 신은 분명히 이 아름다운 세상을 주재하고 있다. 그 뜻이 오롯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그저 그놈이 악마 같은 개자식이라서다.’라고 고쳐줬잖아?]
소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한 차례 벌렸다가 닫은 뒤, 무서운 눈으로 옆 방 문을 노려본 뒤에, 분노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죄송합니다. 그거 제가 쓴 거 아니에요.”
[뭐? 그러면 누가 쓴 거야?]
“아마 제 매니저 누나가 썼을 거예요.”
[매니저가? 매니저가 네 각본에 손댔단 말이냐?]
“그게, 부업으로 인터넷소설도 쓰시거든요. 그래서 대본 분석할 때 종종 도움을 받곤 했어요. 그랬는데 그게 취미가 되셨는지 아무거나 건드리신 모양이네요.”
[그래? 그 염수진이라는 친구가? 내가 좀 봐야 되겠다.]
꽤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왔다.
자신의 창작물이 문외한인 로드매니저에게 훼손당했다고 들었을 때 세계적인 명감독이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이찬은 급히 염수진을 위해 변명했다.
“감독님, 몰라서 그런 거예요. 앞으로 다신 그러지 못하게 할게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아냐 아냐. 화를 내려는 게 아니고, 마음에 들어서 그래. 아주 섬세하고도 강렬한 표현방식이야. 그 대사가 사실은 통속적이고 신선미가 부족한 감이 있어서 아쉽게 느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새로 쓰인 그 문구가 참 인상 깊었던 거다. 그래서 너한테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냈냐고 물어보러 전화한 거야. 대중의 뇌를 알싸해지게 만들 수 있는 화법이야.]
칸의 거장 박무열이 방구석 소설가 나부랭이 염수진의 문장에 격찬을 던진다.
그 해괴한 현실에, 소년은 얼떨떨해져 볼을 긁었다.
*
“그래? 이 나레이션을 자네가 썼단 거야?”
“맞아요, 감독님. 남애리 작가님이 임팩트 있는 문구를 만들어야 된다고 고민하고 계시길래, 슬쩍 메모장에 써서 드려봤던 거예요. 그랬는데 그대로 채택을 해주셨더라고요.”
“야······ 대단한걸? 그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였어. 이걸 쓴 게 자네였다니.”
“영광이에요, 감독님. 사실 올여름 최고의 명대사로 꼽히기도 했어요.”
“아, 그랬나? 그럴 만도 해. 참 좋아. 감성적인 비유인 동시에 아주 촉감으로 다가오는 비주얼라이징이었어.”
박무열과 염수진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무심한 척 들으며, 소년은 속으로 몹시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저렇게 죽이 잘 맞는 거야? 글 쓰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라는 건가? 저러다 혹시 영화사 작가로 채용한다거나 그러는 거 아냐?’
원래 계약감독으로서만 활동하던 박무열은, 2004년 봄에 계진행의 ‘사계’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이사직에 올랐다.
그건 이찬이 계진행의 대단한 언변을 처음으로 실감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가 ‘한미모’에 처음으로 참가한 지 고작 몇 주도 지나지 않아서 일궈낸 성과인 까닭에.
하지만 그렇다곤 하더라도 칸 수상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이야기되던 시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지금 시점에서 박무열을 잡고자 한다면, 적어도 10억 이상의 계약금은 안겨줘야 할 터였다.
그렇게 계진행과 동행하게 된 감독은 한미모 전원.
그들 모두가 사계 프로덕션으로부터 전폭적인 제작비 지원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계진행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또 신인 감독과 작가들을 널리 모집하고 있었다.
사계의 이사가 된 박무열이 염수진을 스카웃하려는 게 아닌가 염려되는 게 그런 까닭이었다.
다만 그 염려의 색깔이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저 누나야 있든 없든 상관없지. 로드매니저야 새로 뽑으면 그만이니까. 캐릭터 분석력이 꽤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거야 나 혼자 해도 되는 일이야. 갈 테면 가라고 해.’
이찬이 그렇게 생각한 건 반쯤은 반발심리였다.
이미 4년 동안 함께 생활해온 매니저에게 그는 표현하지 않을 뿐 깊은 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만 그런 진심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인지했을 때 배신감이 더욱 커지리라는 것을, 무의식이 잘 알고 있기에.
소년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먼저 마음속으로부터 염수진을 내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마침내 박무열이 서두를 떼었다.
“정말 재능이 있어. 아직 자네가 쓴 소설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몇몇 대사만 봐도 느낌이 와. 어때? 나랑 같이 작업해볼 생각이 있나? 하청이 아니라 공동작가로서 대우를 해줄 거야. 그간 전달력이 필요한 포인트나 여성의 대사에서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었거든. 자네가 도와준다면, 이번 영화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아직 책 한 권 출간하지 못했으며, 현실에서도 일개 로드매니저에 지나지 않는 여인에게, 세계 영화인들의 격찬을 받고 있는 거장이 건넨 제안.
그건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직후에 염수진은 이찬을 돌아봤다.
그리고 3초 정도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죄송해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어? 어······ 왜 그러지? 매니저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적성에 맞을 텐데?”
“그렇긴 한데요, 글은 그냥 부업으로만 쓰려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그건 박무열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이찬에게는 더했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 헛소리예요? 지금 이게 어떤 기회인지 몰라요? 박무열 감독님하고 같이 작업하고 싶어서 난리 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작가이기 이전에 네 매니저라며?”
“예? 아. 그거야 그냥 해본 말이죠······ 노예계약도 아니고.”
“뭐야, 그냥 해본 말이었어? 난 진심으로 대답한 건데?”
“······누나 바보예요?”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실관계를 캐묻는 질문.
그렇지만 사실 바보는 아닌 염수진은, 늘 그랬듯 헤벌쭉 웃으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감독님. 제가 찬이 엄마거든요. 수영이나 희재가 이찬맘 어쩌고 하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긴 한데, 원조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죠. 전 찬이 데리고 현장 다니는 게 제일 좋아요. 글 쓰는 건, 취미일 때 더 재밌는 것 같고요.”
“······그렇게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인데.”
“취미로도 충분해요. 일이 되면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소설 출간 제의도 많이 받았었는데, 지금 하는 일에 지장 생길까봐 다 포기했거든요.”
그건 이찬조차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속으로 수긍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글마다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려 있었지. 인터넷소설 출간이 유행이 된 요즘에 제의가 하나도 안 들어왔을 리 없는 거였는데. 그런 건데······ 전혀 모르고 있었네.’
무수한 실패 속에 흐지부지 종결된 ‘이찬 속이기’ 대회에 유일하게 입상한 염수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원하는 대사 있으시면 같이 생각해보는 건 해드릴 수 있는데, 공동작가는 무리예요.”
“아······ 그런가? 하하. 이거 참, 내가 외려 미안한걸.”
거장 박무열의 공동작가 고용은, 그렇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 48장 - 작가 염수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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