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34화 (134/250)

< 48장 - 작가 염수진 (3.) >

<고등형사>가 개봉하는 11월 12일.

이찬은 아침 일찍부터 인터뷰 일정에 나섰고, 오후에는 서울 각지를 돌며 무대인사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확인한 관객들의 면면은 황홀감의 극치.

차마 기대하지 못했던 완성도 높은 판타지물에, 소년들도 청년들도 장년들까지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다만 이찬의 불안감은 이전보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지우개>는 일주일 만에 150만······. 천만영화들에 비해서는 느린 페이스지만, 흥행이 심상치 않아. 우리 영화 개봉일인 오늘 예매율도 막상막하였지. 자칫하면 박스오피스 1위를 꿰차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진정 감독의 이름값은 명불허전이었다.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684>와 <형제> 같은 블록버스터가 1주일에 3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례적인 케이스.

<지우개>의 흥행은 두 편의 천만영화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년은 로드매니저를 향해 질문했던 것이다.

“그 영화 그렇게 재밌어요?”

“응? 무슨 영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속일 생각 마요. 지난주에 휴가 내고 보고 온 거 아니까.”

“아잇. 들켰나.”

“담당 배우의 경잭작을 개봉일부터 보러 가다니. 매니저로서 그런 직무유기가 또 어디 있을지.”

“헤헤. 아니 난 그냥, 우리 유성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저런 정신상태로 어떻게 박무열을 걷어찬 거지- 이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문득 떠올리게 됐다.

박무열이 기존에 캐스팅했던 주연배우들이, 전부 외모로는 대단히 주목받지 못하는 중년의 평범남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랬던 건가? 차라리 나 데리고 돌아다니는 게 잘생긴 배우들 만나기엔 더 유리하니까······? 아니, 그것도 아니지. 홍주석 선배만 해도 잘생겼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 누나는 카리스마 홍이라며 우러러봤잖아. 그런 의미에선 박무열 감독님도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배우들을 부르는 편인데.’

그러니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로드매니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됐고, 어땠어요? 그렇게 재밌었어요?”

“음······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지.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그러면서 추억 속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는······.”

“작가로서 보기엔 어때요? 우리 거랑 비교하면.”

“하핫! 작가로서라니, 과분해. 근데 장르가 다르잖아? 그쪽은 멜로라서 연인들이 보는 경우가 많을 거고, 이쪽은 그런 거 하나도 없으니까 가족관객이 더 많을 거고.”

미모의 여배우 천세영이 출연했다곤 하지만, <고등형사>에서 그녀는 히로인이 아닌 조력자. 멜로 요소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꼭 두 작품을 별개로 만드는 요소는 아니다.

“주요 관객층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공통분모가 더 많을 거예요. 어쨌든 홍보비 많이 들인 상업영화들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어떠냐는 거예요. 여가 시간 만들어서 극장에 갔을 때, 둘 중에 어떤 영화가 더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왜 갑자기 또 걱정하기 시작했어? 아유, 귀여워.”

“화낼 거예요.”

“앗. 그럼 안 되지. 이 작가님이 깔끔하게 답해줘야겠네.”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인 뒤, 염수진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겨. 극장에서 팜플렛 잠깐만 보더라도, 바로 <고등형사> 보자는 말이 나올 거야. 스틸컷 무지하게 잘 뽑았잖아? 계진행 아저씨가 감이 좋아 진짜. 그렇게 보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말할 거야. 야, 진짜 이거 보길 잘했어, 다음에 한 번 더 보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찬아.”

“······앞이나 보시죠? 이렇게 개념 없는 로드라니.”

대뜸 면박을 준 뒤에, 이찬은 생각했다.

‘이런 어정쩡한 누나한테 대작의 흥행을 가늠할 안목까지는 없겠지. 그러니까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를 일이지만······ 좋게 봤다니까 기분은 좋네. 그렇담, 져도 상관없을지도.’

그러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한국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서 갈 길이 먼데, 고작 멜로물에 발목을 잡힐 수야 있나. 반드시 이겨야지. 내년까지 흥행을 이어가서, 다시 한 번 천만의 신화를 써야 해.’

*

염수진의 추측이 완전무결했다거나 이찬의 바람이 신에게 닿은 까닭은 아니었으나, <고등형사>의 오프닝스코어는 확연하게 <지우개>를 웃돌았다.

다만 천만을 논하기엔 약간 미진한 수치였다.

“24만······ 평일 치고 좋은 스코어긴 한데, 좀 아쉽네.”

정창영 대표의 말대로였다.

개봉 후 1주일이 된 거장의 작품 <지우개>를 15만으로 내려앉히며, <고등형사>는 나무랄 데 없는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그간 이찬의 신기록 행진을 지켜본 하늘기획 수뇌부로서는 약간의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30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찬이가 24만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요.”

“후······ 당연히 전작 이상의 성과를 내줄 거라 생각했는데.”

<684>의 오프닝스코어는 평일 34만.

비록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특수가 있었지만, 그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었다. 15세관람가로 그에 10만이나 못 미치는 성적을 낸 데에 여러 실장들마저 침울해졌다.

오직 소양근 팀장만이 그 상황이 황당함을 직시했다.

“아, 이 인간들이 진짜 미쳤나? 오프닝 24만이면 700만 페이슨데, 그걸 보고도 입맛을 다셔? 정신들이 나갔구만? 대표님, 애들 독려해도 모자랄 판에 이상한 분위기 만드실 겁니까?”

“으음. 그렇지만 천만을 노렸단 말이야.”

“그게 뭐 사람이 바란다고 할 수 있는 일이냐고요.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스코어고, 당연히 비현실적인 사건사고가 엮여야 그만한 결과로 이어지는 거죠. 잘 만든 영화라고 다 천만 찍으면 그 나라 참 영화강국이겠수.”

“이 자식이 대표님한테.”

“어흠 흠.”

나라엔터 입사동기였으나 지금은 하늘기획의 2인자가 된 팀장의 하극상은, 그렇지만 대표에게 현실감각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정창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좋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야. 아무래도 비수기인 게 컸겠지. 대학생들이야 시험 끝나고 좀 한가할 때지만, 직장인들한테는 연말 대비로 정신없을 시기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12월이 기대가 되는 거야. 이럴 때일수록 홍보에 더욱 매진해야 해. 다들 알지? 이번 작품에 우리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다. 뛰어나가. 미디어건 극장가건 가서 이슈가 될 만한 건 뭐든지 잡아와. 이번 영화 천만 찍으면, 보너스 200%다!”

“어, 와우!”

“해보겠습니다, 대표님!”

실장들이 부리나케 뛰쳐나간 뒤, 소양근 팀장은 혀를 찼다.

“이 사기꾼 같은 자식. 원래 보너스 주려고 했으면서.”

“흠. 그야 생각은 있었지만 확정은 아니었지. 다 대표님의 넓은 아량인 것이야.”

“지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다 찬이 돈이잖아? 애들 보너스 준다는 핑계로 너도 같이 수령할 거잖아?”

“허허허, 그거야 너랑 나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고.”

“어휴. 그렇게 욕심이 많으니 머리가 빠지지.”

“뭐 이 새끼야? 너 이리 와. 넌 좀 맞아야 되겠다.”

그렇지만 바로 그 다음 주 월요일에, 그들이 기대치도 못했던 이슈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소식이었다.

이찬의 <고등형사>가, 450개 스크린으로 개봉된 첫 주에, 무려 7억 3천만 엔의 스코어를 달성했다는 소식이었다.

「 일본은 지금 <고등형사> ‘이찬앓이’ 중

2004.11.15. 스포츠고려 이차원

일본으로 건너간 <고등형사>의 흥행돌풍이 거세다. 역대 한국영화 오프닝스코어를 모두 갈아치우며 7억 3천만 엔의 흥행실적을 올려 박스오피스 1위를 굳건히 했다.

이는 아시아영화 흥행순위에서도 <영웅>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6억 1천만 엔의 첫 주말 오프닝스코어를 포함한다.

<고등형사>는 형사의 영혼이 고등학생의 몸으로 들어가며 벌어지는 판타지 수사극으로, 국내에서도 첫 주 90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 행진 중인 작품.

그렇지만 내수 애니메이션 및 애니메이션 원작 영화의 흥행이 주축을 이루는 일본에서, 한국의 실사영화는 이제껏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한국영화 중 기존 최고의 수출실적을 달성한 것은 1999년작 <키싱구라미>로, 분단현실 속 스파이들의 암투와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1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붐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가 100만 관객을 달성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실적이 없다시피 했다.

국내 천만 관객을 동원한 <684>와 <형제>가 작년 6월에 잇달아 일본에 개봉했지만, 그 성적표는 60만과 90만으로 국내의 실적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684>의 천만배우 이찬이 참여한 <고등형사>임에도, 일본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고등형사>는 첫 주에 이미 <684>의 흥행실적을 돌파해, 관람객들의 호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달 이내에 <키싱구라미>의 기존 기록을 경신할 것이 유력해 보인다.

이에 대해 JM엔터테인먼트의 이철수 실장은, “발칙한 상상력과 완벽한 연기력의 조합이 일본 관객들에게 어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영혼 교체는 한국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등으로 익숙한 소재”라며, “전쟁이나 분단을 다룬 영화들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점에 더해, 이미 <684>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한 바 있는 이찬의 작품이라는 점이 주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흥행이 <겨울바다>의 흥행에 힘입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동경대 카가와 테루유키 인문학부 교수는 “<겨울바다>가 8월에 한국드라마 붐을 일으키며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했기에 한국영화 역시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평했다.

심성윤 PD의 계절드라마 연작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가을하늘>에서 아역으로 활약해 고공 시청률을 선사했던 이찬이, 이번에는 그의 또 다른 드라마로부터 도움을 받은 셈.

이런 <고등형사> 열풍은 쉬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선 이찬의 개인 팬클럽 회원 수가 1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러한 화제를 바탕으로 개봉관 수 역시 내주 500개를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악재 없이 흥행이 이어진다면, <영웅>의 40억엔 흥행을 넘어 일본 내 아시아영화 흥행순위 1위에 오를 가능성도 점쳐지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성과는 ‘천만감독’ 계진행이 자신의 배급사 ‘세계’를 통해 직접배급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그 수출실적은 일본 내 ‘세계’ 지사를 통해 고스란히 한국 영화시장으로 흘러들게 된다.

또한 이 영화의 메인투자사인 하늘기획 역시, 자사 간판배우가 활약한 영화의 양국 흥행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최초의 천만배우에서 이제 한일 양국에서 최고의 배우로 우뚝 선 소년배우 이찬.

바야흐로 이찬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상당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

“어허허허! 어허허! 일본, 일본에서 7억 엔! 어허허허!”

“대표님, 좀 진정하세요.”

이찬이 말리는 소리도 듣지 않은 채, 정창영은 마구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7억 엔이면 거의 100억인데! 으하핫! 떼부자다!”

“그게 뭐 대표님 돈인가요.”

“어,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대로면 양국 합산 천만 돌파는 기정사실이네요. 직원들 보너스 준비하셔야 되겠어요.”

“지금 그게 문제냐! 이번 이슈로 국내에서도 관심이 불타오를 거야. 그럴 수밖에 없지!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수사극으로 일본 내 아시아영화 수출 1위를 노리고 있는 건데. 어쩌면 국내에서만 천만을 찍을 수 있을지도······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움직여야겠다. 스포츠고려 단독으로 끝낼 일이 아냐. 후속취재가 이어져야지. 일단 MSB 예능국이랑, 씨네맥 이번 달 특집에다······ 찬아, 나 좀 나가보마. 야, 수진아. 찬이 데리고 일정 진행해. 혼자 할 수 있지?”

“당연하죠. 저도 이젠 5년차거든요? 실장급이라고요.”

“그렇지. 못 미덥지만 믿어보마.”

불똥 맞은 사람처럼 부리나케 달려가는 대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년은 염수진을 향해 물었다.

“누나.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일본어? 아니?”

“아, 그런 것도 공부 안 하고 뭐 했어요? 곧 일본 가야 될지도 모르는데.”

“일본 가? 진짜? 왜?”

“감사 차원에서요. 어디 일본뿐인가. 내년 되면 국제영화제 초청도 줄을 이을 거예요. 어쩌면 미국으로 프로모션 가야 될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5월이 되면, 칸에도 가야죠.”

“칸!”

“예, 칸. 박무열 감독님 신작이 거기 2연패를 목표로 제작되고 있는 건데, 당연히 우리도······.”

말하다가 잠깐 멈춘 건, 그 박무열이 아직까지도 염수진의 문재(文才)를 두고 아쉽다는 말을 그치지 않고 있는 까닭.

‘······이 누나는 2005년 5월에 칸에 가게 돼. 매니저든 공동작가든, 어떤 경우든 그건 변하지 않아. 그렇지만······ 두 케이스에서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일 거야. 외국이라고 해서 매니저에 대한 대접이 각본가 이상일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영 가슴이 답답해졌다. 염수진이라는 걸출한 작가의 출세길이 자신 때문에 가로막혀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에 눈빛이 흐려진 소년 앞에서, 염수진은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찬아, 찬아! 칸에 가면, 간 김에 유럽투어 안 할래? 아니 왜, 너 작년 이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었잖아? 그리고 박 감독님도 칸 다음에 초청 많이 받아서 여기저기 영화제 다니셔야 될 텐데······ 같이 좀 껴서, 응?”

“······하여튼 이상한 아줌마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요.”

“이 녀석이, 또 아줌마래! 야, 니가 누나라고 부르는 수영이보다 내가 뭐 몇 살이나 많다고?”

“10살까지가 커트라인이거든요. 앞으로 아줌마라고 부를래. 영어로는 언트.”

“너, 너어, 제 정신이야? 절대 안 돼!”

버럭 성내는 로드매니저를 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그 영광을 걷어차건 말건 염수진 본인의 선택이지만, 좀 미안한 것 같긴 하다고. 그러니 조만간 선물을 줘야 되겠다고.

< 48장 - 작가 염수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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