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장 - 배우 조연식 (1) >
조연식이라는 배우는, 박무열에게 있어서 은인과도 같았다.
감독으로서 기대했던 것보다도 뛰어난 연기로 <오이디푸스>를 완성해 칸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준 위대한 배우.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실력은 주연 중의 주연이었다.
그렇기에 박무열은 그를 바라보며 한참 머뭇거려야 했다.
“왜 그래? 박 감독,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그렇게 뜸을 들이니까 나까지 다 긴장이 되잖아?”
한 살 연상 배우의 너스레에, 감독은 마침내 결심했다.
“후우. 형. 아무래도 말하기 조심스럽긴 한데, 내가 감히 편하게 말할게.”
“그러라니까. 얘기해.”
“다음 내 작품에서, 조연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렇게 하자.”
고민할 것도 없다는 그 대답에 박무열이 멍해졌다.
“어······ 정말? 진심이야?”
“왜 이래? 싫으냐? 하지 말까?”
“아니, 아니. 해줘야 돼. 이렇게 부탁할게.”
“한다니까? 뭘 또 손까지 모으고 그래? 허허.”
도무지 차분해질 수 없는 건, 조연식의 위상 때문이었다.
칸 경쟁부분 수상작 <오이디푸스>의 원톱 주연으로서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한 인물이다. 헐리우드의 감독들조차 그를 탐내는 이가 많다는 후문.
그런 이를 한국에 잡아두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고작 조연 롤을 맡기려 하다니- 욕을 먹어도 싼 부탁이라고 박무열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연식에게는 자신의 위상보다 훨씬 중요한 준거가 있었다.
“박 감독. 아니, 무열아. 너는 내가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지?”
“······당연히 대단한 배우지. 형 같은 배우는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어려운 부탁도 하는 거고.”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라. 사실 내 생각은 아니지만······. 안정록 선배님이 하늘기획 창립 때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시면서, 화제작이던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하셨어.”
“아, 그랬나? 그것까진 못 읽어봤는데. 무슨 내용이었어?”
“작품에 대해선 칭찬만 하셨지. 그렇지만 내 연기에는 불만이 있으시더라. 왜 그렇게 정체돼 있나. 탈에도 맞고 프레임도 좋은 작품이니 더 활약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그 평가에 박무열은 눈살을 찌푸렸다.
감독인 그가 단 한 톨의 아쉬움도 찾지 못한 연기였다. 그런 것을 비판일변도로 평했다는 것이 몹시 황당했다.
“그건 좀, 너무한 말씀인데?”
“하하하! 그 선배가 그래. 다른 데서는 아주 대자대비하시면서도, 연기에서만큼은 정말 칼 같단 말이야. 씬 넘버까지 대면서 지적을 해주셨는데, 그게 나 역시도 나중에 별로였다고 자책한 부분들이었어. 그러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난 아직도 멀었다는 거야.”
“내가 볼 때는, 형이 그분에 못 미친다 싶지 않은데?”
“하하핫!”
조연식의 웃음은 밝은 빛깔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헛웃음에 가까웠다.
“박 감독, 그런 뜻이 아냐. 그 선배는 자기 연기에는 훨씬 더 잔인하게 욕을 하시는 분이거든. 그나마 정체돼 있다고 해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부분이지. 자기보다 못하다고 까는 게 아니라, 좋은 재능을 갖고도 발휘하지 못하는 걸 안쓰러워하시는 거니까. 그리고 안목만큼은 그분의 발끝도 따를 사람이 없단 말이야.”
“음······ 그렇군. 형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겠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박무열은 이제껏 안정록과 함께 작품을 진행해본 적이 없다. 그저 서로의 작품을 통해서 인사를 나눴을 뿐.
그렇기에 어설프게만 수긍하는 칸의 거장을 향해서, 조연식은 웃음기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런 분이 유일하게 어떤 비판도 하지 않은 게 이찬이야.”
“······그래? 어떤 비판도?”
“그래. 그분이 이번 영화 시사회 보고 나서 평을 남기지 않으셨지?”
“아, 그랬지. 기자들이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도 웃으면서 고개 젓고 빠져나가시던데. 아마 주관적인 시선이 개입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 아니었을까? 자기가 이사로 있는 회사의 간판배우가 주연인 작품이니까.”
“기본적으로는 그렇지. 긍정적인 언급을 꺼리시는 건 회사 때문일 거야.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다면 절대로 말을 아끼실 분이 아니거든. 주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사정없이 까셨을 분이야. 자기 제자가 됐든 대선배가 됐든.”
그제야 박무열도 조연식의 포인트를 인지했다.
“시사회에 갔으면서도 아무런 평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찬의 연기에서 단 한 줌의 부족함도 발견하지 못하신 거다?”
“그런 거야.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시놉시스 봤을 땐 그 배역에 어울리는 탈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까······ 이찬이 아니면 ‘백이한’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싶더라. 전혀 상상이 안 돼. 헐리우드 배우들까지 다 쳐서 그렇다는 말이야. 그만큼 완벽하게 배역에 생명을 입힌 거지.”
“······정후는 그것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던데.”
“강정후? 그놈이 잘 크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아직은 안 될 거야. 나도 못하는 걸, 제가 감히 뭐라고.”
격찬 중에서도 격찬이었다. 조연식은 마치 이찬의 팬이라도 된 것처럼 찬사를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형 말은, 내 차기작 주연이 이찬이니까, 조연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거야?”
“하하하. 그게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요인이 됐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박 감독 부탁이라면 못 이기는 척 따라줬겠지만.”
“내가 뭐라고 참······.”
“칸이 인정한 거장이 겸손을 떠는 거야? 하하. 박무열이 이찬과 함께 작업하는 영화라면, 오히려 내 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같이 하자. 하고 싶어. 어떤 역할이냐?”
솔직담백한 조연식의 토로 덕분에,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상황.
그렇지만 박무열은 다시 한 번 민망해져야 했다.
“그게······ 악 중의 악, 사탄과도 같은 존재인데······.”
“어이고.”
“찬이와 대척점에서 끝까지 악인을 연기해야 하는데······.”
“오호라.”
“죽는 순간까지도 반성하지 않는, 가장 사악한 배역인데.”
“이 자식이······ 나를 아주 골로 보내려고 하는구나? 하하, 정말이지 나쁜 놈이라니까. 그래, 하자 해. 언제부터야?”
“오디션 다 끝났고, 세트, 장비에 스탭까지 준비됐어. 형하고 찬이 시간 맞을 때 바로 대본리딩 들어가면 돼.”
“벌써 거기까지 해뒀다고? 성질도 급하네. 하기야, 칸 생각하면 빨리 제작할 필요가 있긴 하겠구나. 좋아. 이찬이란 녀석하고 연기대결을 펼친다······ 재밌겠어. 각본 내놔.”
그로써 <친절한 살인자>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
<고등형사> 때는 오디션장에도 직접 들어갔던 이찬이지만, 그 영화의 개봉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프리프로덕션이 진행된 <친절한 살인자>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11월 23일의 대본리딩이 다른 배우들과 마주하는 첫 순간이 됐다.
그들 중 대다수가 아예 초면이기도 했기에, 소년은 조금쯤 긴장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연식 선배님에 하주헌 선배에 유세령 선배······ 같이 호흡을 맞춰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득한 상황인데. 하지만 다행히도 꼬맹이 주연을 돕는 일이 불편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 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가? 두 편의 천만영화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게 지금 내 위상이니까······.’
일본 내의 폭발적인 인기가 영화 잡지와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진 뒤, <고등형사>의 드롭률은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했다.
첫 주 금토일 3일간 기록한 객수가 90만. 그리고 둘째 주 7일간의 객수가 250만.
2주차의 매출 신장을 뜻하는 ‘개싸가리’ 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황금 개싸가리였다.
‘거기다 일본에서도 도합 160만 관중으로 이미 <키싱구라미>를 능가한 상황이니······ 한국 천만에 일본 500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 몰라. 하주헌에 유세령이 꽤 입지가 있는 배우들이라곤 해도, 지금 내게 질투를 느낄 수는 없겠지. 이건 이미 인간계 수준이 아니니까. 그래서 별 불편함 없이 각본만 보면서 흥겨워하고 있는 걸 거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장본인인 소년 쪽이 그 돌풍의 파급력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종상 신인남우상 출신인 하주헌. 아역 신인 때에 청룡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던 유세령.
그들은 오히려 이찬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참이었다. 다만 상석의 조연식이 입을 떼지 않고 있기에 조용히 각본만 보고 있었던 것.
감독의 등장이 늦어지는 가운데 1분쯤이 더 지나고, 마침내 각본의 검토를 끝낸 조연식이 목소리를 냈다.
이찬의 첫사랑을 연기할 임세령을 향해서였다.
“세령이. 네가 청룡에 후보로 올랐던 게, 96년이었나?”
“아, 네. 맞습니다 선배님. 데뷔작이었는데, 과분한 평가를 받았어요.”
“과분하긴 뭘. 충분히 그럴 만했지. 그때 아마 네가 최연소 기록을 세웠던 것 같은데······ 몇 살이었지?”
“열일곱이었어요.”
“그래, 그랬구만. 참 흥미로운 일이야. 그 기록을 깨버릴 꼬맹이가 바로 여기 있다니.”
그 말에, 배우들이 시선이 이찬에게로 쏠렸다.
2004년 11월 29일에 열릴 청룡영화상. 이찬은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그 위상 높은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상태였다.
심지어 열다섯 살 때에 찍은 작품으로.
2003년 연말에 개봉한 <684>는, 2003년 11월의 청룡영화상 심사대상으로 오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2004년 청룡이야말로 최초의 천만영화가 평가받는 마지막 무대.
3월 백상예술대상과 6월의 대종상에서 이미 최우수 남자 연기자로서 거론된 바 있는 이찬은, 이번에도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찬 군······ 찬이라고 불러도 될까?”
임세령의 질문에, 이찬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부르세요.”
“후후. 찬아, 어때? 이번엔 주연상 따낼 수 있을 것 같아?”
“예, 선배님. 그럴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와, 패기가 대단한걸? 하긴······ 백상도 대종도 다 조연식 선배님 때문에 떨어진 거니까. 작년에 상 타신 선배님이 없는 청룡이라면, 가능성이 없지도 않지. 그렇지만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까? <고등형사>가 포함됐다면 확실했겠지만······.”
2003년 11월 21일에 개봉한 <오이디푸스>는, 그해 12월 11일의 청룡영화상에 후보로 올라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그 주연인 조연식은 이후 백상과 대종상에서도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며 두 편의 천만영화를 물먹인 바 있었다.
이찬 입장에서는, 이번 청룡이야말로 ‘최초의 천만배우’로서 주연상이라는 과실을 움켜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
그런 반면, 2004년 11월 12일에 개봉한 <고등형사>는 11월 29일의 청룡영화상에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
단 6일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심사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
그 덕분에 이제는 두 번째 천만영화 <형제>의 주연들과 건곤일척의 수상 대결을 벌이게 된 이찬이었지만, 그건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고등형사>가 고작 10일 만에 340만 관중을 동원하며 천만 페이스에 접어든 상황이기에.
만약 그게 심사대상이 됐다고 하면, 24회 청룡영화상은 천만영화 세 편이 총집결한 지옥의 시상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전대미문의 고래싸움 앞에 다른 영화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고등형사>가 다음 번 청룡으로 물러난 데에 무수한 영화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상황을 잘 알기에, 소년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올해는 또 다른 선배님한테 밀리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년엔 확실할 거예요. <고등형사>에 <친절한 살인자>가 모두 심사대상에 오를 테니까요. 반드시 남우주연상을 따내서 선배님들께 공을 돌리겠습니다.”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신기할 정도로 어른스럽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아마 세령이 너보다 정신연령은 높을 거다.”
“네? 아, 선배님! 그건 너무하셨어요. 그래도 제가 아홉 살이나 더 많은데.”
“좋게 생각해, 인마. 외모로는 쟤보다 더 어려 보이잖아. 그러면 정신연령까지 어려도 괜찮아.”
“앗······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배우를 놀리며 낄낄거리던 조연식은, 이내 이찬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너, 자신은 있냐? <고등형사>에서는 그래도 레퍼토리라고 할 만한 게 있는 배역이었지. 그렇지만 이 작품의 ‘이수’ 역은 전례가 없는 배역이야. 액션 씬이야 네가 최고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친절한 살인자>를 끌어가는 건 오직 이수의 내적인 고민. 그걸 나레이션으로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이번 영화는 네 커리어에 오히려 악재가 될 수도 있다. <고등형사>의 명연기가 역으로 폄훼될 수도 있어.”
그 말을 듣고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을 아이다운 천연스러움으로 무마한 뒤, 그는 씩 웃어 보였다.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김신수 선배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찬이 네가 얼굴까지 잘생긴 건 한국 성우계의 가장 큰 불행이다······ 라고요.”
“뭐? 으하하! 아, 그랬어? 그 노친네가 참······ 하핫!”
47년 경력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성우, 김신수.
<친절한 살인자>에서 신과 악마의 음성을 모두 연기할 내레이터로 캐스팅된 그 인물은, 이찬에게 바쁜 가을을 선사한 원흉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초인적인 관찰력을 가진 소년에게 반백년의 경륜을 강탈당한 비운의 장인이기도 했다.
“지켜봐주십쇼. 정말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이후 박무열이 도착해 개시된 대본리딩에서, 이찬이 첫 나레이션을 입에 올렸을 때.
배우들은 박무열의 신작이 걸작이라 불리게 될 것임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어린 날 읽은 파우스트를 신부님께 빼앗긴 이후로도, 나는 자주 그 문장을 되뇌곤 했다. 신의 이름 아래에서 인간이 방황하고 싸울 이유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방황의 한마디가 신기할 정도로 날 빨아들였다. 그리고······ 어느 봄날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다른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정녀여, 어머니여, 여왕이시여, 여신이시여, 길이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 48장 - 배우 조연식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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