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장 - 배우 조연식 (3.) >
대서특필된 소년소녀의 공동수상 이외에도, 미디어는 신생 하늘기획의 약진에 특히 주목했다.
주된 워딩은 「청룡을 품은 하늘」이었다.
작품상에 이찬과 안정록 주연의 <684>.
남우주연상에 <684>의 이찬.
여우주연상에 <꼬마신부>의 명진아.
남우조연상에 <684>의 구진철.
신인남우상에 <꼬마신부>의 남태형.
인기스타상에 이찬과 남태형과 명진아.
25회 청룡영화상은 그야말로 하늘기획의 독무대였다. 주요 부문에서 수상자를 독식하다시피 하며 젊은 배우들의 전성시대를 알렸다.
그에 비해 나라엔터 쪽은 의외의 부진으로 민망해졌다.
남우주연상에 강정후와 조혁수 두 명을 올려놓고도 고배를 마시고, 아슬아슬하게 심사기간에 포함된 <지우개>의 이소연조차 여우주연상에서 명진아에게 밀렸기에.
“참 대단하지. 진철이 얘는 내 아역 맡았을 땐 신인상도 아직 멀었다 싶은 꼬마였는데, 뜬금없이 조연상을 타버리고. 남태형이란 녀석은 가만 보니까 이찬이 안 도와주면 아예 연기를 못하는 녀석이던데, 첫 주연작으로 신인상을 타버리고. 이찬은 연기학원을 차리는 게 더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어. 실력도 없는 애들을 끌어올리는 게, 참 알고도 놀랄 지경이야.”
조혁수의 말에 강정후는 한쪽 입술만 말며 웃었다.
대중에겐 조금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찬이 자기 기획사의 젊은 배우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르친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주지의 사실.
그 재능이야말로 소년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종종 생각하게 되곤 했다.
“넌 어떡하냐? 네가 그토록 존경하는 안 선생님께선, <684>로 천만 찍고도 조연식에 밀리고 이찬에 치여서 주연상 하나를 못 타셨는데.”
“헛소리는 하지 마시죠. 그분이야 이번엔 상 욕심 없이 받쳐주는 연기만 하셨을 뿐입니다.”
“누가 몰라서 그러나. 그저 너희 사제가 연전연패만 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년엔 상황이 더 심각할 거야. <고등형사> 페이스가 심상치 않다. 아직 20일도 안 지났는데, 벌써 800만을 코앞에 뒀어. 거기에 박무열 감독하고 <친절한 살인자> 찍으면 상업영화 전문배우라는 꼬리표도 떼어질 텐데. <주룩주룩> 같은 비주류 영화로 걜 이길 수가 있겠냐?”
<주룩주룩>은 자폐증 환자의 인간승리를 다룬 휴머니즘 가족영화.
상업성으로는 <고등형사>에 못 미치고, 예술성으로는 <친절한 살인자>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니 동료 배우로서 승패를 염려하는 그 말에 모순은 없었다.
그렇지만 강정후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미안한데, 조 선배.”
“조 선배? 제대로 선배님이라고 안 부르냐?”
“조선 배님.”
“이 자식이······ 인마, 배는 나주 배지.”
“하하. 어디 배가 됐건, 난 이제 그딴 경쟁에 관심 없습니다. 그냥 난, 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스포트라이트는 꼬맹이 혼자 잔뜩 받으라고 해요. 난 그냥······ 배우 강정후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젊은 대표이사의 얼굴을, 조혁수는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씩 웃었다.
“안 넘어오네. 많이 늘었다, 강정후.”
“멋대로 생각하시고.”
“보기 좋아. 예전처럼 역겹지 않아, 이제.”
“남이사.”
“오늘도 안정록 선배님 오시지? 애들 레슨 끝나면 식사나 같이 하자. 지금 찍는 영화가 클라이막스에 좀 지지부진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 좀 상담 받고 싶어.”
“<달콤한 꿈> 말이죠? 한국형 느와르······ 쉬운 연기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네요. ‘선배님’ 따위로 호칭하면서 상담은 받고 싶으시다는 건데.”
“흠. 역공이냐? 알았다 알았어, 다시 말할게. 안정록 선생님께 내가 상담 좀 받자. 안 되겠냐?”
“그렇게까지 부탁하신다면 제가 말씀은 드려보죠.”
일견 티격태격하는 모습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가장 솔직하게 타인과 사귀는 방법.
그렇기에 대화가 끝난 뒤엔 서로 마주보며 씩 웃게 됐다.
0.5초도 못 되어 서로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
<친절한 살인자> 오프닝시퀀스 촬영을 위해 청주의 한 폐교를 찾은 조연식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곳의 풍광에 감탄했다.
“허허. 야, 이런 곳을 찾아냈어? 울창한 산을 배경으로 강에 둘러싸인 학교라······ 신성하면서도 오싹하네. 재미가 있겠어.”
작중 초반에는 ‘이수’와 ‘김자영’이 재학 중인 고등학교로 묘사되다가, 이수가 출소할 무렵에는 폐교가 되어 ‘신주원’을 감금하고 교화하는 성전으로 변모하는 로케이션이다.
그러니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곳.
그 장소가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신선이 강림할 것 같기도 한 이중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 조연식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우리 박 감독이 심미안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눈까지 내리면 아주 볼 만하겠어. 그렇지 않냐?”
“그렇죠. 좋은 미장센이 나올 것 같아요.”
매니저에게 한 질문인데, 어느 틈엔가 뒤에 나타난 이찬이 대답을 건넸다.
“놀래라. 녀석, 일찍도 와 있었구나. 주인공이 그럼 쓰나.”
“주인공이지만 제일 후배니까요. 선배님이야말로 너무 일찍 오신 거 아니에요? 아직 임세령 선배도 안 왔는데.”
“미리 좀 둘러보려고 왔지. 여기서 나라면 어떤 마음으로 범죄를 저질렀을까······ 그런 생각도 미리 해볼 겸.”
“캐릭터 분석의 일환이군요.”
“그렇지. 너도 괜찮으면 같이 돌아보겠냐? 혼자 다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데.”
“저야 영광이죠. 가시죠, 선배님.”
마흔셋의 조연식과 열여섯 이찬이 함께 학교 주변을 거니는 모습은 마치 진짜 선생님과 제자처럼 보였다.
다만 키는 이찬 쪽이 훨씬 더 커서, 스탭들이 주인공의 비율에 감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야······ 이찬 쟤는 완전 모델 아니냐? 키 더 큰 것 같은데?”
“거의 190 된 것 같죠? 쟤도 큰일이네요. 키가 저렇게 커서야 어지간한 배우들은 투샷 잡기가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조연식도 그 나이 치곤 작은 편이 아닌데, 얼굴 크기가 차이가 나니까 비교가 확 되네.”
그리고 삼국지 속의 유현덕처럼 큰 귀를 가진 조연식은, 그 청력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다.
“······에잉. 할 일 없는 녀석들 같으니. 어딜 외모 품평이야.”
“왜요? 소품팀 사람들 같은데, 뭐라고 하고 갔어요?”
“별 거 아니다. 그냥 헛소리들 하고 갔어.”
“아, 네.”
그만큼 귀가 밝진 않지만 초인적인 관찰력으로 소품팀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던 이찬은, 속으로만 킥킥거리며 강변에 섰다.
콘티에 따르면 11씬에서 김자영의 시신이 발견될 로케이션이었다.
“너무 예쁜 곳이네요. 사람 시체가 나오기엔.”
“그래서 적절하지. 신주원이란 놈이 일부러 빨리 발각되게끔 버린 거니까. 몸이야 물에 잔뜩 불고 썩어문드러지겠지만, 그 가방 안에 든 이수의 물건들이 물증이 되는 거고.”
“자기 학생을 거듭 강간한 뒤에 살해하고, 그걸 또 다른 학생에게 뒤집어씌운다. 정말 사탄도 고개를 흔들 짓이네요. 그런데도 김자영이 낳은 아이는 공을 들여 키웠다는 게 모순적이고요.”
“그렇게 끔찍한 인간조차도 자기 자식한테는 좋은 아버지일 수 있다······ 인간의 다면성을 나타내고 싶었던 거겠지.”
“인간의 다면성이라.”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이찬의 마음은 그 녹색의 흐름과 닮아갔다.
푸른 물결은 어느새 시외버스가 된다. 그리고 그 바람 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는 갈댓잎 중에, 소년과 형사가 있었다.
그 형사는 아주 평범하고 무척 특별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나이보다 좀 더 늙어 보이고 이렇다 할 자랑거리 하나 없는 독거남이었겠지만, 저주와 축복 사이의 소년에게는 세상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살해됐고, 살인자는 15년형을 받았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아직도 이수에 몰입이 안 돼요.”
“리딩을 그렇게 잘해놓고도? 하긴······ 심정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어떤 인간인들 그 신성에 몰입할 수 있겠냐.”
“저라면, 소중한 사람을 죽인 놈을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겠지. 특히나 공권력의 눈이 미치지 않는 폐교에 범인을 붙잡아뒀다면, 눈이 돌아갈 법도 할 거다.”
“그런데도 이수는 그가 회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는 거죠. 선배님께선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강가를 바라보며 묻는 배우의 옆모습을, 조연식은 눈동자만 굴려 살폈다.
그리고 그 소년이 느끼는 것이 아주 개인적인 통증이라고 짐작하게 됐다.
‘이 녀석, 그저 천재적인 재능으로 고속도로 달려온 꼬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실력을 키운 것이 그저 천성만은 아니었던 걸까? 연기에 대해 아주 특별한 동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죄의식 같기도 하고, 사명감 같기도 한.’
작품 할 때마다 전화기를 거의 꺼놓고 사는 탓에, 인간관계가 무척 좁은 조연식이다. 그는 소년의 극단 시절 보호자에 대해 뜬소문으로도 접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피상적인 조언뿐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난 모든 인간이 회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꼭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도······ 세상에 아무 실수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 실수들을 고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 아니겠냐.”
“그렇지만 살인은 달라요. 적당히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잖아요. 뉘우치고 사과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렇지만, 복수를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방법이 없는 노릇 아니겠냐?”
“적어도 피해자의 넋을 기릴 수는 있잖아요.”
“넋, 그깟 거 뭔 상관이야. 죽은 김자영이 이수가 복수해주면 좋겠다고 생각이나 했을 것 같냐? 그냥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길 바랐겠지. 그 마음에 따라주는 게 진짜로 넋을 기리는 방법이다, 꼬맹아.”
소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새빨갛게 된 눈동자로 조연식을 직시했다.
“<오이디푸스>에선, 열심히 복수하셨던 분이.”
“그거야 연기지, 이 짜식아.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또 느낀 거다. 아, 복수 다 허망하구나. 복수가 또 슬픔을 낳고, 또 복수를 낳는구나. 그 좆같은 걸 재생산해서 뭐 하겠냐는 거다.”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이놈이 어른을 가르치려 드네? 야, 이 꼬맹아. 마흔 넘도록 내가 그런 경험도 없을까 봐?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잊어줘야 돼. 잊고 살아가야 해.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끔찍한 복수자를 연기했던 인물의 진심어린 토로.
그걸 들으며, 이찬은 조심스레 생각했다.
‘난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배신자지만······ 형은 그걸 바라겠지. 그러니까, 내가 자길 죽인 살인자 따윈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내길 당부했던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이수는, 내가 꼭 배워야만 하는 인물이야.’
바람에 울부짖는 갈대들 사이에서, 소년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렇게 <친절한 살인자>가 크랭크인에 돌입했다.
*
2004년 12월 12일.
개봉 이후 정확히 30일이 지난 그날에, <고등형사>는 마침내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그건 실로 압도적인 페이스였다.
일대 신드롬을 일으켰던 <684>는 천만 돌파에 51일이 걸렸고, 그를 단축한 <형제> 역시 40일을 필요로 했다.
극장가의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한 영화가 그들보다 10일 이상 빠른 시기에 천만을 돌파한 것이다.
그 충격적인 사실이 무수한 미디어를 통해 공개된 13일에는, 대한민국 전체가 이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 얘는 뭐 찍었다 하면 천만인데? <고등형사> 이거 그렇게 재밌나?”
“뭐? 너 안 봤냐? 이거 완전 유행에 뒤처지는 찌질이구만? 가서 당장 봐라. 이거 그냥 미친 영화야.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다고. 이찬 걔, 졸라 천재란 말이다.”
“아니, 시험 코앞인데 뭔 영화를 봐.”
“지금 시험이 문제냐? 교수님도 내일쯤 극장 간다고 그러시더만. 안 보면 너만 손해다, 찌질아.”
단 세 편의 주연 영화. 그리고 두 번째 천만관객.
이찬이라는 배우의 위업은 드러난 수치만으로도 극히 자극적이었고, 순위 매기길 좋아하는 대중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화젯거리가 됐다.
“우와······ 이 정도면 한국영화사 최고의 배우 아니냐?”
“최고까진 모르겠고, 팬이 많은 거겠지. 무슨 아이돌도 아닌데 백만 팬덤이라고 안 그러냐. 걔들이 두세 번씩 봐서 천만관객 만들어준 걸 거야.”
“어이고, 감 없는 새끼. 팬이라고 재미도 없는 영화를 몇 번씩 보겠냐? 이건 실력이야.”
“그럼 그럼. 이젠 뭐 조혁수나 강정후도 상대가 안 되지.”
“충무로 트로이카도 갈아야 된다니까. 남들은 하나 찍기도 힘든 천만영화를 혼자서 두 편이나 만들었는데 아직도 인정을 안 하는 건, 그건 그냥 질투하는 거지.”
“조혁수랑 강정후는 뭐 하나? 걔들도 또 천만영화 찍지 않을라나?”
“조혁수 뭐 느와르 찍는다고 하던데? 강정후는 마라톤 영화랬나.”
“······걔들은 안 되겠네. 상업영화만 따지면 이찬이 1인자 맞는 것 같다. 이찬의 시대야, 이찬의 시대.”
그렇게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이찬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은 채 오직 로케이션과 세트장만을 오갔다.
그는 지금 그저 이수일 뿐.
인간 이찬을 모두 잊고 배역에 몰입한 소년은, 한 씬 한 씬 자신의 모든 능력을 퍼부어 이수를 연기하는 데 집중했다.
“자영아······ 네가 그랬지? 만약에 세상에 신이 있다면 한번쯤 물어보고 싶다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거냐고.”
“저기요, 이수 형?”
“내가 한번 확인해볼게. 널 그렇게 괴롭혔던 새끼를 어떻게든 회개시켜서, 그놈조차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볼게. 그래서······ 너한테 알려줄게.”
“아니, 이수 형. 사람 불러다 놓고 왜 계속 혼잣말해요? 나도 바쁘거든? 빨리 말해요. 그놈 찾았는데, 이제 어떡하냐고.”
“못 알아듣겠어? 이제, 교화해야지.”
“뭘 해요?”
“교화! Edify!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붉은 용을 처단하는 미카엘처럼, 나는 그를 교화하리라······!”
강변에 서서 복수를 논하던 아이와는 전혀 다른 청년의 목소리. 눈물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성인의 눈동자.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연식은 사제처럼 해맑게 웃었다.
< 48장 - 배우 조연식 (3.) > 끝
ⓒ 비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