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38화 (138/250)

< 49장 - 제자 천세영 (1) >

<친절한 살인자>의 촬영에는 국내외 무수한 영화인들의 관심이 쏠렸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바로 다음가는 권위를 가진 것이 바로 심사위원 대상.

이미 <오이디푸스>로 그 영예를 움켜쥔 박무열 감독이 쌍천만의 소년과 함께 작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해외 유수의 영화지에서도 기자를 파견했다.

특히 일본 언론의 관심이 지대했다.

박무열의 편집증적인 작법에 열광하는 팬이 많은 나라인데다, 개봉 후 한 달 만에 아시아 외화 사상 최대의 흥행실적을 일궈낸 <고등형사>의 주인공 이찬의 신작인 까닭.

영화만 쏙 수출해놓고 단 한 번도 열도를 찾지 않은 소년배우를 직접 만나보고자, 무려 150명에 이르는 기자인단이 촬영장을 찾아왔다.

그렇게 유럽과 북미, 중국과 동남아를 포함해 300여 명의 기자들이 운집한 청주의 폐교.

박무열은 아주 민망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많은 관심에······ 참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여러 날 촬영장을 오픈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서 이렇게 하루에 모든 분들을 초청하게 됐습니다. 특히 센서티브한 감정연기가 필요한 작품이라서······ 죄송스럽게도, 주연의 인터뷰 역시 어렵게 됐습니다.”

통역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은 기자들은 몹시 낙담했다.

특히 일본인들의 불만이 컸다.

“저희는 이찬 군을 반드시 취재해야 합니다. 사적인 인터뷰 일정을 전혀 잡지 않고 있어서 오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는데요?”

“아, 죽겠네. 이게 정말 작품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배우의 몰입을 깨뜨릴 수 없는 내 입장도 이해를 좀 해달라고 말씀을 드려요. 스포일러가 없는 한도 내에서 많은 촬영내용을 공개할 테니까, 그걸로 좀 양해를 해달라고.”

성난 기자들을 간신히 달래고 물러난 박무열은, 한숨을 내쉬며 이찬의 대기실에 찾아갔다.

“찬아, 말하고 왔다. 인터뷰 따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 감사합니다.”

“어휴.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월드스타 주연은 이게 문제야.”

“예? 아니 왜 저만 갖고 그러세요? 월드스타 감독님 때문에 온 기자들이 훨씬 더 많겠는데.”

“······야, 너 말 잘하는데? 인터뷰도 해도 되겠는걸?”

“······주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각본에 없는 것까지 외웠어?”

“신부와 수녀의 아들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아멘.”

마치 사제처럼 진중하게 고개를 꾸벅이는 이찬을 보며, 박무열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그래, 그렇지. 내 작품에 집중하려고 다른 스케줄 다 뺀 배우한테 내가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가보긴 할 거지? 그 정도 일정은 빼줄 수 있어. 네 촬영만 매일 이어지는 건 아니니 말이야.”

“원래는 하루쯤 갔다 오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예 안 가겠다고? 무려 400만 관객이 들었는데? 팬싸인회까진 아니더라도 GV 한 번쯤은 해줘야 예의 아니겠냐.”

“그 영화 얘기 자꾸 하다보면 캐릭터가 깨질 것 같아요. 배우는 작품으로 말해야죠.”

틀린 말은 아닌데- 박무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의 배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물을 완전히 체화하길 바라는 배우들이 흔히 취하는 스탠스다. 전작과 관련된 인터뷰를 고사하고 오직 새 배역에만 몰입하는 건, 분명 배우로서 미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주체가 이찬인 탓에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볼 때 넌, 자다 일어나서 촬영해도 연기에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오해십니다.”

“계진행 대표도 그렇게 말하던데. 대뜸 각본을 다 뒤집어도 이찬은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과분한 말씀이지요.”

“오덕환 선배님도 그러시던데. 어떤 배역이든 뷔페에서 메뉴를 고르듯이 순식간에 끌어낼 수 있는 배우라고.”

“그 모두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하, 참나. 알았다 알았어. 계 대표가 제발 좀 꼬셔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포기다. 너 알아서 해라, 이 꼬맹아.”

그렇게 감독을 패퇴시킨 뒤, 이찬은 해질 대로 해진 자신의 각본을 내려다봤다.

‘일본 며칠 갔다 온다고 해서 내 연기가 흐트러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야지. 이번 작품이야말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까. 칸도 칸이지만, 행복한 이찬이 되기 위해서, 전에 없이 몰입할 필요가 있어. 그저 겉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이수가 되어야 해.’

*

2004년 12월 말에, <고등형사>의 스크린 수는 전국 100개 이내로 떨어졌다.

개봉 후 두 달 가까이 스크린 300선을 유지했던 <684>에 비해서 꽤나 빠른 하락세.

그렇지만 그것이 흥행의 부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미 볼 사람이 다 봤기에 새로 개봉한 외화들에게 자리를 내줬다고 봄이 옳을 터였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지난 12월 27일 발표된 <고등형사>의 전국 관객수는 1208만 명.

<형제>의 최종스코어를 일찌감치 돌파한 그 작품은, DVD로 풀리길 기다리고 있는 일부 관람층을 제외하면, 이미 영화애호가 중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최종관객 490만 언저리에서 막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지우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성과였다.

그런 기록적인 흥행으로 주목받은 것이 이찬 한 명만은 아니었다.

까메오로 출연해 강한 인상을 남긴 임호준과 강정후를 위시해, 조연 홍주석과 황상태와 현우정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오덕환 감독 최고의 강점이라고 하면 보통은 감정을 끌어내는 신파 코드와 센세이셔널한 극적 구성을 꼽는다.

그렇지만 영화인들은 때로 그보다도 큰 장점을 그에게서 찾아내곤 했는데, 인간미 넘치는 조연 캐릭터를 창작해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공감대 형성 능력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미스 스캔들>로 명감독 반열에 오르기 전부터 그가 갖추고 있던 특장점.

그 능력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넘치는 내공을 갖춘 세 배우의 연기력이 보태지자, 악인 중의 악인 홍주석, 울보 형사 황상태, 정의로운 담임 현우정 등이 함께 주목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은 주조연으로 발돋움한 영화의 촬영 직후에 하늘기획으로 옮긴 비슷한 이력으로 인해 함께 묶여서 인식됐다.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애호가들은 그들을 묶어 ‘3H’라고 부르기도 할 정도.

영화의 단독 주연인 이찬이 미디어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자연히 그 셋이 12월 각종 잡지의 표지모델을 도맡게 됐다.

그에 더해 홍일점 신인으로서 활약한 천세영 역시 천만영화의 수혜자가 되었다.

“김 대리님, 진짜 아직 안 보셨어요? 오늘 당장 가서 보세요. 대리님 좋아하는 엄청 예쁜 애도 나온다고요.”

“내가 좋아하는 애?”

“전에 CF 보면서 미친 외모라고 그러셨잖아요. 천세영이요.”

“아, 걔가 천세영이야? 걔가 그 영화에 나온 거야? 야, 그럼 봐야지. 은혜 씨, 알려줘서 고마워.”

천세영은, 애초부터 광고모델로 데뷔한 사례를 제외하자면, 데뷔 이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화장품 CF를 따낸 배우가 됐다.

<고등형사> 개봉일 관객 중에 광고주가 있었다는 것이 그 비하인드스토리.

거기에 각종 음료와 생리대와 가전제품 광고 제안이 줄줄이 들어오는 상황인지라, 2005년에는 이소연이나 신수영 이상의 CF스타로 등극할 가능성도 점쳐졌다.

그 흐름에 가장 기뻐한 건 하늘기획의 정창영 대표였다.

“복덩이야, 복덩이. 진짜 네가 복덩이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찬이가 다 했죠.”

겸손하게 답하는 천세영의 얼굴은 그저 순수했다. 그렇기에 정창영은 더욱 기뻐했다.

‘그야 찬이는 뭐든지 지가 다 하지. 그렇지만 정산 비율도 지가 다 하는 수준이란 말이야. 그에 비해서 신인인 우리 천세영 양은, 개런티를 회사에 반이나 뺏기는 처지지. 세상에 이보다 더 예쁜 복덩이가 또 어디 있겠어?’

소양근 팀장이 알았다면 ‘그렇게 욕심을 부리니까 머리가 빠지지’ 같은 소리로 비난했을 생각을 한 뒤에,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언제나 조심하도록 해라. 빠르게 주목받은 배우들일수록 거꾸러지는 것도 빠른 법이야. 항상 노력하고, 항상 겸손해야 해. 뒷말 안 나오게 믿을 만한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촬영장에선 선배들한테든 스탭들한테든 언제나 깍듯하게 굴고.”

“네, 대표님. 그 얘기 하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그것도 있고, 내가 전에는 바빠서 신경을 못 썼는데.”

“요즘도 바쁘시지 않아요? 사무실 이전 때문에 매니저님들 정신없던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좀 숨 돌릴 만해졌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세영이 너, 지금 만나는 남자 없는 건 확실한 거지?”

그 질문을 듣고, 천세영은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배우의 CF 계약은 이미지를 담보로 추진되는 것.

그리고 배우의 이미지라는 것은 그 사생활에 크게 좌우되는 법이다.

특히 청춘스타들의 경우 이성과의 연애가 팬들의 소비의욕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지라, 열애설이 터졌을 때의 위약금 액수가 계약서에 명시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열애설을 끝끝내 부정하는 스타들 중에는 그런 금전적 타격을 염려하는 케이스가 꽤 많았다.

막 CF스타로 발돋움하려는 소속 배우에게 사생활을 캐묻는 대표이사의 행동은, 그렇기에 당연한 것.

자칫하면 옳다구나 하면서 잡은 CF들로 인해 하늘기획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없습니다. 2년 넘게 없었어요.”

“그래? 확실한 거지? 나한테까지 속이면 안 돼. 나쁘게 말하려는 게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대표님 마음 알고요, 정말로 없습니다.”

“······그래? 신기하네. 너처럼 예쁜 애를 주변에서 왜 내버려두는 거지? 네가 선을 잘 긋는 성격인가?”

“네. 칼 같다는 말 자주 들었어요.”

그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한 천세영이었지만, 마음속은 조금 복잡해져 있었다.

‘다행히도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만나는 사람이 전혀 없긴 하지만······ 그렇지만······ 찬이는, 뭐 하고 있는 걸까?’

긴 고민 끝에 자신의 감정을 구분해낸 이찬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소년의 존재감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렇기에 열애설 위약금 조건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찬이가 고백한다면, 난 거절하기 힘들지도 몰라. 그렇게 멋진 남자는······ 나이를 떠나서 절대로 찾기 힘들 테니까.’

성폭력의 위기에 홀연히 나타나 주먹 한 방으로 자신을 구해준 연하남.

그리고 재능이 없어 도태되려던 그녀를 멱살 잡고 끌어올려 <고등형사>에서 열연하게끔 도와주고, <지우개>의 여주인공 이소연보다도 더 높은 화제성을 누리게 만들어준 구원자.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합숙하는 동안에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나 언제나 그녀에게 친절했다.

겉으로는 툭툭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친남매라고 해도 그러기 힘들 정도로 세심하게 제자를 보살폈다.

그런 존재에게 매혹되는 건 보편타당한 사랑의 공식.

스물한 살의 미녀 스타는, 그렇기에 하루가 다르게 소년에게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고등형사> 촬영을 마친 후로는 이찬의 코빼기도 보기 어렵게 됐다.

거장과의 작업에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다들 말했지만, 천세영으로선 그 변화를 자신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찬이는, 혹시 내가 싫어진 게 아닐까? 그렇잖아. 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이차도 다섯 살이나 나고, 내가 좀 유명해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하늘과 땅 차이야. <고등형사> 찍을 때 찬이가 그렇게 자기 마음을 표현했는데도 내 쪽에서는 뭐 하나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고. 그러니까 실망해서 거리를 두게 된 게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분명히 나한테도 차기작 같이 하자는 얘길 해줬을 텐데······.’

천세영은 <고등형사> 개봉일 즈음에 사무실에서 <친절한 살인자>의 각본을 읽게 됐다.

박무열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배우 이찬과의 면담을 통해서 시나리오의 갈피를 잡게 되었다는 신작.

그 안에 성모를 상징하는 ‘김자영’이라는 배역이 있었다.

천세영은 그 배역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찬이 간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고자, 자신의 짝사랑을 대입해 김자영이라는 배역을 만든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 까닭에 언제쯤 제안이 들어오려나 기대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며칠.

그 뒤에, 천세영은 임세령이 그 배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는 혹시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이찬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날만 이어지자, 마침내 새로운 가능성을 가정하게 됐다.

소년의 마음이 이미 그녀로부터 떠나갔다는 것을.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더니, 내가 버스를 놓쳐버린 걸지도 모르겠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앞으로 다시 그렇게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다시는 그렇게 멋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점차 깊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준 건, 정창영이었다.

“세영아? 야? 전화 왔잖아? 안 받아?”

“어, 아, 죄송합니다. 전화······.”

“혹시 남자야? 너 그 전화 여기서 받아라. 내가 의심하는 건 아니고, 혹시나 해서 그러는 거야.”

“아, 네. 그럴게요.”

급히 대답한 뒤 전화를 받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우리 영화 잠깐 나오면 안 되겠냐? 까메오로.]

“아, 네, 저, 그······?”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주소 보내줄게.]

이찬과 함께 천세영의 위기를 깨부쉈던 구원자.

강정후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 49장 - 제자 천세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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