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장 - 제자 천세영 (2) >
“어, 야! 스톱! 천세영 씨 왔네. 잠깐 스톱. 여러분, 잠깐만 편하게 기다려주세요. 천세영 씨, 여기로 와요.”
정한식 감독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외친 말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손짓하는 <주룩주룩>의 감독과 주연을 향해 걸어가며, 천세영은 스탭들이 떠드는 소리 역시 듣게 됐다.
“와······ 천세영 진짜 예쁘네.”
“광고계의 신흥 블루칩이라죠? 그럴 만도 하네요.”
“쟤는 그냥 조명판이 필요가 없구나. 그냥 여신이야.”
“에이, 여신 하면 신수영인데. 신수영보다 더 예쁘다고요?”
“누가 더 예쁜지는······ 막상막하, 난형난제로다.”
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였다.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여신수영’과 여러 차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천세영이 보기에 그녀는 진정한 여신이었다.
그런 사람과 비견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말았다.
‘······하지만 들뜨면 안 돼. 나 같은 게 뭐라고. 난 찬이 없으면 아직도 무명을 못 벗어났을 둔재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흘려 넘기려고 했지만, 초면의 정한식 감독까지 비슷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야, 천세영 씨? 반가워요. 실물로 보니까 더 미인이시네. 화면으로도 대단했는데, 그 이상인 것 같아. 이런 분이 연기까지도 출중하시니까······ 참 대한민국 좋은 나라예요.”
“······과찬이십니다, 감독님.”
“정후야. 네가 볼 땐 어떠냐? 넌 신수영하고도 이소연하고도 작품을 같이 해봤잖아? 그 두 사람이랑 비교하면 어때?”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돌아보자,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이라 일컬어지는 남자가 눈을 길게 만들며 웃었다.
“셋 중에서 제일 처지죠.”
“어? 그래? 그 둘이 그 정도야? 난 지금 세영 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 다 안 나오는데.”
“예? 아, 외모 말씀하신 거였습니까? 전 또 연기력 얘기를 하신 줄 알고. 감독님, 장난 그만하시고 작품 얘기 하시죠.”
여전히 그린 듯이 멋지게 웃고 있는 얼굴.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 냉랭했다. 배우를 단지 외모로만 품평하는 태도가 불쾌하다는 뜻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싫은 말 할 줄 모른다고 알려진 톱스타의 그 모습에 정한식이 움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하하하. 그렇지. 초면이라, 친해지고 싶어서 내가 헛소리가 길었네요. 세영 씨는 이런 얘기 지겨우시겠지.”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좋아요, 좋아. 잡담은 됐고, 저쪽 벤치 가서 얘기 좀 할까요? 내가 <고등형사>에서 세영 씨 보고 나서 계속 생각을 했거든요. 우리 작품에, 좀 뜬금없지만, 여배우 역으로 까메오가 필요해졌거든. 거기에 모실 수 있을까 해서 정후한테 연락을 부탁했던 거예요.”
민망한 듯 급히 떠드는 감독의 뒤를 따라가며, 천세영은 나란히 걷는 강정후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그냥 부탁받으신 거였네. 거기다 대놓고 연기력은 별로라고 말씀하시고. 너무해. 그야 객관적으로 두 선배님한테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면전에서 그러시다니.’
상황의 맥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치 없는 생각.
그렇지만 그 착오가 강정후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다. 아주 별로라고 생각했다면 까메오로 부르지도 않았을 거라는 판단 역시 들었기에.
“자, 이게 어떤 배역이냐 하면 말이죠. 간단하게 말해서 몰상식한 스타 역할이에요. 우리 ‘성호’가······ 아, 정후 작중 이름이야. 이 성호가 특수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좀 더 조명하고 싶어서 추가촬영 중인 건데, 여기에 외부의 시선을 담아보려고 해요. 물의를 빚고 사회봉사 차원에서 특수학교에 나온 스타가 자폐아를 함부로 대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거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지만, 스타 배역에 적응하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외모가 출중하시니까 앞으로 말괄량이 스타 배역 맡아서 활약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 네. 일단 매니저님하고 얘기 좀 해봐도 될까요?”
“그래요, 그렇지. 잘 좀 부탁해요.”
종종 방정맞게 굴긴 하지만, 정한식 감독은 훌륭한 영상미로 꽤 이름이 있는 감독. 급히 따라온 김순원 실장은 큰 고민 없이 까메오 출연을 용인했다.
“좋아, 아주 좋아요. 촬영은 이틀 뒤예요. 우리가 후반작업 진행하는 중이라 좀 급해. 모레 여기서 그 씬까지 찍고 바로 최종시사 준비할 겁니다. 하루에 끝내주실 수 있겠죠?”
“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준비할게요.”
“오케이. 내가 <고등형사>를 보진 못했지만, 세영 씨 연기에 호평 많다는 건 들었어요.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약식 미팅을 마친 감독은 곧바로 촬영장에 복귀했다. 기술시사까지 마친 뒤에 더해진 추가촬영인지라 한시가 바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주인공 강정후는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어······ 선배님은 안 걸린 씬이에요?”
“어. 난 좀 이따. 천세영, 너 크리스마스엔 뭐 했냐?”
“네? 어, 크, 크리스마스요?”
“그래. 이찬이랑 데이트 좀 했냐?”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기에 눈이 커진 천세영은, 떨어져서 담배를 피우는 매니저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전혀 그런 거 아닌데.”
“······그래?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다행이네.”
“다행······이요?”
“어. 너랑 걔, 잘되면 안 되거든.”
이번에는 더욱 기괴한 이야기였다.
그야, 같은 소속사의 청춘스타 두 명이다. TV만 틀면 CF 나오는 게 이찬의 위상인 만큼 열애설은 없어야 할 일.
그러나 강정후의 말은 들키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아예 가까워지지 말라는 투였다. 그게 천세영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 선배님. 감사한 말씀이긴 한데, 불쾌합니다.”
“불쾌하다라.”
“저, 그건, 제 사생활이잖아요? 찬이 사생활이고요.”
“사생활이라. 그러니까 사귀고 싶은 마음은 있다?”
“네? 그, 그런 말씀이 아니라요······ 그냥 사생활인데요.”
“이럴 것 같았다니까. 백마 탄 왕자님을 본 소녀가 다른 쪽으로 눈이 돌아갈 리 있나. 내 이럴 줄 알았어.”
한 발 더 나아간 해괴망측한 혼잣말.
그렇지만 이번에는 눈치 없는 천세영도 모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 세 사람의 비밀을 언급하는 말이었기에.
“제가······ 그때 일 때문에, 찬이 좋아할 거라고 보셨어요?”
“사실이잖아? 딱 봐도 느낌이 오는데.”
“그, 그게 선배님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제가 누굴 좋아하건 선배님한텐 무관한 일이잖아요? 애초에, 그렇지도 않고요.”
거짓말이었다. 천세영은 강정후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면의 천재는, 내가 세상을 속일지언정 세상이 날 속이는 것을 용납지 않는 인물이었다.
“니 마음은 잘 알겠다. 표정 보니까 답 나오네. 그리고 나랑 무관한 일 아니다. 내가 연기를 누구한테 배웠냐?”
“······안정록 선생님이요?”
“그래. 너도 우리 회사에 있을 땐 그분께 배웠겠지. 그분이 찬이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시는지도 알 거야. 그래서 그래. 그 끔찍한 놈······ 흠. 안 선생님께서 끔찍하게 아끼시는 그놈이, 잘못되는 걸 원치 않아서.”
“그래서, 저랑 찬이 사이를 훼방 놓으시겠다는 거예요? 제가 찬이한테 방해가 되니까요?”
“방해까진 아닌데, 대충 그런 셈이지.”
천세영은 다시 한 번 매니저의 동태를 살폈다. 그가 아직 담배연기에 휩싸여 있음을 확인한 뒤에, 마침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진짜, 못되셨네요. 어쩜 그러세요? 어떻게 그래요? 제가 뭐가 그렇게 못났는데요? 아니, 찬이 좋아하지도 않지만, 분해서 그래요. 왜 저는 안 되는데요? 왜 저는-”
“야, 야. 그만해. 그런 거 아냐.”
“왜요? 나이가 많아서요? 연기를 못해서요? 더러운 년이라서요? 뭔데요? 왜 찬이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건데요?”
“아······ 야, 미안하다. 내가 오지랖 떨었다. 야, 나 촬영하러 간다. 조심히 가라.”
“기다릴 거예요. 오늘 대답을 들어야 되겠어요.”
울분을 가득 담은 눈으로 노려보는 천세영의 마음을 관조한 뒤에, 강정후는 생각했다.
‘아······ 씨발, 돌겠네. 이게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영화에선 이런 식으로 떼어내곤 하던데. 이걸 어떻게 풀지······?’
복잡한 마음으로 촬영장에 복귀한 강정후는,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호’ 역으로 변신했다.
자폐아. 그리고 백만불짜리 다리.
일반적으로 연결되기 어려운 인간승리의 주인공을 연기하며, 그는 자신을 잊어갔다. 감독의 욕심으로 운동장을 뛰고 또 뛰면서도 잠깐조차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세영은 눈도 떼지 않고 그 연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 달리기가 스무 바퀴째에 이르렀을 때 생각했다.
‘저렇게 멋진 연기를 하시면서······ 자기랑 무관한 자폐아한테도 마음을 담으실 수 있는 분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진짜, 너무해. 왜 나만 미워하는 거야?’
*
촬영으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오른 이찬은, 핸드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강정후 이 인간이 웬일로 전화를······ 다섯 통씩이나?’
그리고 호기심과 짜증 속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들린 목소리에 소년은 충격을 받았다.
[야아! 찬아아. 찬아? 찬아······ 어디야? 일루 와. 여기 완전 나쁜 놈이, 나한테 막, 막 막-]
[어, 야! 내 전화를 왜 받아? 어······ 뭐야, 이찬이냐?]
“강 선배.”
[흠. 선배님이라고 불러, 이 새끼야.]
“선배. 뭡니까? 이 밤중에 세영 누나랑 둘이 뭐 해요? 술도 꽤 취한 것 같은데?”
[사정이 좀 있다. 너 얘 집 알지?]
“알긴 아는데, 여자 혼자 사는 집 알려드릴 생각은 없네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 어디예요?”
[여의도에 아는 술집인데······ 너 청주 아니냐?]
“오늘은 세트장입니다. 바로 갈 테니까 주소 찍으세요.”
이후 염수진을 닦달해 여의도로 직행한 소년은, 외진 술집의 룸에서 엉엉 우는 천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뭘 그러케 잘못해써요? 나도- 어? 찬이다! 찬아······!”
“흠. 왔냐. 매니저한테 얘 좀 데려가라 그래.”
“······인사불성이네. 이렇게 술이 떡이 되게 먹인 이유는요?”
“설명해줄 테니까, 좀 데려가라 그래. 넌 택시 타면 되잖아.”
의외로 멀쩡한 답변에 분노가 조금 식었다.
한국사회 특성상, 술에 취한 여배우를 다른 회사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나 택시에 태워 보내기는 어려운 노릇.
그렇기에 염수진이 천세영을 부축해 룸을 나섰다.
그 뒤에야 마침내 두 회사의 간판배우가 마주앉았다.
“뭡니까? 이제 설명을 해보시죠.”
“······내가 좀 실수를 했어. 감독님이 천세영 까메오로 불러달라고 해서 불렀는데, 기왕 얼굴 본 김에 너랑 가까워지지 말라고 말했거든. 그랬더니 분하다고 매니저도 보내고 달라붙더라. 어떻게 처치가 곤란해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던 거다.”
“깔끔한 설명이긴 한데······ 왜요? 왜 헛소리를 했어요?”
“헛소리? 아, 젠장. 그냥 좀 걱정돼서. 너 제대로 연애 해본 적도 없는 꼬맹인데, 저렇게 예쁜 애가 대시하면 거절을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도와주려고 한 거다.”
“뭘 어쩌려고 해요?”
“······도와주려고 했다고. 꼽냐?”
모든 상황의 비약과 제멋대로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가 이찬에게 꽤 신선한 울림을 선사했다.
“날요? 도와주려고 했어요? 왜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니까, 새끼야. 그냥 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어.”
“난 선배가 물에 빠진 거 혹시 보더라도 구해줄 생각 없는데요?”
“뭐? 이런 개······ 우리가 그래도 그런······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사이냐?”
“그렇게까지 말할 사인데요. 근데, 하하하. 웃기다.”
건조하게 시작된 웃음이 곧 청량해졌다.
“아니, 하하하하. 아, 진짜 웃긴데. 선배, 그거 알아요?”
“뭐.”
“난 진짜, 선배하고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어떤 관계.”
“서로 챙겨주고, 제멋대로 도와주는, 그런 인간적인 관계요.”
“흥.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아니 진짜로 눈곱만큼도 고마운 상황은 아니거든요? 그게 이해가 안 되세요? 상식적으로, 무슨 열애설이 터진 상황도 아니고, 그냥 무턱대고 너 쟤 좋아하지 마라 그러면, 그게 먹힐 리가 있어요? 하하하, 진짜 웃겨. 거의 사회부적응잔데.”
“이런 씹······ 그럼 뭐, 어떻게 해야 되는데? 넌 뭘 잘 알아서 그런 소릴 하냐?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맞는 말이야-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천세영과 명진아 사이에서 혼자만의 줄다리기를 해야 했고, 그 끝에 두 사람 모두를 불행하고 만들고 있는 중.
그 멍청한 자신과 눈앞의 멍청한 톱스타가 오버랩됐다.
“······주여. 당신의 어린양들이 참으로 가엾습니다.”
“이 미친놈이 뭐래?”
“강 선배. 저 누나요, 나랑 잘될 가능성 없어요. 그러니까 그 희한한 걱정 더는 안 하셔도 돼요. 오케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좀······.”
“이거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려고 했던 건데. 멍청하지만 입은 무거운 선배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저 누나, 나랑 친척이에요. 법적으론 아니지만. 내가 고아라서 그런 거죠.”
때 아닌 충격고백에 멍해진 강정후를 향해, 이찬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누나는 몰라요. 나도 추측만 하고 있는 거고. 그렇지만 그게 맞든 틀리든, 고백 받아줄 일은 없을 거라고요.”
“······뭐 하냐? <가을하늘> 찍냐?”
“아, 그거랑 비슷하네? 배우가 드라마 따라간다더니.”
“농담 할 기분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아마도. 저 누나는 나한테 그냥······ 제자죠. 잘 가르쳐서 성공시키고 싶은 사람.”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보며, 강정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구 술을 마시는 천세영을 말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 본인은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기에.
“너······ 방금 한 말이 진짜면, 친척인 거면, 네 부모님은?”
“몰라요. 관심 없어요.”
“······찾아보지 않았어? 살아는 있는지, 어쩌다 널 잃어버린 건지, 확인해보지도 않았다고?”
“그게 뭔 대수람. 선배, 나한테 부모님은 없어요. 그냥······ 형만 한 명 있을 뿐이죠. 아무튼 걱정은 이제 끝. 됐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정후는 생각했다.
가족조차 바랄 수 없을 만큼 상처받은 아이에 대해서.
그를 끔찍한 천재라며 질투해온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 49장 - 제자 천세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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