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장 - 소녀 명진아 (1) >
한동안 모든 제안을 고사하고 오직 <친절한 살인자> 촬영에만 몰두한 이찬이었지만, 그런 그로서도 빠질 수 없는 행사가 하나 있었다.
2004년 MSB 연기대상이 바로 그것.
미니시리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남기고 종영한 <연애의 조건>으로 그해 안방극장의 지배자가 된 소년은, 너무도 당연하게 연기대상과 최우수상 후보에 올랐다.
둘 중 하나를 수상할 것이 분명하기에 부수적인 인기상이나 베스트커플상은 오히려 고사해야 했을 정도.
그런 상황에서 작품 때문에 바쁘다며 두문불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때, 찬아? 오늘 대상 탈 수 있을까?”
룸미러를 보며 묻는 염수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자신의 배우가 1년을 결산하는 방송국 시상식에서 큰 상을 탄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도무지 내려오질 않았다.
하지만 뒷좌석 이찬의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모두 순리대로 이뤄지겠지요. 염려할 일이 아니에요.”
“아······ 진짜 적응 안 돼! 찬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오늘만이라도 편하게 얘기하면 안 될까? 응? 찬아아아.”
“아 진짜 귀찮게.”
“아, 찬이다!”
“······누나. 당연히 대상 탈 거니까 그만 물어봐요.”
“정말? 정말이야?”
“당연히 정말이죠. 저 말고 그럼 누굴 줘요?”
“그렇지? 역시 네가 타는 거지? 야, 신난다!”
염수진은 거의 춤을 출 듯이 몸을 흔들다가, 신호가 바뀌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지만 그건 귀찮은 로드매니저의 질문을 막기 위한 단언일 뿐. 사실 소년은 대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다.
10월 2일부터 방영된 주말연속극의 원로배우 때문에.
‘고현미 선배님······ 트렌드에 한참 뒤쳐진 가족극에서 억척스러운 엄마 연기로 시청률몰이를 하고 계시지. 거기다 올해 KBC와 MSB 동시 대상 후보고. 정말 대단하신 할머니야. 내 연기대상 2차 도전에 물을 먹이셨으니 말이야.’
작품만 놓고 보자면 상대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미니시리즈 <연애의 조건>이 드라마사 역대 10위의 시청률을 달성한 데 비해, 주말연속극 <한강수>는 세 달 내내 40% 미만이었다. 게다가 예정된 50부까지는 반밖에 방영되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이찬이 아니면 대상을 받을 이가 없는 게 2004년 MSB 드라마의 실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고현미라는 점에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MSB 탤런트로 시작해 30여 년 동안 7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한 51년생 배우.
그리고 이찬은 그녀가 데뷔하고도 30년이 지나서야 MSB에서 단 두 작품에 참여한 89년생 소년.
MSB 연기대상을 둘 중 누구에게 줘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젠장. 억울해 억울해. 작년엔 톱스타 김은희 아줌마의 안방 복귀작이라고 해서 밀리고, 올해는 원로배우한테 공로상 비슷하게 뺏기게 생겼네. 아, 더러워서 진짜······가 아니라, 흠. 그런 분께 양보하는 거라면 억울할 일도 아니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야······.’
배역 ‘이수’처럼 생각하려 애쓰며 마음을 가라앉힌 소년은, 이후 레드카펫 인터뷰에서도 온화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이찬 군! 이찬 군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MSB 연기대상에 후보로 올라 있어요. 어때요? 올해는 수상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후보로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행복합니다. 저는 고현미 선생님의 대상 수상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연애의 조건> 애청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식장에 들어선 뒤로도 소년은 계속해서 맑게 웃었다.
고뇌 속에서도 넘치는 인간미로 주변을 감화시켰던 이수처럼, 그는 마치 세속을 초월한 성자처럼 굴었다.
그리고 신인상 수상자로 T.O.P의 ‘순정미남’ 심요셉이 호명됐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외쳤다.
“축하해요, 선배! 연기자 인생 제대로 시작하셨네요!”
“찬아! 고맙다, 찬아!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뭘요! 다 선배님이 잘하신 덕이죠!”
“어······ 어째 오늘따라 너무 순순한데? 아무튼 갔다 와서 보자! 잘 봐, 나 오늘 수상소감 진짜 열심히 준비했거든!”
열심히 준비했다고 말하고 당차게 무대 위로 올라간 심요셉은, 그러나 준비한 대사를 반도 다 하기 전에 눈물을 흘렸다.
함께 고생하며 응원해준 멤버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던 도중의 일.
그 뒤로는 그저 훌쩍거리고 더듬거리는 헛소리의 연속이 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드라마 끝나고 발표한 앨범까지 잘돼서, 올해 처음으로 SBC 가요대상을 탔다고 했지. 거기다 MSB에서는 연기로 신인상까지 타게 된 거야. 그간 마음고생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감동이 복받친 거겠지. 저 선배네 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이돌로 활동할 수 있겠어. 내 입장에선, 가수 같은 거 그만하고 연기만 판다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니까, 좀 아쉽긴 한데······ 그렇지만 기분은 좋네. 남태형 선배도 방송으로 보면서 되게 기뻐하고 있겠지.’
대상 아이돌의 연기상 수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직후에 네티즌 인기상을 따내 못 다한 수상소감을 이어갈 수 있었고, 잠시 후에는 임아영과 함께 베스트커플상까지 수상하며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거기에 더해, <연애의 조건> 여주인공 신수영은 생애 처음으로 TV드라마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수상소감의 첫머리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연애의 조건>은, 저에게 정말 뜻깊은 작품이었어요. 마이 찬 때문이에요. 찬이랑 영화 데뷔작을 함께하면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연기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저는 배우 이찬이 없이는 이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발언에 자연히 카메라가 이찬의 얼굴에 프레임을 맞췄다.
심요셉과 함께 동료배우의 수상에 기뻐하는 척하며, 소년은 속으로 잔뜩 구시렁대던 중이었다.
‘쓸데없는 말 하긴. 내가 해준 거라고 해봐야 내 데뷔작 잘되게끔 오지랖 부렸던 것뿐인데. 하여튼 성격 이상한 누나-가 아니라, 정말 고마운 일이야. 가장 행복한 순간에 나부터 거론해주다니, 저렇게 선량한 누나가 또 어디 있겠어.’
그렇듯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던 소년이었지만, 막상 남자부문 최우수상에 그가 아닌 정길승이 불리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설마 나한테 상을 하나도 안 주겠다는 거야? 이 미친 MSB놈들이? 제 정신이야? 내 백만 팬클럽 마이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홈페이지를 다운시켜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와, 참 어이없네?’
여전히 그를 위주로 촬영 중인 현장카메라를 향해 한 점 어색함 없는 웃음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룬 통제력 덕분.
이찬의 마음은 배역을 집어던지고 소년으로 돌아왔다.
‘더러운 새끼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와라. 내가 어디 다시는 너희 드라마 출연해주나 봐. 하나도 안 나오고, 대신 KBC랑 SBC에서 대활약하면서 연기대상 싹쓸이하고 그럴 거다. 흥이다 흥.’
신수영과 심요셉과 주동한 PD가 번갈아가며 “너한테 대상 주려나 봐” 따위로 말했지만, 소년은 전혀 듣지 않았다.
MSB 고위층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욕하던 그가 마침내 이성을 되찾은 건, 공로상 수상자로 고현미의 이름이 불린 순간이었다.
‘어······? 공로상에, 고현미 선배님? 그러면······ 어······ 수상순서로 봐도 그렇고, 이건 어떻게 봐도 대상은 안 주겠다는 뜻인데? 정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대상인 건가?’
그 추측은 사실이 되었다.
30일의 밤을 마감하는 마지막 수상자로 불린 건 이찬이라는 두 글자였다.
“됐다! 마이 찬, 대상이야!”
“축하한다, 이찬! 너 진짜 내가 해낼 줄 알았어!”
“찬아, 찬아! 자, 올라가야지. 자 자.”
동료배우들과 PD의 독려 속에 걸음을 옮기며, 소년은 다시금 자신의 안에 이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트로피와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상이었습니다. 이 상은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소재를 누구보다 잘 풀어주신 남애리 작가님의 것이기도 하고,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연출로 좋은 방송 만들어주신 주동한 PD님의 것이기도 하고,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연기로 이야기를 완성해주신 신수영 선배님, 임아영 선배님, 심요셉 선배님······ 그리고 모든 배우와 스탭 분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또 오랜 시간 동안 MSB 드라마의 발전을 위해 공헌해주신 고현미 선배님의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저는······ 이 상을 대리인으로서 받는 것뿐입니다. 올해 대상 수상자는 제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이 상을 바칩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주인공이니까요.”
그 쓸쓸한 목소리에는 작은 행복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스스로는 정말 자격이 없다고 믿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겸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애.
이찬 대신 시상식에 선 이수는, 그렇게 성자처럼 웃었다.
*
“열여섯 살의 대상, 개념 찬 ‘마이 찬’······ 크, 멋있지?”
정창영의 질문은 순수한 찬사였다.
그 헤드라인이야말로 수상자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시상식 이슈 중에서 가장 적절하고 인상적인 것이라 판단한 까닭.
“두 편의 천만영화를 완성하며 2004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배우 이찬은, 두 번째 드라마 주연으로 연기대상마저 거머쥔 순간에 주변을 먼저 살폈다······. 야, 이거 진짜 걸작이야!”
그 말에, 스포츠고려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소년의 신성한 미소가 정창영의 눈앞에도 고스란히 펼쳐졌다.
“걸작은요, 죄송하죠. 대표님 성함도 언급 못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뭐 시상식장에서 이름 불리려고 일하나? 네가 최고의 배우로 올라서는 거, 그거 하나만 보고 머리 빠지도록 일하고 있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이건 정말 최고의 수상소감이었어. 완벽했어!”
그건 이찬 역시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무려 35년차 배우를 누르고 16세의 소년이 대상을 수상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큰 상 받아서 행복하고 누구누구에게 감사하고 그런 이야기들만 했다면, 청년층이나 팬들이라면 몰라도, 중년층의 대중은 그에게 혀를 찼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극히 낮췄다.
자기 성공에 도취되기 십상인 어린 나이에, 주변에서 자신을 위해서 공헌해준 사람들을 챙기며, 위대한 원로배우에게까지 영광을 돌렸다.
훈훈한 미담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밤부터 시작된 이슈는 익일 오후가 되도록 그칠 줄 모르고 재생산되는 중.
신년 사무실 이전을 앞두고 바쁜 정창영 대표가 세트장으로 달려오게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과였다.
“찬아, 이거 정말 최고다. 주변사람들이야 네가 정말 인품도 훌륭한 아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대중에게는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게 샘이 날 수도 있었을 거거든. 그랬는데 이 한 번의 수상소감이 그걸 다 뒤엎었어. 넌 이제 2004년의 소년인 동시에 대한민국 최고의 보물이다. 지금 한국에선, 대통령보다도 이찬이 최고야!”
“하하. 감사한 일이네요.”
그렇게 답하며, 대한민국의 보물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마음은 배역 이수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 캐릭터가 참······ 이상한 데서 쓸모가 있네. 계획하고 진행한 일이 아니라서 좀 얼떨떨하긴 한데, 잘된 일이야. 정창영 아저씨 말대로 내 이름값이 끝 간 데 없이 올라가고 있으니까. 장기적으로도 도움이 될 이미지인 거야.’
생각은 거기까지. 소년은 금세 다시 이수 그 자체가 되었다.
“그 말씀만 하려고 오신 건 아닐 것 같은데요. 제가 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어, 그래. 우리 찬이, 역시 똑똑하구나.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워낙 네가 이슈가 됐다보니까, 여러 가지 제안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는데 말이야.”
“죄송해요, 대표님.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건 알지. 그래서 CF니 잡지니 계속 들어오는 말들 내 선에서 다 커트했던 거고. 그렇지만 이건 좀 너무 아까운 얘기여서 그래. 한번 들어만 보지 않을래?”
“일단 들어볼게요. 말씀해주세요.”
이어진 정창영의 이야기는, 소년이 예상했던 어떤 것과도 다른 종류의 제안이었다.
“유니세프 친선대사요? 그걸, 진아 누나랑 같이요?”
unicef. 옮기면 유엔 아동기금이란 의미로, 제3세계의 빈민가 아동들을 위해 성금을 받고 구호활동을 수행하는 단체다.
그곳에서 명진아와 이찬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위촉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그래. 너는 혹시 알았으려나? 진아가 거기 정기후원자로 벌써 3억 가까이 기부했다는 거.”
“아······ 뭔가 하고 있을 것 같긴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정말 마음씨 좋은 누나예요.”
“그렇지? 그게 이번 이슈와 함께 엮이면서, 굉장한 시의성을 갖게 된 거야. 너도 진아도 아직 아동이지? 거기다 거기에 둘 모두 각종 기부활동을 해왔지?”
“전 별로 한 게 없는데요.”
“음······ 매미 때 출연료 전액을 성금으로 냈잖아? 그 후에 버는 돈이야 다 회사에 투자하고 있을 뿐이고. 지금 이미지에서는 그 한 건만 해도 인정받기에 충분해.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까, 유니세프에서도 긴급회의로 친선대사 위촉을 결정한 것 같더라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는 흔히 홍보대사라 불리는 특별대표와는 다른 것으로,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현재는 거장 안정록과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그 유이한 면면.
그런 자리에 무려 10대 둘을 보태겠다는 파격이었다.
거기에는 아동으로서 아동을 대변할 수 있다는 상징성만이 아니라, 명진아의 지속적인 기부활동, 이찬의 청룡영화상과 MSB 연기대상 등의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을 터였다.
과연 대표가 직접 설득하러 달려올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찬은 이수의 마음을 관조했다.
‘투명성 면에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구호기금이고, 제3세계 아이들에게는 생명수 같은 존재야. 이 작품 말고 다른 활동은 하기 싫지만······ 이수라면 이걸 결코 거절하지 못하겠지.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건 받아들여야 할 일이야.’
그렇게, 집시 이찬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 이뤄졌다.
< 50장 - 소녀 명진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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