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장 - 소녀 명진아 (2) >
“전 세계의 1/3이 비타민과 미네랄 부족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루 5천 명의 어린이가 오염된 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어요. 94년부터 선진국으로 인정받아 개설된 저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그런 제3세계 아동들을 위해 적극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각종 모금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논하는 남자의 표정은 열렬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은 당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며, 은은하게 미소만 띤 입가는 상대도 자신의 뜻을 알아주리라 의심하지 않는 자신감.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에 이찬은 퍽 만족했다.
‘물 흐르듯 설명하는 태도도 그렇지만, 나이 어린 나한테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고 성의 있게 설명하는 점이 특히 만족스러워. 이런 사람을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한국위원회가 이번 위촉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야.’
아무리 UN의 구호기금 단체라 해도,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사명감으로 넘칠 리는 없는 일이다.
열성적인 사람을 고르고 골라 붙였음이 분명해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한시호 실장님. 저도 의욕이 막 생기네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기쁜데요? 저번 인터뷰 정말 잘 봤습니다. 감동적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고도 그렇게 겸손하시다니. 정말 유니세프 정신에 딱 맞는 스타라고 생각합니다.”
“영광이네요.”
“진아 양도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까, 편하게 차 드시면서 기다려주세요. 간단하게 보고만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한시호 실장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이찬은 염수진에게 손짓해 다가오게 만들었다.
“제 수상소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요?”
“하하, 당연히 엄청 인상적이었지. 예상 못 했던 거야?”
“좋은 이미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 이상이야. 아직까지도 인터넷 뉴스 순위에 계속 상위권이라니까? 사람들이 다 너 수상소감 얘기밖에 안 할 정도야.”
소년은 겸허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이슈는 이슈인 모양이네. 해 바뀌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새해가 되고서도 뉴스 상위권이라······. 흥미로워. 유명인의 미담은 이렇게까지 커질 수도 있는 거구나.’
평소였다면 직접 컴퓨터로 반응을 확인했겠지만, 지금 그는 <친절한 살인자>의 이수. 자기 유명세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는 건 배역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사회적 반향을 확인하는 건 오직 염수진을 통해서.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이 얼마나 커졌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세 편밖에 없는 천만영화 중 두 편의 핵심주연. 거기다 미니시리즈 사상 최고 시청률로 최연소 대상. 그러고도 겸손하게 제가 받은 거 아닙니다 이랬으니까······ 그 포인트에서 화제가 심화된 것 같네. 하여튼 사람들 심리란 흥미로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허겁지겁 들어서려면 명진아의 눈이 이찬을 발견했다.
“찬아!”
“어, 누나. 어서 와. 곧 실장님 오실 거야.”
“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찬아.”
“누나도. 얼른 와서 앉아.”
명진아는 어색하게 삐걱거리며 들어왔다. 그리고 이찬의 옆 한 칸 떨어진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 정말 일찍 왔구나? 나도 되게 빨리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그나저나 정말 잘됐어, 찬아. 이번 행사, 진짜 좋은 일이 될 거야. 친선대사 위촉 기념 애장품 바자회라니. 나 벌써 집에서 이것저것 골라놨어. 잘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구호기금 마련을 위한 거니까, 예쁘게 봐주시겠지?”
친선대사로 위촉될 소년소녀의 첫 번째 임무 이야기였다.
애장품 바자회를 통해서 새해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동시에 유니세프의 활동에 대해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것.
국내의 무수한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두 사람이기에 무척이나 적절한 기획이었다.
다만 이찬은 그 현실성에 대해 상당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누나가 잘 팔아야 돼. 난 뭐 팔 만한 게 없어.”
“어? 왜 없어? 찬이 너는 의상만 내도 엄청 화제 될 건데? 천만영화 의상들 다 받지 않았어?”
“거의 받았지. 근데 수진 누나 시켜서 벌써 다 팔았거든. 군복이나 교복이라 괜히 공간만 차지하는 것 같아서.”
“······이 바보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명진아의 큰소리에, 소년은 킥 웃었다. 얼굴이 빨갛게 돼서 외치는 게 무척 귀여워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마. 그 돈도 다 지금 사무실 이전하는 데 들어갔어.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 새로 애장품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야. 바자회까진 시간 좀 남았으니까.”
“새로 만드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찬아, 내가 좀 살펴봐주면 어떨까? 나 2002년에도 유니세프 바자회 참가했었거든. 그때는 내 물건은 별로 내놓지 못했지만, 안정록 선생님이나 다른 후원자 선배님들 팔린 물건들은 많이 봤어.”
“그래? 그럼 이사님한테 골라달라고 할게.”
“어······ 근데 선생님 바쁘시잖아? 가르치실 제자들도 많으시고······ 근데 난 아직 작품 안 잡혀서 한가해! 그리고 선생님은 워낙 선한 분이셔서, 보통 사람들이 기부하는 심리에 대해선 잘 모르실 거야.”
“하하.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안 들어?”
신부님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건넨 소년의 말에, 소녀는 동그란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그 뒤에야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나, 나는, 전혀 아닌데!”
“누나도 선한 사람이야.”
“아냐······ 난 그냥 보통 사람이야.”
“누나가 보통 사람이면, 난 나쁜 사람인데?”
“아, 아냐. 아닌데······ 너가 훨씬 착한데······.”
연기는 잘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전혀 없는 것 같은 명진아를 바라보며, 소년은 마음속으로 의구했다.
‘내가 착하긴 뭘 착하다고. 대중들이야 모른다 쳐도 이 누나는 나랑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잖아? 이제 슬슬 내가 어떤 놈인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이게 혹시 그런 건가? 콩깍지가 씌어서 상상 속의 선량함을 만들어내는?’
그러나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곧 유니세프의 한시호 실장이 들어왔기에.
“아, 오셨군요! 두 분,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성실하고 선한 하이틴 스타들이 계셔서 한국 유니세프의 미래가 참 밝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위촉식에 대해서 좀 의논을 해볼까요?”
*
칸을 노리는 <친절한 살인자>가 바쁜 일정 속에 촬영되고 있기에, 소년은 미팅 뒤에 곧장 세트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명진아로부터 전화를 수신했다.
“어, 누나. 왜?”
[촬영 끝났다고 들어서! 지금 너희 집으로 갈게. 같이 애장품 될 만한 거 뭐 있는지 찾아보자. 바로 출발할게!]
“아니 굳이······ 벌써 끊었네. 하여튼 착해빠져가지고.”
명진아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나서는 건, 소년에 대한 애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선한 마음으로 기부하는 사람들의 만족감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애장품을 내놓고 싶은 것.
이찬은 그 마음을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기한 일이지. 그런 순수한 선의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좀 어리석어 보이긴 하지만. 기부 같은 거 정말 한심한 행동인데 말이야. 남의 도움으로 생활을 영위해본들 일시적인 회복일 뿐인······ 거긴 한데 좋은 일이지. 암, 좋은 일이야.’
그렇게 이찬의 아파트에 방문한 명진아는, 이후 염수진이 야식을 준비하는 동안 소년의 방을 중심으로 애장품을 탐색했다.
“이거, 운동기구 이거는? 오래 쓴 거야?”
“그렇지. 누나가 좋아하는 내 근육의 원천이야.”
“아······ 그, 그럼 이것도 내자. 대신 내가 새로 사줄게.”
“더 무거운 거 사주게? 더 근육맨 되라고?”
“아, 아니. 그냥 선물로. 이건 그럼 포함시키기로 하고······.”
주로 포함되는 건 이찬이 바로 어제까지도 써먹은 바 있는 운동기구와 필기구 등.
오늘도 내일도 그것들을 사용할 셈이었던 소년 입장에서는 좀 황당했지만, 명진아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저거······ 대본들이지?”
“그렇지. 대본들은 왜?”
“저기에, 네 필기들이 잔뜩 써져 있는 거지?”
“그렇긴 한데, 저걸 낸다고? 팔리겠어?”
“당연하지! 네 팬들도 그렇지만, 연기자 지망하는 분들까지 탐낼 거야. 희대의 천재배우의 비밀이 담겨 있으니까.”
“저거야 그냥 정리만 한 거라 누가 본다고 연기력이 늘지는 않을 텐데. 난 노력파 천재가 아니란 말이야.”
“아······ 그렇지만, 팬들한테는 최고의 추억이 될 거야.”
마치 채무자 집에 들이닥쳐 빨간 딱지를 붙이는 채권추심원처럼, 소녀는 방 이곳저곳을 뒤져 상품을 발굴해냈다.
문지방에 선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좋아하는 남자 방에 들어왔다는 자각이 전혀 없네. 그냥 머릿속이 바자회로 가득 차 있어. 애정이 식어서 그런 건 아닐 거고, 저건 진짜 선의야. 단지 이미지에 좋겠다 싶어서 성금 냈던 나하고는 다른······ 이수처럼 내적으로 고뇌하는 사람하고도 다른······ 완벽한 선의. 저 마음이야말로 진아 누나가 가진 최고의 무기겠지.’
이찬 자신의 무기는 완벽에 가까운 천재성이다.
보이는 모든 것을 정보로 만들고 신체를 통제함으로써 그것을 재현하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도플갱어. 그렇기에 수천만 관중을 감탄시키며 2004년의 배우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천재성은 아닐 터였다.
이찬에 비해 더딜 뿐, 고작 17세에 청룡상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명진아 역시 천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존재.
분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역의 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완성하는 그녀는, 연기대상의 소년에게 있어서 오히려 부러운 인간이었다.
‘그림자 하나 없이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 그건 내가 평생 갖지 못할지도 모르는 마음이야. 하지만 이수를 완성한다면······ 그 배역과 내가 완전히 같아진다면, 조금쯤은 나아지겠지. 나도 기부 따위 허울 좋은 선행을 하면서 순수한 행복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그렇게 작은 소망을 떠올리다가, 소년은 다시금 소녀가 궁금해졌다.
‘그 선의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나와는 전혀 다르게 좋은 사람들만 가득한 성장기를 보내서, 그래서 타인에게도 좋은 마음만을 가질 수 있게 된 걸까?’
명진아는 막 서랍장을 열다가 팬티들을 발견하고 얼굴이 빨개진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 입을 뻐끔거리며 사과를 건넨다.
“미, 미안해 찬아. 몰랐어. 아······ 어디······ 어디는 보면 안 되는 건지, 알려주지 않을래?”
“봐도 상관없어.”
“아, 안 돼. 그건······ 부끄러워.”
“난 안 부끄러워.”
“내가 부끄럽단 말이야, 바보야.”
“누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를 느낀 건지, 소녀는 놀란 토끼 눈으로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어······ 뭔데? 바자회에 궁금한 거 있어?”
“바자회 말고 누나에 대해서.”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서랍장 쪽으로 걸어가 명진아의 한 발 앞에 섰다.
눈높이는 맞지 않다.
17세를 맞이해 마침내 190에 도달한 이찬의 건장한 몸은, 소녀가 까치발을 들어야 간신히 목덜미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그러나 소년이 상체를 조금 숙이자 눈이 같은 높이에 놓일 수 있었다.
“누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야?”
“내, 우리 부모님?”
“어. 궁금하네. 어떤 분들이 이런 딸을 키우셨나.”
“어, 엄마아빠는······ 잘 모르는데······.”
“모르다니. 누나가 모르면 누가 알아? 느낀 대로 말해봐.”
“느낀 대로······는 잘 몰라. 들은 대로는, 말해줄 수 있지만.”
괴상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결에 세트장에서 뛰고 구르며 생겨난 미미한 땀 냄새가 명진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물러나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눈을 꼭 감아봤지만, 체취는 오히려 더욱 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찬이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아. 설마. 누나, 부모님이 안 계셔?”
“으, 응. 나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할머니랑 살았는데······.”
“그러니까 누나는 부모님한테 오냐오냐 우리 공주님 하면서 떠받들어졌던 덕분에 그렇게 착해진 게 아니야?”
“응?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야 나랑 너무 반대니까. 그렇게 된 데에는 공교육이나 사회문화적 영향보다 밥상머리교육의 작용이 크지 않았을까 했던 건데. 아, 근데 미안. 이거 미안한 질문이었구나.”
질문의 발생보다 한참 뒤에 건네진 사과.
이수에 몰입해 있는 게 아니더라도 당연했을 사과가 그토록 늦어진 건, 기존의 생각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인지부조화 탓이었다.
‘맙소사. 이게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나랑 별로 다를 게 없는 처지였잖아? 부모님도 없이 두 자매가 할머니랑 살아왔으면서, 그런 불행 속에서, 남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소녀로 자라났다는 건데. 그게 그럴 수가 있는 건가? 말이 돼? 세상을 원망하고 행복한 가정을 저주해도 모자란 판국인데?’
이찬 본인은 그랬다.
비록 사망과 유아 유기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가족이 없는 성장기 속에서 소년은 행복한 가정들을 질시하고 미워해왔다.
그렇기에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본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꼬맹이였기에.
그렇지만 명진아는, 복잡한 심경 탓에 붉어진 이찬의 눈을 마주한 채, 말갛게 웃으면서 답했다.
“안 미안해도 돼, 찬아. 나 괜찮아. 그냥, 전 회사에서 부모님 돌아가신 거는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해서 비밀로 하고 있었던 거야. 너한테는 숨기고 싶지 않았어. 그냥······ 나는, 좋아. 할머니랑 사는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지금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돼서 좋은 바자회도 할 수 있게 됐잖아? 그러니까 하나도 불행한 거 아니야. 그렇다고 막······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착한데.”
“아니라니까? 나도, 막, 나쁜 생각 할 때 있거든?”
“어떤 생각? 눈앞의 남자한테 뽀뽀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
그 질문에, 명진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당황한 탓에. 또, 직후에 입술이 덮여버린 탓에.
< 50장 - 소녀 명진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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