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3화 (143/250)

< 50장 - 소녀 명진아 (3.) >

명진혜의 동생 명진아는, 외로움에 익숙한 아이였다.

부모님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할머니 아래에서 언니와 함께 지냈지만, 언니는 집안의 희망이기에 각종 학원에 다녀야 했고, 할머니는 그 학원비를 벌기 위해 밤늦게까지 시장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기에 홀로 집에서 머물며 소녀는 연기에 빠져들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명진혜가 서울대학교 사범대에 진학하게 됐을 때는, 할머니와 작별해 언니와 함께 상경했다.

그때부터는 조금 외로움이 덜했다. 대학생이 된 언니가 일찍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 많아졌기에.

그렇지만 곧 명진아 본인이 길거리캐스팅을 당했다.

어려운 집안에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시작한 연기가 생각보다 잘 풀려, 언니와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연기 자체는 마치 꼭 맞는 운동화처럼 마음에 들었다.

다른 아역들은 지겹다고 하는 대본 분석이 세상 제일 재밌게 느껴졌고, 카메라 앞에 섰을 때도 공포보다는 천진한 흥미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명진아는 ‘아역의 명가’ 금양기획 모든 아역들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유망주가 되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들이 무섭기도 했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고독과 인내. 촬영을 위해 홀로 대기하는 시간들은 불가피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어린 유망주는, 때때로 차 안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찬이란 소년을 처음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년이 외로움을 지워버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향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는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정교하게 자신의 배역을 구현하는 그 모습에 자극받아, 처음으로 외로움조차 잊을 만큼 연기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찬은 그녀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녀보다 두 살 어린 소년은, 사실 남자라고 인식하기도 어려워야 마땅했다. 그보다 더 나이 많고 멋진 하이틴스타들과도 이미 작업을 해봤던 명진아였기에.

그렇지만 어째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찬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배역의 감정 이상으로 소년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명진아는 아주 색다른 외로움 속에 살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운 사이가 됐다는 건 즐거운 일. 이후로 소년과 통화할 때마다 마음이 핑크빛으로 물들곤 했다.

<어사>에서 그와 커플연기를 펼치게 됐을 때는, 하늘을 날 것 같다는 관용어가 정말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찬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정신혜가 이후 그에게 얼마나 배척당했는지를 잘 아는 명진아이기에,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소년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시간들은 가슴 벅찬 외로움의 빛깔이었다.

그 슬프고 찬란한 나날들 속에서, 명진아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찬이 숨겨왔던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있을 것이라고는.

포개졌던 붉은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무의미한 생활연기를 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아······.”

“키스하고 싶다는 나쁜 생각, 하고 있었지?”

“아······.”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

“어······.”

“오래 좋아해줘서 고마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응?”

“누나나 나나, 연애를 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아니잖아.”

그리고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게 하나 더.

소녀는, 소년이 기습 키스를 할 경우에 대해서는 떠올려본 적이 있었다. 꿈같은 희망을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하지만 그 직후에 이토록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이찬이란, 도저히 상상해볼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나이가 너무 어정쩡해. 예전처럼 아예 어렸으면 걱정할 게 없었을 거고, 서로 성인이라면 비밀연애도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우린 하이틴스타야. 매니저 없인 돌아다니기 힘들고, 대중은 우리한테 성숙한 순수를 강요하고 있어.”

“아······.”

“그러니까 공개연애도 비밀연애도 곤란한 부분인 거. 공개할 경우엔 일단 위약금부터 물어야 될 거고, 숨기고 만난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들키게 되겠지.”

여전히 얼굴은 가깝다. 소년은 굽힌 허리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코앞에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채,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저기······ 안 들키게, 노력하면?”

“안 들킬 리가 있나. 나는 쌍천만의 배우, 누나는 국민여동생. 우리한테 파파라치가 한두 명 붙을 것 같아? 지금 누나 우리 집에 와 있는 것도 다 체크되고 있을 거야. 그게 기사로 안 나가는 건, 내가 원래 다른 배우들 자주 집에 불러들인 전력이 있어서 그런 거고. 그렇지만 꼬리가 길면 밟힐 거야.”

“그럼, 집에는 안 오고, 회사에서······.”

“회사는 더 위험해. 사무실 이전하면서 새 직원들 잔뜩 뽑을 거란 얘기 못 들었어?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누군가는 눈치를 채고 소문을 내겠지.”

합당한 말이다. 명진아는 제대로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다음 말은 아주 바보 같은 소리가 됐다.

“그냥, 따로 안 만나면? 그러면 안 들킬 텐데······.”

“그럴 거면 연애를 왜 해? 서로 아무 이득도 안 되는 족쇄가 될 텐데. 지금 이 관계랑 다를 게 없어. 누나가 나 좋아하고, 내가 누나 좋아하고, 그걸 서로 알고는 있지만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 참아주는 사이. 그러다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마음이 바뀌면, 그때는 자유롭게 다른 연애도 하면 돼.”

“······바람둥이.”

“그 말 듣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우린 안 돼. 적어도 지금은.”

“그럴 거면, 키스는 왜 했어······?”

“선물. 내가 태어나서 처음 사랑하게 된 누나한테, 연기나 강제가 아니라 내 의지로 하는 첫키스를 주고 싶었어.”

사귀지 않는 사이의 키스가 선물이 될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분분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진아는 그 말에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다.

‘정말 행복했지······. 따뜻하고, 보드랍고, 진심으로 날 위한 거라고 느껴졌어. 그러니까······ 뒤에 이어진 말들만 아니었으면, 지금도 무척 행복했을 텐데. 이렇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생각 끝에 살짝 분해져서, 울상을 지으며 또 물었다.

“왜 모른 척한 거야? 그동안······ 알고 있었으면······ 내가, 몇 년 동안이나, 계속 얼마나 참았는데······.”

“처음엔 진짜 몰랐어. 누나 연기 진짜 잘하더라. <어사> 찍을 때 처음 알았지. 하지만 난 그때 누나 여자로 안 봤고.”

“그럼, 너는? 넌······ 언제부터였는데?”

“<꼬마신부> 까메오로 나갔을 때. 걱정 마, 확실히 첫사랑이야. 나중에 이찬의 첫사랑이었다고 자랑하고 다녀도 좋아.”

“······그런 거 말구, 언제쯤 해도 되는 건데? 연애······.”

“공개연애라면 나 서른 되고 나서. 비밀연애라면 내가 스물 되고 면허 따고 나서.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 있어?”

명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상 속의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하려 애쓰고 있을 뿐.

그렇지만 그 얼굴은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어서, 이찬은 억지로 눈살을 몹시 찌푸려야 했다.

‘아, 젠장. 심장아, 자제해라. 이러다 들키겠어. 그러면 안 돼. 어린 날의 격정적인 연애로 이 누나 인생을 망칠 수 없어. 여고생 스타의 열애설이란 건 지나치게 자극적이야. 거기다 난······ 이해하기 어렵지만, 지금 한국에서 가장 소녀팬이 많은 스타. 나랑 사귀다가 들키면 이 누나는 오랫동안 각종 가십과 악플에 시달려야 할 거야.’

시청률 58%의 <연애의 조건>에서 압도적인 교복 핏을 과시하며 로맨스 연기를 펼치고, 1231만 관객의 <고등형사>에선 히어로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액션을 펼친 10대 배우.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감은 아이돌 이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돌들의 열애설 이후에 상대 여자가 너덜너덜해진다는 건,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흔한 일.

이찬 본인을 위해서도 명진아를 위해서도 연애는 불가한 일이 된 셈이었다.

‘사랑은 피해야 할 두려움······ 노랫말이 그대로 우리 관계가 됐네. 참 웃긴 노릇이야. 내가 스무 살 될 때까진 아직도 3년이나 남았고······ 이 누나 감정은 그 전에 흐릿해지겠지. 아무리 일편단심이라도, 8년은 너무 길잖아.’

이제껏 5년, 그렇지만 앞으로 또 3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인물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눈앞의 새하얀 소녀 역시, 이내 변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이찬은 진한 비애를 느꼈다.

‘······슬퍼하지 말자. 잘된 거야. 어차피 사람은 변해. 평생 동안 나만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어. 그걸 유지시키려면 똑똑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난 아직도 한참 멀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연기에 매진할 때야. 배신당할까 벌벌 떨면서 연애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연인들을 연기하면서 사랑에 대해 알아가야 할 때야.’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자신의 첫사랑을 내보냈다.

열심히 야식 만들던 염수진이 당황해서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 첫키스의 밤은 서로에게 외로움을 남긴 채 저물었다.

*

여의도공원에서 대대적으로 개최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위촉식에는 3천 명의 시민이 몰렸다.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다는 점과, 이찬과 명진아가 화제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듀엣 공연을 펼친다는 예고가 주효했다.

그렇지만 막상 그 공연을 본 시민들은 종종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좀 밋밋한데. 영화에서 봤을 때보다 좀······.”

“영화는 사운드 만졌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아니, 노래는 지금이 더 잘하는 것 같은데? 둘 다 훨 좋아. 그냥······ 이게······ 영혼이 없는 느낌? 서로 쳐다보질 않네.”

아름다운 사랑노래를 시선을 피한 채로 부른 친선대사들은, 이후 바자회를 위해 가져온 애장품들을 직접 소개하는 약식의 토크쇼를 진행했다.

그 진행을 위한 MC로서 톱 개그맨 한재성이 참여해 시민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바자회가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5천 명의 시민이 여의도공원에 운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이찬과 명진아를 비롯해 무수한 연예계 동료들의 애장품을 판매하고 또 자율성금을 모금한 결과, 총액 1억 5천만 원의 성금과 함께 2천 명의 정기후원자가 탄생했다.

단일 행사로는 전례가 없는 압도적 성과. 그렇기에 자연히 각종 스포츠지에서 그 전개를 조명했다.

하지만 익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건 유니세프 바자회 소식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어두운 뉴스가 터진 탓이었다.

“「광고모델 DB 구축을 위한 사외 전문가 심층 인터뷰 결과 보고서」······ 개새끼들. 이름은 참 그럴싸하네요.”

“이름이야 뭐, 대기업에서 추진한 건이니까. 대놓고 ‘연예인 X파일’ 하는 식으로 쓸 수는 없었겠지. 실제로도 광고모델 우선순위 매기려고 시작한 프로젝트 맞고.”

스포츠고려 연예부장 오정민의 설명을 들은 뒤, 취재기자 이차원은 분노로 떨리는 손에 그 프린트를 쥐었다.

“부장님은, 이거 알고 계셨던 겁니까?”

“대충 여기저기서 들은 건 있었지. 우리 쪽에서 나간 정보도 좀 있어.”

“정보라고요? 정보? 아무 증거도 없어서 찌라시에나 어설프게 올라갔던 그 얘기들이, 정보라고요?”

“이 사차원 새끼, 또 지랄이네. 야, 내가 인마 니 부장이야. 이찬 단독기사로 칭찬 좀 해줬다고 이젠 맞먹으려 드냐?”

“······죄송합니다.”

“나라고 인마, 좋아서 해줬겠냐? 유일기획이야. 한국 최고 재벌가의 광고사에서 추진한 건이라고. 그걸 어떻게 반항을 해? 그냥 뜬소문들 정리해서 주곤 했지.”

“그중에 혹시, 찬이 얘기도 있었습니까?”

“지 담당이라고 챙기긴. 걔 얘기 많다. 앞쪽이니까 봐봐.”

눈에 불을 켜고 허겁지겁 페이지를 넘긴 이차원은, 곧 충격적인 보고서를 눈에 담게 되었다.

「 현재 위치 ★★★★★ : 대체불가 최정상 상업배우. 두 편의 천만영화와 58.2% 미니시리즈로 이미 자신을 입증함.

비전 ★★★★★ : 박무열 감독과 차기작 진행 중. 국내 최연소 칸 수상자가 될 가능성 有. 실패해도 이미지 제고될 것.

매력/재능 ★★★★★ : 연기력과 노래실력을 겸비. 성대모사 등 끼도 많으나 예능에 나가지 않아 희소성 高. 모델급 비율에 개성적인 외모.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의견 많음.

자기관리 ★★★★★ : 모범적 생활. 스케줄 없을 땐 집밖에 거의 나오지 않음. 동료 배우들을 초대해 연기 얘기 나누는 게 유일한 여가생활. 가족 정보 無. 엄격한 가풍으로 추정됨.

소문 : 안정록의 숨겨진 제자라고 함. 강정후 조혁수와는 형제 같은 사이. 신수영 임희재 천세영 등과 친하나 연애X. 」

페이지를 다 읽은 뒤, 이차원은 오정민 부장을 노려봤다.

“놀랐잖아요, 부장님! 다 좋은 말밖에 없구만.”

“당연하지, 이 새끼야. 부장검사님이 아끼시는 애를 두고 누가 이상한 소리 떠들었겠냐? 근데, 살짝 문제가 있긴 해.”

“문제라고요? 별 문제 없는 듯한데.”

“걔 말고, 명진아. 페이지 몇 개 넘겨봐.”

일곱 페이지쯤 뒤로 넘기자 명진아의 사진이 보였다.

「 현재 위치 ★★★★ : <꼬마신부> 센세이션, 남성팬 多. CF활동 늘려가며 10대 여성층 일부 안티 형성 중.

비전 ★★★★★ : 동안이지만 <어사> 통해 사극 및 성인배역 가능성 확인됨. 작품 잘 잡는다면 상승세 이어갈 듯.

매력/재능 ★★★★★ : 성인 연기자와 비교해도 톱클래스 연기력. 밝고 생명력 있는 이미지. 동안 외모도 가변성 有.

자기관리 ★★★★ : 착하고, 싹싹하고, 순수하고, 성실함. 꾸밈없이 최고의 인성이라 소문 자자. 단, 지나치게 완벽한 이미지 때문에 안티 대두 가능성 有. 알려지지 않은 기부천사. 유니세프 특별대표 위촉될 가능성 有. 」

거기까지는 별 문제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미 거행된 유니세프 친선대사 위촉까지 더해서, 이미지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 될 일은 없는 문건.

다만 마지막 몇 문장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 소문 : 양친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고사. <가을하늘> 이후로 이찬을 따라다녔다는 소문. <어사> 때 거절당한 듯. 」

이차원은 주먹을 움켜쥐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딴 말도 안 되는 소릴! 어떤 개새끼가 떠벌린 겁니까?”

“······내가 알려준 건 아닌데, 앞쪽은 사실이야. 아는 사람은 다 알아. 금양 쪽에서 나온 정보니까. 그러다보니까······ 위에 유니세프 건까지 해서 그 다음 문장 신빙성이 높아졌어. 문건이 워낙 널리 퍼졌다보니까······ 곤란하게 된 상황이지.”

분노와 염려 속에서, 이차원은 이찬의 마음을 생각했다.

< 50장 - 소녀 명진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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