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5화 (145/250)

< 51장 - 소녀 정신혜 (2) >

이찬과 정신혜의 기자회견은 익일의 오전에 잡혔다.

톱스타로서 화제의 중심에 선 소년과 병마로 오랫동안 방송에 출연하지 못한 소녀의 뜬금없는 합동 기자회견.

급한 일정 전파에도 불구하고, 회장에 몰려든 기자들의 수가 백을 넘었다.

그리고 정창영은 그들이 운집한 회견장 뒤쪽의 대기실에서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으······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찬아, 우리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너 정말 자신이 있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어차피 칸 가서 남우주연상만 따오면 자연스레 지워질 이슈예요. 이깟 거 껌이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영예를 쉽게도 입에 담는 소년은, 분명 그럴 만한 실력을 갖고 있다. 칸의 인정을 받은 박무열과 조연식이 매일같이 그런 전망을 떠들고 있으니.

그렇지만 기획사의 대표로서 정창영은 쉽사리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게 실패하면? 네 연기도 작품도 이상하게 인정을 못 받아서 무관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칸에 초청도 못 받으면? 그렇게 되면 너까지 엄청 손해를 보게 될 거다.”

“괜한 걱정이네요. 믿고 지켜봐주시죠? 어차피 내 회산데.”

“그거야 그렇지만······.”

눈살을 찌푸리며 또 머리를 부여잡던 정창영은, 곧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긴 머리카락들을 보고 기겁해야 했다.

그 소란 뒤에야 인터뷰이들이 기자회견장에 나섰다.

“안녕하세요, 이찬입니다. 이렇게 많이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지금 인터넷에 퍼져 있는 찌라시에 대한 건이에요. 저랑 신혜 누나 입장에선 그게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그거, 명진아 양 X파일에 대한 건가요?”

“과거에 고백 받은 사실이 없다는 얘깁니까?”

“대중의 의심이 쉽게 수그러들진 않을 텐데요?”

기자들의 표정은 달뜬 열기를 띠고 있다. 이찬에게서 뭐 한 마디라도 자극적인 말을 캐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

그야말로 전형적인 똥파리 기자들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소년에게는 그 태도가 오히려 반가웠다.

‘똥파리에게는 똥파리 나름의 능력이 있지. 저 사람들은 대중이 열광할 만한 방식으로 프레임을 짜는 데 일가견이 있어. 소재가 좋을 때에 한정된 얘기긴 하지만······ 이번 건은 그야말로 다시없을 빅 이슈지.’

생각하던 와중, TV와 인터넷이 끊긴 방에서 울고 있을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아 누나는······ 이 얘기 듣고 나면 좀 슬퍼하겠지. 자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감수했다고 느낄 테니까. 하지만 잠깐일 뿐이야. 결과적으로 난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아. 세계 최고의 천재배우한텐 이깟 거 일시적인 바람일 뿐이니까. 그리고 다른 방법이 없어. 소문이란 검은 늪은, 지독하게도 찐득하고 무서울 정도로 깊단 말이야.’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소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수긍한 척하면서도 속으로 ‘혹시 또 모르지’ 하고 생각하는 인간들. 대합실에서 스포츠지를 읽으며 떠들어대던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 마음의 기작을 이미 질리도록 겪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게 대중의 습성을 대변하는 문장이야. 일단 믿고 보는 인간이 많으니까 확인도 안 된 찌라시들이 판을 치고, 증거 하나 없는 헛소리 지껄여놓은 스포츠지들의 판매가 신장되는 거지. 그 프레임을 뒤엎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 작은 의심도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프레임을 새로 짤 필요가 있어. 쉬운 일은 아니지. 오직 내부자만이 할 수 있는 일.’

이찬은 차분한 눈으로 옆자리를 돌아봤다.

단발의 정신혜는, 예전과는 분명 무척 달라진 모습이었다. 표독스럽고 예민했던 미세표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명진아에 대한 염려로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거기에 이찬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더해지긴 했지만.

‘······아니지. 크게 달라진 건 아닌가? 그때도 그랬어. 마음속으로 날 저주했던 것 때문에 내가 가족을 잃은 게 아닌가 괴로워하고, 결국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꺼내면서 사과했었지.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단지······ 그 위를 나쁜 생각들이 덮고 있었기에 악녀로 보였던 것뿐.’

나 역시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 역시 깊은 내면에는 인간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단지 지나치게 뛰어난 관찰력과 불행한 성장환경이 먼지가 되어 그 위를 까맣게 뒤덮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먼지떨이가 필요하겠어. 이번 기자회견이 괜찮은 먼지떨이가 돼주지 않을까? 이타적인 이찬으로 거듭나는 첫걸음······.’

2초 정도의 시간 동안 거기까지 생각한 소년은, 마침내 테이블 위에 놓인 정신혜의 손을 붙잡았다.

더없이 따뜻하고 정다운 표정으로.

“저희, 사귀고 있습니다.”

숨 들이마시는 소리만이 장내를 뒤덮었다.

그 정적 가운데, 이찬은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가을하늘> 촬영 중에 만나기 시작했죠. 지금껏 속이고 있었던 점 팬들께는 정말 죄송해요. 사실을 밝히고도 싶었지만, 저는 몰라도 신혜 누나는 학생이었잖아요? 열애 중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학교생활이 불편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비밀연애를 하게 됐어요. 진아 누나는 그 오작교 역할을 해줬을 뿐이에요. 편지 대신 전달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연막을 쳐줬죠.”

거기까지 말한 뒤부터 노트북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맹렬해졌다.

남들보다 한 발 빨리 기사를 내야 한다는 특종 사명감이, 잠깐 날아갔던 이성을 되찾아준 모양이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런 정황을 누군가가 이상하게 오해해서 퍼뜨린 거죠. 찌라시라는 게 정말 이렇게 황당한 거예요. 연예인 X파일? 이름이 잘못됐어요. X파일이 아니라 그냥 뜬소문 모음이죠. 그런 걸 쉽게 믿는 사람들 때문에 고마운 누나한테 폐가 될까봐, 이렇게 사실을 고백하기 위해 나섰어요.”

임팩트를 위해서 잠깐 텀을 둔 뒤, 기자들이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께 제가 감히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날 수 있어요. 이번 찌라시는 특히 그래요. 광고모델의 스캔들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잃는 일을 방지하고자, 아주 말도 안 되는 헛소문까지도 다 기재해둔 문건이란 말이에요. 적어도 그중 반 이상이 오해 속에서 작성됐을 겁니다. 그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가짜에 현혹돼서 진짜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길······ 이 자리를 빌어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잠깐만요! 이찬 군! 질문 하나만요!”

“정신혜 양! 지금 심정을 좀!”

기자들이 우당탕 일어서며 마구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찬은 정신혜의 손을 잡아끌어 곧장 후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고용된 경호팀이 쫓아오는 기자들을 틀어막았다.

그 소란 속에서, 정신혜는 이찬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너야 열애설 위약금은 안 걸려 있었다고 해도······ 재계약은 분명히 불발될 텐데.”

“불발되든 말든 푼돈인데요.”

“푸, 푼돈? 야, 너 지금 열 개 넘게 나오고 있지 않아?”

“그래봤자 푼돈이라니까.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봐야죠.”

<고등형사> 직접투자를 통해 최소 100억의 수익을 올린 이찬이다. 연간 10억 안팎의 CF 개런티 따위에 얽매일 위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거금이 고스란히 하늘기획에 재투자된 상황.

소속 간판배우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서라도 상황을 뒤바꿔야만 했던 게 어린 투자자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찬보다 조금 못할 뿐, 명진아 역시 <꼬마신부> 이후 아홉 편의 CF로 수익을 내고 있는 톱스타.

이쪽을 잃는 대신 그쪽을 지켰다고 하면 큰 손해는 아닌 셈이었다.

무엇보다, 소년은 그 푼돈조차 잃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CF 계약들 거의 다 하반기에 만료돼요. 그 전에 다른 모델 써서 새 광고 찍는 회사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반신반의하면서 내 CF 그냥 쓰겠죠. 국면이 아주 나빠지진 않을 거거든. 거짓말하다 들킨 것도 아니고 동료배우 지켜주기 위해서 공개연애 기자회견을 한 상황이니까. 그런 와중에 작품 완성해서 칸에 가는 거죠. 거기서 남우주연상만 딱 따내면, 그깟 공개연애가 대수야? 국민영웅이 돼서 소녀팬들 대신에 청년층이 날 숭앙하기 시작할 텐데?”

“으아, 숭앙이래. 애늙은이야 완전.”

“뭐가 됐든. 그렇게 되면 어떤 광고주든 재계약 못 잡아서 안달이 날 거라고요. 결과적으로 노 페인 예스 게인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당장 촬영장 가서 특급연기를 해야 돼요. 괜한 일에 시간을 너무 뺏겼어.”

“참 이상하게 동기부여를 하시네.”

마침내 건물을 빠져나와 대기 중이던 염수진의 차에 올라탄 뒤, 정신혜는 좀 더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사회적인 반향과 무관한 이야기였다.

“진아 언니는······ 괜찮을까? 마음이 말이야.”

“뭔 마음요?”

“너 아직도 몰라? 그 언니 너 좋아하잖아?”

“그거야 알죠. 근데 괜찮아요. 나도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으아악?!”

기겁한 소녀를 보며 픽 웃은 소년은, 다음 순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해요. 누나한텐 스무 살 전까지 연기만 할 거라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감정이 생겨버렸어. 그래도 사귀지는 않아요. 위험하다는 거 잘 아니까, 잘 얘기해서 합의했어요.”

“야, 이 씨······.”

“좋아하는 여자 지키려고 연막으로 이용했다는 죄책감은 갖지 않을게요. 누나한테도 어차피 이득이잖아? CF 잔뜩 걸려 있는 저쪽이랑 다르게 이제 다시 활동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찬의 여자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재기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거야 아는데······ 아 씨. 솔직히 좀 기대했단 말이야.”

“뭐, 나랑 연애하는 거요?”

“그래. 씨이. 그냥 다 위장이었단 말이야? 나한테는 하나도 관심 없고, 진아 언니 때문에 한 거라고? 아, 열 받아!”

잔뜩 울화가 치민 듯 으르렁대는 정신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처럼 독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상처 입은 여우처럼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관조하며, 이찬은 소소한 위로를 건넸다.

“우리 회사로 들어와요. 칸 갔다 오면 신인들 잔뜩 뽑아서 키울 거야, 그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 한둘 있을 거예요.”

“아, 내가 뭐 연애 못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보다 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있겠냐?”

“물론 나 같은 남자 찾기가 쉽진 않겠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높을 거라는 얘기죠. 실력 좋고 외모도 괜찮은 애들로 많이 뽑을 거니까.”

소녀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 따위 발생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각본을 꺼내들었다.

‘이 누나 마음은 순수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동경과 고마움과 소유욕이 뒤섞인 느낌이랄까. 진짜 첫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나하고는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진 연막만 치다가 타이밍 좋게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졌다고 알리면 되겠지. 아, 이렇게 간단한 것을. X파일이든 뭐든 이 완벽한 천재 이찬한테 걸리면 한주먹이지.’

치기 어린 생각을 해보다가, 그는 곧 각본 속 이수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잠시 뒤에는 표정을 팍 구겼다.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을 염탐하는 데 여념이 없던 염수진에게, 이찬의 험한 목소리가 날아갔다.

“아, 출발 안 해요? 이 누나 내려주고 가려면 바쁘거든?”

“오, 오케이! 레디, 스타트!”

*

연예인 X파일 유출 사건은 그날 이후 새 국면을 맞이했다.

두 10대 톱스타 사이의 염문으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명진아 건이, 이찬과 정신혜의 열애 공표라는 뜻밖의 진상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 의혹 없는 ‘진실’이 X파일 문건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로써 다른 스타들의 소문까지 신뢰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서 강정후가 직접 촬영장을 찾아와 이찬에게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고맙다. 뻥 쳐서 프레임을 바꾸다니, 아주 영리했어.”

“뻥은 둘째 치고, 선배가 왜 고마운데요?”

“우리 회사 애들도 걸린 게 있었으니까.”

“이소연 아줌마 스폰 건이요? 그거야 어차피 JT 쪽에서 알아서 묻었을 텐데. 근데 궁금하긴 하네요. 그거 사실이죠?”

“몰라. 내 알 바도 아니고.”

강정후는 그렇게 콧방귀를 뀌고 떠나갔지만, 소년은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스폰 같은 거 없이도 잘나가는 톱스타가 됐지만, 아직까지도 JT그룹하고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거야. 이젠 타의가 아니라 스스로 연락해서 만나고 있겠지. 나중에 결혼까지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아 누나 루머 묻어주려다가 이것저것 덮어주게 됐네. 좀 짜증나는데······ 아니, 인간애를 생각하자. 나야 그 사람들 전부 대중의 포화 속에 공공의 적이 됐으면 좋겠지만, 이수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이찬 본인의 사회적 처지에 대해 말하자면, 매니저들의 큰 염려와 달리, 공개연애로 인한 이미지의 타격은 크지 않았다.

이탈이 예상됐던 소녀팬들조차 그런 거라면 이해한다는 식으로 글을 올리곤 했던 것.

정신혜의 학교생활을 위해 사실을 숨겼던 것과 명진아의 루머를 해소하기 위해 진실을 고백한 선의가 일반대중의 호감을 산 덕분으로 보였다.

거기에 더해, 하늘기획과 약식 계약을 체결한 정신혜는 뜻밖의 트렌드 스타로 떠올랐다.

이찬과 함께한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성숙한 외모가 화제가 된 까닭.

성형수술을 받은 것 같지도 않은데 과거의 기억보다 한참 더 예쁜 외모로 거듭난 여배우의 이름이, 아역 때보다 외모가 향상된 배우의 대명사처럼 전파된 것이다.

그렇기에 ‘신혜하다’라는 신조어가 다른 아역들에게도 쓰이기 시작했다.

‘얘도 신혜했네’ 또는 ‘얘도 신혜했으면 좋겠다’ 따위로.

그런 며칠 사이의 변화에 명진아는 무척 슬퍼했다.

결과적으로 타격이 적었다곤 하나, 첫사랑 소년이 자신으로 인해 괜한 위험을 무릅쓰게 된 셈이기에.

그리고 그 결과로, 이찬과 정신혜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10대 커플로 공인되었기에.

‘······앞으로 평생 동안 신혜 이야기가 찬이를 따라다니겠지. 우리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사귀게 되고, 기쁘게도 결혼까지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랑 신혜를 엮어서 삼각관계처럼 바라볼 거야.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

천재 이찬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비애의 미래였다.

< 51장 - 소녀 정신혜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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