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6화 (146/250)

< 51장 - 소녀 정신혜 (3.) >

크랭크업을 향해 달려가는 <친절한 살인자>의 스케줄은, 이제 순전히 이찬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각종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한동안 소년이 촬영에 전념하지 못한 탓.

“야, 인터뷰가 깔끔한데? 어떻게 신혜 얘기가 하나도 없어.”

박무열이 짬을 내 읽고 있는 영화지 ‘씨네맥’ 역시 그 인터뷰 라인업 중 하나였다. 순수하게 <친절한 살인자>에 대한 홍보와 이찬의 빛나는 컨셉샷 등이 일곱 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어 있었다.

촬영현장의 소년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었어요. 합동인터뷰 계속 제안하다가 안 되겠는지 홍보 인터뷰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래놓고도 인터뷰 시작하고 나서 자꾸 그쪽 얘기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말이야. 기자들이 집요하게 달려들면 무난하게 밀어내는 게 쉽지 않은데.”

“제가 그런 걸 잘하거든요.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는 거.”

“흠······ 좋은 장기인데?”

상대의 마음속을 낱낱이 파헤칠 수 있다는 건 큰 장기.

그렇기에 이찬은 기자들과 크게 척을 지지 않으면서 열애에 대한 관심을 작품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루머 속 여배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열애를 공개한 이찬에게 대중은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그 배우는 행사나 예능은커녕 인터뷰도 작품 얘기가 아니면 받질 않는 상황.

그러니 6월 개봉 예정인 신작 영화 쪽에 기대감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오늘 씬들도 잘 부탁한다. 벌써부터 기대되네, 어떤 연기가 나올지.”

“직접 쓰신 각본인데 기대하실 건 뭐예요?”

“늘 배우가 연기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쓰지만 실제는 언제나 다르거든.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감탄할 때도 있고. 이번 영화에서는 늘 후자였어.”

“오늘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마음껏 기대하고 있으마. 아, 그리고 정후 영화가 내일 시사회지? 내 몫까지 다 응원해주고 오렴. 여기서 조연들 씬 착실하게 찍고 있을 테니까.”

“네······.”

말꼬리를 늘이며, 소년은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 바쁜 와중에 VIP시사회 따위나 초대하고 말이야. 내 유명세로 화제 좀 끌어보겠다는 심산이겠지.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선배라니까. 그깟 예술영화야 조용히 자기들끼리 시사회 하면 될 텐데······. 음······ 하지만 용서하자. 멀리서 불러주니 참 기뻐. 정말로 고맙고 기쁘고 그래.’

억지스럽게 배역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렵지는 않다.

그렇게 이찬은 다시금 이수로 돌아갔다.

*

[<고등형사>의 이찬 군과, 얼마 전 공개연애를 알린 배우 연인이죠? 정신혜 양이 함께 입장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의 플래시세례 속에서 극장으로 들어서며, 이찬은 정신혜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리포터들의 마이크를 손에 들고는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영화,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강정후 선배님이 어떤 연기변신을 보여주실지 빨리 보고 싶네요.”

“저도 이 영화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어요.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돼서 참 기뻐요.”

이찬 쪽은 어디까지나 예의상 던진 멘트였지만, 정신혜는 의외로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포토월 뒤로 향하며 소년은 귓속말로 물었다.

“진짜? 이 영화 기대하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트레일러부터 확 빨아들이던데? 넌 안 그랬어?”

“저야 다른 거 신경 쓸 틈이 없어서요.”

“정말? 그렇게까지 집중하고 있는 거야? 신기하네. 근데 영화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몇몇 씬들만 본 거지만, 정말······ 참 좋더라. 엄청 기대돼.”

평상시에도 이수로서 존재하기 위해 영화광 특유의 트레일러 시청도 하지 않고 있던 이찬이지만, 그 얘기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게 진지한데? 이 누나가 휴머니즘 스토리에 감동할 만한 스타일은 아닌데. 거기다 트레일러만 보고 설레발을 칠 만큼 업계에 무지한 것도 아니고. 대체 어떤 면에서 기대를 품게 된 걸까?’

영화 관계자들 역시도 소년소녀의 열애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년소녀는 상영관 안에서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특히 임호준은 입구까지 나와서 이찬을 끌어안았다.

“너희, 축하한다. 대중들 반응도 참 좋더라. 어린 나이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 오랫동안 서로를 아끼면서 예쁜 연애를 하라고. 알겠지?”

“그야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예쁜 연애를 할 마음이 전혀 없는 소년이지만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에 비해 속마음을 잘 꾸미지 못하는 소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금방 헤어지면 안 돼.”

“당장 헤어진다 해도 5년 가까이 사귄 셈인데요?”

“으······ 그래도 그게 좀 마음이 그래. 나 자리 잡을 때까진 좀 유지해주라.”

“그거야 물론이죠. 그렇게까지 금방은 아닐 거예요.”

소년의 계획으로는 5월쯤으로 예정된 헤어짐.

정신혜가 캐스팅된 드라마가 방영을 끝마칠 시기인 동시에, 이찬이 남우주연상을 목표로 칸에 방문할 때였다.

그 타이밍이라면 결별이 화제가 되기도 전에 새로운 이슈로 세상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 생각이 헝클어진 건, 마침내 배우들이 입장해 인사하고 영화의 상영이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자폐증 장애인 ‘성호’ 역을 맡은 강정후가 등장한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평소의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신한 톱스타는, 일견하기에도 이상했다. 눈동자는 흐릿하고 표정은 어색하고 손동작 하나하나가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바로 그렇기에 그는 강정후가 아닌 성호였다.

[얼룩말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및 북케냐 지역의 초원 지대에 사는 기제목 말과의 동물이다. 말과의 동물은 긴 다리의 굽이 덮인 발가락 하나를 가지는 단제 동물이며······]

듣는 사람 없는 혼잣말을 쉼 없이 중얼거리는 배우는, 어떻게 봐도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처음으로 이찬의 감탄을 불렀다.

‘완벽해······ 저건 정말 완벽해. 연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캐릭터를 잘 분석하고 체화한 수준을 넘어서, 원래 자폐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아. 저건······ 저 런 식의 변신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강정후와의 대화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일부 거두게 된 소년이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멋지지 않은 배역을 자청한 그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목도하게 된 성호라는 배역은 그 생각들이 스스로 부끄러워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상은 소년만의 것이 아니었다.

연기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 시사회장의 관계자들 모두가 강정후 같지 않은 강정후에게 빠져들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며 성호가 받는 시선들과 모친의 고난에 포커스가 맞춰졌을 때에는, 사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찬의 옆에 앉은 정신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 누나는······ 감수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겪어보지 못한 일에 잘 공감하는 타입은 아니야. 그래서 <가을하늘> 때도 내가 일일이 감정 표현을 지적해줘야 했던 거. 그런데 지금은······ 장애인과 어머니의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어. 이게 연기야. 이게 인간에게 인간을 전달하는 연기의 묘미야. 이런 걸······ 강정후 선배가 해냈다는 거야. 이 영화는 분명히 화제가 될 거야.’

그렇다 해도, 가족영화다. 자폐증 장애인의 인간성공을 그린 <주룩주룩>이 천만영화가 되거나 칸 영화제에 초청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다만 대중과 평단에게 극찬을 받으며 이찬의 계획에 제동을 걸 여지는 충분했다.

‘이게 이 정도면, 이미 청룡에서 주연상을 따낸 내가 <고등형사>로 다른 주연상을 받기는 힘들지도 몰라. 그렇다면······ 올해 백상이 5월 20일이고 칸의 폐막식은 5월 22일. 자칫하면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노리면서도 백상에서 강정후한테 밀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젠장. 저 인간은 왜 갑자기 또 저렇게 성장하고 난리야? 아, 안 돼. 지금 난 이수야. 질투하지 말자. 기뻐해주자.’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맨 앞줄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보다 일찍 도착해서 기대감을 표시했던 안정록의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이 두 눈에 담겼다.

‘안정록 아저씨······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 천재의 번뜩임만으로 연기해온 강정후 선배가 진짜 깊이 있는 연기자가 되기를 바라며, 보고 싶은데도 못 보고 있었을 거야. 그런 두 사람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잘된 일이야. 기쁜 일이고.’

상영이 끝난 뒤, 시사회장에는 칸을 방불케 하는 기립박수가 몰아쳤다.

그중 누구 하나도 남들이 하니까 손을 부딪치는 이는 없다. 오직 순수한 경탄과 감동을 담아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마음들이었다.

한참 뒤에 정한식 감독이 소리를 쳐서 사람들을 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그 소란 끝에 배우들과 인사하기 위해 내려가던 중, 이찬과 정신혜는 조혁수와 마주쳤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혁수 오빠, 진짜 오랜만이에요.”

“흠. <가을하늘> 꼬맹이들이 연인이 돼서 나타났구만.”

콧방귀를 뀌듯이 인사를 받은 조혁수는, 이내 이찬의 귀를 잡아끌며 으르렁댔다.

“너 이 자식, 진짜 사귀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든 말씀이네요.”

“네가 진짜 좋아하는 건 명진아지? 걔 루머 막아주겠다고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거 아냐. 이 자식아, 그게 무슨 멍청한 짓이야? 대중을 속이는 건 쉽지만, 그 속임수로 변화하는 건 대상만이 아니다. 네가 한 짓은 악수 중에서도 최악수였어.”

“······전혀 아니거든요? 다 깔끔하게 처리할 거니까 신경 끄시죠.”

대중은 쉽게 뜨거워진 만큼 쉽게 잊는다.

지금 두 사람의 이슈에 열광하고 있는 시민들은, 그 마음 그대로 칸의 남자 이찬에게 환호할 것이며, 그 시기 전후로 공개할 결별에는 크게 관심을 주지 않으리라.

그 결별조차 까마득히 잊힐 30세에 이찬과 명진아가 사귀게 되는 미래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조혁수가 단 한 가지 변수를 입에 담았다.

“다 깔끔하게? 전 국민이 네 첫사랑이 정신혜라고 믿게 된 상황의 어디가 어떻게 깔끔한 건데? 명진아 생각은 안 하냐? 진아 그 애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가을하늘> 촬영장에서부터니까, 벌써 5년이야.”

“······선배님도 알고 계셨어요?”

“내가 그걸 몰랐겠냐? 그냥 쉬쉬해줬을 뿐인 거······ 너, 설마 최근에 알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흠.”

“이, 머저리 같은 놈. 그러니 하는 짓이 이 모양이지. 드러나는 것만 생각하는 버릇 고쳐라. 강정후만도 못한 놈아.”

“그런 심한 말씀을. 됐고, 저희 내려가요.”

그렇게 조혁수를 지나쳐 배우들에게 다가가며, 이찬은 명진아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진아 누나가 박수 치고 좋아할 일까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이게 아니면 그 대단한 배우가 몇 년이나 작품을 놓치게 됐을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진아 누나 생활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건 머저리 같은 일이 맞긴 하지만, 이번 일은 아주 천재적인 해결이었다고.’

들을 사람 없는 변명을 되뇌며 소년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열애 사실 공표 이후로 통화할 때마다 느껴지던 명진아의 어색함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하며, 그는 환한 얼굴로 강정후에게 찬사를 건넸다.

*

마침내 북미에 개봉한 <고등형사>는 예상 이상의 반향을 끌었다.

오덕환이라는 생소한 감독과 이찬이라는 동양인 꼬마의 사실상 첫 번째 소개작.

그렇기에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은 채 대도시의 일부 극장에만 걸게 됐던 것인데, 작중의 롱테이크 집단 액션 씬이 뉴욕타임스에 대서특필되며 상당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덕분에 스크린 수가 100개 가까이 확대되며 북미 전역에 이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한국에서는 강정후의 <주룩주룩>이 고작 100개 정도의 개봉관으로 시작해 순식간에 300개관으로 번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매율이 종전 최고치를 경신했을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가 고평가됐다.

평론가들이고 관객들이고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는 데 주저함이 없으니, 강정후의 팬이 아니었던 이들조차 그 영화를 위해 극장을 찾게 되었다.

<친절한 살인자>의 크랭크업은 그런 와중에 진행됐다.

마침내 이찬이 ‘이수’와 작별하게 되는 날.

명진아의 미래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린 배우의 어린 연인으로 공인된 정신혜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잔뜩 사들고 청주까지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소녀 배우와 마주했다.

“진아 언니······ 안녕하셨어요?”

“응, 신혜야. 그 일, 정말 고마워.”

“고맙긴요. 제가 필요해서 한 일인데. 덕분에 제일 하고 싶었던 드라마도 단번에 캐스팅 따냈는걸요. 이번 작품 잘되면 영화에도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전태양 실장님이, 전 얼굴이 노안이라 성인역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대요.”

“노안은······. 예쁜 거지.”

어색한 대화와 어색한 웃음. 두 소녀는 그쯤에서 비밀얘기를 마치고 스탭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찬의 마지막 촬영을 관람했다.

‘신주원’이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오열한 뒤에, 다른 어린 양들에게 죄의 심판을 맡기는 열린 결말 씬을.

“그렇군요······. 당신은 안 되는 거군요. 당신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지만, 마치 사탄처럼 느껴져요. 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 되는데. 근데······ 그런데요, 너무 미워요.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날 용서해줘요. 당신의 죄를 사해줄 수 없는 날, 용서해줘요.”

“끄흐흐흐······ 야, 드디어 포기했구나? 크흐흐흐흐.”

“······갈게요.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코트를 걸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이수’의 뒤로, 마침내 실종된 딸들이 누구에게 살해됐는지 알게 된 유족들이 모여든다. 결박된 끈을 풀려 애쓰는 신주원을 향해서.

그 씬의 끝에, 정신혜가 명진아에게 물었다.

“언니는 괜찮아요? 이번 일······ 슬프셨을 것 같은데.”

“······슬프긴. 날 구해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잖아. 고마운 일에 슬픔을 느끼는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언니한테 용서를 받아서, 기뻐요.”

복잡한 마음들은 가벼운 대화에 묻혔다.

그리고 이찬과 조연식의 연기는 일곱 번의 테이크 끝에 세 개의 OK컷을 남겼다.

< 51장 - 소녀 정신혜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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