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7화 (147/250)

< 52장 - 거장 박무열 (1) >

<주룩주룩>의 흥행은 슬리퍼히트라는 말에 적합했다.

당초 톱스타 강정후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셀링포인트가 없던 영화. 그 캐스팅조차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원래 얘기되고 있던 신인 주우선이 더 이미지가 맞지 않았겠느냐며 혀 차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게 공개되자마자 충격적인 연기와 묵직한 스토리로 화제를 끌고 한 달 만에 500만 관객을 동원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인터넷상에 극찬이 올라오고 있다.

그렇기에 홍보사에서는 전체관람가 영화 최초로 600만과 700만을 돌파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중.

그에 발맞춰, 감독과 주연들, 거기에 까메오까지도 각종 미디어에 재차 나서게 됐다.

“야, 역시 그랬군요. 정말 촬영에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흥행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게 해서······ 자, 여기까지네요. 오늘 즐거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 여러분께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정후 씨부터?”

“네. 연예가보도 시청자 여러분, 저희 <주룩주룩>에 많은 관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시고 나서 ‘보통 사회’의 높은 벽에 대해 생각해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강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영화 자체의 흥행보다도 장애인 차별의 철폐와 사회적 인식의 제고를 바라는 마음은, 평상시의 이미지메이킹이 아닌 순수한 진심.

리포터 역시 그 마음을 절절하게 느낀 듯했다.

“와······ 참 생각도 깊으세요 참. 저도 다시 영화 보고 꼭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함께해주신, 세영 씨?”

“네! 까메오인 저까지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하고요, 오늘 인터뷰 잘 진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하는 천세영 되겠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간 뒤, 천세영은 매니저의 차 대신에 강정후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드디어 끝났네. 긴장돼 죽는 줄 알았어요.”

“그깟 인터뷰가 뭔 대수라고 긴장을 해.”

“전 연예가보도 처음 나오는 거였는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표정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였다고요.”

“괜한 걸 신경 썼네. 시청자들은 어차피 나만 볼 텐데.”

“아······ 부정할 수 없어서 아프네요. 이런 사람이란 걸 팬들도 알아야 하는데.”

“알면 뭐. 내가 가식 안 떤다고 인기가 떨어질 것 같아?”

“아마 아니겠죠. 억울해서 하는 말이에요.”

부루퉁하게 시선을 돌린 천세영은, 두 차량의 사이에 선 김순원 실장을 바라봤다.

그는 시계를 몇 차례 가리킨 뒤에 두 손으로 머리 위에 뿔 모양을 그려 보이고 있었다.

“······실장님이 늦지 않게 오라고 하시네요.”

“당연한 소리. 스케줄 꽉 차 있는 건 나라고.”

“걱정도 되시겠죠. 겨우 한 달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뭐, 스캔들? 우리 둘이? 걱정할 걸 걱정해야지. 톱스타인 나한테 네가 가당키나 한가?”

“와, 말 진짜 나쁘게 하시네요. 그러니까 더 걱정하시는 거죠. 혹시라도 와전되면 괴로워지는 건 저뿐일 테니까요.”

<주룩주룩>에 까메오로 출연하게 된 이후, 천세영은 시간이 맞을 때마다 강정후의 차에서 연기 레슨을 받곤 했다.

그 발단은 막말을 일삼는 톱스타 쪽의 제안.

그는 이찬의 친척이라 추정되는 천세영과 가까워지기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고 또 쪼갰다.

그리고 천세영이 그 제안을 수락한 것 역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첫 번째 스승인 안정록은 학사일정과 나라엔터 신인들의 교육으로 바쁘고, 두 번째 스승인 이찬은 자기 영화 찍느라고 정신없던 상황.

그러나 원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주목받은 상황에서 아무 트레이너나 불러다가 연기를 배우기는 어려웠다. 사정을 잘 알면서 입이 무거운 강정후가 적임자인 건 그런 까닭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외로 합이 잘 맞는 사제였다.

강정후는 거리낄 것 없는 상대가 된 천세영에게 자신의 높은 기준을 사정없이 강요했고, 눈치는 없지만 오기는 있는 제자는 그 눈에 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강정후는 원래의 목적을 일부 잊어버릴 정도로 레슨에 몰두하게 됐다.

‘이찬 놈에 대한 애정을 지워내려는 게 본래 목표였는데······ 그 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스스로 하면서 의미 없는 노력이 되고 말았단 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가르치는 건 꽤 즐거워.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한심한 재능이라서 그런 걸까.’

그 생각대로, 천세영의 재능은 일천하기 그지없었다.

가진 건 그저 빛나는 외모뿐. 아름다운 여배우는 천재 수준의 가르침 없이는 제대로 연기할 수 없는 둔재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이찬과의 경쟁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영화 크랭크업한 이후로 그 녀석이 다시 직접 가르치고 있는 박준호나 김성대보다, 내가 가르치는 천세영이 더 많은 성장을 한다면? 그건 꽤 즐거울 것 같아. 경쟁심 따위는 버리자고 생각했지만······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서 싸우는 느낌은 좀 달라. 뭔가 좀······ 괜히 즐겁달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네. 이런 게 스승의 즐거움일까? 안 선생님도 날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셨을까?’

생각 끝에 픽 웃은 강정후는, 연습용 대본을 훑기 시작한 조수석의 천세영을 일별하며 물었다.

“너희 회사는 전체적으로 평이 좋더라. 이찬 놈이 뒤에서 이런저런 수를 써둔 모양이야.”

“네? 아, 평이요. 그 X파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임호준 선배가 젊은 시절에 혈기로 치고받고 했다는 소문 빼면 나쁜 얘기가 거의 없었지. 너만 해도 그렇고.”

“저야 뭐······ 아직 나쁜 소문이 날 만한 인지도도 없는걸요.”

“그게 아냐. 여배우는 초기 소문이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성상납이라든가.”

“앗.”

“그래, 그거. 내 쪽 사람들이 빨리 정리를 하긴 했지만, 그 뒷얘기를 정말 단 한 명도 몰랐을까? 그렇진 않았을 거다. 이찬이 지 빽 써서 입단속 시킨 거겠지. 명진아 소문을 막지 못한 건,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그랬을 거고.”

정확한 추론이었다. 이찬은 신수영의 부친인 신성운 검사를 통해서 언론 물밑의 소문에 대해서도 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만 일개 취재기자가 2000년도의 메모를 발굴해 소문을 내는 상황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것.

“아······ 그런 건가요?”

“그 꼬마 본인의 X파일이 입증해주는 문제잖냐. 뭔 그런 찬사들만 가득한 찌라시가 다 있어? 기자 놈들이 지레 겁먹고 나쁜 얘기들을 다 뺐으니 그렇게 된 거겠지.”

“음, 그렇군요. 강정후 조혁수와는 친형제 같은 사이랬는데.”

“흥. 그러니까 헛소리인 거지.”

“그런데, 선배님은 몰라도, 조혁수 선배님은 정말 친형처럼 보살펴주시는 거 아닌가요?”

“그야 인연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선배는 나랑 더 친해.”

“아, 혹시 질투하시는 거예요? 혁수 형은 내 거다?”

“미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대본이나 봐.”

자기가 먼저 말 걸어놓고- 생각하며 천세영은 샐쭉 웃었다.

하는 말이 막말투성이에 매너 하나 없는 남자지만, 저럴 때는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미남을 귀엽게 바라보는 마음은 곧 연초의 사건으로 옮아갔다.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뜬금없는 고백의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결국 집중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천세영은, 조심스레 운전석의 강정후에게 물었다.

“저기 선배님. 혹시요, 저한테도 그런 거였어요? 찬이랑 친한 여자애한테 질투를 느끼고 떼어내고 싶으셨던 거?”

“이게 진짜 미쳤나?”

“그게 아니면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저랑은 따로 본 것도 몇 번 되지 않았고, 고백하시기 전날에는 제가 술 먹고 귀찮게 굴기까지 했는데.”

“말 똑바로 해. 귀찮게 군 게 아니라 진상을 떨었지.”

“아무튼요. 그래서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거절했는데.”

“그래. 그걸로 끝난 일이야. 다시 말 꺼내지 마라.”

“아······ 네. 그럼 찬이 얘기나 해야겠다. 찬이는 이번에 칸에 초청되는 거 확실할 것 같대요. 박무열 감독님께서 촬영 끝마치자마자 심사위원 분들이랑 연락을 좀 해보셨는데, 신작이 완성돼간다는 말에 다들 호들갑 떨면서 꼭 월드프리미어로 와달라고 간청을 하셨대요.”

일부러 속을 긁으려고 하는 말 같긴 했지만, 강정후는 울화를 표출하는 대신 속으로만 신음했다.

‘아마······ 십중팔구 그렇게 되겠지. 박무열 감독님은 이미 한 차례 칸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은 경력이 있으시니까. 거기에 이찬의 연기가 <고등형사> 수준만큼만 나왔더라도, 경쟁부문 수상에 무리가 없을 거야. 부러운 자식. 난 가보지도 못한 칸에서 그 어린 나이에 상을······.’

박무열의 출세작이자 그가 주연을 맡았던 역시 해외 평단의 호평을 사긴 했지만, 그 영화는 분단현실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은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됐었다.

그로 인해 강정후는 높은 인지도와 훌륭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칸과는 인연이 없었다.

“흠. 뭐, 잘되면 좋겠네.”

“정말요? 아니신 것 같은데?”

“헛소리. 내 표정에서 네깟 게 뭘 읽어낼 수 있다고.”

“읽어낸다고요? 어······ 그런 게 아니라 감인데요.”

“감? 비과학적인 소리.”

“비과학적이지만, 맞추지 않았어요? 선배님 지금 찬이가 칸에 가는 거 질투하고 계셨잖아요?”

“전혀 아냐. 수상경력 따위에는 관심 없어.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으면 그뿐인 거다. 그게 배우야. 알아듣겠냐?”

천세영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에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른 소리를 했다.

“선배님도 국제영화제에서 상 타셨으면 좋겠어요.”

“······뭐? 왜?”

“좋은 분이니까요. 귀찮게 군다 진상 피운다 하시지만, 항상 저한테 진심으로 대해주시잖아요. 맨날 속기만 했던 전······ 그것만 해도 고마워요.”

“······쓸데없는 소리.”

“그야 저보다 찬이한테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긴 하지만.”

“아니라고 했다. 대본이나 봐라.”

“네, 그럴게요 선배님.”

대화를 마치고, 강정후는 문득 천세영과 가까워지는 미래를 생각했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해져서 부지불식간에 연인처럼 굴게 될 경우에 대해서.

그리고 마침내 그 감정이 결실을 맺어 이찬을 ‘처남’ 등으로 부르게 될 상황에 대해서.

잠깐 그 장면을 그려보다가, 욕지기를 느끼고 페달을 세게 밟았다.

*

박무열의 3월은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그는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으로 ‘한미모’ 감독들과 만나 편집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데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찬과 처음으로 함께한 작품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공개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그가 미처 갖추지 못한 상업적인 감을 소유한 계진행과 제준원이 특히 큰 도움을 줬다.

“여기가 그거군요, 발푸르기스의 밤 파트! 참 좋아요. 참 좋은데······ 감독님. 여기서는 주변인물들보다 이찬의 클로즈업을 더 많이 쓰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 계 대표 생각이 맞겠다 싶긴 한데.”

“부끄럽습니다.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풀려난 여인들의 감상에 집중하는 게 더 낫겠지만, 아무래도 관객 입장에선 그게 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흠······ 그렇군. 준원이 생각은 어때?”

“좀 더 시각적인 대비를 넣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레드 빼고는 다 흑백으로 빼버리면 어떨까? 빨간색만 도드라지게 해서 악마라는 느낌이 더 강화될 것 같아요.”

“아, 그것도 잠깐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 낯설진 않을까?”

“이쯤에서 한번 낯설게 해주는 것도 효율적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뭐 형님이 결정하실 문제죠.”

턱수염을 쓰다듬는 제준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박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시도해보도록 해야겠어.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고 배우들 의견도 들어봐야지.”

“형님, 이번 영화는 특히나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이거 이러다 정말 황금종려상 받으시는 거 아닌지 몰라.”

신유벽 감독의 설레발에 박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다만 이 녀석은······ 찬이는, 이번에 꼭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면 좋겠어.”

“어? 그렇게 되면 심사위원상 이상은 못 받게 되잖우?”

칸 영화제의 잘 알려진 기준에 대한 얘기였다.

작품상 상위 3등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 심사위원대상,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의 배우들은 다른 상을 동시에 수상할 수 없는 것.

즉, 이찬이 이번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2004년에 이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무열의 커리어 경신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그거야 문제될 일이 아냐. 생각해봐. 이 멋없는 감독이 작품상을 받는 것과 우리 최고의 스타배우가 주연상을 따내는 것 중에, 어느 쪽이 한국영화계에 더 큰 도움이 되겠는지.”

“그렇게 말하자면, 물론 이찬이 잘되는 쪽이 더 고무적이겠죠. 아직까지 우리 배우가 칸에서 주연상을 수상한 일이 없었으니.”

“그리고 아마 최연소 수상자까지 바뀌게 될 겁니다. 찬이 걔가 지금 만으로 열다섯이잖아요?”

“아. 그럼 안 될 걸. 작년 수상자가 열넷이었어.”

“으어? 그랬습니까? 아, 그거구나! <아무도 모른다>.”

“배우 이름이 아마 야기라 유야였지? 데뷔작으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탔으니, 정말 대단한 친구야. 뭐 그렇긴 해도 이쪽의 성과가 평가 절하될 일은 없겠지. 작년 그 친구의 수상이야 어디까지나 <오이디푸스>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면서 조연식 선배가 밀려난 까닭이니.”

“그런 겁니까? 형님, 정말이에요? 혹시 그래서 이번 영화는 특히 더 상업적인 방향으로 편집하고 계신 거? 작품상에서 밀려서 남우주연상이 찬이한테 갈 수 있게끔?”

“어흠. 작년 일이고 올해 일이고, 함부로 할 얘기가 아냐. 제 감독도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예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일단락한 뒤, 박무열은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다들 고마워. 덕분에 작업이 훨씬 순조로워져서, 4월 안에 A프린트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도 잘 부탁합니다, 우리 한 미모 하는 감독님들.”

“그야 물론입니다. 칸 심사위원들보다 더 깐깐하게 봐드리죠.”

“너무 신랄하다고 눈물 흘리지나 마쇼, 박 형.”

“이찬의 남우주연상을, 위하여!”

소년이 모르는 곳에서, 그의 충격적인 국제영화제 데뷔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 52장 - 거장 박무열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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