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9화 (149/250)

< 52장 - 거장 박무열 (3.) >

칸 초청작 리스트가 발표된 2005년 4월 17일 저녁.

‘사계 프로덕션’과 배급사 ‘세계’의 대표 계진행은,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이게 이렇게 되네? 하하하······.”

그는 곧 사정 설명을 위해 전화기를 붙들었다.

첫 번째 대상은 박무열 감독.

“선배님, 저 계진행입니다.”

[어, 계 대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칸 발표가 나와서, 빨리 알려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경쟁부문 출품 확정됐습니다.”

[아, 그랬군. 그게 오늘이었지. 잊고 있던 내가 미안해.]

“하해와 같은 아량 감사합니다.”

[아량은 무슨. 아무튼 다행한 일이야. 편집도 채 마치지 못한 A프린트 보낸 건데, 그걸로 출품이 확정됐으니.]

“그거야 선배님의 실력을 모를 리 없는 심사위원들이라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런 한편으로, 이용빈 선배하고 유벽이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아, 그래. 잘됐네. 각기 어디로 가나?]

“유벽이는 감독주간, 용빈 선배는 미드나잇스크리닝입니다.”

신유벽은 PiFan 수상작 <장풍> 이후 조연식 주연의 복싱 영화 <주먹>을, 이용빈은 조혁수 주연에 심요셉을 까메오로 내세워 <달콤한 꿈>을 완성했다.

두 작품이 모두 4월 1일에 개봉하게 되어 서로 자기 작품이 낫다며 으르렁댔던 게 관전 포인트.

그렇지만 막상 개봉한 뒤의 흥행은 양쪽 모두 빠듯한 수준이었는데, 다행히 심사위원들 눈에는 좋아 보였는지 두 감독이 생애 첫 칸 영화제 초청의 영예를 누리게 됐다.

[정말 기쁘구만, 정말 기뻐. 괴물 영화 만든다고 정신없는 준원이를 제외하면, 우리 감독모임 ‘한미모’ 전원이 칸에 가게 된 셈······ 아, 계 대표를 제외했군. 이건 말실수였어.]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저야 예술가라기보단 장사치죠. 선배님들하고 유벽이 잘되는 게 제 주머니를 불려줄 일이고요. 그런데······ 또 흥미로운 게 하나······.”

[왜 그래? 편하게 얘기해. 무슨 일인데?]

박무열이 재촉하자, 계진행은 조심스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얹었다.

“예. 그러니까 거기에 더해서······ 경쟁부문에 한 편이 더 나가게 됐습니다. <고등형사>가······.”

[뭐?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이후 계진행은 긴 시간을 들여 자신이 벌인 일을 설명했다.

기왕 이찬이란 배우를 소개하는 자리인 만큼, 아직 프랑스에는 개봉하지 못한 <고등형사>의 상영본까지 출품해버렸다고.

작년의 <오이디푸스> 이상으로 여러 나라에 배급되어 있는 장르영화인 만큼 경쟁부문은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비경쟁부문 미드나잇스크리닝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되면 찬이의 다양한 매력을 더 잘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 욕심에 오덕환 선배님을 설득해서 출품하게 됐습니다.”

[허허······ 재밌는 플랜이었구만. 아무래도 장르 쪽은 심야상영으로 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꼭 그렇게만 되는 건 아니야. <고등형사>라면 충분히 경쟁부문에 꼽힐 만하지. 그런데 그게 여태 다른 영화제 마켓에 출품된 적이 없었나?]

기 개봉작도 1년 안에 제작되기만 했다면 심사대상이 될 수 있는 게 칸의 기준이지만, 다른 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면 아예 기회가 박탈된다.

그렇지만 <고등형사>는 각국에 배급만 되었을 뿐 어떤 영화제에도 출품된 적이 없었다.

“예. 제가 직배로 여기저기 뚫고 있기도 하고, 오 선배님 본인이 수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어서요. 사람 많은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하시기도 하고요.”

[하하, 그렇게 된 거였군. 내가 촬영하느라 바빠서 그걸 몰랐네. 하여튼 기인이시란 말이지. 계 대표, 그렇게 좋은 계획은 나한테도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어?]

“그게, 송구해서요. 미드나잇스크리닝은 용빈 선배가 노리고 있는 부문이었고······ 이번 출국은 선배님이 주인공이 돼야 하는 자린데, 천만영화까지 진출하면 관심이 분산될 것 같기도 했고······.”

[그게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만. 오덕환 선배님도 그렇고 찬이도 그렇고, 우리에겐 참 고마운 사람들이야. 기쁘기만 한 일이란 말이야.]

박무열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계진행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껏 기뻐할 수 있게 됐다.

칸 경쟁부문은 세계에서 고작 20여 편의 작품만을 초청한다. 그 각축장에 오른 한국 감독은 이제껏 진정과 안정록과 박무열 단 셋뿐.

그런 와중에 한 해에 두 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되어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중 한 영화는 계진행이 직접 배급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사계 프로덕션의 전속 감독의 작품.

충무로의 군주를 꿈꾸는 계진행이 행복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통화를 마무리한 뒤, 계진행은 두 작품의 주연인 소년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좀처럼 듣기 힘든 이찬의 당황한 목소리를 귀에 담게 됐다.

[저, 정말로요? 제가 주연한 두 작품이 모두 경쟁부문? 와, 뭐 그런 일이······ 와, 하하하.]

“축하한다, 어린 투자자님. 이번 칸의 주인공은 너야. 2관왕이 돼서 돌아와라. 옷 아주 멋진 걸로 입고 말이야.”

[턱시도 새로 맞춰야 되겠네요.]

“그래. 아, 너 괜찮으면 박 선배님하고 같이 맞추러 가라. 고급으로다가. 그분 작년에 칸에서 입었던 거 얼마나 구렸는지 아냐? 미장센 미장센 부르짖으면서 자기 외모에는 보는 눈이 하나도 없는 선배란 말이지.”

그런 뒷담화 속에서, 소년의 칸 데뷔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고급 턱시도를 맞추면서, 이찬은 종종 거울에 비친 자신을 무겁게 노려보곤 했다.

두 영화의 칸 동시 출품으로 들떴던 건 잠시뿐.

그의 내면은 여전히 안양교도소의 그날로부터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워한다는 건 참 편한 일이야. 김도철 그놈 말대로, 증오할 대상은 소중한 것.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어. 그렇지만 그게 사라져버린 뒤에는 갈 곳 잃은 칼날이 자신을 찌르게 되지······.’

김도철의 진심을 읽어낸 자신의 눈을 믿는다면, 윤대흥의 죽음에 책임을 가진 복수의 대상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의 숭고한 희생이 개죽음으로 화하고 만다.

‘늘 불행한 이들을 구하는 일에 몰두했던 사람이지. 칼 들고 죽겠다며 설치는 범죄자 살리려고 몸을 날릴 법한 사람이야. 나한테도 그랬는걸. 터미널 대합실에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내게 다가와 신의 축복이라며 웃어줬던 사람······. 그런데 그 선행의 끝에 스스로를 죽이게 되었다는 거야. 갱생의 여지가 없는 개새끼 한 마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할 텐데-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김도철의 눈은 이미 죽어 있었다. 삶이라는 생존유지행위에서 어떤 행복도 느끼지 못한 채, 작은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그저 죽지 못해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윤대흥이 목숨을 걸어 지켜낸 것은 고작 그런 비루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건······ 과거의 나를 닮았어. 나도 그랬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할 뿐, 세상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걸 바꿔준 게 형이었는데······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 일로 소년은 변화했다.

윤대흥의 사랑과 죽음 속에서 자신을 믿기 시작한 이찬은, 이제 세계 모든 영화인들이 꿈꾸는 위대한 영화제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김도철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인물.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죽이려 하고 있다. 형사의 숭고한 희생으로 부지하게 된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못하고 있다.

그 현실이 이찬을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나쁜 새끼. 차라리 악독한 놈일 것이지. 마음껏 미워할 수 있게라도 해줄 것이지. 하필이면 왜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놈이어서, 미워할 수도 안도할 수도 없게 하는 거야. 신이 있다면 엿이나 먹으라 그래. 이 세상은 정말 다 엉터리야.’

막 커튼을 걷고 나온 박무열 역시,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때 이후로 계속 저 상태로군. 내 입장에서 보면, 참 흥미로운 소재긴 해. 이찬이란 배우를 발굴해냈던 안정록 선배님이 굳이 면회까지 가서 범행의 진실을 파헤친 자. 그리고 그 진상을 알게 된 톱스타 이찬이, 표정조차 유지하지 못할 만큼 괴로워하게 만든 자. 거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간단하다.’

그가 영상편집 내내 머릿속으로 고민했던 문제의 결론은, 놀랍도록 사실에 근접했다.

‘그자를 구하려다 죽었다는 윤대흥이라는 형사가, 이찬에게 가족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 인물의 평소 행실에 빗대보면 어떤 사건으로 찬이의 은인이 됐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단 말이야. 또 찬이는 형사 집안 아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런 사정이라고 하면, 흥미본위로 바라볼 수는 없지.’

타고난 영화광이자 일상의 모든 스토리에 호기심을 느끼는 그였지만, 어린 소년의 슬픔까지도 그렇게 재단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심스레 이찬을 돌려세웠다.

“찬아.”

“······예, 감독님. 어떠셨어요? 원단은 마음에 드셨어요?”

“나야 뭐 주는 대로 입는 사람인데. 그보다 김도철이라는 사람 말이다.”

“땡. 그 얘긴 하지 말죠. 큰 영화제 앞두고 있는데, 좋은 생각만 하고 싶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 내가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황당한 소리에, 소년이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감독님. 죄송한데, 조언은 연기에 대해서만 듣고 싶습니다. 프라이버시 관련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음······ 나도 프라이버시를 하나 얘기하면 어떨까?”

“아니, 괜찮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벌써 6년 전 일인가······ 호준이한테 내가 크게 실망을 했던 적이 있었어.”

“알거든요? 주식투자 건이었잖아요.”

“어?”

“아드님한테 생채기까지 낸 임호준 선배님을 용서하셨다. 그랬더니 지금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가 완성됐다. 그런 얘기 하시려는 거 아니에요?”

불쾌해 보이는 와중에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판단력. 박무열은 이찬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배우들에게 천재 소리를 듣고 있는지 다시금 실감했다.

그렇지만 소년의 판단은, 이번에는 조금 방향이 틀려 있었다.

“그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야. 사실은 복수 삼부작을 만들게 된 계기가 그때 일이었어. 서로가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오해 속에 미워하게 된 인물들의 복수. 거기서 <복수의 남자>가 나왔고, 심화되어 <오이디푸스>가 됐고, 너를 만나서 마침내 <친절한 살인자>를 쓰게 됐고.”

“······그중 두 편이나 칸에 가게 됐네요. 축하드려요.”

“그거야 뭐. 어쨌든 그렇게 끝없이 복수 이야기를 쓰고 가다듬으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니?”

“그야 다양한 생각을 하셨겠죠.”

“그래, 다양했어. 다양했고······ 관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그 말에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여느 어른들을 압도하는 체격이지만, 그럴 때만큼은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보였다.

덕분에 박무열은 웃으며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복수는 관계의 한계점에서 발생해. 개인과 개인이 마주했을 때 형성되는 관계는 언제나 두 개의 시발점과 두 개의 종단(終端)을 갖지. 그게 오롯이 합치되는 일은 없어.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상식, 관념, 긍지가 부딪쳐 사건을 만들고, 그게 비극이 되어 복수를 부른다. 그렇기에 복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완성되지 못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해.”

“······딴은 알겠는데요, 그게 김도철이랑 무슨 상관이죠?”

“윤대흥이라는 그 형사는, 알아보니 참 좋은 분이었더구나.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다.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저 핍진성 조사차 강력반에 문의를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던 거야. 그랬는데 시골 형사도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더구나. 검거율도 높지만, 그 이상으로 교화율이 높았던 형사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건 소년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병실에 있던 윤대흥 대신 그를 잠시 데리고 다녔던 김순영이 떠벌리던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윤대흥이 잡아들인 범죄자들은 거의 모두가 훌륭하게 사회로 복귀했다. 한없이 성실한 형사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이찬은 문득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답했다.

“예, 그랬는데요.”

“범죄자와 형사라는 극단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복수나 배제가 아닌 승화로 관계를 만들어갔다는 거겠지. 그 지점에서 나 역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 분이, 복수도 싸움도 아닌 일로 인해 숭고한 희생을 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써 구원받은 인물이 그 관계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예요.”

“간단한 얘기야. 찬아, 관계가 완성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게 복수다. 내가 봤을 때 너는······ 그분의 희생이 무의미해지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김도철이란 놈이 옥중에서도 자살기도를 했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던 거지?”

이찬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박무열에겐 그게 긍정의 대답이 되었다.

“그렇다면, 완성해보는 게 어떻겠냐? 유지를 이어가보는 게 어떻겠어? 서로 원망하고 죽음을 갈망하는 복수가 아니라, 배역 이수처럼 끝끝내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찬으로서 복수보다도 명확한 관계를 만들어보는 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똑똑한 녀석이 이걸 못 알아듣는구나. 그분이 막으려던 게 뭐였어? 김도철이라는, 버림받고 버림받아서 무엇 하나 기대할 게 없게 된 인간을, 그래도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려고 했던 거잖니? 그 유지를 완성해보잔 얘기다. 그 한심한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자는 거야. 그거야말로 칸 영화제의 수상보다도 더 큰 업적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알아줄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소년은 굳은 얼굴로 다시 박무열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입을 쫙 벌렸다가, 소리 없이 닫았다.

그는 촉촉해진 눈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안정록 아저씨가 시키셨어요?”

“응······? 아니,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하여튼 거장들이란, 이상한 데서 통하시네요.”

발화의 끝에, 소년은 조금 웃었다.

< 52장 - 거장 박무열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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