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장 - 칸의 이찬 >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의 국가대표 배우 이찬 씨가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는 순간이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그럼, 마지막으로 시청자 분들께 한 말씀 해주세요.”
리포터의 말에 웃어 보인 뒤, 이찬은 카메라를 직시했다. 칸의 바닷가를 배경으로 프레임이 클로즈업됐다.
“늘 응원해주시는 영화 애호가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워낙 쟁쟁한 작품들이 많아서 수상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감독님들의 훌륭한 영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먼 곳까지 취재하러 와주신 스탭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려요. 사랑해요, 연예가보도.”
“하하하, 고마워요. 잘 나왔겠어. 이따 또 봐요, 마이 찬!”
그렇게 그날의 세 번째 인터뷰를 마친 뒤, 소년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염수진을 불렀다.
“누나, 물 좀 주세요.”
“여기, 여기! 찬아, 고생 많았어. 비행기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참 아침부터 할 일이 많다 야.”
“그러니까요. 단독인터뷰 따고 두 감독님하고 각각 합동인터뷰 따고 조혁수 선배하고 합동인터뷰 따고 조연식 선배하고 합동인터뷰 따고······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지 몰라. 그냥 한 번에 찍을 것이지.”
“에이, 그럴 순 없지. 작품이 여러 개니까 말이야. 아무튼 다음 주 연예정보 프로는 완전 칸 얘기밖에 없겠어. 단편 포함해서 한국영화가 여섯 편이나 진출을 했는데, 그중에 두 편이 무려 경쟁부문이니까 말이야.”
염수진의 말대로, 방영을 준비 중인 공중파 3사의 연예정보 프로그램 꼭지는 이미 포화상태였다.
두 번째 칸 입성으로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박무열 감독.
첫 초청이지만 한미일 3국에서 이미 2천만에 가까운 흥행실적을 일궈낸 오덕환 감독.
감독 모임 ‘한미모’의 이용빈과 신유벽 감독.
그 이용빈 감독의 <달콤한 꿈> 주연인 조혁수.
신유벽 감독의 <주먹> 주연이자 박무열 감독의 <친절한 살인자> 조연인 조연식 등.
마음만 먹으면 몇 주 동안 특집으로 편성해도 모자랄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가득한 게 2005년의 칸이었다.
그리고 그 화제의 중심은 물론 소년배우 이찬.
단독주연으로 활약한 두 작품으로 칸 경쟁부문을 점령하러 나선 그는, 이미 출국 기자회견 직후 300에 달하는 기자들과 수천 명의 팬들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른 바 있었다.
그리고 한 해에 두 편의 작품으로 초청받는 배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
자연히 프랑스로 날아온 각국의 언론까지 동양인 소년의 인터뷰를 잡고자 안달을 냈고, 덕분에 합동인터뷰보다도 많은 단독인터뷰가 소년의 스케줄을 가득 메우게 됐다.
“휴······ 차분하게 둘러보기는 글렀네요.”
“몰래 도망쳐볼까? 누나랑 드라이브 한번 하고 올래?”
“됐어요. 얌전히 스케줄 따를래요. 이번 초청으로 커리어 끝나는 것도 아니고.”
“하핫, 그것도 그러네?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올 텐데, 관광은 나중에 해도 상관없겠다. 그럼 갈까?”
현지 영화지와의 인터뷰를 위해 푸른 해변을 떠나며, 이찬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관광은 그렇다 치고 다른 영화 볼 시간도 없는 게 좀 아쉽네. <주먹>이나 <달콤한 꿈>이야 이미 봤지만, 칸까지 와서 월드프리미어 상영작 하나를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니.’
6일 일정으로 칸에 온 소년이 시청할 수 있는 작품은 그가 출연한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뿐.
전자의 경우는 이미 개봉한 지 한참 지나 내용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게 된 천만영화고, 후자는 박무열이 출국 직전에야 완성한 베일 속의 최종편집본이다.
그 외에는 표를 받는다고 해도 구경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의 <아이>도 짐 자무시의 <망가진 꽃들>도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도 기예르모 아리아가의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도 왕샤오솨이의 <상하이 드림즈>도 보지 못한다.
‘으, 갑자기 열받네. 남 스케줄은 그렇게 정신없이 잡아놓고, 정창영 이 아저씨는 계진행 아저씨하고 박무열 감독님하고 신나게 이것저것 보러 갈 예정이란 말이지? 말로는 마케팅과 인맥 형성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진짜 치사한 대머리야. 다음번엔 한국 언론이든 현지 언론이든 인터뷰 하나도 안 잡을 거야. 배우는 작품으로 말하면 되는걸. 뭐 CNN 같은 데서 인터뷰 요청하면 받아주긴 하겠지만.’
그 CNN과의 인터뷰도 먼 미래의 일은 아니었다. 21일의 폐막식 직후에 일정이 잡혀 있으니.
경쟁부문에 출품된 두 편의 작품으로 2관왕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추진된 전격 단독인터뷰는, 정말 그런 결과가 나올 경우 세계적으로 대단한 반향을 끌 터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게 첫술이야. 한 숟가락 거하게 떠먹어보자. 그리고······ 그 뒤에, 김도철 그 인간을 만나러 가자.’
*
5월 18일에 뤼미에르 극장에서 공식 상영한 <고등형사>는, 상영 내내 객석의 탄성을 불러일으키며 5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기립박수란 것이 작품의 평가를 완전히 대변해주는 것은 아니다.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고에 헌정한다는 의미로 일어서서 손뼉 치는 게 칸의 암묵적인 전통이니.
그렇지만 소년은 <고등형사>의 평가가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표정들이 참 좋아. 자연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만족감을 대변해주고 있고, 무의식중에 고개 흔드는 사람들도 있고. 뜻밖의 걸작을 발견했다는 그런 감상이겠지. 아쉬운 건 다른 상영작들의 반응을 볼 수 없었다는 점······. 경쟁작의 관람객 표정을 봤다면 좀 더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안도감은 드는 상황이기에, 소년은 환하게 웃었다.
특히 중반부 롱테이크 액션 활극에서의 반응이 생각할수록 기꺼웠다.
2분 내내 여기저기서 박수와 감탄의 외침이 터져 나와, 그곳이 프랑스 영화의 성지인 뤼미에르인지 종합격투기 경기장인지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반면, 5월 19일의 <친절한 살인자> 상영은 상대적으로 고즈넉했다.
초반부 시퀀스 동안 들리는 소리라고는 짧은 탄성이나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전부.
칸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게 두 번째인 이찬에겐, 그게 좀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뭐야? 어지간하면 박수 치고 감탄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었나? 어째 두 영화의 평이 갈리는 느낌인데. 역시 괴작이라서 그런 건가? 이런 건 판타스틱영화제로나 가라는 뜻에서 박수 안 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에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려 했지만, 조연식이 그의 머리를 붙잡고 스크린으로 돌렸다.
“이 자식, 왜 두리번거려? 넌 상영본 벌써 보기라도 했냐?”
“아뇨. 그냥 좀 궁금해서요.”
“하하. 이런 건 좀 아이 같네. 그렇지만 지금은 영화에 집중해라. 박 감독이 한 달 동안 가족들도 못 보고 편집한 결과물이야. 그렇게 널 위한 작품을 만들어낸 거야. 그걸 네가 안 보면 실례지. 늙은이의 순정을 외면하지 마라.”
“아, 선배는 참. 늙은이는 뭐고 순정은 또 뭡니까?”
투닥거리기 시작한 중년 영화인들을 무시한 채 소년은 카메라 쪽을 의식했다.
‘방금 대화 전부 찍힌 것 같은데. 이 아저씨들은 국위선양을 하러 나왔으면 좀 의젓하게 있을 것이지, 체면치레도 못 하시네.’
그렇게 속으로 툴툴거리긴 했지만, 이내 조연식의 말을 받아들여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칸 관객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소년에겐 대단히 공감대가 큰 작품이었기에.
‘괴작이긴 하지만, 확실히 재밌는 영화야.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교화를 주제로 끊임없이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어. 중간중간 보이는 신주원의 거짓 회개가 보는 사람마저 희망고문을 당하게 만들어. 거기에 박무열 감독님 특유의 야성적인 영상미에 마음을 뒤흔드는 구성까지······ 정말 이상하네. 이게 반응이 안 좋을 리가 없는데.’
회심의 ‘발푸르기스의 밤’ 시퀀스가 등장한 뒤에도 기대했던 감탄사들이 들려오지 않자,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객석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김자영 역의 유세령이 그를 말렸다.
“찬아, 가만 있어. 카메라 찍고 있어.”
“그건 아는데······ 누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죠?”
“그거야 집중해서 보느라고 그런 거 아닐까?”
“그런 건가? 유럽 쪽은 자유롭게 소리도 내면서 관람하는 분위기라고 들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세계를 누빈 유세령이라고 해도 그 범주는 동아시아가 전부. 마땅한 대답을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심화되어가던 소년의 의문이 해소된 건, 마침내 신주원의 최후를 암시하는 마지막 시퀀스마저 상영된 뒤.
뤼미에르 극장 안에 오랜만에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지 관계자로 보였는데, 그는 음악감독이 엄선한 OST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힘들다는 듯 발까지 구르며 손뼉을 쳐댔다.
그리고 곧 그 움직임이 주변에 전염됐다.
파도타기처럼, 또는 우후죽순처럼 해일 같은 기립의 행렬이 시작되어, 이내 모든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에야 이찬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뒤를 돌아봤다.
‘아······ 저거······ 저 표정들은, 또 좀 의왼데.’
괴작 중의 괴작으로 완성된 박무열 복수 삼부작의 끝.
턱시도와 드레스로 무장한 채 그 작품을 세계 최초로 관람한 2300명의 관객들은, 첫사랑을 발견한 소녀처럼 꿈꾸는 듯한 얼굴로 환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연식이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찬아. 이거 대박이다, 그렇지? 정말 반응 좋은데!”
“작년 <오이디푸스> 때보다 더요?”
“그래! 박 감독, 안 그래? 이거 반응이 너무 좋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박수 좀 길게 가볼까요?”
“우리 꼬마 주연한테 좀 시켜볼까? 야, 찬아. 삼삼칠 박수를 한번 해보자.”
“······기립박수가 장난도 아니고, 그걸 왜 해요?”
“재밌잖냐. 다 같이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네가 완성한 영화에 감격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면 해도 상관없어. 자, 해봐라. 아 얼른.”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식 삼삼칠 박수를 치기 시작한 이찬은, 기다렸다는 듯 그 리듬을 따라오는 2300명 관객들의 얼굴을 관찰하며, 문득 어딘가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1층도, 2층도, 어디 하나 불만을 느낀 사람이 없어 보여······. 이게 박무열의 괴작. 그리고 이찬이란 배우의 첫 번째 월드프리미어. 내가······ 나 혼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얘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어. 이게 영화. 이게 연기. 나는······ 난, 연기자가 되길 정말 잘한 것 같아. 난 집시가 아니야.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형이 얘기했던 대로······.’
삼삼칠 박수에 이어서 힘조절이 묘미인 휘모리장단으로까지 이어진 기립박수는, 8분 동안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오랜만에 만면에 띤 이찬의 웃음 역시도.
*
2005년 5월 21일, 칸 현지시각 12시 11분.
비경쟁부문의 제작진들이 귀국하고 남은 <친절한 살인자> 와 <고등형사> 팀을 모두 소집해 연회를 베풀던 박무열은, 영화제 추진위원회로부터 공적인 전화를 받았다.
“Oui······ bien sûr······. Merci.”
더듬거리는 대답에 오덕환과 조연식이 씩 웃는다. 영문을 모르는 이찬과 유세령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을 설명해준 건 박무열 본인이었다.
“됐다. 됐어, 찬아.”
“뭐가 돼요?”
“수상하게 됐다고. 폐막식 오라는 전화였어.”
“······폐막식 오라고 하면, 수상을 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말 안 했었나? 수상작이 결정되면, 당일 1시 전까지 미리 연락을 줘. 혹시라도 트로피를 전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끔 꼭 폐막식에 참석해주십사 부탁하는 거지. 그러다보니까 연락을 못 받은 경쟁부문 감독들은 굳이 폐막식에 안 가도 되는 거고.”
“아하. 뭐 서로 편한 일이네요.”
그리고 채 10분이 지나기 전에 오덕환의 핸드폰 역시 벨소리를 냈다.
“······이쪽도 됐네. 오라고 하는데.”
“하하. 축하합니다, 선배님! 겹경사네요.”
“나야 뭐······ 민망해. 박 감독이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단의 호평을 휩쓸고 계신 분이.”
그 말대로, 오덕환의 <고등형사>는 각국의 영화인들이 발표한 평점 순위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고교가 주 배경인 만큼 한국 특유의 정서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많았음에도 그 정도.
영화사상 가장 화려하고 가장 완벽했다는 말을 듣는 롱테이크 액션은, 감성을 중시하는 예술영화인들조차 홀려버렸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친절한 살인자>는 공개된 거의 모든 평점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렇기에 폐막식 초청에 누구도 놀라지 않았던 것.
이찬은 점심을 다 먹기 전에 2관왕을 확정 지은 셈이었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감독님.”
“음. 슬슬 수상소감 준비해야 되겠어. 찬이 너도 준비해.”
“저도요? 저한텐 연락 안 왔는데.”
“박 감독이, 주연상도 연락은 작품 전체로 온다더라.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너한테 마이크 주고 싶다.”
“엇? 그거 저도 생각했는데요.”
“어, 박 감독도? 이런.”
감독들끼리 웃으며 나눈 대화가 무색하게도, 이찬 역시 곧 전화를 받게 됐다.
“······Oui, merci. 뭐야? 저한테도 전화 주는데요?”
“음? 그래? 이게 시스템이 좀 바뀌었나?”
“감독님도 잘 모르시는구만 뭘. 이제 유세는 사절입니다.”
“하하핫! 이 녀석, 까불기는. 불어 좀 공부했다 이거지?”
그렇게 수상을 확정 짓고 세 번째로 밟는 뤼미에르의 레드카펫 위에서, 이찬은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파랗게 어두워진 이국의 하늘.
<가을하늘>에서 명진아가 발화한 대사에 따르면, 어디서든 볼 수 있기에 하늘은 외롭지 않다고 했었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하늘······ 그렇게 돼야지. 그래야, 형사 주제에 노안이 와서 안경 끼고 책 보던 내 형이, 날 보고 웃을 수 있겠지.’
그런 이찬의 영예는, 각본상으로 시작했다.
오덕환의 <고등형사>가 쟁쟁한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그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
생애 처음 초청받은 국제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안게 된 오덕환은, 자주 이찬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프랑스어로 수상소감을 말하며 여러 차례 소년을 언급했다.
눈물 그렁그렁한 시선이 그 진심을 전해줬다.
‘저 아저씨야, 울고 싶기도 하겠지. 어중간한 상업영화밖에 못 만들다가 나로 인해 진짜 감독인생이 시작된 셈이니까. 그렇지만 수상소감을 나눠 가질 필요는 없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나 역시 저 소심한 감독님 덕분에 참 많은 걸 배웠으니까.’
그렇게 웃기만 하다가 무대를 내려간 이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리에서 일어서게 됐다. 이번에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서.
<고등형사>에서 열연을 펼친 만 15세의 동양인 배우가,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의 토미 리 존스를 누르고 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소년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아······ 이건 또 뭐람. 그야 <고등형사>는 각본상이니까 주연상을 겸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걸로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남우주연상에 불린다면 <친절한 살인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게 그랑프리 이상을 수상할 게 분명한 상황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건데. 그렇다면 설마······ 2관왕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
당혹스런 마음에 되는 대로 주워섬긴 수상소감은, 그러나 현지인이 듣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유창한 불어였다.
당황한 사회자가 프랑스에 산 적이 있냐고 물어봤을 정도.
그렇게 소감을 마치고 내려온 이찬은, 속으로 구시렁댔다.
‘정작 하려고 했던 말을 못 했네. 이렇게 되면 하는 수 없이 박 감독님 수상소감에 묻혀 갈 수밖에. 뭐가 되려나? 그랑프리가 되려나, 황금종려상이 되려나?’
그랑프리라 불리는 심사위원 대상은,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이>에 돌아갔다.
당연하게도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을 때는 수많은 카메라가 박무열 감독과 이찬에게 집중되었다.
남은 시상은 하나. 그리고 남은 수상작도 하나.
박무열은 슬슬 눈물을 흘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 종려나무의 잎사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 정말로 울기 시작했다.
“······감독님? 쪽팔린데 안 우시면 안 돼요?”
“아, 크흠. 나가자. 일단 나가야지.”
볼 위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박무열은 의외로 깔끔하게 수상소감을 읊었다.
그 안에는 심지어 공동작가로서 공헌해준 염수진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었다.
바깥에서 폐막식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이찬은 씩 웃었다.
‘첫 상영 스탭롤에서는 빼달라고 했으니까, 아마 이걸 알면 되게 놀라겠지.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려나? 뭐라고 할지 기대되는데.’
그 뒤로 짧게 소감을 마친 박무열은, 이제 자신의 주연을 영예의 자리로 불렀다.
“제가 살면서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아름다운 배우로부터 한마디를 듣고 싶습니다. 예, 방금 보셨던 그 배우입니다. 미처 못 다한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소년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한 차례 쉰 뒤에 고개를 들었다.
“<친절한 살인자>의 이수는, 제게 물음표였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하고 싶습니다.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인간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습니다. 죽지 마, 나의 원수. 난 이수처럼 실패하지 않아.”
가장 공적인 자리에서 나온, 무엇보다도 사적인 이야기였다.
< 53장 - 칸의 이찬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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