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52화 (152/250)

< 54장 - 가드 김도철 (2) >

이찬이 7월을 앞두고 귀국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첫 번째는 대종상 참석.

칸에서 지나칠 정도의 화제를 일으킨 덕분에 <친절한 살인자>의 홍보 일정에선 모두 빠질 수 있었지만,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라 있는 두 작품의 주연으로서 시상식에 불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기대돼! 대상, 감독상, 남우주연상까지 받을 거야. 이번에는 어떤 영화로 주연상 받으려나?”

“뭐래? 남우주연상은 못 받아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뱉은 뒷좌석 소년의 말에, 운전석의 염수진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왜? 주연상 탈 게 분명한 작품을 두 개나 했는데, 왜 못 받아?”

“형평성이란 게 있으니까요. 최우수작품상이랑 감독상을 박무열 감독님하고 오덕환 감독님이 챙기실 거예요. 그 상황에서 제가 남우주연상까지 받아버린다? 그러면 지나친 파격이라는 거죠.”

“칸에서는 그렇게 해줬잖아?”

“그쪽이야 심사위원들 재량이라 자기들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데, 이쪽은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한국사회 특유의 입김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종상 역시 수상작 선정에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핵심적으로 작용하지만, 주최측의 뜻은 그보다도 우선된다.

한때 문교부 산하였던 대종상은 지금도 파격보다 안정을 우선하는 시상식.

한 배우가 주연한 작품이 주요한 상들을 싹쓸이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경쟁작인 <주룩주룩>의 강정후 역시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다른 때였다면 남우주연상 수상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인물.

그는 자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전체관람가 가족영화로 무려 700만 관객이라는 대기록을 일궈냈다.

그건 이찬이 청불 영화로 천만 관객을 달성했던 것과도 비견될 만한 업적.

외화와 국산영화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흥행을 이뤄낸 것이니, 그 작품에 주연상도 주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힝······ 웃겨 진짜. 우리 이칸한테 주연상을 안 주다니.”

“이름 제대로 부르시죠?”

“얘는. 제대로 부른 건데? 칸의 남자 이찬, 줄여서 이칸. 한국에서는 이제 다 그렇게 부르더라. 마이 찬 날아갔어.”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니 원. 짜증나요.”

“하핫. 넌 참 별명 싫어하더라? 왜 그러는 거야? 다 애정으로 붙여주는 이름인데.”

소년은 별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한 달 넘게 함께 여행하며 더욱 친해진 매니저라고 해도 알려주지 못할 일은 많이 있는 법이기에.

과거 이군영의 먼 친척으로 입적하여 마침내 개명을 하긴 했지만, 사실은 ‘이찬’ 자체가 그에겐 별명이었다. 그렇기에 거기서 파생된 별명들이 우습게 느껴지는 것.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고아원장이 대충 번호 매겨서 붙인 강동일 따위가 내 이름일 순 없어. 부모도 안 지어준 이름을 나 말고 누가 짓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찬이면 충분해. 별명은 더 필요 없어.’

울적한 상념에 빠진 소년을 룸미러로 돌아보다가, 염수진이 문득 물었다.

“그 김도철 말이야. 정말 경호원으로 쓸 거야?”

“네.”

“으······ 난 좀 무서운데. 살인자잖아?”

“그 사람이 죽인 거 아니라니까요.”

“그렇긴 한데······ 정확히 어떻게 된 건데? 찬아, 누나한텐 이제 얘기해줘도 되지 않아? 어떤 원수고 어떤 용서인지······.”

그러나 이찬은 콧방귀를 뀌며 창밖만 볼 뿐.

결국 로드매니저는 방향을 바꿔서 현실적인 질문을 건넸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그러면 언제부터 일하는 거야? 언제 출소하는데?”

“10년 뒤요.”

“······으아?”

“그런데 꼭 형기를 다 채워야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번 재심이 잘되면 바로 나올 수도 있겠죠.”

재심.

이찬이 6월 안에 귀국한 두 번째 이유였다.

기본적으로 국내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 하여 한 번 판결된 사안의 변경에 우호적이지 않지만, 새로운 물증을 통해 기존의 형이 과도했음이 확인되었을 때에는 재심의 청구가 가능하다.

그리고 소년이 고용한 법무법인은 의뢰 이후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기존 판결을 뒤집을 만한 증거를 찾아냈다.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증인이었다.

“난 그것도 참 신기했어. 의뢰비만 날리고 재심은 불가능할 줄 알았거든. 5년이나 더 된 사건이잖아?”

“사실 당시에도 조사만 제대로 했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예요. 그걸 놓친 건······ 본인이 제멋대로 허위자백 해버린 탓이죠. 형사들도 존경스런 동료 형사의 죽음에 분개해 있었으니까 피의자에게 유리한 조사는 하려고 들지 않았을 거고.”

“진짜 그러네······. 자백은 왜 한 거래? 막 고문 당했나?”

“고문이라니, 언제 적 얘기에요? 어차피 자살할 거, 미움 받으면서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대요. 어리석은 선택이었죠. 덕분에 수원서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던 형사가 양아치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돼버렸으니.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래야 그분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랑 너랑은 무슨 관계야? 힌트 좀 줘.”

“남의 상처 헤집는 거 아닙니다, 누나.”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 진지한 어조였다. 그 말에는 염수진도 호기심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찬아. 안 그럴게.”

“아무튼, 변호사 만나고 나서 오디션까지 봐줘야 돼요. 시간상으로 문제없겠어요?”

“그럼 그럼. 이 공동작가 누나가 운전도 완전 잘하거든.”

“······본업에 충실하세요, 로드 누나.”

“그럼 그럼. 이 로드 누나는 글도 엄청 잘 쓴단다.”

시시덕거리는 이야기는, 그렇지만 온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날의 재심 준비와 오디션 결과 모두 소년에게 만족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김도철이란 인간은······ 볼 때마다 짜증나긴 하지만, 그것조차 극복할 거야. 이찬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하늘에서 가장 따뜻한 별이 될 거야.’

*

7월 8일의 대종상 시상식에서, 이찬은 2년 연속으로 인기남우상을 수상했다.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42회 대종상의 심사대상 중 둘뿐인 천만영화가 다 그의 단독주연작이었으니.

‘인기’만으로 따지자면 한국에서 그 소년보다 나은 인물이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 더해 <고등형사>의 홍주석은 남우조연상을 차지했고, 같은 작품의 황상태와 천세영도 각각 신인상을 수상했다.

하늘기획 이찬 사단의 약진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 영화의 연출자 오덕환까지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친절한 살인자>에서는 유세령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오랜만에 국내 트로피를 손에 쥔 것 외에는, 촬영상과 미술상 정도를 더 받게 됐다.

그 흐름 속에 소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대상은 <친절한 살인자>가 확실하네. 다른 이런저런 상을 <달콤한 꿈>이나 <주먹>에 나눠준 게 다 그 안정감을 위해서겠지. 그리고 남우주연상은 자연히 <주룩주룩>의 강정후. 흠······ 대종상 하여튼 별로야. 작년에 <684>로 주연상 못 탄 거야 조연식 아저씨가 막강했으니 어쩔 수 없다 쳤지만, 올해는 진짜 내가 최고였는데. 칸에서 남우주연상 받아놓고 한국에선 그게 안 되다니. 진짜 별로다 별로.’

그 생각대로, 남우주연상에는 강정후가 호명됐다. 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톱스타가 느긋하게 일어서서 웃어 보인다.

그를 향하는 객석의 환호성 역시 결코 작지 않았다.

늘 멋진 역할만 맡다가 갑작스런 연기변신으로 장애인 배역을 완성해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린 일이, 칸 남우주연상에 비길 만한 업적이라고 본 까닭.

그렇기에 이찬 역시 진심으로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정후가 무대 위에 올라서 내뱉은 수상소감은, 똑똑한 소년에게도 퍽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 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경쟁자가 좀 셌으니까요. 그렇죠? 두 작품으로 모두 주연상에 부합하는 명연기를 펼쳤으니······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이번 주연상에 공약까지 걸고 있던 친구니까요.]

깜빡 잊고 있던 이야기가 빠르게 머릿속에서 재구성됐다.

2004년 대종상에서 <684>의 ‘인하’ 역으로 인기상을 수상한 뒤, 소년은 사회자의 질문에 의해 공약을 걸었다.

2005년 대종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탄다면 그 출연료 전액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독립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식으로.

‘······아, 좀. 조용히 자기 소감이나 말하지 굳이 그걸 언급하네? 곤란한데. 그때야 독립영화도 잘 만들면 괜찮겠다 싶어서 속 편하게 말했던 거지만, 지금은 입장이 다르단 말이야. 칸 3관왕 배우가 무슨 독립영화야?’

마음은 그렇지만, 이미 현장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는 상황.

소년은 억지로 밝게 웃어 보였다.

[하하, 웃는 거 봐. 참 저렇게 올바른 친구는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한국 독립영화의 부흥을 위해서 개런티도 없이 여러 작품에 출연해주겠죠. 이찬이라면, 어쩌면 그 작품들로 수백억 예산의 영화들을 누르고 대종의 주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런 친구가 있어서 한국 영화계의 미래가 참 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이 영광을 오롯이 저 친구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국보급 배우 이찬, 파이팅!]

사실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장난이지만, 그 톱스타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완벽한 가면에 뒤덮여 있다.

오직 순수한 경외와 동료애만이 아우라처럼 그의 주위를 휘감았다.

그 모습에 몇몇은 이찬이 ‘제2의 강정후’라 불렸던 시기를 떠올렸고, 몇몇은 연예인X파일 찌라시에 나온 ‘친형제 같은 사이’라는 워딩을 떠올렸다.

어떻게 해석해도 훈훈한 이야기. 자연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채웠다.

속으로 욕을 하는 건 오직 이찬뿐이었다.

‘아, 나쁜 놈.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남은 독립영화 찍게 만들어놓고 내년에도 지가 주연상 타시겠다? 흥······ 음흉해 진짜. 두고 봐. 독립영화로 주연상 못 탈 것 같아? 나라면 할 수 있어. 이 거지 같은 대종상, 내가 예산 1억도 안 되는 영화로 주연상 받아간다. 조금만 기다려.’

*

TV를 틀면, 이찬의 얼굴이 나왔다.

그 사실에 김도철은 상당히 불편해 하는 중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보급 은행, 대한은행. 믿고 맡길 수 있어요.]

[뒷좌석이 편안한 차. 에어백이 네 개인 차. 운전자뿐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생각하는, 당신의 차.]

기존에도 많이 나오던 얼굴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 시간 사이에 최소 세 번씩 볼 정도도 아니었으며, 어린 나이 탓에 은행이나 차량 CF 등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찬은 한국 미디어의 주인공이었다.

‘자꾸 보니까 정 들려고 그러네. 짜증나 죽겠다. 꼴도 보기 싫은 놈. 미워해야 되는 사람을 용서한다고 나서서 재심까지 추진하고······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 아, 나가기 싫다.’

다른 수감자들이 알았다면 황당해서 욕했을 생각.

김도철은 TV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며 또 생각했다.

‘어른들 CF를 갑자기 몰아서 찍게 된 건······ 칸 영화제 덕분이려나? 국위선양에 기뻐하는 중장년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이 됐으니까, 제안이 마구 들어왔겠지. 저 새끼 저거 돈을 얼마나 버는 걸까? 한 달에 1억씩 벌고 그러나? 그래서 나 같은 놈한테도 경호원을 시켜주겠다고 그러는 건가?’

그가 하늘기획의 최대투자자로서 이미 100억 이상의 자산가라는 사실을 모르니 하는 생각일 뿐이었다.

사실 이찬 입장에서는 타겟층의 연령대를 극복한 그 CF들조차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고착된 이미지는 배역 스펙트럼을 줄이며, 그 계약 조항들은 운신의 폭을 좁힌다. 연기만으로도 세계를 흔들 수 있는 배우에게 광고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칸을 점령한 직후의 소년은 한동안 회사의 내실만 다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시놉시스를 보는 일 없이 공개오디션 등을 추진했던 것.

그러는 동안 적당한 인지도를 유지할 수 있게끔 CF 계약을 몰아서 받았을 뿐이었다.

지금이야 강정후의 돌발발언으로 인해 독립영화 기획안들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게 됐지만.

‘모르겠다, 모르겠어. 일단 나가게 되면······ 그 영화나 봐야지. 그걸 보면 이해가 좀 되려나. 그놈이 뭔 속셈인지······.’

바로 그 순간에, 감방의 문이 흔들리고, 복도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방(수용시설 내의 주간 작업이 마무리되어 출입이 금지되는 일) 이후의 사동 출입이란 꽤 드문 상황.

자연히 수감자들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그리고 교도관이 김도철을 불렀다.

“1620, 나와. 출소다.”

“······아하.”

“김 형, 축하허요.”

“도철이······ 나가서 잘 살아라.”

수감자들의 어색한 축하인사 속에서, 그는 감방을 빠져나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도망자 처지였던 탓에 짐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금세 중문을 통과하고 교도소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노을진 여름하늘을 시야 가득 담게 되었다.

“하······ 바깥 공기는, 따뜻하구나······ 좋다······.”

“좋아요? 난 더워서 짜증나는데.”

갑작스런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교도소 외벽의 담벼락에 기대 서 있던 선글라스의 남자가 보였다.

“······이찬?”

“정답. 가죠. 주차장에 차 대놨어요.”

“어딜······?”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가자고요, 김도철 형.”

대단한 관찰력을 갖지 못한 김도철이야 몰랐지만.

형이라는 말에 담긴 그 심정은, 무한히 복잡하고 무거웠다.

< 54장 - 가드 김도철 (2)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