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54화 (154/250)

< 55장 - 감독 이연진 (1) >

대한민국 극장가는 독립영화인들에게 있어서 높은 벽이다.

블록버스터들이 쉽게도 500만을 넘기게 되고 무려 네 편째의 천만영화가 등장한 2005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볼거리 많은 영화에 익숙해진 대중은 유명한 배우도 없이 소소하게 촬영된 소자본 영화에는 큰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극장가 역시 예술성보다는 상업성에 집중해 상영작을 선별하게 되었다.

예술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그 가상한 뜻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매니아들을 제외하면 거의 찾지 않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이칸의 공약’은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상상해본 적 없는 거대한 희망을 안겨줬다.

무려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획득한, 세 편의 천만영화를 보유한 슈퍼스타 배우.

그런 이찬이 자신의 대종상 공약을 지켜 한동안 독립영화에만 출연하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다.

그 이슈는 이미 각종 일간지와 영화지를 뒤덮었다. 거기에 이찬이 출연하는 영화니, 100개 이상의 스크린도 쉽게 따낼 수 있을 거라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

그렇기에 소년의 공약은 감독들에게 ‘찬 영화제’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대단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 가상의 영화제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감독들 중에 이연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5년차 독립영화 감독. 그러나 세 편의 영화가 소소한 수상은커녕 영화인들 사이에 알려지지도 못했으며, 그렇기에 생활형편은 처음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보다도 못해진 실패자.

그녀는 자기 영화인생의 명운을 걸고 찬 영화제에 뛰어들었다.

무려 9년 동안 준비해온 필생의 역작으로.

그 시나리오는, 그러나 이제껏 까이기만 일곱 차례를 거듭했던 작품.

아무리 독립영화라곤 하지만 영상미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인 까닭이었다.

그에 관해 조금이나마 비호하자면, 이연진은 무협소설 작가 김용의 대단한 팬이다.

그리고 ‘신필’이라 불린 그가 집필한 작품 중에서 가장 분량이 짧은 <설산비호>를 인생작으로 생각하는 인물.

그러다보니 많은 면에서 그 연출의 영향을 받게 됐다.

<설산비호>는 겨우 단행본 1권 분량의 짧은 무협소설로, 액자식 구성을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만을 가지고 초반부의 전개를 이끌어나간다.

굳이 말하자면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와 비슷한 구성.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오히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이야기 속에 감춰진 거짓말과 오해를 추리하면서 진상에 다가가는 추리물의 양상을 따르고 있다.

그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은원과 갈등이 드러나며 점차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다.

이연진이 자신의 필생작 시나리오에 차용한 것이 바로 그 긴장감이었다.

설산비호만큼 흥미진진한 대화의 영화를 만들어보자-

그 소설에서 설산 꼭대기에 갇혔던 인물들처럼, 태백산맥 한복판의 산장에 갇히게 된 인물들을 설정해, 그들이 과거에 벌인 죄들이 뒤얽혀 벌어지는 한판 서스펜스를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으로 오직 산장과 그 주변 일대만이 로케이션으로 활용되는 소자본 영화를 기획했던 것이다.

참신한 발상이고 흥미로운 소재이긴 했다. 하나뿐인 배경이라는 그 독특함만으로도 어느 정도 시선을 끌 수 있을.

그렇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섯 명의 등장인물만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긴 러닝타임을 끌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배우에게 그야말로 미친 듯한 연기력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

“이건 뭐······ 조연식에 임호준에, 뭐 그런 잘나가는 배우들로만 채워도 잘 될지 모를 시나리온데요? 이런 걸 어떻게 만듭니까? 이딴 거 말고, 좀 자극적인 걸 가져와 봐요. 왜 쉬운 거 많잖아? 살인자 얘기, 조폭 얘기, 그런 거. 아니면 아예 산골 들어가서 다큐를 하나 찍어보시든가.”

한때 친했다고 생각했던 영화사의 말단이 해준 얘기는, 뼈를 맞는 것처럼 아팠지만, 정론이었다.

공익사업으로 지원을 받는다 해도 1억 예산을 꾸리기가 힘든 게 독립영화 시장이다. 조연 개런티조차 1억을 호가하는 조연식 같은 거물을 데려올 방법은 전무했다.

그렇게 압도적인 연기파 배우들을 데려와 본들 성공을 가늠하기 힘든 시나리오에, 독립영화 위주로 활동하는 연차 짧은 배우들을 꽂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꿈일랑 고이 접어두고 중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며 조금씩 적금을 붓고 있던 이연진.

그녀에게 이찬의 공약이란 마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렇지만 그 찬 영화제에 참여하려는 감독들의 행렬은, 마치 골드 러시였다.

“사계 프로덕션에서 검토 중인 시나리오만 벌써 60개가 넘는다더라. 난 한국에 독립영화 감독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잖아. 경력 10년 넘는 감독들까지 대거 몰렸다고 하던데, 거기서 누나가 경쟁이 되겠어?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충무로에서 영화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남동생의 말에, 그녀는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2005년 10월 2일이 되어 그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이연진 감독님? 나 사계의 계진행입니다.]

“예······? 계, 예? 계 감독님!? 아,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귀청이야. 아무튼 반가워요. 보내주신 시나리오 잘 읽어봤고, 간단하게 미팅을 좀 할까 해서 연락드렸어요.]

“예? 에, 예?”

[······시나리오 보내신 이연진 감독님 맞죠?]

“예, 예.”

[미팅 하자고요. 나하고 이찬하고 같이.]

“예······ 예?”

그 통화로 인해 계진행은 이연진을 아주 답답한 사오정이라고 판단해버렸지만, 사실과는 좀 달랐다.

오히려 그녀는 이해력도 좋고 소통도 잘하는 인물.

다만 기대치도 못했던 꿈속의 꿈이 실현돼버린 상황에 재빨리 이성을 되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미팅날이 다가오며, 이연진의 심장은 점차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후반작업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잠을 쫓고자 에너지드링크를 열 몇 캔 들이켰던 날처럼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이러다 혹시 미팅 전에 심장질환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혼자 걱정하기 시작하고도 다시 며칠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녀는 계진행과 이찬 앞에 서게 되었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연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연진은 차마 맞은편 사람들을 직시하지 못하고 천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외쳤다.

그 말에, 터무니없이 담담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앉으세요. 늦으신 거 아니고 저희가 일찍 온 거예요. 계 회장님하고 할 얘기가 좀 있었거든요.”

“그, 그러면 전 나가 있겠습니다!”

“예? 아하하. 아뇨, 그러실 건 없어요. 앉으세요 얼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 앉으며, 이연진은 드디어 소년 이찬을 마주봤다.

2005년 칸의 두말할 나위 없는 주인공. 세계 영화인들과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 시대의 연기천재.

그는 까만색 트레이닝복과 까만색 모자 차림이었다.

“아······ 복장이 좀 그렇죠? 죄송해요. 방금까지 운동하고 오는 길이라. 복원된 청계천이 뛰기 참 좋더라고요. 보셨어요?”

“아, 아뇨······.”

“말씀 편하게 하세요, 감독님. 청계천 개장했다고 해서 좀 뛴 거지, 감독님을 얕잡아보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요.”

“얕잡아보셔도 괜찮습니다······ 하하.”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그리고 감독님이 얕잡아봐도 괜찮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촬영장의 총책임자가 되셔야 되는데.”

그렇지만 나 같은 게 어떻게 감히- 이연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17세 소년이라곤 하지만, 이미 세계 최고의 배우 반열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국내에서조차 한 차례의 수상도 해보지 못한 감독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두 차례나 말을 낮추라고 한 상황. 거기에 대고 또 존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그렇게 할게······.”

“예, 감독님. 아무튼 시나리오 참 재밌게 읽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던데요?”

“앗······.”

“대단해요. 단지 대사만 가지고 이렇게 긴장감 있게 극을 끌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재독 삼독하면서 장치들을 찾아내는 재미까지 있었어요.”

“고, 고마워!”

“고맙긴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딱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들은 아무래도 염려가 좀 되시나 봐요.”

“그, 그렇겠지!”

“예. 일단 좀 심각할 정도로 볼거리가 없으니까요.”

“그럼, 좀, 고쳐볼까?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그런 이연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찬은 생각했다.

‘오덕환 아저씨 생각나네. 성격 자체는 극과 극이지만, 그분도 한동안 상업성과 타협하면서 어정쩡한 영화만 만드셨다고 했었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 특출한 재능을 마흔이 넘어서야 간신히 개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기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60여 편의 시나리오를 읽고 선별한 작품이다. 뜯어고칠 거였다면 계진행에게 추천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안 돼요. 무조건 이대로 가야 됩니다. 사소한 오류나 고증 문제까지도 어디까지나 감독님 몫이에요. 관련해서 사계 프로덕션 분들이 의견을 주시긴 할 건데, 철저하게 작품성만을 생각하면서 고쳐주세요.”

“야, 누가 들으면 네가 사계 대표인 줄 알겠다?”

“시켜주시면 잘할 자신이 있긴 한데.”

“음······ 그럴 것 같긴 한데, 넌 배우일 때 더 멋져.”

이미 세 편의 천만영화를 배급하며 충무로의 군주라 불리고 있는 계진행이, 소년의 친삼촌처럼 푸근하게 웃는다.

“얘 말대로야, 이 감독. 솔직히 난 이거 좀 별로였어. 내용은 재밌지만 대중 입장에서 막 보고 싶을 작품은 아니거든. 그렇지만······ 이번 독립영화 제작지원 건은 어디까지나 이찬 때문에 시작한 거니까, 끝까지 얘 말 들어줄 예정.”

“그리고 전 입 하나도 안 댈 겁니다, 감독님. 그 말은 뭐냐 하면, 완전히 전권을 드리겠단 얘기예요.”

“아······ 와······.”

“괜찮으시죠? 하실 수 있죠?”

“물론, 할,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상상해본 적 없는,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대형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영화라 해도, 제작지원을 받는 이상 얼마간 방향성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작품성을 위해 다른 전문가가 붙는 ‘자문’의 형식으로.

그러니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만들려거든 적금 털고 보증금을 빼서 자주제작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속칭 찬 영화제는 사계 프로덕션 측의 1억 원 제작지원으로 기획되었으니, 당연히 그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라는 말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표는 이찬 의견이 중요하다고 하고, 그 이찬은 감독에게 전권을 주겠다 한다.

거장이라 불리는 명감독들만이 받을 수 있는 신뢰였다.

그 포인트에서 이연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왜······? 믿을 수 없는 감독이고, 보잘것없는 작품인데, 왜 이렇게 철저하게 신뢰해주는 걸까?’

칸 3관왕이라는 영예를 뒤로하고 독립영화 출연에 전념하겠다 한 결정이야, 원수조차 용서하겠다 말한 훌륭한 인품으로 해석하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독립영화의 작품성 제고를 위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니.

풋내기 감독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자대비였다.

“저······ 이찬 군?”

“찬이라고 부르세요.”

“어, 찬아. 저,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우습다는 생각은 들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

“얼마든지요.”

“내 작품이, 정말 괜찮아? 그동안 정말 많이 까였던······ 그러니까 반려됐던 시나리오인데.”

“아, 그 질문 나올 줄 알았어요.”

히죽 웃은 소년이 어깨를 으쓱이고 옆을 돌아본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건, 이찬보다는 조금 왜소해 보이지만 인상이 무척 거친 사내와, <친절한 살인자>의 공동작가라는 타이틀로 유명해진 이찬의 여자 매니저.

그중 매니저 쪽이 염화시중처럼 마주 웃었다.

“그 작품, 최고예요. 저 이연진 감독님 팬 됐잖아요?”

“고, 고맙습니다!”

“아니 누나, 그런 얘기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 아니었어?”

“아 됐어. 내가 설명해요. 감독님 작품 말이에요, 한계가 아주 명확해요. 그렇죠?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회상 씬이라도 들어가는 게 아니라 순도 100% 대화로만 전개되는 스토리니까요. 그러다보니까 연기자들의 활약이 아니면 아예 볼 게 없는 영화라는 거죠. 그래서 많이도 까이셨던 거죠?”

이연진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어수룩한 모습에, 소년은 가슴을 펴며 낄낄 웃었다.

“세상에 약점만 있는 작품이 어디 있겠어요. 어느 씬에나 보여야 할 곳과 보이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그중 보여야 할 곳을 보여줄 줄 아는 이들을 우리는 명감독이라 칭한다······ 누가 한 말인지 아세요?”

“박무열 감독님!”

“맞아요. 그분 영화평론 책에 있는 구절이죠. 그 말대로예요. 감독님 영화에도 강점과 약점이 있어요. 그중에서 약점을 보면, 당연히 이건 안 될 영화죠. 1억이 뭐야, 천만 원도 지원하기 힘들죠. 근데 강점을 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지잖아요. 세상에 이만큼······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배우에만 집중하는 영화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 말에, 이연진은 눈을 크게 떴다.

끊임없이 쿵쾅대던 심장의 소리마저 듣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적어도 감독인 그녀에게는.

“그러니까······ 그래서 선택한 거야? 완전하게,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네 연기력만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예? 어라.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시네. 전 더 이상 보여줄 거 없는데요? 그래야 될 필요도 없고요.”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고의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따낸 소년에게 그 이상의 연기력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반대예요. 감독님 작품은 저만 완성시킬 수 있어요. 몸값을 떠나서, 조연식 선배님도 못 한다고요. 그래서 고른 거예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이연진은 눈만 깜빡였다.

제1회 찬 영화제 대상이 <설산>으로 결정된 순간이었다.

< 55장 - 감독 이연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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