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장 - 감독 이연진 (2) >
“누나, 봉 잡았네.”
동생 이연철의 말에, 이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진짜 말도 안 되지.”
“이래저래 말이 안 돼.”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수상경력도 없는 누나가 쓴 이상한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할 수 있지?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였는데.”
“야,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야? 진짜 나쁘다 너.”
샐쭉해져서 토라진 누나를 보며 이연철은 킥 웃었다.
“축하한다는 얘기야. 잘됐다, 누나. 한번 잘해봐.”
“잘해야 되긴 하는데······ 무서워 죽겠어.”
“뭐가 무서워? 이찬이야. 지금까지 영화든 드라마든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괴물. 그런 애가 누나 각본이 최고라고 치켜세워준 거잖아?”
“그러니까 무서운 거야. 내가 그 첫 번째가 되면 어떡해?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미래가 창창한 배우 필모를, 내가 처음으로 망쳐버리면 어떡해?”
그 말에는 이연철도 진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을하늘>의 아역 시퀀스로 주연들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고, <미스 스캔들>을 슬리퍼히트 시킨 뒤, 3년의 공백기를 지나 복귀한 직후에 <어사>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최초의 천만영화 <684>를 만들었으며, 이후에도 <연애의 조건>으로 미니시리즈 최고시청률을 달성하고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로 연이어 천만 관객을 달성한 배우다.
그런 그를 쓰고도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면, 감독 이연진의 영화인생은 끝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우······ 무섭긴 하네. 근데 누나, 다르게 생각해봐. 그만큼 걔 선구안이 좋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작품을 잘 보니까 계속 성공했던 거고, 그 연장선상에서 누나 작품도 높이 산 걸 거야. 나 같은 애한테는 안 보이는 장점을 봤겠지.”
“그건, 맞아.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란 말이야. 지금까지 찬이가 했던 작품들 보면 동료들도 거의 대단한 분들이었어. 신인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로 호흡 맞춘 배우들은, 명진아, 신수영, 안정록 선배님, 조연식 선배님까지······ 다 대단한 분들이었단 말이야.”
“어, 그랬지. 근데 그게 왜? 이번에도 하늘기획 배우들이 같이 출연해주는 거 아냐? 우정출연 개념으로.”
“······오디션 본대. 회당 페이 10으로.”
상업영화의 주연들은 보통 고정된 액수로 계약을 맺는다. 핫한 청춘스타들의 개런티가 보통 1억에서 2억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이찬 같은 경우에는, 칸 프리미엄이 붙은 덕분에 5억까지도 치솟을 거라 평가되는 상황.
스크린 300개 이상을 먹고 들어가는 블록버스터들은 배우에 그렇게까지 돈을 쓸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영화의 경우 얘기가 달라서, 마치 단역처럼 촬영 회차별로 일당을 지불하곤 한다.
그게 적으면 5만원이고, 많아야 20 정도.
장편으로 50회차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천만 원 안쪽에서 페이가 정리되는 것이다. 그런 개런티로 대단한 배우를 뽑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이연진은 ‘찬 영화제’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칸에서 돌아온 이찬 본인이 영화계에 공헌하기 위해 노개런티로 출연하는 작품인 만큼, 그의 대단한 인맥들이 다른 배역들을 맡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조연식이 못 하는 걸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장담한 소년은, 자기와 함께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책임져야 할 배역 넷을 전부 오디션으로 뽑자고 제안했다.
“지, 진짜야? 그게 끝이야? 우정출연 없어?”
“그, 하늘기획 신인들도 오디션 보내겠다고는 했는데.”
“신인? 아, 혹시 천세영, 이런 신인들? 그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아니, 아예 필모 없는 신인들이래.”
“미친! 그게 뭐 하는 짓이야? 그래서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 누나는 그 말 듣고 그냥 알겠습니다 한 거야?”
“아니······ 원래 그게 맞긴 하잖아. 독립영화에 상업영화 배우들 왕창 써서 성공한다고 해봤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들 인지도가 전부 높아버리면 극에 집중이 되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저 말고는 전부 신인으로만 쓰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해.”
틀린 말은 아니어서, 이연철도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 직후에 테이블을 쾅 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신인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는 영환데, 배우 인지도 따져서 뽑을 일이냐고.”
“······그래도, 신인 중에 실력 있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그거야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들 얘기지. 한 오디션에서 네 명이나 되는 천재 신인을 어떻게 뽑냐? 아, 답답이 진짜. 누나 망했어 아주!”
“너는, 악담을 하고 그래······.”
울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이연진은 하늘에 빌었다.
이 불쌍한 감독을 어여삐 여기시어 부디 네 명의 천재 신인을 오디션에 보내달라고.
그리하여 위대한 소년배우 이찬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는 대역무도한 짓거리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그 간절한 소원에, 하늘이 응답했다.
*
<설산>에는 총 다섯 명의 배역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인물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산장 주인.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인 데 더해 산장의 구조에도 익숙하지 않아 주변의 의심을 사는 ‘지하’라는 배역이다.
두 번째 인물은 산장 인근의 매점 알바.
오랜만에 시내에 가려고 차를 몰던 중에 폭설을 만나, 하는 수 없이 산장의 첫 번째 손님이 된 ‘수남’이다.
세 번째 인물은 산장의 두 번째 손님인 ‘태석’.
활기찬 성격으로 분위기메이커에 해당하지만, 갑자기 말을 멈추고 창밖을 보는 등 수상한 행동거지를 보여준다.
네 번째 인물은 산장의 세 번째 손님인 ‘지수’.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이며, 중반부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주변의 의견에 따르는 태도를 취한다.
다섯 번째 인물은 산장의 네 번째 손님인 ‘호재’.
몸에 문신이 가득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로, 독단적으로 움직이거나 주변을 무시하는 등 긴장을 부르는 배역이다.
그 다섯 명이 산장 안팎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설산>의 하나뿐인 시퀀스.
그것만으로 100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채워진다.
단 한 명이라도 배역에 맞지 않거나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가 있다면, 그 즉시 몰입감이 깨지고 말 터였다.
그렇다곤 하지만 그 전원을 인지도 있는 배우들로 채워버리는 건 오히려 악수가 될 수 있다.
뛰어난 배우일수록 쪼가 많은 법. 여러 작품에서 반복된 이미지는 그 인물에 대해 선입견을 만들고, 관객의 감상은 극의 배역에 집중되기보다 배우들에게만 향하게 된다.
즉, 익숙한 얼굴들로 인해 서스펜스가 깨져버리는 셈이다.
그게 공포영화 등에서 과감하게 신인배우를 기용하는 이유.
연기력에서는 조금 처지더라도 낯선 얼굴을 캐스팅함으로써, 관객이 오직 극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설산>의 경우, 비록 어떤 귀신이나 괴현상도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의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서스펜스에 몰입해야만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기성배우가 들어가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영화- 소년은 그렇게 확신했다.
박무열의 영화평론 서적을 비롯해 여름 내내 영상 관련 서적을 무수히 읽어댄 결과였다.
‘물론 조혁수 선배랑 강정후 선배 정도면 어떻게든 관객이 새로운 배역에 집중하게끔 만들 수 있겠지만······ 그 인간들한테 고개 숙여 우정출연 부탁하긴 싫단 말이야. 그리고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나야말로 참스승 이찬 어르신이니까.’
남태형. 천세영. 심요셉.
무려 세 인물이 이찬의 지도를 통해 스타배우가 되었다.
박준호와 김성대 역시, 아직 유명해지지 않았을 뿐, 평단의 갈채를 받는 연기를 펼친 바 있고.
그렇기에 이찬은 <설산>이야말로 자신이 잡아야 하는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괴작이 성공할 수 있는 수천만 분의 1의 가능성을 100%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이찬 사단’의 압도적인 소개를 위해서.
“그런데 찬아. 그냥 네가 캐스팅을 한다고 말하지 그랬어? 굳이 오디션까지 안 봐도 되는 거잖냐. 어차피 신인감독이라 뭐라고 하지도 못했을 텐데.”
머리를 밀고 진정한 대머리로 거듭난 정창영 대표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그렇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야 제가 꽂아준 셈이 되잖아요.”
“사실이잖아? 시나리오 내정되자마자 합숙 시키면서 맹연습 시키고 있었던 녀석이.”
“그렇긴 하지만, 안 돼요. 그 후배님들은 감독의 선택을 받아야 해요. 그래야 촬영 중에도 잡음이 없죠.”
“감독한테 존경심을 느껴야 한다? 그것도 그냥 네가 꽂아주고 현장에서 직접 컨트롤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이번 작품은, 저한테도 꽤 큰 도전이니까요.”
“오······ 네가 이렇게 어려워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네 배역 역시 작중에서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들이지만, 이찬이 맡게 될 주인공 ‘지하’는 그중에서도 특히 난이도가 높은 캐릭터.
그 안에 담겨 있는 긴 역사를 체화하고자 이찬은 작은 잡념조차 갖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창영에게 거기까지 설명하기는 좀 민망하다고 느껴져,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촬영장 감독은 어디까지나 연출 몫이에요.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 이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어요.”
“아, 그래? 참 좋은 태도긴 한데, 그게 생각처럼 될지- 아, 전화 왔다. 이 감독인데? 스피커폰으로 받을게.”
이연진 감독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오디션 방금 전에 모두 마쳤습니다. 그랬는데, 저······ 하늘기획에선 아무도 안 오셨던데요······.]
“흐흐흠. 어떻게 선발은 잘 되셨습니까?”
[어, 예. 그······ 혹시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배역에 딱 맞다 싶은 배우들이 있었어요. 다들 회사 없는 신인들이었는데, 겨우 두 씬만 갖고 어쩜 그렇게 배역 분석을 잘했는지, 정말 깜짝 놀라버렸습니다. 연기력도 다들 출중합니다. 이 배우들이라면 찬이한테 누가 되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잘 좀 말씀을 해주실 수 없을까요? 물론, 그, 하늘기획 신인들도 따로 오디션을 보신다고 하시면, 봐야 맞겠지만······.]
“예, 예. 혹시 명단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예! 심대범, 이기자, 오남현, 나지은, 이렇게 넷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뒤, 하늘기획의 대표와 최대투자자는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아이고, 이거 참. 찬아, 네가 말씀드려라.”
[어? 차, 찬이도 거기 있습니까?!]
“예, 감독님, 좋은 작품 쓰신 분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 네 배우 모두 하늘기획 소속이에요.”
[예? 어, 예?]
“일부러 소속사 쓰지 말고 참가하라고 한 거예요. 감독님께서 살펴보시는 데 혹시 선입견이 생길까 봐요.”
[어, 어, 예?]
“그러니까 이번 영화는 전부 하늘기획 배우들로만 구성이 된 셈이네요. 어떠세요? 제가 장담한 이유가 있었죠?”
[어어······ 예에?!]
게진행에 이어 이찬까지, 이 감독 혹시 사오정 아닌가 하는 오해를 품게 됐다.
*
“결국 그걸로 가기로 한 거군요. 중간에라도 뒤집힐 줄 알았는데.”
우습다는 듯 콧등을 찡그리는 강정후를 보며, 조혁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자기들끼리 이걸로 독립영화의 기적을 만들어보자고 으쌰으쌰 하고 있던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듣는 겁니까?”
“너만 인맥 만드냐? 나도 인맥 있어.”
“선배가 하늘기획에 무슨 인맥이 있어요?”
“그쪽 말고, 사계. 거기 초창기에 자리 잡게 해줬던 게 내 작품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연락 자주 하지.”
“아, 그 <공적>. 그거 시리즈로 갈 것 같더니, 더 안 한답니까?”
“그럴 것 같다. 우리 계 회장님께서 요즘은 투자배급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극장 인수도 추진 중이던데.”
“극장 인수요? 그렇게 많이 벌었답니까?”
“그랬겠지. 천만영화 두 편을 연달아 냈으니까.”
이찬이 주연한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 외에도, 계진행의 ‘세계’는 이용빈 감독과 신유벽 감독의 작품으로도 꽤나 흑자를 봤다.
비록 국내에서는 빛을 못 봤지만 해외에서는 달랐던 것.
‘코리아의 습격’이라는 프레이즈로 화제가 된 칸 영화제의 출품작인 덕분에, 유럽 각국에 설립한 현지 법인으로 직접배급에 나서, 꽤나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거참. 대단한 사업가 나셨네요.”
“덕분에 나도 앞으로는 해외 쪽으로 좀 풀릴 것 같다. <달콤한 꿈>이 설마 그쪽에서 먹힐 줄은 몰랐는데, 사업적으로 잘 풀어주셨어. 이제는 단순히 작품만 잘 만들면 끝이 아니라는 거지. 세계 곳곳에 볼 영화는 넘쳐나니까.”
“흠. 난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관심 없으면 어떡하냐? 기획사 대표라는 놈이.”
“소속 배우한테 놈 소리 듣는 대표 말씀이시죠?”
“아, 실수. 주의하도록 하지.”
빙글빙글 둘러대는 그 낯에는, 강정후도 픽 웃고 말았다.
“참나. 됐고, 선배 그 작품은 어때요? 제준원 감독님 거.”
“우리 <몬스터>는 아주 잘되고 있지. 아주 잘······ 솔직히 말해서 좀 머리 아프긴 해.”
“어떤 면에서요? 감독님이 좀 디테일하다고 듣긴 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CG 때문에 말이다. 크로마키 생각하고 괴물을 연상하면서 연기해야 되는데, 호준 선배 정도 아니면 거기에 적응을 잘 못하더라. 이래서야 진짜 잘 될지 모르겠어.”
“선배가 재미없다고 한 작품 아닙니까. 당연히 잘되겠죠.”
“······기분이 좋을 듯 나쁠 듯······. 그러는 너는 어떠냐? <왕의 광대> 이제 슬슬 마무리 단계 아냐?”
“잘되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연말에 걸 수 있겠어요. 이것도 선배가 더럽게 재미없다고 했으니, 분명히 천만 가겠죠.”
“하하하. 그래, 너도 나도 내년에 천만 찍자.”
대화가 끝나갈 무렵, 강정후는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어땠습니까? <설산>. 시나리오 읽어보셨죠?”
“흠. 읽어보긴 했는데······.”
“어땠습니까? 재미있습니까, 없습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모르겠다고요?”
“어. 그건 모르겠다. 영화로 봐야 알겠어.”
조혁수에게서 들어보리라 생각해본 적 없는 평가.
한때 ‘제2의 강정후’였지만 이제는 ‘이칸’이 되어버린 배우의 유일한 대적자는, 황당하다는 듯 웃어버렸다.
< 55장 - 감독 이연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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