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56화 (156/250)

< 55장 - 감독 이연진 (3.) >

“아, 출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감금이야. 이젠 아주 산구석에 몇 달을 처박혀 있게 생겼네.”

캐리어에 짐을 싸면서, 김도철은 들으라는 듯이 투덜댔다.

그러나 이찬을 향해 한 말에 복도를 지나가던 신인배우 이기자가 대답한다.

“형은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요? 이 좋은 기회를 앞두고.”

“이런 씨······ 좋은 기회는 또 뭐냐?”

“공짜로 여행 가는 거잖아요. 헤헤. 완전 좋지 않나?”

“거기가 여행 갈 데냐? 끔찍하게 춥겠더만.”

“에이. 뒤에 산 있어, 앞에 계곡도 흘러, 배산임수로 완전 최고잖아요? 눈이라도 내려봐. 이야······ 진짜 절경일 거야.”

“그거 치우느라 중노동일 거다, 이 새끼야.”

“내가 다 치워줄게요, 형. 형하고 찬쌤은 즐기기만 하면 돼.”

지나치게 낙천적인 놈 같으니- 생각하며 김도철은 거실로 도망쳤다.

그곳에선 이찬과 염수진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첫날부터 촬영장 스케치요? 박무열 감독님 작품도 아니고.”

“그렇지만 찬이 네 작품이잖아? 다들 궁금해하는 차기작 소식이니까, 자연히 방송도 몰릴 수밖에.”

“그런 갤러리는 좀 불편한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만큼 작품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오대산에 마침 첫눈 왔다더라고. 경치 좋을 거야.”

“하여튼 방송국 놈들 할 일도 없다니까. 그래요 그럼. 오라고 해요.”

방송3사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취재 얘기였다. 이찬의 신작 크랭크인 현장에 스케치 촬영을 나온다는 것.

김도철은 이기죽거리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야, 이찬. 나한테 휴가 좀 줘야 되는 거 아니냐?”

“형한테요? 제가요? 미쳤어요?”

“이 새끼가. 야, 거기 가서 경호원이 할 일이 뭐 있어?”

“내가 산에서 굴러 떨어지면 몸 바쳐 구하셔야죠.”

“아니······ 됐고, 이거 근로기준법 위반이야. 쉬게 해줘.”

“뭐래. 나 쉴 때 형도 쉬잖아요?”

“내가 쉬고 싶을 때도 있는 거 아니냐?”

“그딴 거 관심 없는데요? 미안하다면서요? 뻥이었어요?”

“아니······ 미안한 거랑 일이랑은······ 별개 아닌가?”

“진정성이 안 느껴지네. 아, 기분 나빠졌어.”

“거 진짜! 더러워서 간다 가.”

이제는 익숙해진 막무가내 대화법. 잠깐 구경하던 염수진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불쾌한 듯 바라보다가, 김도철이 다시 물었다.

“영화 망할 것 같지 않냐?”

“이 형이 주연배우 앞에서 악담을 하시네?”

“너 말고 다른 애들이 다 이상해. 저기 백날천날 하하호호 웃고 다니는 이기자 부대 새끼부터 시작해서······”

그 타이밍에 짐을 들고 거실로 나온 이기자가 히죽 웃는다.

이기자 부대 출신인 건 아니지만, 김도철 말대로 바늘로 찔러도 웃을 것처럼 늘 낙천적인 청년이었다.

“······그리고 심대범 그 인간은 혼잣말 중얼거리면서 눈 희번덕대는 게 완전 미친놈 같고, 나지은은 하루 종일 손등으로 침 닦으면서 아이돌 사진이나 오리고 있고, 오남현은 덩치는 큰 새끼가 맨날 지 좆만 한 건담 보면서 헤헤거리고.”

“와. 마지막은 칭찬 아닌가?”

“야, 그냥 하는 말이지.”

“아무튼 캐릭터 파악 잘하셨네요. 좀 특이하죠, 그분들이.”

심대범, 이기자, 오남현, 나지은.

하늘기획이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그 네 신인은, 사실 누구 하나 흔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첫인상이 그나마 가장 평범해 보이는 이기자조차 계속 보면 바보 아닌가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근데 형. 성격이란 건 연기랑은 무관해요.”

“뭐? 미친놈들이 연기를 잘한다는 뜻이냐?”

“그런 건 아니고, 연기력과 무관하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일수록 기회를 잡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죠.”

“······뭔 말이야?”

“오디션 얘기예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디션에선 첫인상이 많은 걸 좌우하니까. 처음에 엉망으로 해놓고 뒤에 지정연기 잘한다고 해서 뽑힐 가능성은 높지 않거든요.”

그 스스로 연기를 해봤거나 연기에 광적으로 관심이 많은 감독이라면, 오디션장에서도 다른 건 제쳐두고 연기에 대한 열정만을 눈여겨보기도 한다.

일례로 박무열이 그런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일식집 요리사 배역을 뽑는데 오디션장에 회칼을 들고 들어온 신인배우가 있었다고 한다. 박무열은 그녀에게 단숨에 사로잡혀 주조연에 캐스팅했고, 그 신인배우가 과연 자신의 ‘미친’ 연기력을 입증하며 배역을 120% 소화해냈다.

그 작품이 바로 <오이디푸스>였다.

그렇게 때로는 광기 속의 열정이 낭중지추처럼 돋보이게 되는 일도 있지만, 사실 드문 사례라 할 수 있었다.

촬영장의 시간은 롤(카메라가 촬영 중인 상태) 때보다 롤이 아닐 때가 더 긴 법.

대부분의 감독들은 인간적으로 소통하기 편한 사람과 작업하길 바라며, 대부분의 경우 그런 배우들이 연기에도 능하다. 감독의 디렉션을 더 잘 받아들이는 까닭.

그렇기에 그들 넷은 오디션에서 매번 낙방만 하곤 했다.

척 봐도 좀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성격으로 인해, 면접관 중 대다수에게 불쾌감을 안겨주곤 했던 탓이었다.

작품 오디션도 그럴진대 기획사 오디션은 오죽했을까.

사회성 결여 따위의 모욕적인 말까지 들으며 무시를 당했던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대부분 기획사에는 공포심까지 갖고 있던 케이스들이었다.

하늘기획 오디션 역시 이찬이 직접 심사한다는 문구가 없었다면 결코 찾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 대로, 과연 이찬은 달랐다.

거죽을 통해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소년은 그들이 겉으로 보여주는 행동 대신 눈빛과 표정으로 진심을 읽었다.

평상시의 말주변이나 성격 대신, 오직 연기할 때의 실력만을 천부적인 관찰력으로 세세히 평가했다.

그렇게 겉보기와 달리 뛰어난 재능과 무한한 열정을 가진 8인을 선발하게 된 것이다.

그게 김도철의 재심이 시작된 지난 8월의 일.

그리고 10월이 되어 그가 출소한 직후에는, 그 8인 중 4인이 선발되어 <설산> 맞춤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칸의 남자 이찬이 주재하는 스파르타식 합숙과외였다.

보통 어지간히 속 좋은 사람도 나이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욕먹으면서 일을 배우길 희망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네 사람은 소년에게 연기에의 열정으로 합격점을 받은 인물들.

그렇기에 과도하고 집중적인 교육에도 누구 하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고, 다만 일과가 끝난 뒤에 잠깐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면 그걸로 만족했다.

그 결과가 바로 블라인드 오디션의 동반합격이었다.

스펀지처럼 이찬의 가르침을 빨아들인 그들은, 적어도 맡은 배역에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완전히 뉴페이스들이니까, 영화의 서스펜스와 배우의 실력이라는 딜레마도 해결된 셈. 또 전부 하늘기획 소속이기까지 하니 이찬 사단이라는 신조어를 확고하게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저 네 명은 한꺼번에 블루칩으로 성장을······ 음······ 다른 작품을 잡기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연기는 제법 잘하지만, 아무래도 사회생활에는 여전히 서툰 제자들이다. 그들을 다른 촬영장에 내보내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건 일단 이번 작품 끝내고 생각할 일이지. 우선은 촬영이야. 다른 모든 건 그 뒤에 시작될 일.’

그리고 김도철이 다른 모든 것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아무튼 내가 볼 땐 잘 안 될 것 같은데, 그건 됐고······ 근데 말이다. 혹시 나는 그런 재능 없나?”

“뭐요?”

“연기······ 혹시나 해서.”

“없어요. 코딱지만큼도. 다른 데 가서 알아봐요.”

“아 씨발, 말 진짜 싸가지 없게 하네. 알았다 새끼야.”

거친 말로 투덜대며 돌아서는 경호원의 뒷모습에 대고, 소년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솔직히 가르치면 제법 잘 따라올 것 같긴 한데······ 내가 뭐 예쁘다고 댁한테 연기를 가르쳐? 형을 죽게 만들고 형이 됐으면, 그 뒤를 이어서 내 신변이나 잘 지켜야지. 흥이야.’

그는 팽개쳐뒀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아마도 평생 진실을 알려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

그날 밤 열린 <설산> 팀의 출정 전 회식은, 원래 사계 프로덕션 측에서 주최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단지 제작진들이 이후 겪게 될 고난의 촬영을 미리 위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후 그들 모두가 두 달 동안 오대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사정이 그렇게 된 데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작용했다.

바로 돈이었다.

주연배우 캐스팅에 돈을 한 푼도 안 썼다고 해서 독립영화의 예산이 일약 흥청망청으로 전환되는 게 아니다.

이쪽에선 인력보다도 더 타격이 큰 것이 장비 비용.

대여기간 하루하루마다 꾸준히 대금이 정산되므로, 그게 때로는 배우와 스탭들의 총 인건비를 초과할 정도였다.

그런 데 더해 이번 촬영지는 오대산 심심산골.

스탭들이 주1회씩만 쉰다고 해도 그 귀가와 출근 유류비 지급으로 고역을 앓게 될 게 분명했다.

스탭 전원을 촬영지에 묶어놓고 추가수당 지급하는 편이 차라리 남는 장사인 게 그런 이유였다.

그래서 이쪽 바닥에 인망이 있는 계진행이 직접 나서서 열의는 있는데 딸린 식구는 없어 장기간의 숙식촬영이 가능한 청년 인력들을 구해놨는데, 그래놓고도 막상 두 달짜리 산 생활을 시키려니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전 스탭을 불러 모아 위로의 주연을 열게 되었다.

그랬던 상황이 꼬인 건, 박무열이 그곳을 찾아온 순간부터.

“아, 배우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나? 이런. 내가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상황을 잘못 이해했구만.”

“아닙니다, 선배님. 이번 수상도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주연배우가 자기 일로 바쁘다고 해서 대리수상하러 갔던 영화제, 별로 즐겁지도 않았어.”

스페인 시체스 판타스틱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아 오는 길이지만, 판타스틱영화제의 흥행을 위해 출품해준 것일 뿐 상 욕심에 간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귀국하자마자 기자회견도 없이 이찬 얼굴이나 볼까 하면서 찾아왔던 것.

“그러면 난 이만 찬이 보러 가봐야 되겠어.”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을 정확히 드렸어야 했는데.”

“뭘 또 그런 소릴. 아무튼 전별 잘해주고-”

“아앗! 바바빡무열 감독님! 와주셔꾼요!”

연상의 스탭들에게 치여서 잘 못하는 술을 잔뜩 들이켠 이연진 감독의 목소리.

그때부터 1:1 팬미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연진은 술이 들어가면 감정표현이 격해지는 편이고, 박무열은 술을 마셨든 안 마셨든 호의를 잘 거절 못하는 성격인 까닭.

“아이고······ 내가 가면 울어버리겠다는데, 어쩌나? 찬이 불러서 트로피나 주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내일은 새벽같이 출발한다고 들었는데······ 이건 나중에 줘야 되겠는걸.”

그 아쉬워하는 투의 말에 계진행이 까짓 거 다 불러 모으자고 외친 게 계기였다.

막 짐을 다 싸고 난 이찬 사단이야 알겠다고 하고 바로 나왔는데, 그 소식이 염수진을 거쳐 정창영에게 전달되며, 하늘기획 배우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에 칸 때 제대로 못해줬던 축하를 이번에야말로 해주겠다는 일념하에 무수한 스타들이 집결했다.

그 면면 중에 명진아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찬아. 잘 지냈어? 어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같은 회사 아닌 줄 알았잖아.”

“음. 회사 밖에서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

“이사도 가고 경호원도 고용하고, 바빴겠구나.”

“그랬지. 일부러 피한 게 아냐. 회사도 종종 나갔었어. 그때마다 누나가 촬영 중이었을 뿐이지.”

“음······ 그랬구나.”

어색한 대화였다. 유니세프 친선대사 위촉 이후로 무수한 일들을 겪고 처음 마주한 자리였기에.

7월 대종상 때 스쳐 지나긴 했지만, 그야말로 스쳤을 뿐 작품이 달라 대화 한마디 해보지 못했다.

“찬아. 너 거기 가면, 내년 돼서야 오는 거지?”

“그렇지. 두 달 일정이니까. 아, 누나 수능 잘 보고.”

“치······ 연말에도 거기에 있는 거야?”

“아마도? 크랭크업 빨리 하더라도 추가촬영 진행하면서 새해까지는 있을 것 같아. 그건 왜?”

잠깐 분노했다가 금세 풀이 죽는 명진아의 얼굴을 보면서,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해와 분노의 연관성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렇지만 소녀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건······ 왜냐 하면······ 그때 말해줄게. 응원하러 가서.”

“연말에? 응원하러 온다고? 오대산까지? 에이, 오버야.”

“아니거든? 그렇게 한참 안 돌아올 거면서 연락 한 번 안 한 게 오버거든? 나······ 음······ 그때 봐. 그때 꼭 봐.”

소년의 나이는 현재 열일곱.

그리고 그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가 키스 한 번으로 마음을 들켰던 소녀의 나이는, 지금 열아홉.

2006년이 오면 그녀는 스무 살 성인이 된다.

그때를 위한 소중한 약속이 그렇게 전달되었다.

본의 아니게 큐피드 역할을 한 이연진이야, 술에 떡이 된 채 박무열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었지만.

< 55장 - 감독 이연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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