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57화 (157/250)

< 56장 - 팀장 이차원 (1) >

“사실은 지난 번 기자회견 이후로 이찬 씨의 행보에 대해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는데요. 전국에 계신 팬클럽, 우리 ‘마이 찬’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재희의 질문에는 충실한 진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그 본인이 초창기의 마이 찬으로서 유명한 인물이기에.

<어사> 신드롬에는 MSB 메인 앵커로서 소년의 팬이라 공표했던 박재희의 행동이야말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엇갈린 반응 때문에 저녁뉴스에서 내려와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MC로 보직이 옮겨지긴 했지만, 그녀는 그 좌천에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의 우상인 이찬의 소식을 더 적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을 뿐.

그렇기에 그 소년의 신작 촬영 현장에 직접 가보겠냐는 PD의 제안에 일고의 여지도 없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다.

“예. 마이 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한동안 독립영화 위주로 활동하겠다고 발표한 데에 많이들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응원해주시는 말씀 염려해주시는 말씀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전 단지 영화계를 위한다는 생각만으로 방향을 선회한 게 아니에요. 한국에는 무수한 명감독님들이 단지 자본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대중 앞에 진면모를 드러내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믿어요. 그래서 이연진 감독님의 이 <설산>을 선택하게 됐어요.”

“와······ 그 말씀을 들으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그러면 우리 이찬 씨는 앞으로 몇 편이나 독립영화를 찍으실 생각이에요?”

“한 세 편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찍게 될 작품들만이 아니라 많은 독립영화들에 관심과 기대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한국 영화계에 큰 힘이 될 거예요.”

터무니없이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앳된 미소로 말하는 소년에게, 박재희는 다시 한 번 걷잡을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어쩌면 저렇게 멋진 아이인 걸까······ 정말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단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예상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상업성과 예술성과 인성까지 겸비해버린 나의 스타······!’

물론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의기 가득한 말을 입에 담은 소년이 사실 한국영화계의 미래 따위엔 별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새로운 사단을 소개할 미래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작품에 일단 네 명. 그리고 다음에 세 명, 그 다음에 한 명, 그런 식으로 내보내면 될 것 같아. 그러는 동안 독립영화제 대상을 몽땅 다 쓸어 담고 대종상 남우주연상까지 따내야지. 두고 봐, 강정후 선배. <왕의 광대> 같은 미묘한 작품으론 감히 나한테 상대가 안 될 거야.’

그리고 카메라의 프레임 밖에서 흐뭇한 얼굴로 소년의 인터뷰를 체크하는 홍보팀장 역시, 그 속내는 전혀 알지 못했다.

*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정말 그랬다고?”

“하하하! 감독님 진짜 대단했다니까요? 박무열 감독님 그때 표정을 찍어뒀어야 했는데. 찬이가 걱정됐는지 열심히 말렸는데, 그 말도 하나도 안 들으시더라고요.”

신인배우 이기자의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이연진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원래 술이 약하긴 했고, 아침에 일어나서 완전히 필름이 끊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걱정을 하고 있긴 했지만, 설마 그런 짓까지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정말 미쳤어.”

“에이, 그러지 마세요 감독님. 다들 좋게 봐주셨어요. 앞으로 거장이 되실 감독님의 첫 실수를 본 거니까요.”

“거장? 에이.”

“네, 거장이요. 감독님 그렇게 되실 거잖아요? 한국의 가장 빛나는 감독들 중에 이름 올리실 거예요. 완전 확신해요.”

“아······ 아니, 그렇게는 안 될 건데.”

“그럴 거라니까요? 최고의 작품을 쓰신 최고의 감독님!”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이긴 했지만, 정황이 터무니없다.

박무열이나 안정록 정도 되는 인물들이나 장담할 수 있는 거장이라는 말을, 고작 신인배우인 이기자가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니.

그것도 심지어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는다는 듯이 헤벌쭉 웃기까지 한다.

하는 수 없이 어색하게만 감사를 표하고, 이연진은 이기자에게서 도망쳤다.

그 뒤에 만난 사람은 하늘기획의 새로운 요인.

단독 사옥 매입에 뒤이어 진행된 대형기획사로의 전환 과정에 스카웃되어 홍보팀을 전담하게 된, 전 스포츠고려 취재기자 이차원이었다.

“저기, 이 기자- 앗, 죄송합니다! 이 팀장님······.”

“아하하하. 죄송하실 거 없어요, 저도 아직 귀에 안 익어요.”

“예······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거 없대도요. 아니, 오히려 이 기자님 하니까 되게 재밌네요. 저기 저 친구 이름이 이기자잖아요?”

“아, 예, 그, 그렇네요.”

“하여튼 재밌는 회사란 말이죠. 저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한테 팀장직을 안겨주질 않나, 오디션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들을 대차게 푸시해서 찬이 옆에 붙이질 않나.”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기획 홍보팀은 이제 신설된 지 겨우 한 달 남짓 된 팀. 당장은 기존의 매니저들이 실무를 전담하고, 팀장을 포함한 홍보팀 신입들은 그간 인수인계와 전략기획에 집중해왔다.

그런 홍보팀의 첫 번째 실무가 바로 이찬의 <설산>이었다.

그간 각계각층에서 스카웃된 팀원들과 함께 꾸린 무수한 기획들이 마침내 실현될 첫걸음.

그것이야말로 하늘기획 3인자에 등극한 이차원이 직접 멀고먼 오대산의 산장까지 왕림한 이유였다.

물론, 공적인 이유가 전부인 건 아니었다.

“이 팀장님은, 일간지에서도 계속 찬이 전담이셨죠?”

“그랬죠. 세계 최초로 그 아일 취재한 남자가 접니다.”

“와, 정말 안목이 뛰어나신 모양이에요! 막 데뷔했을 때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제 안목이 뛰어난 건 아니에요. 낭중지추라는 거죠. <가을하늘>하고 <미스 스캔들> 촬영하는 한편으로 극단 활동을 슬슬 마무리하고 있던 무렵이었는데, 그때도 이미 업계에 소문이 자자했던 친구거든요. 정말 연기천재라는 말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싶어요.”

연기천재. 대중은 지금껏 무수한 배우들에게 그 별칭을 붙여왔다.

멀게는 열일곱 살에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던 유세령으로부터, 안정록의 제자로서 청출어람이 될 거라는 말을 들었던 강정후에 이어, 최근에 활약한 명진아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 명이 넘는 인물들이 그렇게 불려왔다.

그렇지만 2005년 현재 그 모든 수식어들은 폐기됐다.

이게 그 말은 오직 이찬의 앞에만 붙는 고유어가 되어 있었다.

“그렇죠······ 겨우 열일곱인데, 지금껏 어떤 배우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뤄가고 있으니까요.”

“하하. 그것도 그건데, 제 생각에 찬이가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는, 평소에는 연기를 전혀 안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연기를 안 한다고요?”

“예. 고맙게도 오랫동안 찬이 전담으로 붙어서 기사를 써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아이는, 그렇게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는 늘 진솔하구나. 언제나 진심으로만 사람들을 대하는구나. 왜, 그렇잖아요? 보통 연예인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가식적인 면이 있어요. 인격자로 소문난 안정록 선생님이라면 또 모르지만, 대부분은 많은 거짓말로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죠. 하지만 찬이는 달라요. 명진아 건만 봐도······ 그렇죠?”

연초, 명진아는 연예인 X파일의 루머에 휘말려 위기를 맞았다. 오랫동안 이찬을 쫓아다녔다는 말에 백만 이찬 팬클럽이 가자미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게 되었다.

그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이찬의 고백.

그는 자신이 정신혜와 사귀고 있음을 공표함으로써 명진아를 구출했고, 이내 대중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결별하게 되었다.

그게 일반대중은 물론이고 연예계 관계자들마저 완전히 믿고 있는 사실관계.

이차원은 자신이 깜빡 속았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소년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다시 한 번 감격하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런 점에는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죠.”

“정말로요. 감독님, 혹시 정예원이라고 기억하세요?”

“어? 정예원······ 그, 자살한 분, 맞죠?”

“맞아요. 그 친구가······ 제가 기자 생활 시작해서 처음으로 전담하게 됐던 연예인이었죠. 나이도 동갑이었던지라 금세 친해져서, 나중에는 거의 소울메이트가 됐어요.”

그렇지만 정예원과의 교우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97년 겨울, 유부남 감독과의 불륜설이 퍼지면서 연예활동에 지장이 생기고, 무수한 똥파리 기자들의 파파라치 행각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기에.

“그때 이후로 기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당장 다른 일을 하겠다는 의욕도 생기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죠. 그랬는데······ 찬이를 만나고 저는 변했어요.”

“아······.”

“그 아이는 다른 어떤 배우하고도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자면서도, 결코 남을 속이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 찬이가 저는 참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의 홍보에 제 인생을 걸 생각이에요.”

“와······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시원하게 답하고 웃는 이차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연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짐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팀장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 찬이가 잘못된 작품을 골랐다는 말을 듣지 않게, 죽을힘을 다할게요.”

“그래주시겠어요? 하하하, 그거 참 기쁜데요? 아, 찬이 메이크업 끝난 모양이네요. 이제 전 빠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예! 그럼, 잘 살펴봐주세요.”

*

배우기획사 홍보팀의 업무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간지라면 윗선에서 나온 지침에 맞게 대중의 취향에 맞는 아이템을 취재하고 적절한 내용으로 기사를 쓰는 것이 전부.

그렇지만 그 과정 전체를 아주 기본적인 절차로 포괄하는 기획사의 마케팅 업무는, 기획단계에서부터 훨씬 넓은 범위의 작업을 총괄해야만 했다.

가장 기본적인 건 배우의 대중적 인식을 어떤 프레임으로 잡아나갈 것인가.

대중의 인식이란 팩트만을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워딩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어떤 인상으로 이미지 컷을 완성하느냐에 더욱 크게 좌우되는 편이었다.

거기에 더해, 홍보팀은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잘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대중이 작품을 보고 나서 느낄 감정을 추론하고 거기에 맞춤전략으로 홍보의 기술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이차원이 굳이 신작의 크랭크인 현장까지 따라온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작 독립영화······ 그렇지만 연말에 제작되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이야. 과연 이찬이 참여한 독립영화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하는 기대부터 시작해서, 이번 작품이야말로 처음으로 그 소년이 실패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까지. 각양각색의 생각들이 이 <설산>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어. 이 작품의 홍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찬은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올곧은 마음을 강조하는 인터뷰가 대단히 적절했다.

‘따뜻한 마음으로 행운의 여신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아이······ 그야말로 연기의 신이 사랑하는 소년이야.’

작은 오해가 곁들여지긴 했지만, 그렇기에 이차원은 조금쯤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촬영의 시작을 지켜봤다.

마치 몰래카메라처럼 여기저기 설치된 카메라에 더해 열정 넘치는 카메라감독이 최종 프레임을 점검하고 있다.

‘작중 외부의 환경은 오직 설산의 하룻밤. 그렇기에 눈이 내리지 않은 지금은 실내 촬영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야. 시퀀스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씬들이 있을 텐데, 그걸 신인배우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크랭크인 씬의 중심인물인 심대범은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아, 진짜 눈 더럽게 많이 오네. 어르신! 어르신 있어요?”

산장 인근의 매점 알바로, 시내에 가던 중 폭설을 만나 산장에 머물게 된 ‘수남’.

그는 산장의 원 주인인 ‘어르신’과 면식이 있는 인물로서, 갑작스레 나타나 새 주인이라 주장하는 ‘지하’를 의심하며 갈등을 이끌어내는 핵심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지하와 마주하는 장면의 표정연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지하 입장에서도 그는 예상외의 변수.

내쫓을 수도 환영할 수도 없는 딜레마 속에서 어색하게 그를 맞이하는 연기가 첫 씬의 핵심이 될 터였다.

물론, 이찬에게 있어선 조금도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어? 어, 손님이요?”

“여기 주인입니다. 오늘 인수했는데······.”

“예? 뭔 뜬금없이?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어르신은요?”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쉬시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거 별일이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아무튼 그건 됐고, 짐 좀 같이 옮겨주시면 안 될까?”

“짐이요? 묵고 가시게요?”

“예 예. 아니, 나 저쪽 등산로 매점 알바예요. 오늘 폭설주의보 떠서 읍내로 가는 길이었는데, 아 젠장 벌써부터 쏟아지지 뭐예요?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여기서라도 자고 가야지.”

“그······ 제가 막 인수한 참이라, 아직 영업을 안 하는데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아 이 눈보라 속에서 텐트 치라 이거요? 사람이 그러면 쓰나. 방 하나만 내줘요.”

“컷!”

딱 거기까지가 지하의 어깨를 건 수남 숄더샷이었다. 콘티상 이후에는 지하의 클로즈업샷으로 이어질 예정.

그렇기에 일단 컷을 외친 이연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막 연기를 마친 심대범의 심장이 두근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씨, 별로였나? 내가 너무 못했나?”

“잘했어요, 후배님. 연기 괜찮았어요.”

“······근데 감독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금방 오케이라고 외치실걸요. 뭐 몇 컷 더 따긴 하겠지만.”

이찬의 말대로, 이연진은 곧 격앙된 목소리로 OK를 외쳤다.

더없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미 오디션 때 경험해봤다고 해도 실전은 다를 수 있어 염려했는데, 그게 기우였던 덕분.

그에 창가에서 들여다보던 이차원 역시 쾌재를 불렀다.

< 56장 - 팀장 이차원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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