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58화 (158/250)

< 56장 - 팀장 이차원 (2) >

매니지먼트 팀과 마케팅 팀 사이의 관계는 꽤나 복잡하다.

본질적으로 서로 상보적으로 기능해야 하는 집단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서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90년대부터 활동한 베테랑 매니저들의 경우 홍보부서의 존재가치를 높이 사지 않는다.

그들은 홍보팀이란 것이 아예 생소하던 시절부터 활약해온 인물들.

자연히 마케팅 업무에도 노하우가 함양되어 있어, 자체적인 기자 인맥을 통한 홍보활동에 대단히 능숙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겐 홍보팀이 그저 보조적인 역할로만 인식되었다. 하여 핵심적인 정보는 공유하지 않은 채 지시사항만을 수행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분위기가 강한 회사에서는 말단 로드매니저들조차 홍보팀을 하위조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으로 홍보팀 직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기획사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 시험을 통해 선발된 고학력자들.

운전면허 하나로 입사해 바닥부터 굴러온 매니저들에게 약간의 우월감을 가진 케이스가 있었다.

그렇기에 때로는 매니저들의 직감적 판단과 자의적인 협조 요청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이런 홍보부서 출신의 인물이 주도하는 회사에서는, 매니저들의 현장 판단보다 홍보팀의 기획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일부 베테랑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매니저들이 홍보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곤 했다.

2003년 이전의 나라엔터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기본적으로 허성윤이라는 대기업 출신의 엘리트 홍보팀장이 창사 초기부터 전략을 수립해왔고, 이군영 대표 역시 그를 철저하게 신뢰해 모든 업무를 맡겨온 것.

그렇기에 정창영을 비롯한 대다수의 매니저들이 현장에서 자율적인 권한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 반대의 케이스로는 금양기획이 대표적이었다.

이쪽도 90년대 후반에 대형 기획사로 전환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팀을 확충하긴 했지만, 그들보다는 탤런트 매니저 출신의 대표이사 조금양이 입지전적인 직감으로 회사를 꾸려왔다.

그렇기에 홍보팀의 전략기획이 매니저들의 현장판단에 의해 일종의 필터링을 당하곤 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하늘기획은 태생적으로 금양기획의 성장과 역사가 비슷한 기획사.

로드매니저부터 시작한 정창영 대표와 그의 동기 소양근 팀장이 진두지휘하는 상태에서 회사의 규모가 커졌다.

당연히 신설 홍보팀의 지위는 낮아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늘기획 홍보팀의 입지는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했는데, 그 전부가 간판배우 이찬의 특성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우선 하늘기획은 이찬의 인맥으로 무수한 스타들이 결집해 창사된 회사.

그에 더해 초창기 예산의 대부분이 이찬 출연작의 제작에 투자돼, 인력충원은 창사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그 기간 동안 매니저들은 현장과 사무실에서 과로에 시달렸고.

그러니 노동 강도를 줄여줄 신설 홍보팀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하늘기획의 급격한 성장은 매니저들의 전략보다 일당백 간판배우의 활약으로 이뤄진 일.

그들 스스로 뭔가를 잘해낸 게 없는 상황에서 회사의 덩치가 커졌기에, 자부심과 교만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한 편이었다.

20: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게 그런 까닭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혼자 힘으로 현재의 하늘기획을 완성한 이찬이 홍보팀장의 인선을 직접 추천했다.

그간 여러 차례 이찬의 단독기사를 써내며 소년의 이미지메이킹에 공헌했던 이차원 기자가 그 주인공이었고.

비록 입사는 창사 이후 한참이 지나 이뤄졌지만, 그 전부터 이미 마케팅에 공헌해온 인물이며, 이찬이 아끼는 인재다. 그가 지휘할 홍보팀을 백안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차원은 그렇기에 존중과 주목을 함께 받으며 낙하산을 탔다.

그가 직접 발로 뛰어 오대산의 <설산> 촬영현장을 확인하고 돌아왔을 때 내근 중이던 모든 매니저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환영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팀장님, 오셨습니까!”

“어, 어. 고마워요. 바쁜데 일어날 거 없어요.”

“아닙니다, 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하하하, 고마워요.”

이차원 개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건 굉장히 낯설고 멋쩍은 경험이었다.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일개 취재기자일 뿐이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반대로 차장 부장들 지나갈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느라 바쁜 처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집요한 취재나 자극적인 워딩에 개인적인 반감을 갖고 있어서, 동료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도 겉돌고 있던 실정이었다.

고작 1,2년차밖에 안 되는 후배들마저 향상심 없는 그에게 줄을 대려 하지 않았을 정도.

이찬 단독기사를 쭉쭉 뽑아오면서 밥값 이상을 해내지 않았다면, 진즉에 따돌림까지 당했을 터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 기획사의 3인자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라 할 수 있는 변화.

거기에 적응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다만 그런 기저심리를 제외하고 말하자면, 이차원은 의외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귀경길에 떠올린 홍보전략의 과업을 추진하는 데에는 작은 거리낌조차 없었다.

“혹시 지금 대표님 어디 계신지 아는 분?”

“대표님 지금 사계 대표님하고 미팅 중이십니다.”

“그래요? 몇 시까지?”

“예정은 세 시부터 쉬시는 걸로 돼 있습니다.”

“오케이. 그러면 천세영 남태형 명진아 매니저님들 세 시까지 소집해줘요.”

“예, 팀장님. 실장급으로 소집할까요?”

“가능하면요. 바쁘시면 로드 분들 오셔도 되고.”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찬과 함께 작품활동 했던 배우들의 매니저를 불러 모은 이차원은, 막 미팅을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온 정창영 대표와 회동했다.

“이 팀장, 벌써부터 일 시작하는 거야? 멀리까지 갔다 오느라 고생했는데 오늘은 좀 쉬라니까.”

“아닙니다, 대표님. 중요한 임무를 맡겨주셨는데 쉴 시간이 있나요. 바로 브리핑 들어가겠습니다.”

“하하, 성실하긴. 알겠어. 그럼 한번 들어볼까.”

그렇게 이차원은 네 명의 창립멤버들을 앞에 두고 이찬과 <설산>을 위한 홍보전략의 브리핑을 시작했다.

“배우 이찬의 주요 이미지는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칸 3관왕 배우, 국보급 배우, 4천만배우, 연기천재, 인성이 바른 배우 등입니다.”

“음, 그렇지. 다 옳은 말들이구만.”

“예. 그렇지만 그 모두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설명하는 것일 뿐, 인간 이찬에 대한 이미지메이킹은 선량하고 올바르다, 딱 그 정도로만 형성돼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 이찬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소년 배우가, 어린 시절부터 오직 작품으로만 자신을 말해왔으니.

“그런 상황이지. 혹시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만 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한때 신비주의 전략으로 팬덤을 모았던 아이돌들은 해체 수순을 밟았고, 이제 많은 스타들이 미니홈피 등을 통해서 대중과 소통하며 인지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거죠.”

“하지만······ 찬이 본인이 그런 걸 별로 즐기지 않아. 최고의 배우한테 억지로 시킬 만한 일도 아닌 것 같고.”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찬이한테 그런 활동을 요구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팬덤의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찬의 광신도라고만 생각했던 신임 홍보팀장의 부정적인 분석에, 정창영은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지? 지금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끊임없는 성공가도 덕분이었죠. <어사>부터 시작해서 작품을 낼 때마다 거대한 화제를 일으켰으니까요. 미니시리즈 최고시청률에, 천만영화를 줄줄이 내고, 세계 최고의 시상식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소통이 없더라도 최고의 우상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가 막막합니다. 두 작품으로 세 개의 칸 트로피를 들어버렸으니, 그 이상의 성과로 대중에게 감동을 일으킬 방법이 없다는 거죠. 거기다 이제 찬이는 적어도 1년 이상 독립영화에만 투신하게 됩니다. 그 영화들도 분명히 좋은 평가를 받겠지만, 찍기만 하면 천만 흥행이 되던 충격적인 커리어는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겁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이찬이 천재적인 배우라고 할지라도, 소자본 독립영화로 천만관객을 달성할 수는 없다.

대중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주연의 연기력만은 아니기에.

대부분의 관객은 화려한 블록버스터 액션이나 화려한 스타군단이나 압도적인 영상미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다.

그 모든 요소들은 자본의 뒷받침 없이 이룰 수 없는 특색.

독립영화라는 제약 속에서는 아무리 많아도 300만 관객쯤이 한계일 거라고, 이차원은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그 추측조차 어마어마한 고평가라고 할 수 있다.

업계의 상식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독립영화의 3만 관객은 상업영화의 천만 흥행과도 비견되는 대성공.

독립영화로 300만 관객을 달성하는 것은 세 편의 천만영화보다도 압도적인 위업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는 사람들만의 인식.

대중이 체감하기에는, 계속해서 천만영화를 찍던 이찬이 영 재미없는 작품만을 고르게 됐다고 인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백만 ‘마이 찬’이 공고할 거라고 희망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음······ 그렇게 말하면, 부정할 순 없겠는데. 하기야 처음부터 손해를 감수한 공약이긴 했지.”

“그런 걸 꿋꿋이 추진하는 찬이를 저도 참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손 놓고 있기는 싫습니다. 그렇기에 대안을 준비했습니다. 지금까지 성과로만 선보여졌던 인간 이찬을 드러내자. 칸 수상과 독립영화 공약 이행을 통해서 이찬이란 배우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관심은 전에 없이 커져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키워드를 쌓아나가기에 딱 적절한 시기입니다.”

“그렇긴 하겠는데······ 무슨 방법으로? 작품에 집중하고 있는 찬이한테 예능 출연을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예, 절대 안 될 일이죠.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말을 하며 세 명의 실장을 둘러보는 이차원을 통해서, 정창영 역시 곧 그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하. 찬이 본인이 아니라 그 성장을 함께했던 배우들을 통해서 인간 이찬을 드러내겠다?”

“그렇습니다, 대표님. 물론 여기 계신 실장님들의 배우 분들이 동의하셔야 진행 가능한 사안이겠지만요.”

“그거야, 다들 동의할걸? 그렇지 않아?”

세 실장은 서로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기본적으로 저희 세영이는 찬이 광팬이라서요. CF 얘기 나올 때마다 찬이랑 동반광고 찍으면 안 되냐고 계속 물어봐요.”

“태형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찬이 아니면 배우 남태형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매일 말하는 녀석이에요.”

“진아는, 두말할 나위가 없죠. 하이틴스타 배우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구해준 게 찬입니다. 얘는 뭐 무조건이죠.”

그렇게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지만, 정창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긴 한데, 사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했던 기획이잖아? 특히 칸 끝나고는 ‘배우 이찬을 말하다’ 같은 식으로 주변인들 인터뷰도 엄청 많이 나왔었는데, 신선한 아이템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 기획을 답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죠. 그런 것도 있고, 이번 오대산 촬영을 보면서 또 느낀 게 있습니다. 심대범, 이기자, 오남현, 나지은, 네 친구가 전부 찬이의 연기 조언을 진지하게 듣고 있더군요. 그간 합숙하면서 직접 연기지도를 받기도 했다고 들었고요.”

“그렇지, 사실이야.”

“거기에 네 신인배우를 극히 중요한 첫 번째 독립영화에 투입한 것 자체도 대단히 특별한 일이죠?”

“그렇지. 하지만 그건 추천이나 끼워팔기가 아니라 전적으로 감독의 오디션을 통해서 결정된 일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된 일입니다. ‘이찬 아카데미’를 홍보하기 위해서는 말이죠.”

예상치 못했던 워딩에 정창영의 눈이 커졌다.

“이찬 아카데미······? 그거 설마, 찬이가 신인배우들을 직접 키워내고 있다고 프레임 잡자는 거야?”

“예, 대표님. 그거야말로 독립영화에 투신한 찬이의 이타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면서, 그 천재성을 넘어서 배우들을 사랑하는 인간 이찬의 마음을 엿보여줄 방책입니다.”

“허허······ 그래서 세영이랑 태형이랑 진아라고? 세영이는 그 찬이랑 합숙을 해봤던 애고, 태형이는 공공연히 찬이한테 연기를 배웠다고 말해왔고, 진아도 찬이랑 같이 연기하면서 많이 늘었으니까, 이런 라인업을 짰다?”

“예. 사실 여기에 심요셉 씨도 포함을 시켜야 되는데, 아직 기획 중이라서 따로 연락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거 참, 재밌긴 한데.”

하지만 정창영은 곧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나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아이템은 아니었어. 하지만, 이제 겨우 열일곱이잖아. 그런 애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배우들을 가르쳤다고 하면 그게 좋은 이미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얘네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야. 태형이든 진아든 세영이든 군말 없이 따라주긴 하겠지만, 연기를 어린애한테 배웠다는 이미지는 좀 곤란할지도 몰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찬이한테 이런 걸 배웠다 하는 식의 아이템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뭔데? 어떤 보도를 내고 싶은 거야?”

“보도가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는 겁니다.”

충격적인 말에, 정창영은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붙잡을 머리카락이 없어서 허전한 손끝. 하늘기획 대표이사는 이내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큐 영상······ 이찬 없는 이찬 다큐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미리 연락을 좀 취해봤는데, MSB 교양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찬이도 찬이지만 세 분 배우들의 상승효과도 클 겁니다. 주인공인 찬이가 자료화면 느낌으로 나오는 다큐에서 화자로 활약하는 거니까요. 칸 이슈랑 독립영화 공약까지 있으니까, <설산> 시사회 일정 전까지 편성 따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다큐 포맷까지 좀 구상을 해봤는데······ 한번 브리핑을 해볼까요?”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정창영은 몹시 흐뭇해졌다. 참신한 기획을 내놓은 사차원 홍보팀장이 더없이 예뻐 보였다.

그리고 이차원은, 평생 처음 느끼는 충족감으로 달아올랐다.

< 56장 - 팀장 이차원 (2)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