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장 - 팀장 이차원 (3.) >
<설산>의 시퀀스는 산장 안팎의 대화 일변도.
그렇지만 작법에 따라 극의 갈등양상을 분석해보면, 총 3막의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반부에는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거짓말 섞인 인생사를 떠벌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말이 없는 산장 주인 ‘지하’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그러나 중반부에 지하가 진실게임을 제안한 뒤로는 손님들의 속내가 드러나며 분위기가 반전된다.
마침내 후반부가 되었을 때에는, 지하와 손님들이 갖고 있던 비밀들이 서로 맞부딪치거나 정반합으로 해소되며 대단원이 장식되는 것이다.
“이거 약간 마피아 게임 같은 느낌인데요.”
막 15씬 연기를 마치고 모니터로 돌아온 이찬의 말에, 이연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염두에 두긴 했는데······ 느껴져?”
“예. 타겟이 한 명 한 명 의심받으면서 자신을 변명한다는 데서 그 시스템이 생각났어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좀 낯설긴 하지만요. 초반부 경험담들이나 바람소리가 그걸 해소하려고 넣으신 시퀀스들이죠?”
마피아 게임이란 200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게임으로, 미리 마피아와 시민들을 지정해 서로가 서로를 추궁하게 만드는 심리게임이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생겨나는 패닉.
그것이야말로 <설산>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나 하는 게임 같은 대화를 핍진성 있게 구현하기 위해서, 이연진은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해야만 했다.
“나름 애써봤어. 속 얘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경험담들, 그리고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바람소리······. 사실 양면적인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만의 비밀을 평생 묻어두고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어차피 하루 보고 말 사이에서라면 한번쯤 토로하고도 싶다는 생각도 있을 것 같아.”
“눈에 길이 막혀 예정에 없이 갇힌 산장이라면, 거기다 맥주까지 어지간히 들어갔다면, 왠지 모르게 비밀을 고백하고 싶을 만도 하겠어요.”
“그렇겠지? 공감해줘서 다행이야. 맥주가 좀 그런 마력이 있지.”
물론 현장에 배치되는 건 색깔만 비슷한 보리차.
주연의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실제로 술을 계속 마시면서 연기를 하다가는 씬의 연결이 어색해질 정도로 취기가 오를 수 있는 까닭이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맥주를 즐겨온 소년은 그걸 조금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맥주가 좀 그렇죠······.”
“응? 어, 마셔본 사람처럼 얘기하네?”
“마셔보긴요. 보기는 많이 봤으니까 말하는 거죠. 흠. 그래서 감독님, 결국 마피아는 누구였던 거예요?”
“응? 어······ 그건 열린 결말인데.”
“열려 있더라도 설정해두신 사실관계는 있을 거 아녜요?”
“어······ 그래야 되는 거야? 난, 정말 열린 결말인데. 왜, 박무열 감독님도 각본 쓰실 때 그렇게 하신다던데?”
“그거야 매니아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 봐 대충 둘러대는 말이고, 당연히 머릿속엔 유력한 가능성이 있는 법이죠. 감독님 되게 특이하시네요.”
“앗······ 그런 거야? 몰랐네······.”
어수룩하게 웃는 이연진을 보며 이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속마음을 말하자면, 배우로서는 그녀에게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감독님이야. 열린 결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고지식함이야 좀 웃기지만, 아무런 인간관계가 없어 보이는 배역들을 모아놓고 개연성 있게 긴장감을 조성할 줄을 알아. 이 재능이 제대로 꽃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역시 내가 활약해야 되겠지.’
다른 배역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주인공은 한 명.
지하라는 캐릭터를 맡은 이찬은 관객이 극에 집중하게끔 만드는 핵심 인물이다.
그리고 그 배역의 내면은, 이찬의 직전 작품인 <친절한 살인자>의 이수와 맞닿는 면이 있었다.
‘이번엔 역으로 이상적인 살인자를 꿈꾸는 존재······ 복수를 위해서 산장으로 찾아와, 진짜 주인을 지하에 묶어놓고 막 올라온 상황이야. 그래서 당황해서 둘러대느라 배역의 이름까지 지하가 되는 거. 그렇지만 막상 폭설 때문에 손님을 받고 그들의 삶을 듣게 되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지. 저 인간을 죽이는 게 정말 맞는 건가 하면서. 그 감정의 변화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게 이 작품의 입소문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거야.’
감독이 스토리보드를 체크하는 동안 그런 생각으로 각본에 집중하던 소년은, 이내 걸려온 정창영 대표의 전화에 꽤나 당황했다.
“제 다큐요?”
[그래. 우리 이차원 팀장이 아주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놔버렸다. 이찬이 자료화면으로만 나오는 이찬 다큐로 너랑 영화를 홍보하는 동시에, 우리 회사의 결속력도 자랑할 수 있는 거야. 바로 이런 획기적인 상상력 때문에 홍보팀장으로 추천했던 거지?]
전혀 아니고 그저 허성윤과 달리 매우 온건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었지만, 이찬은 대답 없이 장고에 착수했다.
‘좀 황당하긴 한데, 나쁜 제안은 아니야. 세 출연자가 다시 한 번 주목받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고, 이찬 사단을 소개하는 효과까지 있을 테니까. 인간 이찬을 드러내는 게 좀 별로긴 한데······ 직접 출연하는 게 아니니 별로 상관없나? 그럼 문제는 딱 하나네. 남태형 선배랑 세영 누나는 나한테 연기를 배웠다고 할 수 있지만, 진아 누나는 좀 케이스가 다르다는 점.’
그런 생각에 명진아 대신 심요셉을 섭외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정창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 팀장도 그 생각 하긴 했는데, 그 요셉이가 겨울에 콘서트 일정으로 너무 바쁘더라. 잠깐 출연하는 것 정도는 되지만 몇 주씩 일정 비울 수는 없는 모양이야.]
“아, 거참 깐깐하게 구네요. 가요대상 누가 만들어줬는지 기억도 안 나나?”
[으하핫. 아니,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더라. 너한테도 따로 찾아가서 사과하겠다고 했어.]
“흠. 뭐 그럴 일까진 아니지만요. 그러면 남태형 선배 천세영 누나 둘로 가면 되지 않아요?”
[그게 또 그럴 수가 없는 게, 아무래도 네임밸류가 확실한 카드가 필요한 모양이야. 그 둘이 유명해졌다곤 해도 아직까진 진아보다 인지도가 낮잖아? MSB에서 편성 내주겠다고 한 것도 진아 출연이 결정적인 준거라서 말이야.]
그렇게 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소년은 결국 이찬 없는 이찬 다큐의 제작에 찬동했다.
*
다큐 제작진이 결정되고 포맷과 예산이 확정되는 과정은 순식간이었다.
매력적인 흐름으로 교양국의 호평을 산 이차원의 초안이 빠르게 구체화됐고, 2주가 지나지도 않아서 촬영이 개시되었다.
“네, 여기서 처음 만났어요. 드라마 아역 회식이었죠. 그게 2000년 봄이었고······ 그때 찬이는 지금보다 한참 더 작고 귀여웠어요. 아, 물론 그때도 저보다는 컸지만요.”
연꽃처럼 맑게 웃으면서 추억을 더듬는 명진아를 보며, 천세영은 남태형의 팔뚝을 건드렸다.
“저, 선배님.”
“예.”
“진아 진짜 예뻐졌네요. <꼬마신부> 찍었을 때랑 비교해도 훨씬 더 성숙해진 느낌이에요. 혹시 쟤 연애하는 걸까요?”
“······그게 무슨 논리죠?”
“왜,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들 하잖아요?”
“아니······ 혹시라도 괜히 이상한 얘기 하고 다니지 말아요. 안 그래도 루머 때문에 고생했던 앤데.”
“아, 그건, 당연히 안 그러죠. 저 그렇게 생각 없는 애 아니에요, 선배님.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였어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뒤, 남태형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잘 모릅니다. 다른 데 관심 둘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요.”
“아······ 선배님, 지금 들어간 작품 없지 않으세요? 요즘 광고도 찍는 거 없으신 것 같던데.”
“그렇긴 한데, 연습할 게 천집니다. 찬이가 내준 숙제들요.”
“앗, 우와. 선배님한테도 숙제 내주는 거예요?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매일 과제 다 해서 메일 보내느라고 참······.”
“고마운 일이죠. 자기 작품에 집중하기에도 바쁠 텐데.”
“맞아요. 괜히 신경 쓰지 않게 더 열심히······ 해야죠.”
“흠. 혼자 힘들지는 않습니까?”
“아, 네. 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선배님께선요?”
“나도, 물론, 혼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과제를 강정후와 함께 해결해나가고 있는 천세영이지만, 그에 대해서 떠들 수는 없는 노릇.
마찬가지로 남태형 역시 남들의 눈을 피해 신수영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찬의 두 제자는 잠깐 정적 속에서 명진아만 바라봤다.
하지만 잠시 후에 천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아는, 어떤 걸까요?”
“뭐가 말입니까?”
“찬이한테 들은 건데, 진아한텐 뭘 가르쳐본 적이 없대요.”
“그랬겠죠. 그 애랑 만나기 전부터 유망했던 친구니까.”
“그런데 왜 이 다큐에 출연하겠다고 했을까요?”
“그야······ 찬이 데뷔작을 함께한 동료로서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음. 확신 없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선배님.”
“맞습니다. 진짜 잘 몰라요. 같이 주연 했다고 다 친해지진 않습니다. 난 내 연기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놈이니까. 이번 다큐도 찬이를 위한 일만 아니었으면 바로 반려했을 겁니다.”
불완전한 연기력을 보완하는 일에만 모든 정신을 쏟는 남태형은, 좋은 대화상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CF스타로 두각을 드러내며 마음이 복잡해지던 천세영에게 자극제가 되기엔 충분했다.
‘<미스 스캔들>에 이은 <꼬마신부>로 블루칩이 된 이 선배님이, 자기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생각해보면 정후 오빠도 그랬지. <주룩주룩>으로 그 찬이마저 밀어내고 남우주연상을 따냈으면서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내 연습 도와준다고 불러놓고는 <왕의 광대> 각본만 계속 보고 있기도 하고······. 정말이지, 나 같은 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구나.’
그렇게 천세영은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당당한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찬과 강정후의 곁에 서기 위해서.
두 사람 중 정확히 어느 쪽을 위한 감정인지는 스스로도 명확치 않았지만, 그게 당장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찬과의 첫키스 이후 날이면 날마다 더 예뻐졌다는 말을 듣고 있는 명진아는, 명확한 한 사람을 갖고 있었다.
‘찬이는 산장에서 내 생각 조금이라도 하고 있을까? 난 이렇게 우리가 처음 만난 식당까지 와서 추억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도 대중들에게는 그저 어린애들의 풋풋한 추억 정도로만 보이겠지.’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
명진아는 2000년의 그날 처음 만났던 키 큰 소년을 이내 사랑하게 되고, 오랫동안 그 마음을 숨겼다가, 결국 대외적인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을 정신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스토리들은 지금도 소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꼬마신부> 이후 무수히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다 반려하면서 학업에만 집중했던 게 바로 그런 까닭.
이제는 수능도 끝나고 다시 연예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됐지만, 명진아는 당장 어떤 작품을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 다큐 찍으면서 차근차근 생각해봐야지. 지금은 뭐가 뭔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찬이와의 추억을 되짚어보는 거야. 그러면서 연기자 명진아의 길을 구상해야지.’
그렇게 세 출연자가 이찬의 과거와 각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동안, 이차원은 MSB 교양국 이중재 CP와 인사를 나눴다.
“정말 기쁩니다, CP님. 12월 24일이면, 연말인데다 크리스마스가 연휴라서 완전히 분위기가 핫할 시기인데.”
“그렇죠. 거기다 연휴 낮 시간대니까 시청률이 잘 나올 거예요. 그날 모임에서 대화의 소재로 나온다면 다시보기도 상당히 잘 팔릴 거고.”
“감사합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무척 잘될 것 같네요.”
“나야말로 고맙죠. 스타들 섭외까지 다 끝마쳐놓고 기획안을 주신 거니까요. 거기다 칸 3관왕 배우의 첫 다큐고. 직접 출연시키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찬이 이름값으로 다큐 최고시청률까지 경신해서 CP님 커리어에 좋은 기록으로 남는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상냥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중재는 미심쩍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게 처음에 기획안 보고도 생각했던 거지만······ 영화 홍보는 안 하실 겁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이찬 배우 지금 영화 찍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큐도 못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 내내 옛날얘기만 있고 영화 홍보 내용은 전혀 넣으실 생각이 없어 보여서 말입니다.”
“아, 그 얘기군요. 하긴, 다큐에서도 영화 촬영장 찾아가서 대화하는 장면 넣고 하면 꽤 홍보가 되기는 하겠죠.”
배우 다큐멘터리라는 게 드물어서 흔치 않은 일일 뿐,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간접광고다. 다큐의 방영일과 영화의 개봉일 사이에 텀이 길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차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흔한 수법이라서요.”
“흔하지 않은 수법이라도 쓰시게요? 홍보비용이 많지 않으실 텐데.”
“예. 예산도 예산이지만, 다른 블록버스터들 하듯이 TV CF 넣고 프로모션 돌고 하는 건 독립영화 정신에도 안 맞죠. 영화는 오직 영화로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쪽 입맛이니까요.”
“독립영화 쪽도 잘 아시나 봅니다?”
“저야 스타 취재는 못 하고 예술영화 취재만 주로 해온 따라지 기자 출신이라서요.”
“하하. 겸손하시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9년 동안 기자생활 하면서 느낀 게 많습니다. 작품만 확실하다면 홍보할 방법은 참 많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중재의 표정에 호기심이 차오른 뒤에, 이차원은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실제로 산장을 운영할 수도 있겠죠.”
“······예?”
“작중에서 찬이 역할이 산장 주인이거든요. 배경은 100% 로케이션 촬영이고요. 그래서 세트 촬영보다 여건이 열악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촬영이 끝난 직후부터 거기서 추첨제로 손님을 받는 겁니다.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한 배우들이 종업원으로 일하고, 그 영상을 예능처럼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고. 재밌지 않겠습니까?”
희열로 들뜬 홍보팀장 이차원을 보며, 이중재는 생각했다.
이 인간 정말 별명처럼 4차원이라고.
< 56장 - 팀장 이차원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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