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60화 (160/250)

< 57장 - 인간 이기자 (1) >

스물네 살 이기자는 밝은 청년이었다.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항상 웃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주변에 말을 걸고 다녔고, 상대의 기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위기메이커인 동시에 분위기파괴자였다.

예를 들면 감독이 스토리보드의 오류를 깨닫고 고뇌하고 있을 때에 물색없이 다가가서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감독님 하고 떠든다거나, 촬영장 근처에 폭설이 내려 식료품의 조달이 문제가 됐을 때 눈을 갖고 들어와 맛있다며 먹는다거나.

제 딴에는 주변을 즐겁게 만들어주려 하는 짓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옆에 두기 불편해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성격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날의 사건 이후, 그는 스스로 밝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졌다.

그로 인해 눈치보다 앞서는 의욕을 갖게 된 셈이었다.

다만 촬영 중에는 조금 달라졌다.

그는 눈을 빛내며 상대역의 움직임을 살폈고,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다.

거기에 이찬의 지도가 더해지며 훌륭한 ‘태석’이 완성됐다.

물론 그 지도는 상당히 거칠었다.

밝고 낙천적인 이기자조차 때로 한숨을 쉬게 만들 만큼.

그럴 때면 이찬 사단의 넷 중 홍일점이자 가장 어린 나지은이 다가와서 위로를 건네주곤 했다.

“기자 형, 괜찮아? 찬이 저 새끼가 말이 좀 심하지?”

“심하게 맞는 말이지. 찬쌤 말대로, 난 제 할 일도 못하는 반푼이가 맞아.”

“······아, 그러셔.”

“힘내야 되겠다. 주연배우님이 더 신경 쓰시는 일 없게. 자꾸 찬이 연기에 집중해서 내 대사 까먹는 버릇, 고쳐야 돼.”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기자는 사실 이찬 팬클럽 ‘마이 찬’의 백만 회원 중 한 명이었으니까.

특히 그는 마이 찬 중에서도 드물게 이찬과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막 군에서 전역해서 지인의 소개로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뛰던 무렵, 이찬의 <고등형사>에도 참여했던 것.

그때 어린 나이로도 현장의 분위기를 장악하던 소년을 본 것이 이기자가 연기자를 지망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기에 넷 중에서 가장 성실하게 연기지도에 따르며, 수제자로서 때로는 다른 제자들을 다독이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물론 노력한 만큼 성과가 좋지는 않았다.

“대범이 형! 저 설경을 봐봐요. 이런 곳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어.”

“개새끼가 뭐라 씨부리는 거야.”

“형 형, 혼잣말인 척하면서 욕해도 난 알아요. 형이 사실은 마음 따뜻한 사람이란 걸요.”

“또라이 새끼가.”

“근데 남현이 너는 진짜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데? 정말 대단해. 연기를 완전히 타고났어.”

“흐흐. 자쿠또와 치가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크 지온······.”

“자꾸 지온······? 아, 지은아. 너 춥지 않아? 이거 좀 입고 있어. 오빠는 몸이 건강해서 괜찮거든.”

“형, 바들바들 떠는 거 다 보이거든?”

“어······ 근데 지은이 넌 왜 계속 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나한테 오빠는 오직 다섯 명뿐이야. 단지 널 사랑해······.”

누구 하나 만만치 않은 동료들 사이에서 분위기메이커 노릇을 한다는 것은, 필사적으로 낙천을 연기하는 이기자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럴 때마다 이찬을 바라봤다.

‘찬쌤의 멋진 점은, 어린 나이에도 세계 최고의 연기력을 갖췄다는 점만이 아냐. 저 녀석은 언제나 주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어. 자기 자신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찬쌤을 닮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돼. 난 아직 멀었어.’

그런 이기자의 노력이 꽃을 피운 것은, 2막 직후에 각본의 포커스가 태석 역으로 쏠린 이후.

활기찬 성격의 태석이 표정을 바꾸고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을 무렵부터 스탭들은 온통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와······ 기자 씨 좀 신기하네요. 맨날 헤헤거리고 있어서 진중한 연기가 될지 어떨지 걱정했는데, 저렇게 자연스럽네.”

“그러게. 지금까지 잘했던 건 캐릭터가 맞아서 그런 거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이 영화 진짜 대박 나는 거 아닐까요? 찬이도 찬이지만, 다른 배우들도 전혀 신인 같지가 않아요.”

“그렇다니까? 계진행 감독이 어떤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제작지원을 해줬겠어? 이거 적어도 100만 찍는다.”

“와······! 그렇게만 되면, 진짜 일대 사건이네요.”

클로즈업 분량 촬영을 마치고 스탭들 뒤를 알짱거리던 이찬은, 그 이야기에 꽤 흡족해했다.

‘고작 100만 갖고 호들갑 떠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이제야 스탭들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모양이야. 아무렴. 내가 아무 신인이나 데려다가 연기 시켰겠냐고.’

이기자는, 이찬 사단의 뉴페이스 8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띈 인재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성장을 기대하는 인물 역시 그였고.

‘이기자 후배님은······ 더 향상될 수 있어. 어정쩡한 강박증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무명에 있을 배우도 아니었던 거.’

그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낙천적인 태도였다.

도무지 진지함이 보이지 않는다- 연기를 하다가도 실실 웃어버려서 몰입감을 깨뜨린다- 애초부터 배우가 될 재목이 아니다-

그게 그간 이기자를 심사한 오디션 면접관들의 공통된 평가였던 것이다.

흔하디흔한 페이스라 깊이 있는 배역이 아니면 굳이 쓸 이유가 없는데 진지한 연기를 아예 못 하는 배우라는 악명. 소년은 업계의 마당발 계진행을 통해서 듣게 그 뒷얘기들을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편견을 웃어넘길 수 있었다.

신의 축복과도 같은 관찰력을 갖고 있는 덕분에.

‘그런 게 아니야. 애초에 낙천적인 성격도 아니고, 그게 상황파악도 못 하고 툭툭 튀어나오는 것도 아닌 거야. 오히려 그건 편집증과도 같은 집념. 언제나 밝게 웃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희극인 거지.’

흔한 얼굴의 청년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물론 이찬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세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감정뿐이니.

하지만 소년은 자신이라면 이기자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확신을 실현시켰다.

‘당장은 최고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일단 극의 몰입은 깨지 않을 수준이 됐어. 다른 후배님들까지 제몫을 해준다면, 영화의 완성도는 확실히 제고돼. 신예 배우들의 파란이라는 식으로 화제성도 만들어질 거야. 그렇게 되면 남는 건 주연의 활약뿐. 그렇다면 100만이 뭐야? 충분히 200만도 달성할 수 있어.’

독립영화로서는 까마득한 흥행실적을 상상하며, 소년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그날 밤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회사의 신임 홍보팀장이, 그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음을.

“300만 관객 돌파를 위한 <이찬의 산장>······이요?”

[그래. 여러모로 고민해봤는데, 그게 딱인 것 같아.]

“음. 그런 게 영화 홍보에 도움이 돼요?”

[요즘은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잖아? 유튜브 같은 편리한 포맷도 생겼고 말이야. 그쪽도 전략적으로 국내 프로모션 늘리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잘 얘기하면 사이트 차원에서 지원해줄지도 몰라.]

“아니, 유튜브 그건, 한국어 페이지도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한국 IP 한정으로 이벤트 페이지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무엇보다 세계적으로도 괜찮은 아이템이잖아? 칸 3관왕 배우의 신작 프로모션을 단독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하면 솔깃할걸? 오히려 지원금 나올지도 몰라.]

거기까지 들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찬의 명성은 해외에서도 결코 낮지 않은 상황.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친절한 살인자> 이후로 어떤 작품에 출연할지에 대해서 영화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생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탐을 낼 만한 아이템이라는 것.

이미 활성화되어 있는 사이트에 홍보하려면 돈이 들지만,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이찬의 네임밸류를 빌려주는 셈이다.

어쩌면 이차원의 말대로 프로모션비가 지급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홍보에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면, 따로 해외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고도 여러 나라에 배급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재정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될 일.

상업영화에만 열광하는 국내와 달리 유럽 쪽은 상대적으로 예술영화의 마니아층이 튼튼한 까닭이었다.

거기에 현실적인 부분까지 생각해보면, <설산> 제작진 입장에서도 그 홍보전략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영화 촬영이 지체되는 상황에 대비해 1월 중순까지 빌려놓은 산장이다.

그러나 이찬 사단의 활약으로 매일 예정된 분량 이상의 OK컷이 완성되고 있어, 늦어도 연말까지 모든 촬영이 끝날 것이라 추정되는 상황.

그렇다고 일시불로 지급된 임대료로 세계여행을 떠난 원 주인을 촬영 일찍 끝났다고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활용이 애매해진 공간에서 홍보까지 할 수 있다고 하면 환영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한 이찬은,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 잘 알겠는데요, 진짜 이해가 안 돼요. 배우들이 손님 받는 산장 영상 올린다고 누가 보겠어요? 제 팬들이라면 몰라도 일반인들한테는 지나가는 얘기일 것 같은데.”

[어······ 찬아, 진심이야?]

“진심이냐고요? 물론이죠.”

[어······ 신기하네.]

“신기하다고요?”

[어. 그러니까······ 네 팬이 지금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백만 팬덤이잖아요? 칸 이후로 92만 정도까지 올라온 건 봤어요. 근데 아이돌한테 밀려서 2위 됐던데.”

[어, 그야 그렇지. 아이돌 쪽은 팬카페 가입을 안 하면 거의 정보를 얻기 힘드니까. 그에 비해서 따로 행사도 안 하고 작품으로만 말하는 배우라면 별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소식을 빠르게 듣기 위해서 포털 아이디 만들어서 네 팬카페 가입한 사람이 92만 정도 되는 거지.]

그 어조에서 소년 역시 묘한 감상을 받았다.

“설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넌 혹시 다른 연예인 팬이 된 적 없니?]

“없죠. 제가 제일 잘하니까요.”

[아하하하. 배우 말고 가수나, 아이돌은?]

“전혀요.”

[그래서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하긴, 유럽일주 끝내고 집이랑 촬영장만 오가던 애가 달라진 인기를 실감하기도 힘들었겠지.]

귀국한 이후 김도철을 꺼내기 위해서 법무팀 사무실이나 교도소에는 종종 들락거렸지만, 대중과 따로 마주하는 자리는 만들지 않았던 이찬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위상을 실감치 못하고 있었다.

[보통 팬덤의 규모를 측정할 때 팬카페 회원수를 많이들 얘기하지만, 사실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야. 2002년 반지의 제왕 안정환, 그 사람이 팬클럽 몇 명이나 됐을 것 같아?]

“어······ 한 50만은 되지 않았을까요? 인기가 정말 대단하셨으니까.”

[전혀 아냐. 지금도 채 10만이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에게 사랑받으면서 수십 개의 CF를 찍은 거야. 굳이 팬카페에 가입할 유인이 없었을 뿐이지 인지도 최고의 국민영웅이었으니까. 그리고 찬아. 넌 그 선수보다······ 박세리나 박찬호 선수보다도 더 큰 감동을 한국인들에게 안겨줬어. 칸의 주인공 이찬은, 해방 이후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서 최고의 국위선양이었단 말이야. 팬카페 가입을 안 했다 뿐이지 사실은 전 국민이 네 팬이란 거야.]

전 국민이 내 팬- 이찬은 허탈하게 웃었다.

국위선양을 이뤄낸 이들에게 열성적으로 응답해주는 국민성이야 2002년에 이미 확인한 바 있었지만, 그게 스포츠만큼이나 영화계에도 강하게 작용할 줄은 몰랐다.

[그런 네가 신작 프로모션으로 리얼한 예능을 찍어 올렸다는데, 인터넷만 켜면 그걸 무료로 볼 수 있다는데, 안 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기까지 들은 뒤에, 소년은 마침내 인정했다.

“뭐······ 좀 황당하긴 한데, 가능성은 있겠네요.”

[황당하지만 가능성 있는 거라면 내게 맡기라고. 찬아, 내 별명이 뭐야?]

“4차원이시죠. 뭐, 좋아요. 어차피 해야 되는 홍보, 편하게 산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나쁠 건 없죠. 추진해주세요.”

[알겠어. 기다리고만 있어라. 당장 협상 시작해서 최고의 기획을 완성할 테니까.]

그 승인으로 <이찬의 산장>이 급물살을 탔다.

유튜브와의 합작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국내 최초의 시도였으며, 이찬의 예능 출연이라는 측면에선 세 번째 케이스였다.

*

태석 역에 집중된 시퀀스의 촬영을 마친 날.

맥주캔을 들고 점퍼를 걸치던 이기자는, 테이블 쪽에서 강렬한 시선이 쏘아지는 것을 느꼈다.

“찬쌤?”

“네, 후배님.”

“어······ 같이 한 잔 할래?”

그저 민망해서 농담 삼아 해본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찬은 기다렸다는 듯 펄떡 일어나 맥주캔을 손에 쥐었다.

“미성년자의 주류 구매는 불법이지만, 이렇게 성인이 주재하는 가벼운 맥주 한 잔은 지탄받을 게 없는 일이죠.”

“하하하. 아니, 쌤 맥주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쌤네 집 냉장고 맥주가 이상하게 빨리 줄어든다 싶었어.”

“비밀이에요.”

“당연하지. 쌤 비밀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진 않아요.”

그렇게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통과해 계곡이 보이는 테라스로 나온 뒤, 두 사람은 캔을 부딪쳤다.

건배사는 연상인 이기자의 몫이었다.

“자, <이찬의 산장> 선공을 위하여.”

“······본말이 전도된 거 아녜요? 그건 어디까지나 <설산> 성공을 위한 프로모션인데.”

“에헤헤. 근데 난 그거 진짜 기대된단 말이야. 전국 각지에서 찬쌤 팬들이 몰려올 거야. 어떤 사람들일까?”

“글쎄요. 후배님 쪽은 어때요? 왜 내 팬이 되셨어요?”

술 한 잔이 들어간 김에 물어본 말.

그 질문에, 낙천적인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늘 그랬듯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렸다.

마치 신의 축복을 갈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 57장 - 인간 이기자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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