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장 - 인간 이기자 (3.) >
산장의 손님들은 때로 MC처럼 기능했다.
대부분이 이찬의 팬들인 만큼, 신작의 내용이나 배우들과의 관계, 촬영 중의 에피소드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했다.
그런 문답을 통해서 자연스레 <설산>의 홍보가 이뤄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의미 그대로의 게스트.
이찬과 배우들은 손님들의 호기심을 해소해주는 한편으로, 그들이 살아온 인생 얘기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영화 <설산>의 시퀀스 때문이었다.
작중에서 손님들은 주인의 제안에 의해 각자의 죄를 고백하는 진실게임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이찬의 산장>의 핵심 코너도 낯선 사람들이 숨겨왔던 이야기를 하나씩 공유하는 게임이 되었다.
물론 분위기는 영화와 무척 달랐다.
카메라로 촬영 중인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기에 불법적인 행동을 저질렀다고 자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기에 고백은 귀여운 장난 수준에 제한됐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자매와 싸운 뒤에 옷을 찢었다거나 부모님께 반항하려고 비싼 양주를 다 마셔버렸다거나.
그런 와중에, 물론, 사회자이자 서버인 배우들 역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해야만 했다.
형평성을 위한 의례적 행위이자 방송분량을 위한 포맷. 오직 유명인을 보려고 영상을 접한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였다.
그를 위해서 이찬은 아주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을 여럿 준비해둔 바 있었다.
약간의 각색까지 곁들여서.
“전 사실 소매치기를 보고도 모른 척했던 적이 있어요. 터미널 대합실에서였는데, 험상궂은 아저씨가 대놓고 가방에서 지갑 빼더라고요. 신고도 못 했어요. 어렸을 때라 겁이 났었죠. 나중에 지갑만 찾아다가 돌려줬어요.”
“우와······ 상상이 안 돼.”
“진짜 진짜. 바로 잡아서 패대기칠 것 같아.”
“······제가 무슨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어렸을 땐 작았어요. 물론 지금이야 현행범을 가만 놔두진 않을 거예요. 범죄로 인한 불의의 피해자가 없기를 소망해요.”
대놓고 바른생활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 거짓말들을 눈을 빛내며 들어주는 손님들은, 첫날은 젊은 여성들이 전부였지만, 점차 남녀노소로 확대되었다.
개중에 동갑내기 이사랑도 있었다.
“나으리! 나으리이이!”
“하하. 우리 집안 몸종, 오셨는가.”
지난날의 네임드 어사폐인 ‘유씨집안몸종’의 장본인이자 팬클럽 창단일의 일일데이트 당첨자였던 동갑내기 소녀.
그녀는 운 좋게도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다시 한 번 이찬과 마주하게 되었다.
“힝······ 찬아아,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야. 잘 지냈어? 먼저 전화해도 된다니까.”
“그, 그건 너무 미안해서······. 너 바쁘잖아!”
“남들한테 알려주지만 않으면 돼. 친구 전화는 괜찮아.”
“아앗······ 으앗······.”
아이돌보다도 많은 팬을 보유한 배우에게 친구 소리를 듣는 건, 업계에선 포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행복일 터.
이사랑은 이후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펜을 잡았다.
그렇게 이찬의 초상화 일곱 점이 산장에 걸리게 됐다.
이튿날 그 장관을 보며 이기자는 무척이나 흥겨워했다.
“사랑이는 쌤을 정말 좋아하나 봐! 보통은 사진 찍고 대화를 나누는 데 더 집중할 텐데, 그러는 게 아니라 쌤한테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어서 방에만 있었던 거잖아?”
“그거야 친구니까 그런 거겠죠. 종종 통화는 하거든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거든. 나를 배제하고 순전히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참 멋져.”
“흠. 후배님도 그런 마음인 거예요?”
“어? 나? 어······ 하하하. 나는 아니지. 아닐걸?”
그런 이기자의 속내를 일부나마 알게 된 건, 12월 30일 밤의 일이었다.
그날의 진실게임은 초반부터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세 번째 고백자로 지목된 이찬의 남성 팬 한 명이, 자신이 최근에 이혼했으며, 그 계기가 된 싸움이 쌍방의 육아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고백한 것.
그렇지만 이제와선 부인의 곁에 가 있는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훌쩍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감대 있는 중년층이 이런저런 위로로 달래던 와중에, 그 남자를 빤히 보던 이기자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배님? 어디 가요?”
“아······ 참······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하하하.”
늘 그랬듯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2층을 향했다.
이찬이 옳다구나 하고 뒤따라 일어선 건, 딱 맥주 한 캔을 비우고 싶은 타이밍이었던 까닭.
“혹시 가서 혼자 우시는지 확인해볼게요. 얘기 나누세요.”
그러면서 슬쩍 맥주캔을 들고 2층의 테라스로 나갔지만, 사실 정말 울고 있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세 달 가까이 이어진 폭압적인 트레이닝에도 인상 한 번 찌푸려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고작 말 몇 마디 들은 걸로 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어······ 후배님? 울어요? 진짜예요?”
“으흑? 끄, 아니? 아닌데, 안 우는데?”
“뭐야 이 상황? 아, 혹시 후배님 결혼했다 이혼했어요?”
“응? 읍, 으잉?”
잘못 짚었나 생각하며 캔을 따자, 맑은 소리가 설원에 반사되어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기자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으하핫, 하핫. 아, 아냐. 그런 거 아니지. 아 참, 민망하네.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
“아······ 그쪽이었구나.”
“응. 그래서 살짝 슬펐던 건데, 이제 아무렇지 않아. 나는 즐거운 사람이니까. 이기자, 이기자!”
거짓말의 징후가 명백한 미세표현들에 눈길을 주며, 이찬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게 이유였던 거구나. 이혼가정의 아이가 이후 성장과정에서 충분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면 십중팔구 정서적인 장애가 촉발된다고 했어. 그래서······ 아니, 좀 이상한데? 보통 그런 케이스는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고 했는데, 이 후배님은 그게 아니잖아?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사회적이고 황당할 만큼 낙천적이야. 그럴 수가 있는 건가?’
“후배님. 혹시 말인데, 부모님의 이혼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무, 무슨 말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맞는 것 같은데. 후배님이 혹시, 부부싸움을 촉발시켰어요? 그래서 그걸 다 자기 때문이라고-”
“아니라니까! 넌, 이, 씨······ 아이······ 아니라고······.”
처음 들어보는 스마일맨의 고성.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이내 시선을 피하며 턱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런 후배를 바라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맞네. 그거였네. 부모의 이혼이 자신의 부정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스스로를 억제하고 옭아매게 된 거. 하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 건가?’
그 심리에 대한 추측은, 이후 방으로 돌아가 인터넷 검색을 수행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 이혼 자녀의 정신건강 / 입력 2004.04.02. 12:26
······ 3) 타협의 단계
만 3-5세에 해당하는 학령전기의 아동들은, 실제 했거나 상상했던 잘못들 때문에 부모 중 한 명이 떠난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행동을 변화시켜서 이혼에 의한 상처를 치료하려고 한다.
이럴 때는 생활에 있어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고, 그들의 행동 때문에 가정이 변화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안심시켜줄 필요가 있다. 」
홀로 고개를 주억거린 뒤, 소년은 또 한 번 맥주가 당기는 마음을 관조했다.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 그 변화에, 아이는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모양이야. 첫째는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방향. 김도철 형이 그 케이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 둘째는 극단적으로 친화적인 방향. 이혼과 유사한 슬픔을 다시 겪지 않고자, 자신의 욕망을 모두 억제하고 타인의 기분에만 맞추려고 드는 케이스······. 그게 이기자 후배님이 이상한 새끼라고 불리게 된 원인인 거야.’
두 사람의 사정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김도철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한마디 말 때문에 부모가 살인자와 피해자로 변모했고, 이기자는 스스로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로 인한 인격 변화는 정반대 방향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같은 원인에서 나온 전혀 다른 결과라. 그 비교도 참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어떤 걸까? 만 3세가 되기도 이전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나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된 걸까? 만약 형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어느 쪽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이기자 쪽에 호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찬은 자신이 그처럼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난, 분명히 김도철 그 인간처럼 됐겠지. 세상을 저주하고 나 자신을 조소하며, 그렇게 죽어갔을 거야. 형이 날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줬어. 그래서 김도철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됐고, 작으나마 이기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됐고, 이사랑 같은 작은 아이를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정말 많이 바뀌었어.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이 변할 거야.’
*
이튿날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자신의 머리맡에 서서 머뭇거리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이기자 후배님?”
“······찬쌤. 어젠, 미안했어!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정말 미안해. 다시는······ 다신 안 그럴게. 용서해주면······ 안 될까?”
“용서고 자시고, 하나도 화 안 났어요. 일부러 찌른 거거든요. 내담자의 속 얘기를 끌어내기 위한 기법이죠. 심리상담에서 직면이라고 부르는 과정인데.”
“어? 어, 어?”
“······이건 됐고. 어쨌든 후배님이 화 좀 낸다고 해서 싫어하지 않아요. 나만 해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화내고 다니는데 뭐. ‘형제 같은 사이’라는 강정후 조혁수 그 선배들한테도 짜증 잔뜩 내고 그래요. 뭐······ 그러면서 소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 어어······.”
이찬 입장에선 잠결에 주워섬긴 말들이었지만, 그 이야기에 이기자가 느낀 감흥은 크고 무거웠다.
‘화내도, 된다고? 찬쌤은 세상에서 거의 제일 유명한 배우고, 난 이제 막 연기 시작한 햇병아린데······ 그런데도, 화내는 게 상관없다고? 날, 버리지 않는다고?’
지나치게 당황해서 특유의 미소조차 짓지 못하는 이기자를 이끌고, 이찬은 다시금 2층의 테라스로 나갔다.
물론 맥주캔을 손에 든 채였다.
“모닝 맥주가 꿀맛이지. 그렇죠? 다들 잠들었을 때 아무도 모르게 마시는 이 맛은, 최고예요.”
“어, 그런가······?”
“그런 거예요. 그리고 미안해요, 후배님. 너무 궁금해서 그랬어요. 원래 그렇게 사생활 파고드는 성격은 아닌데.”
“아, 아니, 쌤이 미안할 거 없는데······.”
“그럼 하나만 더. 왜 내 팬이 됐어요?”
방금 전에 사과한 주제에 또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그 이찬스러움에, 혼돈 속의 이기자조차 킥 웃고 말았다.
“아핫······ 쌤은 진짜, 희한해. 별 거 아니었어. <미스 스캔들> 봤는데, 거기서 너는 가족을 만들었잖아? 어린데도, 현명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면서, 가족이 되더라. 그거 보고 반했던 거야. 난 그 반대였으니까······.”
“오, 이제 인정하시네?”
“아니, 그게,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럼, 부친 쪽이에요 모친 쪽이에요? 어느 쪽이 떠났어요?”
“아니, 쌤, 사생활 안 파고든다며······.”
심문은 거기까지였다. 이찬은 웃으며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에 비해 이기자는 오랜만에 정색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만이, 예상치 못한 충족감으로 벅차올랐다.
‘그래도 괜찮은가 봐. 나는, 계속 바보처럼 웃기만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봐. 찬쌤 옆에서라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봐. 나도, 좋은 연기자가······!’
의도치 않은 추종자의 탄생을 알지 못한 채, 이찬은 맥주캔을 냅다 던지곤 하루를 시작했다.
해가 뜬 뒤에 그 캔을 줍게 된 김도철의 반응이 유쾌했다.
“아, 씨발! 이 새끼 진짜 죽여버릴 거야! 이건 나 놀리는 거야, 씨발. 안 그러냐? 야, 이찬. 말해봐. 나 이 새끼 잡아다 족쳐도 되는 거지?”
“하하. 그래요 형. 이번에야말로 진짜 살인자 되시겠는데.”
“······아니 씨발 농담이지······. 뭘 그렇게 또······ 말하냐.”
“나도 농담이었는데?”
“······개새끼가. 넌 나중에 천벌 받을 거다.”
천벌은 받지 않을 거라 자신하며, 소년은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나는 달라. 형을 만난 이후로 전혀 달라졌어. 안정록 아저씨가 말씀하신 대로, 난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좋아. 이찬, 이기자!’
그런 생각을 떠올린 12월 31일.
그날은 추첨된 손님이 아닌 동료들이 산장을 찾아왔다.
정창영 대표의 주도로 연말 일정을 비운 직원과 배우들이 간판배우와 함께 새해를 맞고자 오대산을 찾아온 것.
그중에는 물론 명진아의 모습도 있었다.
“누나, 왔어? 근데 사람 너무 많은데. 침대 모자라겠다.”
“응······ 난 혼자 오고 싶었는데, 대표님이······.”
소소한 회동을 원했지만 회사 송년회가 되고 만 연말.
그들의 등쌀에 여러 차례 폭탄음료수를 마시고 나서야, 소년과 소녀는 2층의 테라스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꺼억. 여기서 내일 일출 보면 돼. 그럼 2006년 시작이지.”
“응······ 그······ 찬아. 저기······ 사······귀자.”
“응? 하하, 갑자기?”
“열두 시 지났으니까, 나 이제 스무 살인데? 그러니까, 빨리 면허도 딸 거고, 차도 살 거거든? 그러면, 이제 남들한테 안 들키고 비밀연애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사, 사랑해······.”
기자들의 눈도 카메라의 플래시도 없는 오대산 첩첩산골.
그곳의 한 산장에서,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6년을 기다린 소녀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 57장 - 인간 이기자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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