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장 - 소녀 송유리 (1) >
“저, 저, 빨리 면허를 따야 되겠어요.”
산장 쪽을 주시한 채 조급하게 말하는 명진아를 룸미러로 보며, 하늘기획 실장 조진영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아, 그거야 벌써 학원 잡아놨잖아? 연말에는 클래스가 없어서 내일부터 나가기로 한 거고.”
“그런데, 미리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빠, 저 운전 좀 가르쳐주세요.”
“아이고, 성질도 급하셔. 빨리 면허 따서 오빠 드라이브 시켜주게? 하지만 1차는 필기야. 일단 공부부터 해야지?”
“그건 벌써 다 해놨어요. 가자마자 바로 시험 보게 해달라고 할 거고, 다 맞출 거예요.”
“오, 공부 잘하는 우리 진아가 예습을 하셨구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명진아는 원래도 학업에는 탁월한 편이 아니었고, 연기에 집중하면서는 상위권에서 보다 더 멀어져갔다.
그렇지만 2005년의 그녀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존재.
고3을 맞이해 연기를 접어두고 학업에만 집중한 소녀는, 이찬의 키스와 정신혜 열애설 등을 잊기 위해 오직 공부에 몰두했고, 그로써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 결과가 국립한국예술대학교 연극원 연기과 합격이었다.
10월에 치른 2차시험 결과 발표가 이미 11월에 나왔으니 굳이 볼 필요 없었던 수능에서도, 그녀는 꽤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렇게 소녀는 미성년으로서의 마지막 시기를 뜨거운 학구열과 함께 불태웠다.
그리고 20세가 된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불타오를 때였다.
‘찬이가, 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물론 그건 완벽한 이해의 합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건부 유예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를, 명진아가 자의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젯밤 이찬은 소녀를 보며 혀를 찼다.
“아니······ 그 얘긴, 내가 성인 됐을 때 말한 거였어.”
“어, 어?”
“누나 말고 나. 나 아직 만 16세. 아직 2년 남았다고.”
“아앗!”
“그렇긴 한데, 고마워. 벌써 6년인데.”
“마, 맞아! 6년 동안 일편단심이었어!”
“쉿. 목소리 너무 커. 아무튼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고, 나도 아직 누나 많이 좋아하니까, 일단 시도는 해보자.”
“아······ 시도는, 어떤 거야?”
“요새 말로 썸씽이라고 하지? 일단 그렇게 시작해보자. 혹시 또 모르잖아? 실제로 데이트를 해봤는데 별로일 수도 건데, 관계가 깊어진 뒤에 헤어지면 서로 불편해질 거야. 그러니까 가볍게 썸씽부터 시작하는 거지.”
알려지기로는 거의 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사용되었다는 은어 ‘썸씽’의 실제 용법은, 명진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게 친구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자!”
“목소리 낮추라니까. 아무튼 그걸 하면서 서로 조건을 좀 붙이는 거야. 내가 만 18세 될 때까지 각자가 해나갈 일들에 대해서. 우선 난 누나가, 혹시라도 열애설이 나오더라도 피해가 없을 정도의 커리어를 완성했으면 좋겠어.”
“어······? 차 있으면, 안 들키는 거 아니야?”
“차가 뭐 가제트 만능팔은 아니잖아. 그래도 당장은 편리한 수단이 돼주겠지. 그러니까 면허 딴다는 건 찬성. 누나는? 나한테 어떤 걸 요구하고 싶어?”
“나? 난······ 그런 거 없는데?”
“그러면 나만 나쁜 놈 같잖아. 아무거나 말해봐.”
“어······ 그럼······ 어······.”
“차차 생각해봐 그럼. 아무튼 그렇게 서로가 약속한 걸 잘 지켜내면, 이 안건은 그때 다시 논의해보는 거야. 괜찮지?”
“어, 응!”
폭탄음료수 잔뜩 마신 뒤 일부러 이까지 닦았지만, 이찬이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훔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는 웃으면서 명진아의 손을 잡았다.
“스킨십은 딱 여기까지. 이 이상은 서로한테 곤란할 거야.”
“버, 벌써 해놓고······?”
“키스? 그러네. 그렇긴 한데, 하고 싶어?”
“아, 아니!”
“그래? 싫으면 안 해야지. 이거 마시고 내려가자.”
그러면서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한 이찬을 보며, 소녀는 순간적으로 꽤 큰 울화를 느꼈다.
그렇지만 잠시뿐. 이내 그런 무신경한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었다.
산장을 떠나는 지금에 이르러선 나름의 방어기제까지 완성이 되어 있다.
‘찬이는, 아마 부끄러워서 그랬을 거야. 그럼 그럼, 당연하지.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잖아? 그러니까 겁이 나서 일단은 튕겨보는 걸지도 몰라. 내가 이해해줘야 돼. 누나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을 하며 웃던 명진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오빠! 오빠 오빠. 찬이한테요, 다큐 보내줘야 돼요.”
“다큐? <칸의 남자 이찬> 다큐? 왜, 다시 보고 싶대?”
“다시가 아니라, 아예 안 봤대요! 그날 낮에 손님들하고 설원 산책한다고 TV를 안 켰대요! 그래서 나중에 온 손님들한테 얘기로만 들었댔는데, 진짜 못됐죠?”
“그러네, 못됐네.”
“······아냐. 못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보여주고 싶거든요. 오빠가 메일로 보내주세요. 아셨죠?”
“하하하, 그래, 알았어. 당연하지! 우리 연예인이 한겨울에 덜덜 떨면서 찍은 다큔데, 그걸 안 보면 안 되지!”
데뷔 시절부터 성인이 되도록 맡아온 소녀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조진영은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
이후 조진영이 빠르게 영상을 받아 메일로 보냈지만, 이찬이 그걸 확인한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정확하게는 산장에서 퇴거한 이튿날인 1월 11일.
오대산에서 손님들과 홍보영상 분량을 뽑고 또 몰래 맥주 마시기에 탐닉하던 소년은, 서울로 돌아와 <이찬의 산장> 편집에 여념이 없는 사계 프로덕션 사람들을 만나서 격려의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에 든 뒤, 해가 밝은 아침에야 컴퓨터를 켰다.
‘<칸의 남자 이찬>이라······ 뭘 또 이렇게 대놓고 자랑 같은 제목을 지었나 싶긴 한데, 반응이 꽤나 좋았다지?’
25일 이후로 산장을 찾은 손님 중 그 다큐를 보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광팬들이 앞 다퉈서 이찬에게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려 애썼기에, 소년은 보지 않은 다큐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일단 시청률은 16%. 이것도 역대 최고 수치랬지? 역시 나야. 뭐만 하면 역대 최고가 나오고 말지.’
2002년 KBC의 <다큐 스페셜>이 11.8%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공중파에서든 케이블에서는 다큐멘터리는 비인기 장르였다.
시청률이 낮으니 광고도 쉽게 끊겨 민영방송에서는 다큐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상례.
그런 와중에 MSB에서 무려 16.2%의 드라마급 시청률로 이찬을 조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작비도 얼마 안 든 다큐 하나로 5억 넘는 광고료를 챙겼다고 하니까, 이건 뭐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러 와야 되는 거 아닌가?’
그건 과한 생각은 아니었다.
칸과 이찬이라는 마케팅포인트가 없었다면, 아무리 연휴의 낮 시간대라고 해도 그 정도의 시청률은 나오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 성과는 이찬에게도 분명 반가운 일이었다.
소년의 일대기가 조명되는 한편으로 지금껏 그가 가르친 배우들의 인터뷰까지 잔뜩 들어갔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최고의 스승이 된 그의 위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을 터.
이후로 하늘기획의 문을 두드리는 젊은 연기자들의 행렬이 더욱 길어질 게 분명했다.
그에 더해 소년의 차기작 <설산>에도 큰 관심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편집이 거의 끝나가는 <이찬의 산장>까지 힘을 보탠다면, 그 독립영화가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할 가능성은 더욱 커질 터였다.
그걸 생각하면 따질 일은 아닌가- 생각하며 소년은 웃었다. 그리고 막 다운로드가 완료된 영상을 재생했다.
용량의 한계로 인해 화질은 썩 좋지 않은 디지털본.
그렇지만 칸 영화제를 비롯한 몇몇 자료화면 뒤에 등장한 소녀를 이찬은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진아 누나······ 내 성장사를 소개하고자 한다면, 임희재 누나보다도 더 적합한 인물이긴 해. 그렇지만 나한테 연기를 배운 적은 없는 누난데, 대체 뭐라고 얘기를 했으려나?’
명진아의 역할은 이찬의 과거를 찾아다니는 세 출연자 중 한 명이자 나레이터.
연상의 천세영과 남태형을 이끌고 추억의 장소들을 방문하며, 소녀는 이찬에게서 받은 감상들을 전달했다.
[처음 이찬을 만났을 때, 그는 열둘이었다. 키가 크고 볼살이 없어서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사실은 조금만 자세히 봐도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배우였고, 사석에서는 그렇게 귀여운 아이가 또 없었다.]
흐르는 나레이션을 따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첫 드라마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장 연차가 긴 명진아에게 일부러 살갑게 굴었던 일과, 연극을 마치고 함께 먹었던 고기와, 느티나무 아래에서 느꼈던 최초의 경외.
<가을하늘>에 관한 시퀀스는 5분쯤이었다. 이내 <미스 스캔들>에서 호흡을 맞췄던 남태형이 로케이션을 안내했다.
그 배우 및 스탭들의 인터뷰와 남태형 본인의 감상이 길게 묘사된 뒤에는, 뒤이은 긴 공백기 사이의 변화들이 자료화면으로 삽입되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이찬은 풋 웃었다.
거의 3년이 흘러 다시 <어사>로 뭉쳤을 때에도 명진아는 어디 하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연기력만이 더욱더 깊어졌을 뿐 마음은 여전한 순백의 눈.
거기다 키와 몸매마저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 놀리기도 자주 놀렸었다.
[어사 신드롬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어째선지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아마 촬영하면서도 속으로 짐작을 했던 거겠지. 이건 다르구나. 그간 만들어왔던 어떤 드라마와도 다르구나. 이찬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이렇게나 압도적이구나.]
대놓고 금칠하는 표현들이지만, 명진아의 순수한 목소리는 그 이야기들을 더없이 담백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합주실에서 밴드부를 연기했던 <꼬마신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던 2004년 청룡영화상.
그리고 두 사람이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었을 때와 소녀가 연예인X파일로 궁지에 몰렸던 일까지.
그 모든 과정 사이사이에 ‘이찬 아카데미’를 홍보하기 위한 시퀀스들이 있었지만, 소년은 내내 명진아의 목소리만을 경청했다.
[배우가 다른 배우의 팬이 되는 건 곤란한 일이라고도 한다.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될 수도 있기에. 그렇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찬의 데뷔작에서 상대역으로 연기했던 경험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놀랍도록 황홀해서, 그때 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그랬기 때문에······ 그를 닮아가려 노력했기 때문에, 더 나은 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기에, 이찬은 나의 영원한 스타다.]
‘참나, 거짓말도 잘해. 나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서 최고의 연기자로 거듭난 주제에······ 아니, 아닌가? 저 누나는 정말로 그게 나하고 같은 방향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닌데.’
명진아의 재능은 이찬이나 강정후, 조혁수가 갖고 있는 천부적인 관찰력과는 전혀 다른 것.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순수한 감정을 끌어내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찬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발현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스펙트럼에 맞는 배역에서는 그 이상의 깊이를 완성할 수도 있는 것.
‘그런 누나니까······ 아마 해낼 거야. 이제는 휴학도 가능해서 학업에 구애받지 않고 연기할 수 있으니까, 아마 스물둘이 되기 전에 열애설 조항 없는 CF계약을 잔뜩 따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게서 뭔가를 배웠기 때문이 아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머리로 연기하는 방법뿐. 그게 내 한계야.’
그 스스로에게는 한계가 아니다. 신체의 거의 모든 근육을 통제하며 미세표현을 훔칠 수 있는 연기자이기에.
그러나 남태형이든 천세영이든 이기자를 비롯한 이찬 사단이든, 가르치며 답답함을 느낀 것이 여러 차례였다.
‘아, 어디서 괜찮은 천재 하나 뚝 안 떨어지나? 혹시라도 나 같은 놈 하나 있으면 진짜 제대로 키워낼 자신 있는데.’
그런 헛된 바람을 품으며 아침을 맞은 이찬은, 이후 이연진과 계진행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하늘기획의 신인배우들을 불러들여 트레이닝의 진척상황을 살폈다.
그 뒤에 자신에게 무엇도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차기작은 이번 영화 개봉한 뒤에 다시 찬 영화제 개막해서 뽑을 거고······ 와. 이거 뭐야? 홍보 일정 빼고 나니까 갑자기 할 일이 없네?’
그런 까닭이었다. 소년은 염수진에게 별난 지시를 내렸다.
“누나, 수원이나 가죠.”
“아, 그때 그 국밥집? 거기 맛있었어? 난 별로였는데.”
“누나 의견 여쭤본 거 아니고요, 국밥 먹을 거 아니고요.”
“히히. 그럼 우리 오늘 근사한 데서 외식 할까? 양식 어때? 아, 맛있는 피자랑 파스타 먹고 싶다!”
쾌활하게 희망사항을 외치는 로드매니저와 함께 수원을 찾은 이찬은, 근사한 레스토랑 대신 추억의 장소를 찾았다.
과거 수원터미널이 있던 곳에는 이제 공사가 시작됐다. 주상복합 오피스텔이 들어올 모양.
그리고 그 주변은, 터미널이 있던 시절과 비교할 수도 없이 한산해져, 굳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시간은 흐르는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간 여기에 머물러 있던 내 시간도 흐르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난 더 나아갈 거야. 진아 누나랑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난 그 시기보다 더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렇게 형도 추억이 되는 거야.’
따뜻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상념.
소년은 모자를 벗으며 내리쬐는 태양을 마주했다.
그렇게 가늘게 좁혔던 눈이, 잠시 후에 빠르게 확장됐다.
‘······저건, 뭐야? 어디서 많이 봤던······ 내 모습?’
작은 아이였다. 멀리서 이찬을 곁눈질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미세표현이 이찬을 쏙 빼닮은.
소년은 작은 형체를 한참 동안 주시했다.
< 58장 - 소녀 송유리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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