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66화 (166/250)

< 59장 - 엄마 강정후 (1) >

2006년 1월 5일에 개봉한 <왕의 광대>는, 고작 8일 만에 350만 관객을 달성했다.

600개 스크린을 넘긴 와이드릴리즈를 고려한다 해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 기존에 이찬이 <고등형사>로 세웠던 기록들이 모조리 깨어지고 있었다.

매일이 축제여도 좋을 그 상황에,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인 강정후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홍보활동을 마치고 오랜만에 안정록과 마주앉은 자리에서도 천에 묻은 물감처럼 한숨이 배어나왔다.

“하······ 후우.”

“정후야. 이미 400만이 본 영화의 편집이 후회되는 거냐?”

“음······ 좀 그렇습니다. 키스 씬은 뺄 걸 그랬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 댓글 보는 게 좀 불편하네요.”

“너를 동성애자라고 넘겨짚는 사람들 때문이냐?”

“아뇨, 그건 상관없습니다. 연기자로서 그 정도 오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그런 느낌을 줄 만큼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칭찬일 테니까요.”

“하하, 잘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거니?”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툭툭거리면서 보고 있던 노트북을 돌리자, 안정록도 곧 문제가 되는 댓글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울오빠 왜이렇게예뻐!!! 이찬이도 반하겠어요!!!

정후오빠ㅠㅠㅠㅠ 찬이랑 로코찍어주세요ㅠㅠㅠㅠ

이찬아빠 정후엄마 완전 찰떡이겠다ㅠㅠㅠㅠㅠ

강정후♥이찬 뽀레버~~~~ 」

“······허. 이건 참, 허허. 참 별난 일이구나.”

“그렇죠? 진짜 황당하지 않습니까? 다들 정신이 나갔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물론 너희가 꽤나 잘 어울리긴 하지만-”

“선생님!”

“아니, 친구 같은 사이를 말하는 거야. 내가 볼 때 너희의 기질이 의외로 잘 맞는 구석이 많거든.”

“전혀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어쨌든 아주 예상하지 못한 프레임은 아니구나. 다만 나는 같은 기획사의 혁수 쪽하고 엮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찬이가 연결됐다는 점이 흥미로운걸.”

사실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프레임이었다.

안 그래도 여성보다 아름다운 미모로 꽃미남의 대명사로 군림해온 강정후가, 동성애 코드의 사극을 선보인 것이다.

그런 커플링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이 열광할 법도 했던 것.

다만 그게 갑자기 이찬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진 건, 인터넷을 잘 보지 않는 안정록에겐 꽤 의아한 일이었다.

“그게······ 작년 그 이찬 다큐 때문인 것 같아요.”

“<칸의 남자 이찬> 말이구나? 거기에 네 인터뷰도 삽입된 걸 보긴 했다만, 그 내용에 동성애 코드가 있었나?”

“질문 중에 그런 게 있었잖습니까. 충무로의 신(新) 트로이카로 묶여 있는 조혁수와 이찬 중에서 누구와 더 호흡이 잘 맞냐는 거요.”

“그랬지. 거기서 이찬이 더 맞다고 말한 건 봤다.”

“예. 제 딴에는 카메라 뒤에서 히죽거리고 있던 조혁수 놈- 아니, 조혁수 선배가 짜증나서 대뜸 그렇게 답한 거였는데,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하. 그건 분명 그랬지.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했으니까.”

“예. 그래서 네티즌끼리, 강정후가 이찬한테 완전 푹 빠졌다, 그딴 소리들을 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 와중에 <왕의 광대>까지 개봉했으니······ 유행처럼 커플 취급을 받게 됐습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안정록이 껄껄 웃었다.

“그거 참, 정말 묘하게 돼버렸구나. 인터넷상에서 장난처럼 하는 말들에 진지하게 반박 기자회견을 열 수도 없는 일이니, 이건 그냥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어.”

“아주 엿 같은······ 불편한 일입니다.”

“하하하. 자, 마셔라. 적당히 식었다.”

오랜 스승이 건네주는 차를 받아들며, 강정후는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현재의 이찬과 비슷한 나이부터 알았던 인물. 그리고 그에게 처음으로 연기의 즐거움과 세상의 따뜻함을 알려줌으로써, 10년의 외로움도 견딜 수 있게 해줬던 스승.

그런 안정록과 함께이기에 불쾌한 화제도 참을 수 있었다.

“이사님!”

“어, 찬이가 왔구나?”

다만, 평화로운 안정록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찬의 얼굴은,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이었다.

“너는 이 개- 거, 손이 없냐! 노크 할 줄 몰라?”

“어, 경쟁사 대표님도 계셨네. 한가하신가 봐요?”

“바쁜 와중에 시간 쪼개서 온 거다.”

“아, 그러세요? 그럼 시간 좀 더 쪼개고 계세요. 이사님, 소개해드릴 애가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그러면서 이찬은 손끝에 잡혀 있는 인물을 끌어들였다.

땀이라도 흘릴 듯 우거지상이 된 채 끌려온 건 작은 소녀였다. 이제 열 살이나 됐을 법한, 귀염상에 양갈래 머리가 인상적인 아이.

그렇지만 그 외에는 어떤 주목할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일 소개한다고······?”

“예, 중요한 아이거든요. 자, 인사해.”

“안녕하세요. 송유리라고 하는데요······.”

“어, 그래. 반갑구나. 안정록이라는 사람이다.”

“알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난 강정후야. 반갑다.”

“처음-”

“경쟁사 대표님이랑은 인사할 거 없고.”

“이게 진짜!”

“자, 이사님. 제가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마 다시는 찾기 힘들, 절 닮은 천재를요. 어떠세요? 느껴지세요?”

그 말에 황당해진 마음은, 안정록과 강정후가 대동소이했다.

이찬의 천재성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다.

비록 조력자와 경쟁자로서 포지션이 달랐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녀 송유리로부터 이찬과의 유사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음······ 유리야? 일단, 앉으렴. 차 한 잔 하겠니?”

“저요? 저······.”

“그래, 그렇게 해. 이사님, 마침 안 바쁘신 것 같은데, 잠깐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작보고회만 하고 바로 돌아올게요. 김도철 형, 갑시다.”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경호원을 끌고, 이찬은 황급히 방을 떠났다. 선배 배우에겐 인사 한마디 없이.

그 뒷모습을 잠깐 노려보다가, 강정후가 직접 문을 닫았다.

“하여튼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노크도 안 해, 문도 안 닫아, 정말이지 뭐 하나 예의 있게 구는 적을 본 적이 없어.”

흔한 투덜거림이었다. 연기라는 분야에서 위대한 재능이라고 인정하고 있을 뿐, 인간적으로는 무척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해온 까닭에.

그렇지만 그 작은 목소리가 송유리의 관심을 끌었다.

“와. 정후엄마다.”

“뭐······?”

“정후엄마요. 이찬 아저씨한테만 잔소리 많이 한다고 해서, 바가지 긁는 엄마 같다고, 그렇게 부른대요.”

강정후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서 호인이다.

굳건한 가면 속에서 늘 좋은 말만 입에 담기에, 방송가에서는 그를 마치 성인군자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때때로 이찬과 있을 때는 참지 못하고 지적을 하거나 투덜거릴 때가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퍼진 그런 ‘짤방’들 역시, 이찬아빠 정후엄마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항상 조심했어야 했는데. 젠장.”

“하하하. 정후야, 아이 앞이다. 말조심해야지.”

“예······ 후우.”

그렇게 둘러앉은 세 사람은, 이후 마치 창과 방패처럼 가면의 대결을 펼쳤다.

안정록과 강정후는 이찬이 말한 ‘절 닮은 천재’의 포인트를 찾아내기 위해서 눈을 날카롭게 빛냈고, 반대로 송유리는 자신의 천재성을 들키지 않고자 몹시 애썼다.

첫 번째 승부에서 패배한 건 놀랍게도 유명인들 쪽이었다.

“흠······ 글쎄······ 모르겠는데요? 선생님, 이 녀석 정말 천재 맞을까요? 아무리 봐도 흔한 꼬맹인데.”

“내게도 그렇게 보이기는 한다만, 찬이가 괜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후우. 너 유리라고 했지?”

“네.”

“너, 연기 배워본 적 있어?”

“아뇨.”

“흠. 그러면 간단하게, 배고픈 사람 연기를 보여줄래?”

후배가 제자랍시고 데려온 아이를 위해 선심 써서 건넨 말.

그렇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종류였다.

“싫어요.”

“······뭐?”

“죄송합니다. 싫어요.”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 계신 안정록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연기자셔.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입지가 있는 배우고. 이 앞에서 연기를 보인다는 건 모든 연기자 지망생들이 꿈꾸는 일이야.”

분명한 사실이었다. 안정록과 강정후에게서 한마디 연기지도를 들을 수 있다면, 어지간한 연기자들은 신발 없이도 먼 길을 달려올 터였다.

그러나 송유리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 저 연기 배울 생각 없거든요? 이찬 아저씨가 억지로 끌고 다니는 거예요. 방학 끝나면 풀어준다고 했으니까, 그냥 하는 시늉만 할 거예요.”

조금 어른스러운 기색이 있긴 했으나, 완벽하게 열 살짜리 소녀의 얼굴을 연기하면서 내놓은 대답.

그 말을 듣고 안정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구나. 찬이 말대로였어.”

“네?”

“그러네요. 잘 감추고 있긴 한데, 확실히 다릅니다.”

“네? 저기, 네?”

“이런 느낌이군요. 이찬 처음 보셨을 때도 이랬습니까?”

“아니. 그 아이는 자신을 굳이 감추지 않았단다. 그때 이미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에 비해 이 꼬마는 열심히 숨기고만 있는 게······ 아마 재능으로 인해 안 좋은 경험을 한 모양이네요.”

“그렇겠지. 철저하게 계산된 가면 속에서만 행동하는 것이 그 아이와 비슷하긴 하지만, 본질이 다르구나. 이 아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아마도 가족을 위해서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분명히 확실한 가면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진실을 들켜버리고, 순식간에 그 의도까지 꿰뚫린 상황.

송유리는 우거지상 속에서 질문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왜? 티가 나니까 그런다. 봐라, 꼬마야. 이찬이야. 아무리 뜻이 확고한 꼬마라고 해도 자연히 우상처럼 느끼게 될 연기판의 아이돌. 그런 배우한테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뿐이라고 말할 아이가 누가 있겠니? 그럴 수 있다면, 아이인 척하고 있는 애늙은이겠지.”

“아잇. 그게 실수였나······.”

“그런 거야. 아무튼 이거 참 재밌게 됐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는 강정후에게, 안정록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정말 재밌게 됐구나. 정말로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완벽에 가까운 연기천재······ 그런 아이가 찬이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던 거야. 큰 나이터울도 없이, 이렇게 일찍 찬이에게 발견되었고 말이야. 이 일이 영화계를 또 얼마나 뒤흔들지······ 나로서는 감도 잡을 수가 없구나.”

“아니요, 근데 저 진짜로 연기 안 할 거라니까요?”

“그러게요. 이찬 그놈이 자기 수준에 맞춰 따라올 수 있는 여자 아역을 손에 넣었다······ 흥미진진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수준의 작품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도 지지 않을 겁니다. 연기판이란 게 천재들만 노는 판이 아니니까요.”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저 연기 안 할 거라고요!”

숫제 떼를 쓰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정록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해졌다.

“그래, 정후야. 지지 말거라.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연기로, 이 아이들에게 장벽이 되어주렴. 그렇게 목표점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이 아이들의 과도한 재능이 어디로 튈지 모를 일이니.”

“장벽으로만 남지는 않을 겁니다. 빌어먹을 천재들을 쓰러뜨리고 제가 하나뿐인 선생님의 제자가 될 거예요.”

“하하하. 이미 넌 내 하나뿐인 제자란다, 정후야.”

“아······ 나 누구랑 얘기해요······?”

세 사람의 엇갈린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푸근한 할아버지로 돌아온 안정록은 소녀를 위해서 달콤한 차와 과자를 제공해줬고, 강정후 역시 연기 이야기는 그쯤 멈추고 아이의 소소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심지어 다음 스케줄까지 취소해가면서.

세계적인 거장과 톱스타 사이에서 보낸 그 한 시간.

송유리는 조심스레 생각하게 됐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 좀······ 편하네. 내가 괴물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건 아마 이찬 아저씨랑 잘 아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렇다면, 그 아저씨 지인들 앞에서는, 굳이 숨기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닐까? 비밀만 잘 지켜주신다면······ 편하게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

<이찬의 산장>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칸을 점령하고 돌아온 국보급 배우의 신작 <설산>에 쏠려 있던 관심은, 아직 예고편조차 공개되지 않은 까닭에 갈 곳이 없던 상황.

그런 와중에 촬영장의 모습과 이찬의 일상이 담긴 클립이 무료로 공개된다고 하니 대중이 열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결과가, 1월 19일 공개된 영상의 3시간 10만뷰 달성.

애초에 유튜브라는 매체 자체가 마이너한 시기에 발생한 기록적인 추세였다.

이찬의 명성과 신작에 대한 기대감 외에도, 전폭적으로 한국 진출에 나선 기업전략이 제대로 먹힌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었을 때 이슈를 끈 건 강정후 쪽이었다.

계속해서 기록행진을 펼치던 <왕의 광대>가 마침내 2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한 것.

작품의 평가 면에서도 호평만이 가득한지라, 30일 이내에 천만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오후에, <설산>의 기술시사가 진행됐다.

“축하한다, 송유리. 한국인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 신작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게 된 걸 말이야.”

“······전 별로 안 기쁜데요?”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제발 배우 시켜달라고 떼쓰게 될지도 몰라.”

입술을 삐죽거리며 송유리는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 59장 - 엄마 강정후 (1)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