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장 - 엄마 강정후 (2) >
2006년 1월 29일, 일요일.
처음으로 일반대중에게 공개되는 <설산>의 시사회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조혁수와 강정후는,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입구의 혼란 속에서 꽤나 시간을 빼앗겼다.
제작사가 추가로 통제 인력을 준비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네. 오지 말 걸 그랬습니다.”
상영관에 들어서자마자 강정후가 투덜댄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명한 배우가 찾아올 이유가 없는 독립영화 시사회는 구태여 통제를 하지 않는 게 상례.
여러 차례 스크린을 대관할 만한 예산이 없는 관계로 언론과 일반을 구분하지 않고 단 한 차례 잡은 <설산> 시사회 역시, 독립영화판의 통념을 따른 사례일 뿐이었다.
물론 주인공부터가 톱스타니 VIP시사회를 따로 열지 못할 건 없는 일이었다.
예술영화를 후원하는 소규모 극장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도 이찬의 팬싸인회 등을 결부시켜 멀티플렉스 측과 타협안을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조차 독립영화 정신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주연이 단 한 번의 대형 시사회에 만족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초청받지도 않은 주제에 뒤늦게 자리 마련해달라 요청하고 찾아온 강정후가 불평을 입에 담는 것.
듣는 조혁수 입장에서는 좀 우스운 이야기였다.
“뭘 또 그렇게 말하냐? 지가 오고 싶어서 억지 부린 놈이.”
“그야, 안 선생님은 초청했단 얘길 들어서······.”
“그럼 여배우나 하나 끼고 올 것이지 난 왜 불렀어?”
“그건······ 흥. 자기도 오고 싶었으면서 괜한 소리 마시죠. 이찬 신작 어떨지 궁금하다고 노래 부르던 게 누구셨더라?”
“흠. 뭐, 안 그래도 오고 싶긴 했었지.”
조혁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찬의 연기는, 그가 볼 때에 그다지 재미가 없는-다시 말해 대중성이 있는-시나리오조차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고, 역으로 그에게 재밌는 시나리오로도 천만관객을 달성했다.
<미스 스캔들>과 <684>가 전자,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가 후자의 사례.
그때마다 조혁수는 부인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곤 했다.
언제나 일반대중의 감성과 괴리되어 별종 같은 영화만 좋아하던 자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다수의 사람들과 호평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기에.
그렇기에 중요한 촬영일랑 일찌감치 마쳐놓고 시사회 초청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초청장이 계속 오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있었던 건데, 그 와중에 강정후가 억지로 자리를 마련하자 옳다구나 하고 따라나선 참이었다.
“그렇지만 네가 이러는 건 좀 신기하단 말이지. 안정록 선배님이야 이제 자주 보는 사이잖냐? 이건 그냥 이찬 영화를 응원해주고 싶어서 온 걸로밖에 안 보여.”
“······그야, 이찬은 싫어하지만 이찬 영화는 좋아하니까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넌 좋아하는 영화는 무조건 혼자 보는 놈이잖냐? 그런 놈이 이 사람 많은 곳에 왜 굳이?”
“······아 정말 시끄럽네. 예, 보고 싶은 애가 있어서 왔어요.”
“보고 싶은 애? 이 영화에 아역이 있었나?”
“그건 아니고······ 이따 설명할 테니까 들어갑시다. 길 너무 오래 막고 있었어요.”
입구를 막고 있던 개인경호원들을 바깥으로 물린 뒤, 두 사람은 하늘기획 신인배우로부터 갈취한 좌석을 찾아 이동했다.
“아, 혁수랑 정후 왔구나. 어서 앉으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무탈하셨습니까, 선생님. 그리고······ 오랜만이다, 송유리.”
“방가방가요.”
멀뚱하니 서서 안정록과 인사를 나누던 조혁수는, 이후의 상황에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강정후가 안정록의 옆자리에 앉지 않고 조혁수가 앉으려던 자리에 착석했다. 송유리라고 부른 소녀의 옆에.
밀려나서 안정록 곁에 앉으며, 조혁수는 곧바로 질문했다.
“선배님, 쟤는 누굽니까?”
“어, 유리라고 한다. 찬이 제자야.”
“제자 아니거든요?”
낮은 목소리를 용케 듣고 곧바로 쏘아붙이는 소녀.
그 자그마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조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렇군요. 그 녀석이 제자를 찾아냈군요.”
“저기, 아니라니까요?”
“그래. 넌 바로 알아보는구나?”
“알아본 건 아닙니다. 그냥,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찬 그놈 신인 때 생각도 나고······ 제가 어렸을 때도 생각나고.”
“하하. 하기야, 너도 어렸을 때 많이 방황을 했었지?”
“저기요? 전 방황한 적 없는데요? 완전 평범한데요?”
“아, 그래서 정후가 저렇게 들뜬 거군요? 첫 단추가 꼬인 이찬하고는 다르게 이번엔 좋은 관계를 만들어보려고······.”
“그런 거 아닙니다. 이쪽에 신경 끄시죠.”
“하하. 그럼 아닌 걸로.”
“저기, 죄송한데, 내 말은 왜 안 들어줘요?”
“하하하하. 귀엽네, 귀여워.”
여전히 송유리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이 어째선지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소녀의 마음이 복잡해질 때쯤, 마침내 <설산>의 감독과 배우들이 스크린 앞의 단상에 올라섰다.
“아······ 안녕하십니까. 귀한 시간 내서 이렇게 시사회에 와주신 기자님들, 영화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영화 팬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마이크 잡는 게 처음이라, 너무 떨리네요. 어······ 참······ 하하하.”
독립영화 세 편을 만들었지만 전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연진 감독은, 마음이 복잡한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이찬이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안녕하세요, 이찬입니다. 방금 인사하셨던 분은 이연진 감독님이시고요. 긴장해서 함자도 말씀을 안 하셨네요. 저로선 참 이해가 안 됩니다. 분명히 몇 년 안에 수천 영화 팬 앞에서 인사하게 되실 분인데 말이죠. 여러분도 영화 보시고 나면 저랑 똑같이 생각하시게 될 거예요.”
유머러스한 이찬의 말에 뒤이은 다른 배우들의 인사는, 그렇지만 이연진 감독보다도 더 어색했다. 그들 모두가 제대로 된 배역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신인들인 까닭.
그러니 그 단상 위에는, 이찬을 제외하곤 시사회란 것 자체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셈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이찬이 다시 마이크를 쥐었다.
“저희 영화 <설산>은, 겨울의 산장에서 다섯 명의 남녀가 처음 만나 대화하며 발생하는 감정의 변화들에 집중한 영화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단 한 곳의 로케이션에서 모든 촬영을 끝마쳤어요. 덕분에 후반작업이 수월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고, 이연진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기자 배우님은, 신이 나셨는지 지금도 계속 혼자 웃고 계신데, 아무튼 이번 영화를 통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셨고······”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이 준비한 대사마저 모두 전달해준 뒤에, 이찬이 마지막으로 씩 웃어 보였다.
“전 다른 건 없고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저희 영화 <설산>은 올 한 해 가장 충격적인 영화가 될 겁니다. 제가 출연해서가 아니라 이 감독님과 네 분의 배우들 덕분에요. 장담할게요. 크레딧 올라갈 때 분명히 기립박수 나옵니다. 저 부끄러워지라고 억지로 참는 분들만 안 계시다면요.”
터무니없는 호언장담에 조혁수가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하, 자신감 넘치는데. 선배님, 혹시 기술시사 보셨습니까?”
“아니, 나도 오늘 처음 보는 거야.”
“그렇습니까? 선배님께도 보여드리지 않았다면 미리 본 사람이 아예 없겠군요.”
“······제가 보긴 했는데요.”
송유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 조명이 꺼져가며 적막해진 극장 안에서 조혁수의 귀에 잘 닿았다.
“봤다고? 제자는 기술시사에도 데려가는 모양이군.”
“제자 아니거든요?”
“보고 어땠어? 기립박수 칠 만했어?”
“······그냥, 재밌긴 했어요.”
그 단순한 평가는 사실 깊은 고민 끝에 나온 말.
그녀가 지금껏 봐왔던 어떤 영화보다도 재밌었으며, 그로 인해 이찬에게 느끼고 있던 반감이 대부분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를, 부끄러움에 간추려버린 대답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그 뜻을 조혁수가 이해했다.
“흠. 정말 기립박수 치게 될 것 같은데.”
“네? 왜요?”
“재밌긴 했다고 말하는 네 표정이······ 내가 정말 재미있다고 말할 때랑 비슷해서.”
“네? 아니······ 그게 뭐야.”
“아, 시끄러. 선배, 애 귀찮게 하지 마시고 앞이나 보시죠.”
강정후의 핀잔에, 조혁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2시간이 흐른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안정록이 거의 동시에 다리를 폈으며, 이윽고 강정후와 송유리를 제외한 모두가 기립박수에 합류했다.
“······아저씨는 안 일어나요?”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던 소녀가 힐끔 쳐다보며 물었을 때, 강정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왜? 의미도 없는 기립박수, 그냥 퍼포먼스일 뿐이야. 그딴 짓 하느니 재밌게 봤다고 평이나 해주는 게 낫지.”
“어, 재밌게 보긴 했나 보네요?”
“흥. 넌 어땠는데? 두 번째로 본 건데.”
“음······ 전에 봤을 때랑 달라진 부분 찾아보려고 했는데요, 나중엔 그냥 보게 됐어요. 재밌어요 진짜. 근데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게요, 어떻게 저래요? 다 연긴데, 어떻게 하나도 안 이상해요?”
“배우들이 전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한 게 신기하다 그 말이지? 신기할 것도 없어. 이찬이 가르친 연기니까.”
“아니 그래도, 자기가 하는 거랑 남한테 시키는 거랑은 완전 다르지 않아요?”
배우들이 다시 단상에 오르며, 박수는 더 거세져 있다.
소녀도 강정후도 목소리를 점점 키워야 했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저렇게 못 해. 난 내가 하는 연기까지가 한계다. 내 방식을 따라하면 누가 됐든 엉망이 될 테니. 그렇지만 이찬은 가능해. 그놈 방식은 완벽에 가까우니까.”
“완벽에 가깝다······? 전에도 그 말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 너도 그렇게 될 거다.”
“아니 저는 진짜 그럴 생각 없거든요?”
“그만 종알대고 이제 받아들여. 저 영화 보면서 뭔가 끓어오르지 않았냐? 너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칸의 남자라고 뻐기고 다니는 이찬 자식보다 훨씬 더 잘나갈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큰 꿈을 가져야지. 그래야 가족한테 멋진 트로피도 안겨주고 할 거 아니냐?”
괴물의 나쁜 기억과 트로피의 영광 사이에서 잠깐 저울질을 하던 송유리는, 박수소리가 거의 잦아들 무렵에 툭 내뱉었다.
키운 상태 그대로의 목소리로.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 더 많이 해요, 정후엄마.”
“아니 이······ 끙.”
강정후는 반박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소녀의 말을 들은 주변 관객들이 전부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기에.
*
‘정후엄마’ 이슈 속에서 화제가 된 시사회가 끝난 사흘 뒤.
2006년도 2월을 맞이한 그날에, 강정후의 <왕의 광대>가 마침내 천만 관객을 달성했음이 알려졌다.
기존의 최단기록인 <고등형사>의 30일을 무려 4일이나 앞당긴 미증유.
그 소식에 나라엔터 직원들 모두가 들뜨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인터뷰로 바빴던 대표이사가 터덜터덜 사옥으로 돌아올 무렵까지도.
“이제 다시 강정후의 시대야! 그렇지?”
“진짜요. 칸에서 주연상 탄 이찬도 밀어내고 남우주연상 휩쓸더니, 이제는 최단기간 천만 기록까지 갈아치운 거니까요.”
“진짜 자랑스럽다니까요. 뭐 이찬이야 천만영화가 세 편이나 되지만, 우리 대표님도 이번이 두 편째고, 금방 따라잡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후 형님, 리스펙!”
“하하하! 너 대표실 가서 꼭 그렇게 말씀드려라.”
“헤헷. 그렇게는 부끄러워서 좀······.”
모퉁이 뒤의 강정후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더더욱 부끄러워졌을 담화. 그러나 강정후는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대표실로 이동했다.
촬영으로 바쁘다던 조혁수가 빙글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게 그에게는 또 살짝 의외였다.
“여기서 뭐 합니까? <몬스터> 촬영 안 했어요?”
“했는데, 오늘 분량은 순식간에 마쳐버렸지. 이제 슬슬 얘기 들어올 때 됐잖냐?”
“뭔 얘기요?”
“뭔 얘기는. 이찬 영화 개봉일 관객 수 말이야.”
“그게 왜 지금 들어옵니까? 내일 발표 기다리시죠?”
“아는 사람끼리 왜 이래? 극장에 인맥 많잖냐? 당연히 중간집계 결과 들어오지 않아?”
일반적으로 일간 관객 유치 기록은 익일 아침에나 발표되는 것이지만, 나라엔터의 대표는 멀티플렉스 내부정보를 미리 얻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그럴 의지가 있을 때의 일이지만.
“헛소리 말고 돌아가십쇼. 연락 달라고 한 적 없으니까.”
“그래? 그럼 내가 받은 전화는 뭐지?”
“뭐요?”
“기다리고 있는데 직통 하나 걸려오더라고. 그냥 받았지.”
“이 미친 자가······.”
“하하, 뭐 어떠냐? 너랑 나 사이에.”
“너랑 나 사이라서 열 받는 겁니다.”
“아무튼, 궁금하지 않아? 일반대중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멀티플렉스 OGV의 <설산> 관객 기록.”
월권에 잔뜩 화가 났지만, 강정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지휘계통이 엉망이라 미안하단 소리 해가면서 다시 전화를 걸기보다는 조혁수의 낄낄거리는 소리 듣는 게 차라리 낫다 싶었기에.
“말씀하시죠. 10시 입장 관객까지 해서, 몇 명입니까?”
“몇 명일 것 같냐?”
“닥치고 불어, 인간아. 대표랑 파워게임 시작하기 싫으면.”
“어이쿠, 무서워. 3000만 들었다더라.”
“이 미친놈아!”
“하핫. 상업영화 기준으로 그렇단 얘기야. 그쪽은 3만 들면 상업영화 천만으로 쳐주잖냐. 즉, 9만 들었다는 거다.”
“9만······?”
“그래. OGV에서만 9만. 오전 시간대부터 전부 다 매진만 돼야 나올 수 있는 수치지. 거기에 심야시간 객수 더하고 다른 극장 체인이랑 단일관까지 다 합치면, 몇이나 될까?”
“······20만이, 될 수도 있겠군요.”
독립영화 열 편의 총객수를 합쳐도 나올까 말까 한 기록.
이찬의 <설산>이, 대한민국 영화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 59장 - 엄마 강정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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