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69화 (169/250)

< 60장 - 군주 계진행 (1) >

독립영화 <설산>의 흥행세는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갔다.

첫 주에 이미 꿈같은 100만을 달성한 데 더해. 둘째 주에는 스크린을 확대하며 170만을 추가로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독립영화로서는 기념비적인 위업이었다.

그 충격적인 흥행돌풍의 주된 수혜자는 물론 이찬.

무수한 의심과 우려 속에서 상업영화를 탈피한 소년은, 이제 충무로에서 거의 영웅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이룬 영광이 자신에게만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강정후가 이미 추정했던 것처럼 그의 활약에 한국의 독립영화계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극장가 역시 이례적인 슬리퍼히트 속에서 웃음소리가 가득해졌다.

그 중추에 계진행이 있었다.

그 자신이 감독한 <684>의 천만 흥행으로 굵직한 족적을 남기며 충무로의 군주라 불리게 된 감독 겸 제작자 계진행.

그는 이후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를 비롯한 걸작들을 배급하는 한편으로, 한미모 감독들을 지원하고 하늘기획 스타들이 출연한 여러 영화를 투자배급하며 회사의 세를 키워왔다.

그로써 유동자산 규모가 업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계진행은 그 결실로써 2005년부터 자신의 극장을 일궈왔다.

단관극장 여럿을 허물고 멀티플렉스를 올리는 한편으로, 부실한 운영으로 휘청거리던 극장 체인 ‘프라임’까지 인수해, 자신의 성을 딴 ‘월계 시네마’를 개관한 것이다.

그로써 마침내 계진행은 투자-제작-배급-극장의 수익구조를 일원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월계 시네마야말로 이찬의 <설산> 프린트 현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극장이었다.

그 말인 즉, <설산>의 투자사와 제작사와 배급사와 주요 판매처가 모두 계진행의 소유라는 것.

고작 1억의 투자로 완성된 영화의 놀라운 흥행수익이 거의 고스란히 계진행의 주머니로 흘러든다는 얘기였다.

“회장님은 진짜 나한테 고마워하셔야 돼요.”

그런 상황이기에, 씩 웃으며 흰소리를 하는 이찬이 전혀 밉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말로 너무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난 진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고작 1억 투자해서, 지금 최소 100배 이상의 순수익이 확정됐어. 여기에 해외배급에서도 천만불 흥행은 충분히 될 것 같고.”

“그래요? 선댄스에 출품도 안 했는데?”

“응? 아, 그 얘기 들으니까 다시 위가 쓰린데.”

“그러지 좀 마세요. 다 잘되고 있는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선댄스 대상은 정말 영예로운 건데.”

“그래봤자 한국 대중은 알지도 못하는데요 뭐.”

선댄스 영화제란 매년 1월 20일에 미국 유타주에서 열리는 독립영화제.

비록 이찬의 말처럼 한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대안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비상업적 영화제 중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명성을 가진 무대다.

그렇기에 <설산>의 투자자인 계진행 역시 선댄스 출품을 목표로 일정을 기획하고 제작을 독촉해왔다.

20일까지 상영본을 완성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일부 미진함을 감수해서라도 따로 출품본을 현상하는 것까지는 가능했던 상황.

그로써 영예로운 영화제에서 주요한 상을 수상한다면 세계시장 스크린 확보가 보다 수월해졌을 터였다.

그러나, 이연진 감독이 울상을 지으며 그 기회를 고사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준 배우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완성본만을 선보이고 싶다며.

이미 자본의 중심에 선 계진행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술혼이었지만, 늘 조용하던 감독이 처음으로 자기 의견을 강변한 순간이었다.

거기에 이찬까지 감독의 편을 들어주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산>은 어떤 영화제에도 출품되지 않았고, 따라서 해외 배급은 이후 영화계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며 차근차근 추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시선은 계진행이나 이찬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찬아. 외신이 벌써 여럿 다녀간 모양이야.”

“예? 다녀갔다고요? 자료화면 보내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렇다니까? 칸의 주인공이 독립영화로 한국 영화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이슈가 굉장히 흥미로웠던 모양이야. 그래서 이미 유럽 쪽에는 네 신작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고, 곧 CNN에서도 보도 나갈 것 같다더라.”

“와. 별일이네요.”

“흐흐. 찬아, 별일이란 건 독립영화로 300만 관객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상황 같은 걸 말하는 거야. 그런 별일을 취재하려고 외신이 몰려든다는데, 그게 뭐가 이상하냐?”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거대자본이 유입되지 않은 독립영화의 흥행이 어려운 건 한국이나 세계나 매한가지. 해외에서도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아니고서야 상업영화의 십분의 일 수익도 내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 상황일진대, 칸 수상자인 이찬이 고작 십만 달러도 들어가지 않은 소자본 영화를 영화제 출품도 없이 충격적인 속도로 흥행시키고 있다.

이는 분명 외신의 흥미를 끌 만한 일이었다.

그에 더해, 점점 덩치를 키워가는 유튜브의 파급력도 영향을 줬을 터였다.

이름 있는 영화 중에서는 세계 최초로 스트리밍 사이트만을 매개체로 홍보활동을 펼친 영화.

그 영화의 화제성을 더욱 높이고자 자체적으로 푸시를 넣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뭐 딴은 그러네요. 그래도 이 먼 나라에 취재까지 올 줄은 몰랐죠. 이거 이렇게 된 김에 칸 한 번 노려봐야 하나? 회장님, 진짜 한번 가볼래요?”

“어, 어? 아니······ 야 그건 무리 아닐까? 아무리 취향 특이한 심사위원 많은 영화제라고 해도, 이건 좀······ 볼거리가 너무 없잖냐.”

전세가 역전되어 이젠 어색하게 웃게 된 계진행은, 잠시 후에 고개를 흔들며 이찬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또 별일이라고 하면, 거기 그 친구도 별일이다.”

“유리요? 제 제잔데 왜요?”

“응? 뭐래요? 제자 아니거든요?”

5분 전과 똑같은 문답을 나누는 소년소녀.

비록 소년 쪽이 지나치게 덩치가 커서 일견 삼촌과 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만 보면 사이 좋은 오누이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계진행은 낄낄 웃었다.

“내가 평생 이런 그림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거든. 가르치고 싶다며 달려드는 월드 톱 액터랑, 그거 싫다고 콧방귀 뀌는 조그마한 꼬마라니. 완전 영화 같잖아.”

“조그만 꼬마 아니거든요? 4학년인데요?”

“재밌으시면 나중에 영화화 해보시든가요. 그럴싸한 드라마가 나오려면, 내가 나중에 얘랑 연애라도 해야 되나?”

“미쳤어! 이상한 소리! 나쁜 아저씨!”

“우하하하핫!”

계진행은 미친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농담이라곤 해도 월드스타 이찬이 연애를 입에 담은 건데, 곧바로 부정하는 초등학생 소녀의 얼굴이 그야말로 진지했다.

그 모습이 우스울 정도로 황당했다.

“하아······ 아이고 배야. 야, 너 진짜 재밌다. 유리라고 했지? 찬아. 그럼 다음 찬 영화제엔 이 유리도 참가하는 거야?”

“예, 물론이죠.”

“아니에요, 이 아저씨야!”

“설득 중입니다. 지금은 연기에 관심 없다고 하고 있긴 한데, 금방 넘어올 거예요.”

“아니라니까요?”

“보세요. 거의 넘어왔죠.”

계진행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참, 난 모르겠다. 너도 모르겠고 이 꼬마도 모르겠고. 아무튼 보고 있으니까 웃겨 죽겠네. 유리야, 앞으로도 자주 와라. 그래, 밥 안 먹었지?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까?”

“······맛있는 거 뭐요?”

“뭐 좋아해? 회? 고기? 아니지, 어리니까 케이크 같은 게 더 입맛에 맞으려나?”

“저 떡볶이 좋아해요.”

“어우. 떡볶이야 뭐, 10인분도 사주지.”

부유한 회장님 재력을 과시하듯 가슴을 펴던 계진행은, 이내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런 거면 찬이가 사줘야겠네. 나 같은 아저씨는 분식집에 가면 눈총을 받아요.”

“왜요? 안 그러는데요?”

“그냥 내가 좀 기분이 그래. 찬아, 얘 맛난 것 좀 많이 사줘라. 애가 떡볶이가 먹고 싶다잖냐.”

“······그러죠. 튀김, 순대도 사줘야죠.”

대답하는 소년의 마음은, 깔끔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상념에 빠진 채 오랜 추억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형과 처음 먹었던 것도 분식이었지. 그땐 그게 참 맛있었는데. 지금이야 입맛이 바뀌어서 집에서 소고기나 구워먹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괜찮겠지.’

그런 대화 끝에 어디의 어떤 분식집에 가야 소란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명진아의 연락이었다.

“여보세요?”

[찬아! 찬아! 나 나 나 운전면허 나왔어!]

“축하해. 이제 차 골라야겠네.”

[차도 미리 사서 바로 등록했어! 지금 차에 탔어! 찬아, 찬아, 드라이브하자, 바다 보고 오자, 바다 가서 회 먹자! 응?]

“그래? 흠······ 썬팅은?”

[미리 해놨어! 불법이라고 했는데도 막 칠해달랬어!]

그런 걸 당당하게도 말하네- 생각하며, 이찬은 송유리를 돌아봤다.

“야. 너 명진아는 좋아하냐?”

“명진아요? 명진아 전화예요?”

“너는 인마, 진아 언니라고 해야지.”

“네, 진아 언니. 근데 왜요?”

“그냥 좋아하냐고.”

“치. 네, 좋아하는데요.”

그 대답에는 아주 작은 거리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거기서도 이찬은 묘한 감흥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긴 해. 진아 누나는 신기할 정도로 순박하니까, 우리처럼 관찰력이 좋은 사람한테는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는 거야. 하지만 이 꼬마는 아무나 다 좋아하던데.’

“아 왜요? 왜 물어봤는데요?”

“너, 난 안 좋아하지?”

“윽. 싫어해요! 완전 싫어요!”

한 차례 킥 웃고, 이찬은 핸드폰을 볼에 댔다.

“누나. 아무래도 분식집 가야 될 것 같아. 군식구가 한 명 있거든.”

[응? 군······식구?]

“내 제자. 누나 좋아한대. 드라이브 같이 하자.”

[······어······ 그러니까······ 첫 데이튼데?]

“하하. 충무로 쪽 와서 전화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이찬은 계진행에게 고개만 꾸벅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회장님, 얘기한 대로 진행해주세요.”

“그래. 내가 아주 깔끔하게 진행하마. 제2회 찬 영화제, 개막이다!”

*

마스크와 머플러로 무장한 이찬이지만, 명진아는 그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소녀를 보고는 경직돼야 했다.

‘저 아이······ 시사회 때 왔던 그 제자? 어······ 여기에, 왜 데려왔을까? 우리 첫 데이트인데······.’

질투 같은 걸 느끼기엔 지나치게 어린 아이다. 열 살인 데다, 과장을 보탤 것도 없이 이찬의 반도 안 되는 덩치였다.

그렇지만 스무 살 명진아는 속으로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했던 데이트와 지나치게 달라진 그림이라서.

‘저 아이랑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 달콤한 얘기도 할 수 없을 거고, 같이 우리만의 셀카를 찍지도 못 할 거야. 으······ 거기다 저녁 메뉴는 분식이래. 난 이제 그런 거 먹을 나이가 아닌데. 찬이가 성숙한 누나로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막상 인적 드문 분식집에 들어섰을 때, 명진아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숙한 누나라기엔 너무 어린 아가씨였다.

“떡튀순, 떡튀순 주세요!”

“떡튀순이 뭐예요, 언니?”

“떡볶이, 튀김, 순대야. 요즘 그렇게 다 섞어서 먹는 게 유행이거든.”

“아하. 저는 그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히히. 바보야, 찬이가 다 먹을 거야.”

“이 아저씨 잘 먹어요?”

“어휴. 몸 보면 모르겠니?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먹어야 돼.”

“아, 돼지구나!”

“아냐, 이 꼬맹아. 기초대사량이 다른 거야.”

그리고 꼬마 소녀의 옆에 앉은 채 불퉁거리는 이찬의 모습은, 의외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힛. 찬아, 너 완전 삼촌 같아.”

“그래 보여? 삼촌들은 조카 엄청 좋아하지 않나?”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그래요? 아저씨 저 완전 좋아해요?”

“전혀. 그냥 필요하니까 데리고 다니는 것뿐이다.”

“와. 완전 비열해.”

“그럴 땐 비열한 게 아니라 냉혈한 쪽이 맞지.”

“와. 자기가 냉혈한이래. 이상한 아저씨야.”

그렇게 우스꽝스런 대화를 듣다가 마침내 주문한 분식 메뉴를 맞이했을 때에는, 마음의 색깔이 전혀 달라졌다.

‘생각했던 데이트랑은 많이 다르지만······ 이것도 좋은 것 같아. 사실은 찬이랑 둘만 있으면 왠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했을 텐데······ 이렇게 유리랑 같이 있으니까, 편안해. 그리고 좀······ 따뜻해. 마치 딸처럼······.’

사실 부모와 딸 사이의 나이 차이는 아니다.

명진아가 스물, 이찬이 열여덟인데, 송유리는 열 살이니.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자라온 명진아는, 이찬과 그 제자를 마주보며 홀로 행복한 공상에 빠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뤄 둘을 닮은 아이를 낳는.

그렇게 생각하니, 송유리가 이찬과 꽤 닮은 것처럼도 보였다.

< 60장 - 군주 계진행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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