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장 - 군주 계진행 (2) >
계진행은 가끔 자기 소유의 영화관을 시찰하곤 했다.
언더커버나 고객응대 불시 검사는 아니고, 떵떵거리며 회장님 의전을 받기 위함도 아닌, 그저 개인적인 취미생활.
자신의 영화인생의 결실 같은 월계 시네마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몹시 따뜻해지는 까닭이었다.
특히 2006년 2월에는 그 취미가 더욱더 즐거워졌다.
임원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단으로 120개 스크린에 올린 이찬의 <설산> 티켓이 끝을 모르고 팔려나가고 있었기에.
이찬 때문에 왔다가 영화 때문에 얼이 빠져서 나오는 관객들을 구경하는 일이, 참을 수 없이 짜릿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계진행은 2월 28일에도 강남 월계 시네마를 찾았다.
다만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다른 면이 있었는데, 타칭 이찬의 제자이자 자칭 성숙한 초등학생인 송유리가 동행했다는 점이었다.
“유리야. 너 영화관은 자주 가니?”
“엄마아빠랑 가끔요. 영화 별로 재미없어요.”
“아······ 극장 사장으로서 가슴 아픈 얘긴데. 그럼 월계 시네마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네. 수원 집 근처에 OGV 있어서요.”
“아, 경쟁사 고객이시구나. 그럼 최근에는 무슨 영화 봤어?”
“<주룩주룩>이요.”
“강정후 영화? 그러면 1년 넘은 작품이네. 진짜 자주 안 보는구나. 그 영화는 좀 어땠니? 재미없었어?”
“아뇨······ 그건 재밌었어요. 정후엄마 연기 좋아요.”
투덜거리듯 대답하며 송유리는 극장 안을 둘러봤다.
업계 1위인 OGV에 비해서 좀 좁긴 하지만, 세련된 인테리어와 직원들의 환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언니들이 되게 잘 웃어요.”
“응? 아, 직원들? CS······ 그러니까 고객응대라고 해서 교육을 다 하니까.”
“그런 거 말고요, 표정들이 되게 좋아요. OGV 언니들은 억지로 웃는 거 티 났는데.”
“오, 너 눈치가 좀 빠른가 보다? 그렇지. 그쪽에선 CS팀 매니저들이 손님인 척 위장해서 불시에 검사를 한다더라고. 그게 무서워서 억지로 웃는 게 있을 거야. 근데 난 그렇게 강제적으로 미소 만들고 싶진 않더라.”
“그러면 어떻게 웃게 한 거예요?”
“하하하. 그건 영업비밀인데. 경쟁사 사장들이 알면 안 되거든? 유리가 비밀 잘 지켜주려나?”
“저 완전 입 무거워요. 믿으셔도 돼요.”
그렇게 확답을 한 뒤에 듣게 된 영업비밀은, 그러나 알고 보니 별 게 없었다.
“직원들한테 휴게시간을 좀 많이 주는 편이야.”
“그게 다예요?”
“그리고 직원들 휴게실을 좀 좋게 만들어줬지.”
“그런 걸로 행복한 미소가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송유리의 눈은 인간의 가식을 완전히 꿰뚫어 내면을 바라본다.
그런 재능으로 알아본 것이다. 월계 시네마 직원들이 OGV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게 웃으며 일한다는 것을.
“그게······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려운데, 직접 가볼래?”
“휴게실이요? 가봐도 돼요?”
“어. 나 온 거 들키긴 하겠지만, 할 수 없지 뭐.”
하관을 가리고 있던 머플러를 조금 풀고 직원통로에 접어든 계진행은, 이내 후방에서 움직이던 직원들에게 발각당했다.
그에 깍듯한 인사 행렬이 그와 송유리를 반겼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또 왔어요, 미안 미안. 할 일들 하세요. 위에 보고하지 마.”
“아······ 점장님께서 회장님 보면 꼭 알리라고······.”
“진호 형이? 됐어 됐어. 하지 마요. 나 지금 손님이랑 있잖아. 방해 받기 싫어서 그래요.”
그렇게 직원들의 시선을 떼어내고 휴게실에 당도했을 때, 송유리는 입을 떡 벌렸다.
그곳은 휴게실이라는 이름과는 잘 부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찬의 광팬이 오랫동안 살아온 자취방이라거나, 또는 이찬 본인이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고자 만든 소형 전시관처럼 느껴졌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우리 휴게실 컨셉이지. 월계 시네마 광고모델이 바로 이찬이잖아? 그래서 휴게실도 전부 다 이렇게 찬이로 가득 채워놓은 거야. 이게 영업비밀 포인트란다. 일선 직원들은 보통 20대 남녀야. 그중에 찬이를 안 좋아하는 사람은 아예 한 명도 없단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착한 천재배우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쉴 때마다 찬이랑 같이 있게 해주면, 다들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고객들한테도 잘하게 되는 거지.”
터무니없이 단순무식한 영업비밀.
그러나 그건 아이들의 동화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간에 알려진 이찬이라고 하면, 17세에 칸 영화제에서 세 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신성이자, 단 하나의 구설수도 없던 가운데 오히려 동료 배우를 위해 자신의 열애를 폭로하기까지 했던 인격자.
나라의 자랑이자 좋은 가정교육의 상징 같은 그를 싫어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심리는 인터넷의 주 사용자인 20대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져, 청년층의 이찬앓이는 그야말로 열광적.
인터넷상에서는 스스로를 이찬교 신도라고 부르는 이들이 무한증식하는 중이다.
그중 월계 시네마에 채용된 젊은이들이 휴게실 사진과 영상 등을 공유하곤 했는데, 그게 2005년 하반기에 굉장한 이슈가 된 바 있었다.
그렇기에 신규 채용된 직원들의 대다수가 이찬의 광팬.
이찬 전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뒤 진심 어린 미소로 고객을 응대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계진행의 흰소리와 함께 들으며, 송유리는 복잡한 기분이 됐다.
단지 좀 유명한데 좀 귀찮은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던 이찬의 영웅적 면모를 직시하게 된 탓에.
그래서 휴게실 안을 둘러보는 시선이 잔뜩 떨렸다.
이찬이 각종 광고 때 찍은 브로마이드나 영화 드라마 명장면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벽.
이찬이 받은 무수한 트로피의 모조품이 세워져 있는 전시장.
방 곳곳에 배치된 이찬의 등신대 POP.
더해서 세 개의 안락의자 전면으로는 이찬이 출연한 드라마가 방영되는 대화면 TV가 있다.
그 아래 장식장에는, 매니저인 염수진과 경호원 김도철의 사진도 몇 장씩 액자에 담겨 있었다.
“저건 왜 놔둔 거래요?”
“어? 아, 수진이랑 도철이 사진? 쟤네도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 많거든. 시사회나 팬싸인회 때 찬이 옆에 있다가 사진 같이 찍히고 하다가, 이제는 묶여서 인기 끌고 있는 거야. 찬이가 너무 좋으니까 그 주변에까지 애정 어린 시선이 가버리는 거겠지. 지금 싸인회에서도 찬이 대신 수진이 도철이 촬영하는 사람 몇 명은 있을 거다.”
싸인회는 특히 대기하는 동안 매니저와 경호원 등 주변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기 쉬운 자리다.
송유리가 임시로 계진행에게 맡겨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팔자에 없는 보모로 활약 중인 충무로의 군주를 향해, 송유리는 호소하듯 말했다.
“변태 같아요.”
“야······ 넌 꼬맹이가 뭐 그런 말을 쓰고 그러냐?”
“이거 이찬 아저씨한테 허락 받은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전속모델이신데. 아, 근데 찬이도 너랑 똑같이 말했던 것 같다. 김도철 형 좋아하는 여자들은 진짜 변태 같다고. 하하하, 이상한 데서 닮았다니까. 어쨌든 이런 거야. 직원들도 좋아하고, 서비스가 좋아져서 손님들도 좋아하고, 아주 윈윈이 되는 휴게실인 거지.”
“이상해요. 사람들이 그 아저씨 좋아하는 게요.”
“에이, 그게 뭐가 이상하냐? 당연한 일이라니까?”
송유리에게는 그게 당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능을 일부 드러낸 것만으로 가족까지 도매금으로 괴물 취급을 당한 이후,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숨겨온 소녀이기에.
그렇지만 당연하지 않은 이찬의 인기는 현실이었다.
송유리와 달리 폭로가 아닌 연기를 통해서 천재적인 재능을 쓴 이찬은, 2006년 현재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유명인.
넘쳐나는 애정이 주변으로 흘러넘쳐 매니저인 염수진과 경호원 김도철마저 팬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에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찬의 부모님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분명 세상 모든 사람이 그들을 축복하며 감사를 표할 거라고.
어째서인지 가족관계를 철저하게 숨기는 이찬인지라 알려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 분명한 현실감각을 획득한 소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있잖아요, 아저씨. 만약에 제가 이찬 아저씨 제자가 되면요. 그러면······ 저도 이렇게 될까요?”
“응? 오, 정말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그냥 궁금한 건데요.”
“하하하. 대답을 해주자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모르지. 찬이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이상으로 세상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찬이가 선택한 너니까 아마 재능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꼭 저만큼 사랑받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
“······보통 빈말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지 않나요?”
“그런가? 흠. 나도 이찬이랑 놀다 보니까 좀 딱딱해진 모양이다. 걔가 좀 그렇잖아? 친한 사람들한테는 완전 직설적으로 말해버리고, 거짓말을 할 줄 몰라.”
그게 아니라 거짓말을 너무 잘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며, 송유리는 투덜댔다.
“그 아저씨는 웃겨요. 요즘 계속 같이 있었는데요, 엄마아빠랑 통화를 한 번도 안 해요. 그렇게 연기 잘하게 키워주셨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건데.”
“아. 유리야, 그건······ 하하.”
“그래서 완전 싫어요. 전에는 우리 엄마 욕도 했어요. 밥맛이라고 했어요.”
“그게 참······ 흐음······.”
소녀를 내려다보며 뭔가 고민하던 계진행은, 그녀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서로의 눈높이가 딱 맞게 되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고, 내 추측이 맞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닐 일은 아닐 테니까.”
“······뭔데요? 표정, 무서워요······.”
“아, 미안. 이게 그러니까······ 순전히 아저씨 추측이야.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한테 말해서는 안 될 일이고. 그러니까, 비밀 지켜줄 수 있겠어?”
“저, 완전 입 무거워요.”
꼬마답지 않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 계진행은 진짜 비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찬이를 안 지가 벌써 4년이 돼가는데······ 그 동안 한 번도 찬이 부모님 얘길 못 들었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수진이 도철이 그 친구들도 아는 바가 전혀 없대. 그러니까 그 말은······”
“어, 엄마아빠 없어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야. 그 추측조차 비밀이어야 하고. 찬이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하고 있는 짐작이긴 한데, 혹시라도 상처를 줄까봐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는 일이기도 해. 그만큼 그 아이가 소중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이 얘길 너한테 해줬는지, 알겠니?”
“저······ 모르겠어요.”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진행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찬이한테는 네가 참 소중한 사람인 것 같거든. 그래서 말해주는 거야. 혹시라도 모르는 채 부모님 얘기 꺼냈다가 찬이한테 상처 주지 말라는 뜻에서. 너야 아저씨 아저씨 부르지만 사실 그 녀석도 아직 미성년자거든. 누가 네 부모님 욕하면 마음 아픈 것처럼, 찬이도······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힘들지도 몰라. 이해해줄 수 있겠니?”
*
팬싸인회를 마치고 강남 월계 시네마로 가는 길에, 이찬은 송유리와의 남은 시간을 생각했다.
‘내일이 3.1절이고······ 그 다음날이면 개학이네. 학교에 학원이 다 수원이니까 이제는 얼굴 자주 보기 힘들 텐데······ 그 전에 어떻게 설득이 안 되려나?’
계진행 앞에서는 이미 다 꼬셨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송유리는 완고한 벽과도 같았다.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그녀의 마음은 요지부동.
시사회에 데려가고 GV 행사에 데려가고 신인배우들 레슨이나 톱스타들과의 식사 자리에 동석시키는 등 유명 배우의 럭셔리한 삶을 지속적으로 어필했지만, 개중 소녀가 좋아한 거라고 해봐야 명진아와 함께 먹은 떡볶이 정도였던 것이다.
‘진짜 이상한 녀석이야. 스스로의 의지도 없이 맨날 엄마아빠 어쩌고 말하는. 나랑 같은 재능으로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어. 핏줄만 이어진 그깟 혈육,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데. 여차하면 버리고 지워버리는 혈연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야?’
편견으로 가득 찬 단정.
그러나 친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저주했던 천재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옹고집과도 같았다.
이후 윤대흥 덕분에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음에도.
‘형은 진짜 가족이야. 핏줄 같은 한심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한 가족. 그런 게 진짜 가족인 거야. 송유리 그 꼬마도 이 진리를 이해해야 되는데. 그놈의 엄마엄마 소리 진짜 듣기 싫어.’
설득 작업이 지지부진한 데는 그런 까닭도 일부 작용했다.
기실 가장 쉽게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송유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모를 설득하면 그만.
그들이 톱스타 딸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즉시 소녀는 이찬의 제자로 들어오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건 이찬에게 있어서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부모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 송유리라면, 도저히 옆에 둘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다 왔어, 찬아! 저기 나오신다.”
머플러 둘러쓴 계진행의 손을 잡고 송유리가 걸어온다.
예의바르게 회장에게 인사하고 차에 탄 뒤에,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오빠.”
“······오빠? 그거 나 부른 거냐?”
“응. 오빠라고 부르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모르겠네.”
“그냥요. 그냥······ 몇 살 차이 안 나잖아요. 아저씨라고 하면 이상하지. 레옹도 아니고요.”
“레옹? 꼬마 주제에 그걸 봤어?”
“TV에서 하던데. 그거 알아요? 정말 사랑한다면, 공원에 심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돼요. 내가 자라길 바란다면 나에게야말로 물을 줘야죠. 그래줄 수 있으면······ 연기 배워볼래요.”
명대사 앞에서, 이찬은 오랫동안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 60장 - 군주 계진행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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