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72화 (172/250)

< 61장 - 거장 안정록 (1) >

철거되는 농성장을 바라보며, 안정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웃으면서 텐트를 걷는 감독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농성을 끝마치게 된 데에는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기적인 성공의 기쁨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 농성에 임했던 것이 아니니.

농성장을 몇 주 동안 지켰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은, 사실 FTA 발효 이후에도 분명히 걸작을 찍고 천만관객을 달성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은 오직 하나.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에 급격히 쇠퇴하고 말 독립영화 시장이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돈이 되는 상품을 골라 투자하는 거대자본에 의해 굴러간다.

그리고 거대자본은,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건 말건 박무열과 오덕환이 연출하고 안정록과 조연식과 조혁수가 출연하는 대작에 큰 자금을 댈 것이 분명했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작품은 확실히 돈이 되니까.

그러니 스크린쿼터 축소로 인해 문제를 맞는 쪽은 다양성영화 쪽.

기존에 스크린쿼터 일수를 충족시키기 위해 멀티플렉스에서도 종종 올려주곤 했던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그 제약이 절반으로 축소되고 나면 설 자리를 잃는다.

무수한 감독과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 명약관화.

그들이 추구해온 마이너 장르의 명맥이 끊기고, 나름의 노하우를 갖춘 인력들이 꿈으로부터 전락(轉落)할 터였다.

그렇기에 안정록은 한국예술대학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성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렇기에, FTA가 발효되는 하반기부터 외화 대신에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상영하겠다는 계진행의 희생에 감동했으며, 이튿날 농성장 전체의 철거에 동의했다.

다만 마음이 무거운 것은 월계 시네마의 미래 때문이었다.

‘멀티플렉스가 성공한 근본 요인은 선택의 편의성.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전통의 단관극장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신생 월계 시네마도 빠르게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거고. 그렇지만 영화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외화를 완전히 배제한다면, 그 멀티플렉스는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한국영화 전용관이라는 것이 아주 없는 신기원은 아니었다.

이미 2002년부터 문화부 주도로 주요 도시들에 한국영화 전용상영관이 개관된 바 있다.

그러나 그조차 연간 60% 수준의 상영을 강제할 뿐 결코 한국영화만을 상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영화진흥금고의 지원금이 출자될 정도로, 전용상영관이라는 특성의 한계가 명확한 탓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리다.

박무열이 만든 영화가, 이찬이 출연하는 영화가 개봉한 시기라면, 한국영화만 상영하더라도 무방하다.

그때에는 변함없이 무수한 관객들이 찾아와 부족하지 않은 수익을 안겨줄 터였다.

그러나 그 외의 시기.

대목이 아니어서 국산 대작이 개봉하지 않는 비수기에는, 전용상영관은 누구도 찾지 않는 공동이 될 수 있다.

오지의 유일한 극장이 아닌 이상에야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이동하면 흥미진진한 헐리웃 영화가 몇 편씩 걸려 있는 경쟁 극장이 나올 것이기에.

‘그렇기에 상업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찬이가 <설산>을 통해서 소자본영화도 얼마든지 흥미진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이 있겠지. 거기서 다양성영화의 매력을 느낀 관객들은 이후 비수기마다 다양성영화를 잔뜩 상영할 월계 시네마의 충성고객층이 되어줄 테니까. 그러나 그 숫자가 많지는 않을 터.’

1억짜리 예산의 <설산>을 본 관객은 무려 500만 명.

그러나 그들 전부가 숨겨진 걸작을 찾는 데 열성인 매니아는 아닐 것이고, 그보다는 이찬의 이름값과 입소문 덕분에 어렵사리 선택한 경우가 많을 터였다.

그렇다면 월계 시네마가 업을 수 있는 지원군은 기껏해야 50만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대중들에게만 기대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야. 이제는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 자신의 일생을 건 무모한 도전을 통해 문화의 미래와 다양성의 가치를 지키려 나선 것이니, 그 보답으로써 영화계가 계진행을 도와줘야 한다. 그 휘하의 무수한 임직원들을 위해서라도 월계 시네마는 무너져선 안 돼.’

마침 잘 된 일이라고, 안정록은 생각했다.

국가의 자본주의적 이익에 반한 농성 활동에 주축으로 참여함으로써 안정록의 교수직은 박탈됐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는 교수가 아닌 순수 영화인.

‘못난 내게 중책을 맡겨줬기에 책임감으로 열심히 일해왔다. 학과장에 운영위원까지 맡으면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 그 기간이 너무 길었지. 이제는 다시 작품을 시작해야 할 때야. 그러나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작가주의는 잠시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많은 이들이 즐거워할 영화를 만들어야 해. 그리고 그 영화들을 오직 월계 시네마에만 거는 거다.’

마침 천막 내부를 정리하고 빠져나오는 강정후의 모습이 보였다.

거대 기획사의 대표이사이자 이찬에 버금가는 명성을 가진 연기자면서도, 안정록이 출현했다는 한마디 소식에 곧장 농성장으로 달려왔던 청년.

그런 그에게도 이제는 선물을 줘야 할 때였다.

“정후야.”

“선생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차 안에 계시지.”

“괜찮다. 그보다 너, 지금 검토 중인 시나리오가 있니?”

“예? 아,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좀 캐스팅을 하고 싶은데. 오랫동안 구상만 하고 아직 초고도 완성하지 못한 소자본 영화다만, 꽤나 재미가 있을 법해. 들어보렴. 어렸을 적 아이돌 그룹으로 활약했지만 이제는 퇴물이라고 불리는 청년이, 오직 그 한 명만 믿고 일해온 매니저와 함께 재기하는 이야기야. 공기 좋은 산골에서 지역방송 라디오 DJ를 맡아서, 시민들의 사연을 듣고 자신의 속마음도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스타가 되는 이야기. 거기서 내가 매니저 역을 하고 네가 스타 역을 하면 어떨까? 어떨 것 같니, 정후야?”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이미 캐스팅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진 강정후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겨울철의 차가운 바람도 그 뜨거운 눈물을 식히지는 못했다.

*

“응? 이사님이랑 강정후 선배가요?”

이찬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염수진은, 꿈꾸는 듯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 진짜 이게 얼마나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모먼트였는지 몰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실현되자 참지 못하고 막 울어버린 미남! 그런 제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한참 동안 꼭 안아주신 초로의 신사!”

“······아니 근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영상 봤으니까 알지.”

“영상? 그걸 누가 찍었는데요?”

“전태양 실장님이 이사님 모시고 있었거든. 겸사겸사 기록도 남길 겸 디카 들고 가셨는데, 이건 안 찍으면 안 된다 하면서 바로 녹화 들어갔던 거래. 그래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벌써 조회수가 10만 넘어갔더라! 스승과 제자의 그 브로맨스에 전국의 부녀자들이 이미 난리 난리!”

황당할 정도로 신이 난 염수진에게 콧방귀를 몇 차례 뀌고, 이찬은 두 사람의 마음을 관조했다.

‘이사님, 농성 때문에 교수직 반납하게 되셨다고 했었지. 그래서 슬슬 복귀하시겠구나 생각은 했는데, 그 시작이 강정후랑 투톱 주연작이라니. 그 인간도 이 누나 이상으로 신났겠는데. 그리고 이건 대중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되겠어. 데뷔한 이후로 인터뷰 때마다 안정록 선생님 얘기만 하던 그 인간이, 처음으로 스승과 한 작품을 찍는 거니까.’

대중들이야 그 안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저 지나치게 작가주의적인 안정록의 영화에 톱스타가 들어갈 배역이 없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화제가 생길 터였다.

국민배우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두 사람의 합작이기에.

‘그리고 그 작품은 아마······ 월계 시네마에만 걸리겠지. 우리 이사님은 계진행 아저씨의 만행에 그 누구보다도 고맙고 미안했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급히 제작에 돌입한다고 하면, 혹시 7월에 바로 개봉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쉽게 추측이 가능했던 건, 그게 안정록만의 생각이 아닌 까닭이었다.

자신의 무신경한 발언을 믿고 인생을 통째로 베팅한 계진행에게 죄책감을 느낀 이찬 역시, <아저씨>를 7월까지 완성해 월계 시네마에만 올릴 예정.

제멋대로 군주가 순식간에 고꾸라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흠. 그렇게 되면 진짜 흥미진진하겠는걸. 안정록&강정후의 첫 번째 합작과, 이찬&송유리의 첫 번째 합작. 그렇게 두 사제의 첫 작품이 단 하나의 멀티플렉스 체인을 무대로 맞붙게 되는 거야. 고작 320개 스크린이라 어느 쪽도 기록적인 흥행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거기서 양쪽 영화가 전 시간대 매진행렬을 기록하며 화제를 만든다면, 그 대결이 여름을 넘어 가을까지 지배할 수 있을지도.’

일반적으로 여름방학 뒤부터 추석 이전까지의 가을철은 극장가의 대표적인 비수기.

그런 시기를 두 영화의 유명세가 견인해준다면, 한국영화 전용관 전환 직후의 반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터였다.

‘커다란 희생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상황은 오히려 유리해져. 그러는 동안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그때는 계진행 아저씨의 진정성이 영웅시되기 시작할 테니까. 그렇게 생겨난 상징성이 월계 시네마에 월계관을 씌워준다면······? 그러면 혹시 또 모르지. 최초의 멀티플렉스 전용관으로서 미증유의 성공신화를 쓸 수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찬은 송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김도철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유쾌한 내용인지 서로 손뼉을 치며 웃는 모습으로.

캐스팅 소리 듣고 엉엉 울었다는 강정후와 반대로, 스승 될 사람의 행보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꼬마 숙녀.

이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 송유리.”

“응? 왜요?”

“물 줄게. 따라와.”

“네? 뭔 물요?”

“기억력 붕어냐? 네가 그랬잖아. 자라길 바라면 물을 줘야 된다고. 오늘부터 레슨 시작하자. 이러면 되는 거지?”

“응? 되긴 뭐가 돼요? 오빠 진짜 이상하네요.”

송유리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귀엽게 인상을 썼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 기분이 좋겠어요? 그게 물 주는 사람 태도예요? 식물도 물 주는 사람 마음을 알아서 더 잘 자라거나 확 죽어버리거나 한다잖아요?”

“······백스터 효과?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냐?”

“엄마가 얘기해줬어요! 엄마 화분 키우거든요.”

“흠. 욕하고 싶은 건 아닌데, 그거 아주 대표적인 유사과학이야. 백스터 효과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어. 그냥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앗······ 어······ 그런 거예요? 그럼······ 사랑해요 말하면서 안 줘도 되는 거예요?”

“그래. 네가 직접 실험해보든지. 죽어 이놈아 하면서 길러도 잘 안 죽을 거다.”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입술을 떠는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이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미안하다. 부탁할게. 같이 영화 좀 찍어줘. 이번에 만들 영화는 반드시 성공해야 되거든. 안 그러면 계진행 그 인간이 내년쯤에 한강 수온 체크하러 갈 수도 있어.”

“어······ 한강 수온 그게 뭐예요?”

“극장 도산해서 자살할 수도 있다는 얘기야.”

“네?! 왜요?! 월계 시네마, 이찬 휴게실 영업비밀 때문에 완전 잘되고 있었는데요?”

“그런 게 있어. 네 머리론 잘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아 왜 나쁜 말 해요? 오빠 진짜 나쁜 사람이야.”

고개를 한 차례 흔든 뒤, 이찬은 진지하게 말했다.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나 때문에 인생 건 머저리 아저씨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좋은 사람일 테니까. 그러니까······ 좀 도와주라. 네가 있어야 돼, 송유리.”

혼란스런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던 송유리는, 긴 신음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해볼게요. 근데 잘 못한다고 화내고 그러면 안 돼요?”

“그럴 리가. 내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말이 잘 못한다는 얘긴데.”

“저는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리가. 따라와, 바로 시작하자. 9시까지 집에 가려면 시간 별로 없다.”

이찬이 송유리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김도철은 뒤통수를 긁으며 채널을 돌렸다.

송유리와 함께 볼 때는 재밌던 예능 프로였지만, 혼자 보고 있자니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

“오! 선배님께서 신작을 만드신다고요?”

계진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장의 신작 소식에 후배로서 되게 기쁘긴 한데,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684>로 많이 버셨으니까 투자가 필요하신 것도 아닐 거고, 스탭들도 선배님 한마디에 구름처럼 몰려들 테니까 제작지원을 바라시는 것도 아닐 거고. 아, 혹시 저 캐스팅해주시는 겁니까? 특별출연으로요?”

화제의 중심에 선 사람답지 않은 태평함.

절로 안정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넨 참, 편해 보이는구만.”

“예? 아, 어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걱정 마십쇼. 저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까요.”

“정말인가?”

“그럼요. 당장 비수기에 적자가 날 수도 있겠지만, 저희가 재무적으로 튼튼합니다. 찬이가 또 천만영화 만들어줄 때까지 버티기에는 무리가 없어요.”

“······하하하. 계 대표는 속 편해서 좋겠어. 참 밉구만, 미워.”

그 1분 뒤에, 계진행은 마침내 몹시 불편해졌다.

“어, 억! 절······ 위해서요? 선배님이 연출하고, 정후랑 같이 출연하시는 작품을, 7월에 월계에만 걸어주시겠다고요?”

“그래. 놀라기는. 이제부터 좀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이게 아마 나만 한 생각은 아닐 테니까.”

계진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그리고 이후 이틀간, 같은 얘기를 두 번 더 듣게 됐다.

< 61장 - 거장 안정록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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