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장 - 거장 안정록 (2) >
‘한미모’의 제준원 감독은 스크린쿼터제 축소를 반대하는 농성에 참여한 인물은 아니었다.
차기작 <몬스터>의 후반작업으로 정신이 없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심정적으로 쟁점의 바른 답안을 확신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그는 사실 치열한 경쟁 속에서야말로 비로소 한국영화의 위상이 더욱 향상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스크린쿼터가 오히려 방해가 되리라고 믿었다.
“<설산> 관객몰이 하는 거 보고 그 생각이 굳어졌던 거지. 이제는 우리 관객들 눈높이가 스크린쿼터 따위에 좌우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거 절반으로 줄인다고 별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다 싶었던 거지. 오히려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서 이쪽에서 물러서는 게 맞겠다 생각했던 거고.”
“어······ 그러셨구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한 살 차이인지라 말을 놓기로 한 계진행은, 조금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전날 안정록과의 대담 이후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탓.
그러나 이어지는 말들에는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박 형은 농성장에서 살다시피 했잖아. 아무래도 궁금해서 물어보게 됐던 거야. 대체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말하데. 지금 영화계가 단지 영화인들의 힘으로 완성된 것 같으냐고. 우리는 이찬이라는 소년한테 무진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거라고. 걔가 있으니까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결정이라면, 칸이 주목하는 배우의 희생을 담보로 한 안녕이라면, 그건 얼마나 잔인하고 못된 판단이냐.”
“오······ 그거 참 통렬한 말씀이신데? 확실히 박 감독님이 생각이 깊으셔.”
“그러니까! 내가 그거 듣고 완전히 마음이 짠해졌단 말이야. 너무 쉽게 생각했더라고. 찬이 걔가 그 독립영화 공약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얼마나 높이 비상했겠어? 수백억 투자 들어가는 작품들 마음껏 골라잡고 또 국제영화제 모조리 뒤흔들 수도 있었을 건데, 그러지 않고 있잖아. 우리 영화계를 위해서 그 꼬맹이가 참 많은 걸 희생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진행이 자네가 그 포지션을 이어받게 됐고.”
계진행은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모르는 척이야? 우리 영화계를 위해서 희생하려는 거잖아?”
“희생이 아니라 정말로 믿고 있는데? 한국영화 전용관이라고 해도 크게 적자는 안 날 것 같단 말이야.”
“그렇다고 지금처럼 수익이 크게 나오지는 않을 거 아냐? 그게 희생인 거지. 그래서 나도 좀 힘을 실어주려고 해.”
“······설마, 형도 월계에만 작품 걸겠다고?”
“그거지! 배급사가 다른 곳이면 뭐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몬스터>는 자네가 배급할 영화니까······ 응? 잠깐만. ‘형도’라는 건 딴 사람이 벌써 있었다는 거? 뭐야? 이런 미친 소리는 당연히 내가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정록 선배님께서······.”
“응? 뭐? 안 선배님 신작 만드신대? 야, 그거 참 반가운데!”
그렇게 화들짝 놀라서 이런저런 감탄사를 늘어놓았던 제준원과 달리, 이찬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안정록 이사님 왔다 가셨죠?”
“어? 어. 그제 왔다 가셨는데.”
“예상대로네요. 저도 같은 목적으로 왔어요. <아저씨> 7월까지 완성해서 월계에만 걸기로 해요.”
“어이고. 맙소사. 내 기사가 시키지도 않은 충성을······.”
“누가 아저씨 기사예요? 내 영화니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이거든요?”
“아니 그런데 말이야,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그러면 스크린 수가 너무 부족해져. 어제 제준원 감독도 찾아왔었거든. <몬스터> 월계에만 걸고 싶다고.”
“알고 있어요. 임호준 선배한테 들었거든요.”
임호준과 조혁수라는 톱스타를 투톱으로 캐스팅한 제준원의 <몬스터>는, 무려 50억의 CG 비용을 들여 현실감 넘치는 크리처를 만들고 있는 희대의 블록버스터.
그렇기에 적어도 500만 이상의 관객을 유치해야 손익분기점을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 전용관에 걸고 싶다고 한 제준원의 마음은,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쪽이 곤란한 일이죠. 월계 320개 스크린 전부에 걸어도 수익이 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작품이니까요. 투자배급자인 아저씨 입장에서도 그건 여기저기 걸어서 수익 뽑아야 되는 작품이잖아요? 그쪽을 빼주세요. 이쪽이랑 안 이사님 작품만으로도 가을까지 매진행렬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어······ 난 그걸 여기다 걸고 안 선배님 작품이랑 <아저씨>를 다른 데로 돌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도 너지만 안 선배님은 아주 오랜만에 복귀하시는 거니까······.”
“이 아저씨가 진짜. 사업자로서 생각을 하셔야죠. 외화랑 비벼보기엔 볼거리 많은 <몬스터> 쪽이 훨씬 유리해요. 월계에서는 매니아들 입맛에 맞는 영화를 상영하셔야죠.”
완전히 들어맞는 말은 아니었다. 이찬의 이름값이라면 해외의 블록버스터와도 경쟁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니.
여전히 200개 이상의 스크린에 걸려 있는 <설산>이 그 방증이었다.
500만을 돌파한 뒤로도 기세가 죽지 않은 그 작품은, 1200만 선에서 스크린이 팍 줄어든 <왕의 광대>의 후반 흥행을 완전히 짓누르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기작 상영처로 월계를 선택한 것이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 결심했을 터인 그 희생에 푸근하게 웃던 계진행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너 그런데 오늘따라 아저씨라고 부른다? 회장님 회장님 해주더니, 갑자기 왜 그러냐?”
“노망나신 아저씨한테는 과분한 호칭 같아서요. 원하신다면 억지로 불러드리고요.”
“뭐? 하하핫. 이 자식, 말을 해도 꼭.”
이찬에게라면 조카라고 불려도 좋은 계진행이 불만 없이 키득거렸지만, 소년은 이후 호칭을 되돌렸다.
“아무튼 그렇게 진행하면, 이쪽은 홍보도 꽤 유리해져요. 회장님이 주창하신 다양성영화라는 프레임에도 잘 맞는 두 작품이란 점에 더해서, 저쪽은 안정록 이사님과 강정후 선배가 사제지간에 투톱 맡은 거고, 제 쪽도 첫 제자랑 같이 출연할 영화니까요.”
“어,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구나?”
“딱 좋은 그림이죠. 애국마케팅을 베이스로 깔고 거기에 저랑 강정후 사이의 라이벌리를 위주로 이런저런 마케팅을 더하신다면, 두 작품 모두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오히려 타 극장보다 높은 수익률을 내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계진행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제준원 감독한테는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전해야 되겠네. 야, 나중에 예능 나가서 이런 비하인드스토리 얘기해보는 거 어떠냐? 이미지 엄청 좋아질 것 같은데.”
“제가 왜요? 배우는 작품으로 말할 테니까, 사업가 아저씨나 예능 많이 잡으세요. 지금 화제성으로는 회장님이 최고던데. 완전히 히어로 되셨잖아요?”
그 말대로, 일반대중에게 <684>의 감독으로나 알려져 있던 계진행의 네임밸류는 현재 수직으로 치솟고 있는 중이었다.
유명 배우들의 농성으로 대중에게도 제법 화제가 됐던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
그 앞에서 거대 멀티플렉스의 주인이 수익성을 계산하지 않고 영화계를 위한 결정을 공표했다. 그 덕분에 정부도 영화계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그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덕분에 매니아들 사이에서나 불리던 ‘충무로의 군주’라는 별명이 빠르게 퍼져나가 그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한 상황.
시청률 높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카드인지라, 방송가에서도 각종 특집 포맷으로 그에게 러브콜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나도 사업으로 말하련다. 너랑 안정록 선배님이 손해 보시는 일이 없게끔 수익구조를 다각화해야 되겠어. 이런 건 어떨까? 이찬 캐릭터상품을 만들어서 극장에서 파는 거지. 어때? 잘될 것 같지 않냐?”
“잘될 리가요. 괜한 데 돈 쓰지 마시고 자산 아껴두세요.”
“아냐. 정말 잘될 것 같은데? 피규어 업체를 좀 알아봐야 되겠다. 네 영화 나올 때마다 캐릭터에 맞게 신규 상품들을 기획하면, 매니아층을 통해서 충분한 수지타산이 나올지도 몰라. 그리고 싸인 들어간 한정판을 월계에서 영화 본 고객들한테 추첨을 통해서 준다고 하면······ 야! 이거 먹히겠는데?”
또 헛소리 하고 있네- 생각하며 이찬은 웃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그의 군주는, 저렇게 비정상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가 가장 행복해 보였다.
*
강정후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주 강렬한 적의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꼬맹이······ 하필 선생님께서 신작 내시는 타이밍에 자기 작품 들이밀다니.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는 놈.”
옆에서 듣는 천세영의 기분이 복잡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품으로 바쁜 이찬 대신 강정후의 개인교습을 받게 된 지가 어언 4개월이지만, 첫 스승에 대한 감사함은 아직도 그녀를 구성하는 주된 감정이었다.
“오빠. 이찬 선배 쪽 작품이 먼저 제작되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선생님 신작 소식 들었으면 일정을 변경했어야지.”
“아니,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쌍끌이 흥행으로 이사님 쪽 작품이 더 잘될 수도 있는 거고.”
“헛소리 하네. 선생님 작품은 그딴 거 없어도 무조건 잘돼.”
“······<장승업> 객수도 생각을 하셔야죠.”
안정록에게 칸 감독상의 영예를 안겨줬던 <장승업>은, 그러나 국내 흥행에는 참패했다.
그러니 감독으로서 안정록은 아직 상업성이 입증되지 않은 인물. 이찬의 기대작과 맞붙는 일이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은 명백했다.
물론 강정후는 그 합리적 추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야 예술영화라서 와이드릴리즈를 안 했던 거고, 작정하고 만드시면 무조건 흥행시킬 수 있는 분이야.”
“아······ 진짜 광신도라니까. 요즘 보면 이찬교 신도들보다 오빠가 더 광신도 같아요.”
“원래 그랬어. 그쪽은 사이비지.”
“아무튼 잘 알겠고요, 그만 투덜거리시고 제 수업이나 좀 해주세요. 오늘은 뭐 연습하면 될까요?”
“넌······ 흠. 오늘은 수업 말고 계약 얘기를 좀 하자.”
천세영의 눈이 동그래질 무렵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앗? 누가 오셨나 봐요. 저 어디 숨어 있을까요?”
“그럴 거 없어. 벌써 말씀드렸으니까.”
“네? 뭘요? 제가 오빠 집에서 연기 배우는 거요? 그걸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떡해요?”
“괜찮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이니까.”
“······선생님? 안정록 이사님이요? 그, 그럼 더 안 되죠! 우리 사이 오해하시면 어떡해요?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인데!”
“오해는 개뿔. 선생님은 그런 색으로 생각하지 않으셔.”
그렇게 말한 강정후가 대뜸 현관문을 연 뒤.
인자한 얼굴로 거실에 들어선 안정록은, 환하게 웃으며 천세영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세영아. 이제야 이렇게 인사를 하게 되는구나. 요즘 우리 정후가 푹 빠져 있는 아이랑 말이야.”
“네? 네?”
“아닙니다, 선생님. 쟤가 저한테 빠진 셈이죠.”
“그래. 그래서 신작에 꼭 캐스팅해달라고 부탁한 거구나.”
“네? 네?!”
“아닙니다, 선생님. 연기는 아직 별로지만 마케팅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오늘 보시고 별로다 싶으면 쫓아내셔도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간 이찬과 강정후라는 두 천재 밑에서 자신의 연기를 단련해온 천세영은, 오히려 안정록의 만면에 미소를 만들었다.
그 결과가 바로 신작의 브리핑이었다.
“이번 작품에는 아주 많은 예산이 투입되진 않을 거란다. 계 대표 입장에서도 많은 돈을 쓰기 힘든 시기니까, 주로 내가 출자해서 로케이션 쪽으로 예산을 쓸 거야. 그 대신 네게는 러닝개런티를 약속하마.”
“저, 개런티는 없어도 좋아요! 선생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구나. 하하하, 이거야 원 기분이 묘하다. 며느리 될 아이와 마주 앉은 느낌이야.”
“그, 그런 건 아닌데요······.”
“아, 미안하구나. 늙은이가 주책이지? 모쪼록 이해해주렴.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정후가 다른 배우를 추천하는 건 전에 없던 일이야. 다른 배우를 맡아서 가르치는 일조차 처음일 거다. 작중에서 만나 답답함에 몇 마디 조언을 해준 것을 뺀다면 말이지.”
주방에서 저녁식사를 차린다고 분주한 강정후를 힐끔 본 뒤에, 천세영은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를 위해서라기보단, 제가 찬이한테 선택된 후배라서, 그래서 좋게 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정후가 그만큼 찬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아, 그러니까 저도 알긴 알아요. 정후 오빠가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찬이하고 친하지 않다는 거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항상 찬이가 잘되길 바라는 것 같아요. 저 오빠는, 찬이를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
“네. 대표라고 부르지 말라고 계속 말한 게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사실은 형이라고 불러줬으면 해서 한 말이겠죠. 찬이는 그것도 모르고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지만요.”
“하하하. 세영이 넌, 눈치가 참 빠르구나.”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두 차례나 사기를 당했던 천세영이기에.
그렇지만 그녀는, 말대꾸 대신 수줍게 웃었다.
어째선지 이찬과 강정후에 대해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눈치가 빨리 도는 느낌이었다.
*
안정록이 새로운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에, 대중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적어도 연출작으로는 상업적인 성과를 거둔 적이 없는 감독인 까닭.
그러니 안정록의 신작에 달아오른 대중의 호응은, 그 본인이 아닌 주변 인물들의 반응에 동화한 감이 없지 않았다.
충무로의 히어로 계진행이, 칸의 남자 이찬이,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인 박무열이 감격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이찬 이래 처음으로 두 편의 천만영화를 장식한 강정후가, CF계의 새로운 퀸이 된 신성 천세영이, 그 영화에 무조건적으로 출연할 것임을 알리며, 러닝개런티 수익을 전부 월계 시네마의 독립영화 현상을 위한 기금으로 지원하리라 선언했다.
그와 같은 영화계의 열광이 대중에게도 전염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신작의 까메오 출연진까지 공개되며, 의례적으로 환영하던 대중들마저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정록이 분한 캐릭터는, 길거리와 클럽에서 춤을 추던 소년을 발견해 아이돌로 키워낸 매니저. 짧은 스타덤 뒤 문란한 사생활로 연예계에서 퇴출된 소년을 이후 끊임없이 지원하며 그 재기를 돕는다.
그리고 그 왕년의 아이돌로 분한 강정후는, 과거 동거동락한 멤버들에게도 미움 받는 철없는 청년이 되었다.
그 ‘왕년의 아이돌’ 멤버들이 전원 까메오로 발탁되었다.
T.O.P의 여섯 아이돌과 배우 이찬이었다.
< 61장 - 거장 안정록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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