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장 - 거장 안정록 (3.) >
2004년 MSB <연애의 조건>에서 이찬의 친구 역할로 활약해 신인상을 수상했던 심요셉은, 이제는 당당히 한 사람의 연기자로서 우뚝 선 인물.
또한 그가 속한 보이그룹인 T.O.P는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가요대상을 수상한 명실상부 최고의 아이돌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이찬의 제안을 들었을 때 심요셉은 조금쯤 심드렁했다.
“네가 하자는 거니까 하긴 하겠는데, 그 영화 잘될까? 안정록 그분은 배우로 더 유명하잖아?”
[이 인간이 감이 없으시네? 요셉 선배 따위는 감히 오디션 한 번 보기도 힘든 박무열 감독님이 한국 감독들 중에서 유일하게 존경한다고 말하는 거장입니다. 그런 분이 대중적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으면, 그건 무조건 흥행하는 거죠.]
“그런 거야? 나야 그분 영화 본 게 없어서······.”
[잘 모르면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세요. 이번 영화가 조잡한 선배 연기인생에 전환점이 돼줄 테니까.]
“짜식이 말을 해도 꼭. 뭐 시놉이 재밌긴 하던데. 근데 내용 보니까 너도 춤 연습 좀 해야 되겠던데? 유일한 현역으로 나오는 거 아냐? 야, 내가 연습시켜줄까? 잘해줄게, 흐흐흐.”
안정록이 기획한 신작의 제목은 .
그러나 그 시나리오에는 DJ만이 아니라 한물 간 아이돌로서의 고뇌 역시 담겨 있다. T.O.P 6인과 이찬이 바로 그 아이돌 까메오로서 출연할 예정이고.
급히 쓰인 시놉시스에 따르면, T.O.P의 6인과 이찬, 강정후는 한때 동고동락한 보이그룹 멤버들.
초기에 8인의 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받았으나 이후 한 멤버의 스캔들로 나락에 떨어지고 만다.
그 뒤로 T.O.P 6인은 밴드로 전향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유일하게 이찬만이 솔로 아이돌로서 성공했다는 설정.
그런 배경을 고려할 때 이찬은 고된 연습이 불가피했다.
가창력이야 <꼬마신부>에서 증명한 바 있지만, 댄스 쪽은 여태껏 제대로 평가 받은 적이 없었던 까닭.
그렇기에 심요셉은 그 영화야말로 오만방자한 연기 선생을 괴롭혀줄 기회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건 오판이었다.
작중에 쓰일 안무 창작을 마치고 이찬을 연습실로 불러낸 직후에, 심요셉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 너, 춤, 누구한테 배웠냐?”
“선배한테요.”
“나한테? 언제?”
“방금요. 안무 다 땄으니까 이만 갈게요.”
설렁설렁 인사하고 돌아서는 이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심요셉은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저 거짓말 저거 진짤까?”
“음······ 거짓말이겠지?”
“그렇겠지? 한 번 보고 딸 안무가 아닌데.”
“안무도 안무지만 그루브가 완전 제대로던데.”
“그게 된다면, 10년 넘게 춤만 춘 놈이겠지.”
황당한 현실 속에서 대화가 비현실을 맴돌았다.
답이 없겠다 싶어진 심요셉이 하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너네 시나리오 다들 읽어봤지?”
“예쓰, 리더!”
“어땠냐? 재미있었어?”
“예쓰, 리더!”
“야, 너넨 뭔 생각도 없이 대답하냐? 진짜 읽어봤어?”
“당연하지. 형, 이거 진짜 명작이야. 안정록 선생님······ 이번에야말로 최고의 작품을 완성하셨어······.”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감미로운 오세민의 말에, 심요셉은 황당해졌다.
“그래? 그 정도야? 안무 만드느라 아직 못 보긴 했는데.”
“이 인간아, 대사도 있는 배우가 그러면 되냐?”
“제대로 해, 리더 형. 이번엔 이찬한테 지지 말아야지.”
“그래! 이번에야말로 T.O.P 요셉의 힘을 보여주라고!”
“이걸로 대종상 청룡상 타내고 하는 거야!”
“지랄들은. 야, 까메오는 아무리 잘해도 상 못 타. 됐고, 너네도 안무 따라. 이거 찬이보다 못 추면 알지? 다 죽는 거야. 원로 아이돌의 힘을 보여줘라, 인간들아!”
“예쓰, 리더!”
멤버들의 연습을 몇 차례 체크한 뒤에 연습실 구석에 앉은 심요셉은, 몇 장 정도만 훑어봤던 각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지난 뒤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어? 리더 형 운다.”
“진짜? 요셉 형, 우는 거야?”
“아냐, 끅, 이 새끼야.”
“야, 진짠데요? 이 인간 우는데요?”
“야 야, 돈 걷어. 내가 울 거라고 했지?”
“이, 끅, 썅. 리더 갖고 내기를 했냐!”
“아, 내 십만 원! 리더 형 때문에 날렸어!”
*
7월을 목표로 한 의 크랭크인 일정은, 오히려 이찬의 <아저씨>보다도 앞선 3월 초로 잡혔다.
촬영의 선결과제인 프리프로덕션이 훨씬 더 빠르게 마무리된 것.
아무래도 감독의 경륜이 다른 까닭이었다.
투자를 유치하는 파이낸싱 과정을 제외한다면, 프리프로덕션의 핵심 요소는 배우 캐스팅과 스탭 고용, 그리고 스토리보드의 완성과 촬영장 섭외다.
시나리오의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발탁하고 그 내용에 적합한 스탭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그와 병행해 실제로 촬영하거나 CG로 편집할 컷씬들의 내용을 결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로케이션을 섭외하거나 세트장을 제작해야 한다.
그러니 프리 단계야말로 영화의 흥망을 좌우하는 과정.
프리프로덕션이 엉망이라면 촬영 중에 상황에 맞춰 스토리보드를 수정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흘러가 전형적인 망작이 된다.
반대로 프리프로덕션의 준비가 철저하게 이뤄진다면, 제작비 지출되는 프로덕션 과정이 간소화되고, 오히려 추가촬영을 진행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다.
그로써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제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프리 단계에서 10여 년 간 업계의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안정록의 명망이 빛을 발했다.
그는 교육자로서 무수한 배우를 가르쳤으며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수많은 스탭들을 경험해본 인물.
자신의 차기작에 필요한 인선쯤은 이미 머릿속에 명단으로 도출되어 있었고, 그 대상들 역시 하고 있던 작업을 접어두고 안정록의 밑으로 모여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의 주 무대는 방송국이다.
마침 영월의 라디오 방송국이 2004년도 이후 지방방송 통폐합으로 방치돼 있었는데, 안정록의 인맥을 통해 그곳 전체를 무료로 대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로 세트를 제작할 것도 없이 100% 로케이션 촬영이 가능해진 것.
그에 비해 양진원 감독 쪽은, 로케이션 선정에도 애를 먹는 가운데 대부분의 배역을 오디션으로 뽑아야 했다.
<아저씨> 주연인 이찬이 도리어 의 까메오 씬에 먼저 투입된 건 그런 까닭이었다.
매니저와 경호원과 어린 제자만 대동한 채 영월 방송국에 당도한 월드스타에게, 감독은 멋쩍은 듯 손을 건넸다.
“특별출연으로 이렇게 먼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구나. 네 작품 스케줄만으로도 바쁠 텐데.”
“괜찮아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죠.”
“이런 기회라니?”
“예전에 내기했던 거 있잖아요. 강정후 선배랑 관객으로 승부해서 진 쪽이 까메오 나와 주기로 했던 거.”
“아,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거기서는 정후가 패배를 인정하고 <고등형사> 출연해줬던 거 아니었니?”
“으. 그런 거 전 인정 못 해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퉁명스레 답한 이찬이지만, 잠시 후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그거고, 작품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하하. 듣기 좋은 말이로구나.”
“진심이에요. 보면서 감탄 많이 했거든요. 특히 저 누나가.”
이찬의 손가락질을 받은 염수진이 마구 손을 휘저었다.
“최고예요! 최고 최고! 역시 안정록 이사님!”
“아, 그랬어? 빈말이라도 참 영광인걸? 무열이조차 탐냈던 희대의 작가님께서 내 시나리오를 좋게 봐줬다니 말이야.”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요! 이거 완전 미쳤어요, 이사님. 피폐해진 스타와 매니저 사이의 브로맨스랑, 아이돌 그룹이었던 멤버들 사이의 갈등과 해소까지. 진짜 이건 장편소설로 써도 엄청 흥행할 거야. 어떻게 이런 재능을 숨기고 계셨어요?”
“그거 참, 과찬이구나.”
“원래 아이돌 쪽에 관심 많으셨던 거예요? 그게 아니고선 이렇게 섬세하게 감정선을 잡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하하······ 작품을 위해 조사했을 뿐이란다.”
그렇게 가볍게 대꾸한 안정록이지만, 잠시 후 도착한 T.O.P 멤버들까지 같은 질문을 입에 담자 민망함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거야 원. 설마 현직 아이돌들에게까지 호평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너희들한테선 오히려 미진한 에피소드에 대해서 지적을 받길 원했어.”
“저도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게 전혀 없었습니다. 연습생 시절부터 아이돌 활동, 회사와의 갈등이랑 팀 내 분열까지, 아이돌 활동 해본 사람이 쓴 것 같은 이야기였어요. 보면서 눈물 찔끔 나서 혼났습니다.”
심요셉의 정중한 평가에, 옆의 유진영이 낄낄거렸다.
“그게 아니고, 찔끔이 아니라 엉엉 울었대요.”
“누가, 인마.”
“니가, 인마. 감독님, 이거 진짜 감동적이에요. 까메오 씬들이 현실적인 것도 있는데, 매니저랑 관계도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저희 매니저 형들도 다 울었다니까요? 그래서 저희보고 있을 때 잘하라고 구박도 하고 있긴 한데······ 아무튼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죠. 대체 어떻게 쓰신 거예요?”
그때에는 안정록도 자신의 정보원을 거론하게 됐다.
“사실은······ 내가 그간 예술대학에서 연극원을 맡고 있었지만, 학사 과정 학생들만을 가르쳐온 건 아니란다. 회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연기자로 전향하려 한 아이돌을 교습했던 일도 있었어. JOG의 준성이 말이다.”
“엇! 준성이······ 탈퇴당하고, 감독님을 찾아뵀었군요.”
“그래. 너희야 그 팀 내부사정도 잘 알겠지. 당시에 간절하게 상담을 부탁해서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속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됐던 거야. 그렇게 그 팀의 재결합을 위해 구상한 스토리였지만······ 면회를 가서 만나보니, 오히려 안 좋은 기억들 때문에 몰입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더구나.”
T.O.P와 동시기에 활약했던 JOG는, 그러나 T.O.P 이상으로 내홍을 겪으며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보이그룹.
그 중심에 회사와 갈등을 빚은 계준성이 있었다.
복잡한 두 회사 사이에 끼어 있던 그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팀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그로 인해 배신자가 되었다.
기존 팬덤의 와해를 막기 위한 회사 차원의 언론플레이로.
탈퇴당한 인물이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이후 팬덤 결속력에 지장이 생긴다. 그렇기에 그를 타락한 배신자로 몰아 나머지 멤버들로 JOG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연예계에 학을 떼고 팀에서 탈퇴한 계준성.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연기에 매력을 느껴 안정록을 찾아오게 됐고,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미래를 기약하며 입대하게 되었다.
그 현실이 의 주인공인 ‘태원’과 맞닿아 있다.
TO라는 예명으로 활약했던 그는, 사실 회사 내 갈등 속에서 희생자로 점찍혀 인간말종이 돼버렸던 언론의 피해자.
그러나 어린 나이부터 연예인이 되어 멤버들과의 갈등을 풀 사회성이나 말주변이 없었다.
계준성처럼 속을 털어놓고 상담할 기회도 없이 퇴물 아이돌이 돼버린 태원을 연기할 강정후는, 배우들 중 마지막으로 영월에 도착했다.
진행 중이던 화보 촬영이 업체 측의 사정으로 지연된 탓.
지각을 싫어하기에 콧방귀를 뀌고 있던 이찬이었지만, 송유리의 닦달에 의해 주차장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정후엄마! 인제 왔어요?”
“흠. 인제 말고 영월 왔는데.”
“아! 와,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러면서도 꺄륵거리는 소녀를 보며 웃던 강정후는, 이찬에게 눈길을 준 뒤로는 표정을 굳혔다.
“너는, 굳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늦게 온 인간이 도리어 큰소리네? 이사님이 직접 캐스팅한 까메오거든요?”
“네깟 거 없어도, 심요셉 그 녀석이 맡으면 되는 역할이야.”
“그 선배도 이제 제법 잘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랑 비교가 되나요? 순수하게 감사합니다 하셔도 됩니다.”
“감사? 감사 같은 소리 하네. 감사 받고 싶거든 당장 네 영화 스케줄 미뤄라. 여름 다 지난 9월쯤에나 개봉해.”
“에이, 그건 무리죠. 선배 하나론 믿음이 안 가서요.”
“······애 앞이라 다행인 줄 알아라. 아니었으면 한 대 쳤어.”
몹시 성난 듯한 강정후와 함께 촬영장으로 돌아오며, 이찬은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고 싶을 정도야. 이 영화, 분명히 잘된다. 안정록의 복귀작이고 강정후가 안 선생님과 처음 찍는 작품이고를 다 떠나서, 스토리텔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해. 그야말로 거장의 작품. 막말로 까메오 출연조차 감히 해선 안 될 선택이었지만······.’
그렇지만 끝끝내 안정록의 청을 거절하지 않은 건, 송유리 때문이었다.
‘정후엄마만 따르는 이 꼬맹이한테 사제 간의 진정한 의리를 보여주는 건 나름 의미가 있어. 강정후만큼 강력한 스승바보가 또 없으니까.’
그 생각대로, 강정후는 강력한 스승바보 면모를 뽐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안정록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는, 이내 그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어버렸다.
송유리 역시 예상대로 그 광경에 몹시 감격스러워했다.
“우와······ 예뻐요. 정후엄마 안정록 아저씨 완전 좋은가 봐.”
“그래. 그게 스승과 제자라는 거야. 너처럼 툴툴거리면서 재미없다 재미없다 그러는 거 말고, 저게 제자의 참모습이지.”
“아, 그래요? 근데 재미없는 걸 어떡해?”
그렇지만 그 송유리도 이내 연기의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전국투어가 예정돼 있는 T.O.P와 차기작이 먼저 잡혀 있던 이찬의 스케줄을 고려해 가장 앞으로 당겨진 까메오 분량.
그 촬영을 보며, 송유리는 이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찬 오빠······? 뭔가 달라. 저거, 이찬 오빠가 아닌데? 그냥 행동만 훔치고 있는 게 아닌데? 저건······ 어떻게 하는 걸까?’
팀 해체 이후 솔로가수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지금도 가족 같던 아이돌 시절을 그리워하는 ‘해진’ 역.
그 배역으로 분한 이찬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단지 겉보기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신으로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행복을 깬 원흉에 대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송유리가 그 연기의 근원을 알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지만.
거장의 첫 촬영은, 성공적이었다.
< 61장 - 거장 안정록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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