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75화 (175/250)

< 62장 - 스승 이찬 >

첫 촬영을 마친 이찬과 포옹을 나눈 뒤, 안정록은 멀찍이서 구경하던 송유리에게도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졸린 눈을 비비는 소녀에게 말했다.

“유리야. 그간 여러 번 만나면서도 네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던 것 같구나. 왜 그랬던 건지 혹시 알고 있니?”

“웅······ 몰라요. 맨날 내 얘기 무시했어요.”

“그랬지. 미안하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요?”

“너는 찬이의 제자니까.”

“그땐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단다. 원인과 결과, 연기법이라고 하지. 내가 평생 찾아 헤매고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완벽의 천재를 찬이의 형이, 그리고 찬이가 만나게 된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쉬운 말로 풀어본들 어렵게만 들리는 인연생기의 설법 대신, 송유리는 ‘찬이의 형’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형이라고 하면 김도철 오빠······? 아냐. 그 사람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찬이 오빠가 날 보고 쫓아왔던 것처럼, 그 전에 누군가가 오빠를 발견했던 걸까? 그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에 대해 궁리하기 전에 안정록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기에 나는 찬이에게도 연기를 가르친 바가 없단다.”

“그래요? 그럼 그 오빠는 누구한테 배웠어요? 정후엄마?”

“정후? 하하하. 찬이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어. 스스로 자신의 껍질을 허물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거다. 나나 정후는, 그저 그 과정에서 작은 인연이 되어줬을 뿐이지.”

“······그럼 저도 혼자 연기 배워야 돼요?”

“하하. 그럴 필요가 있겠니? 이미 같은 길을 걸어봤던 스승이 있지 않니? 찬이에겐 없었던 그 행운을 너는 그저 만끽하면 된단다. 그리고 언제고 한마디 말을 해주면 되는 거야.”

“한마디 말이요?”

“고맙다고. 세상에 한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별들 가운데에서 가장 따뜻한 색깔로 날 찾아줘서, 고맙다고. 네 스승에게 그렇게 말해주려무나.”

송유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퉁명스런 이찬이 따뜻한 별이라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초로의 거장에게 그렇게 대꾸하기엔 심리적인 장벽이 커서, 그저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염수진이 모는 차에 탄 뒤에는 이찬을 슬쩍 떠보기도 했다.

“오빠는요, 형 있어요?”

“앞에 있잖아. 자본의 개 형.”

“아뇨, 저런 형 말고요. 다른 형 없어요?”

“저런 형은 또 뭐냐? 다 들리거든?”

마음 상했다는 듯 투덜대는 김도철에게 대꾸하지 않은 채, 이찬은 조용히 읊조렸다.

“저런 형 말고 소중한 형이 한 명 있었어. 지금은 없지만.”

“왜요? 오빠 싫어서 어디 가버렸어요?”

“그럴 리가. 그 형은 그럴 사람이 아냐.”

“앗. 그러면······ 죄송해요.”

“꼬맹이가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 자신이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던 소리를 고스란히 전해주며, 이찬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됐고, 내일부터 다시 바빠질 거다. 슬슬 레슨 마무리해야지. 오디션도 끝났겠다, 이젠 시간이 별로 없어.”

“레슨 한 적이 있긴 했어요?”

“그간 한 게 전부 다 레슨이야.”

그게 안정록의 마지막 부탁만큼이나 황당했던 건, 이제껏 연기 레슨이라 불릴 만한 활동을 경험한 적이 없는 까닭.

이찬은 그저 소녀를 데리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때로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때로는 차량 안에서, 때로는 서울역 대합실의 인파 사이에서.

그 과정 속에서 뭔가를 질문하고 궁리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찬은, 머플러로 자신의 하관을 칭칭 동여맨 채로, 그저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봤다. 소녀에게도 그리하게끔 시켰다.

교육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범한 백수의 삶이었다.

다만 이튿날의 레슨은 조금쯤 방향성이 달랐다.

하굣길의 송유리를 픽업해서 향한 곳은, 이번엔 터미널.

신축된 뒤 월계 시네마까지 들어선 현 터미널이 아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구 터미널 부지였다.

“왜 여기 왔어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별로 없어서. 머플러 동여매고 있긴 좀 덥잖아.”

앞장선 염수진과 뒤따르는 김도철 사이.

공사장이 된 부지 주변을 걸으며, 이찬은 말했다.

“내가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어려운 게 별로 없었어. 모든 게 다 보이고 그 하나하나가 분석되는 동시에, 그걸 고스란히 따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실생활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흉내 내면 그걸로 감탄을 살 수 있었지.”

“자랑타임이에요? 나도 할 수 있다 뭐.”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멀었다는 거야. 연기는 그런 게 아니야. 모든 인간을 훔쳐서 모든 인간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해봤자, 그건 기계에 불과하니까.”

“왜요? 화내는 사람도 따라하고 슬퍼하는 사람도 따라하면, 다양한 감정이 나오잖아요?”

“그렇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천만영화를 찍을 수 있어. 작품을 잘 고른다면 칸 주연상도 받을 수 있고. 너랑 나는 그런 존재야. 완벽에 가까운 천재.”

소녀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이찬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완벽에 가깝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잘 모르겠어요. 리미트 같은 거예요?”

“선행학습도 안 한 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네. 그래, 그런 거야. 한없이 1에 가까운 수는 1로 표기해도 무방하다는 논리. 비록 완전한 자연수는 아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1이거든. 그런 재능이니까 사실적인 해석에 폭발적인 감정 연기라며 추켜세움도 받는 거야.”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천만영화 찍고 칸 영화제 갈 수 있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나한테도 그거면 충분한 시기가 있었어. 인간 이찬이 아니라 배우 이찬만 연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이제는 생각이 전혀 달라졌다는 뉘앙스.

입술을 오리처럼 내민 송유리는,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뭔지 알겠어요. 어제 촬영장에서 봤거든요.”

“뭐? 그 차이가 눈에 보였어?”

“네. 되게 복잡한 감정이었잖아요? 그런 건 남 따라하기만 한다고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 감정 보이는 사람은 만나보기 힘드니까요.”

“······그런 게 아냐. 경험을 많이 쌓다보면 그런 인간도 볼 때가 있어. 복잡하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젠데요?”

“내가 그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나는 그 배역만큼 생각하고 몰두하고 괴로워했는가. 그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겉보기만 훔치는 건······ 불완전해.”

“불완전해요?”

“그렇지. 그딴 건 로봇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다른 이들은 전혀 모를지라도, 그 스스로는 아는 진실.

명진아를 다독이며 슬픈 척하던 <가을하늘>의 이찬과, 떠나간 이의 유지를 잇고자 자학하던 <친절한 살인자>의 이찬은, 결코 연장선상에 있지 않았다.

형을 잃은 이후에야 인간 이찬을 연기에 담기 시작했기에.

“마음을 담아야 돼. 중요한 건 마음이야. 내가 겪어보지 못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느낀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돼. 물론 그게 지나치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일도 생긴다고 하지만, 너나 나는 다행히······ 앗.”

“앗? 왜 앗이에요?”

“아니. 누가 좀 생각나서.”

이찬은 송유리가 정후엄마라고 부르는 인물을 생각했다.

그 자신이나 송유리처럼 완벽한 신체통제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조혁수처럼 터무니없는 노력으로 배역을 형성해나가는 괴물도 아닌, 그저 연기를 즐길 뿐인 인물.

그가 매 작품에서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좀 불쌍하긴 한데······ 뭐 안정록 아저씨가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신경 쓸 위인은 아냐.’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흔드는 이찬을 향해, 이번에는 송유리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뭔데. 말해봐.”

“난요, 그렇게 연기 잘해서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멋있겠다 싶긴 하지만,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연기 왜 배우겠다고 한 건데?”

“그냥······ 오빠처럼 유명해지면요, 우리 엄마아빠도 유명해져서, 기분 좋을 것 같아서요.”

“이유 꼬라지 하고는.”

“으. 나쁜 오빠는 그럼 왜 연기 하는데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요?”

고개를 끄덕인 이찬은, 공사장의 크레인을 보며 말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다양한 배역을 맡아서 조금씩 그 삶을 배우다 보면, 언젠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그래야만······ 언젠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연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중이고.”

“에이. 뭐예요? 꼭 연기를 해야 좋은 사람 되나?”

“당연하지. 넌 아닐 것 같아?”

“네. 나는 좋은 아이예요. 엄마가 그랬어요.”

“멍청하긴. 그것도 네가 부모 비위 맞추려고 애써서 나온 결과인 거야. 그리고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냐? 부모라고 해서 자식에 대한 애정이 무한정인 건 아냐. 아직 어려서 모르는 모양인데, 가끔은 그 사람들조차 널 미워할 거야. 상황이 안 좋아지면 버리려고 할지도 몰라. 그걸 막으려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좋은 사람이 돼야 해.”

그렇게 내뱉은 뒤 이찬은 생각했다. 송유리가 이번에도 마구 화를 내며 그의 팔뚝을 때릴 거라고.

그렇지만 이후의 상황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잠시 후에 내려다본 소녀는,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오빠는, 그랬어요? 오빠는 미움 받고 버려진 거예요?”

“이게 미쳤나. 그런 거 아냐.”

“그 뒤로 다시 만나본 적 없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빠 유명하니까, TV 보고 알아보지 않았을까요?”

“아니라고, 이 꼬맹아. 내 표정은 읽지 마.”

그 뒤로는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수백 미터를 더 걸어간 뒤에야 소녀는 또 말했다.

“근데요, 나는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엄마아빠가 나 미워한다고 알면 슬플 거예요.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거예요. 근데요, 그건 엄마아빠 마음이 아닌 거예요. 오빠는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그것도 몰라요? 그냥 잠깐 힘들어서 투정부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괜찮아지는 거예요. 나도 그럴 때 있어요. 오빠만 해도 처음에는 보기 싫었는데, 이제는 좋아요. 엄마아빠도 그럴 거예요. 잠깐은 나 미워해도, 금방 다시 좋아할 거예요.”

“······그게 괜찮다고? 그 눈을 가지고? 그렇게 일반인처럼 멍청하게 관계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그것이야말로 이찬의 천형.

지나치게 깊은 바닥의 감정마저 들여다볼 수 있는 탓에, 그는 어떤 인간에게도 깊은 정을 주지 못했다.

그 애정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경우의 수를 명징하게 예상할 수 있는 까닭에.

그가 유일하게 그리워하는 인물이 이미 목숨을 잃은 윤대흥인 것은, 그저 감정으로만 이뤄진 정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송유리는 망설임 없이 이찬을 올려다봤다.

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재능을 가진 눈으로.

“할 수 있어요. 난 남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빨리 알 수 있으니까. 엄마아빠가 나 안 싫어하게 변할 수 있어요. 나는 그게 좋은 사람 같아요. 꼭 싫어할 수 없는 사람 된 다음에 만나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씩 하나씩 맞춰가면 돼요.”

잠시 후에, 송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찬의 얼굴이 너무나 빠르게 변했다. 웃을 것 같았다가, 울 것 같았다가, 화낼 것 같았다가, 당장이라도 돌아설 것처럼 아련한 빛깔이 됐다.

그러면서도 멀쩡히 걷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커다란 소년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이네.”

“앗······ 그냥 생각난 대로 말한 건데요?”

“아냐. 논리적이야. 상당한 합리성이 있어. 그래. 두려워만 해서 바뀌는 건 없어. 하나씩 하나씩 경험해야지. 일종의 트라우마인 거야. 본능적으로 회피했을 뿐, 사실 맞닥뜨려보면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 그냥 지껄이는 거야. 아직은 자신도 없고.”

그런 이찬을 보면서 송유리는 생각했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덩치가 큰 주제에, 이상하게 마음은 참 여린 사람 같다고.

마음 여린 소년은 차로 돌아갈 무렵에 말했다.

“너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우와······ 칭찬해준 거 처음이에요.”

“칭찬 아냐. 원래 꼬맹이들은 보통 좋은 사람인 법이니까. 그렇지만 멍청해서 연기는 좀 걱정이 되네. 내일부턴 특훈이다. 지금까지 관찰했던 모든 사람을 따라하게 할 거야.”

“모, 모든 사람이요?”

“그래. 지금까지 내가 보라고 시켰던 게 300명 정도 되는데, 하나하나 체크해야 되겠어.”

“그건 안 돼요!”

“안 되긴. 그거 하라고 데려온 건데.”

이찬의 말대로, 안 될 건 없었다. 소녀는 이후 사흘에 걸쳐 300명을 연기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기억을 쥐어짜느라 상당히 고생하긴 했지만.

*

“안녕하세요. 저요, 아빠 차에서 뭐 가져올 거 있어서요.”

“어······ 그래? 차 번호 뭔데?”

“아까 저랑 아빠랑 왔었잖아요? 아빠 차 기억 안 나요?”

“······모르겠는데. 차종이 뭔데? 보면 알겠어?”

“네. 그러면 같이 찾아봐요.”

“컷! 오케이. 좋았습니다! 바로 넘어갈게요.”

크랭크인 직후 첫 번째 테이크에서 오케이를 받은 뒤, 송유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이찬의 소매를 쥐었다.

“이거 오케이예요? 저 안 예쁘지 않았어요?”

“예쁘고 자시고, 신인 아역한테 그런 걸 바라겠냐.”

“그럼요? 저한테 뭐 바라는데요?”

“지금 그 느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잣집 아가씨. 평생 사랑만 받고 살아온 순진무구한 꼬마.”

“응······ 그건 잘할 수 있어요. 나는 사랑둥이니까요.”

말을 마친 직후, 송유리는 황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운이 좋았으니까요.”

“······뭔 사족이야?”

“오빠도 그럴 수 있었을 거예요. 나처럼 운이 좋았으면.”

“아, 그러냐.”

“근데 내가 바라는 건요, 오빠가 따뜻해졌으면 좋겠어요.”

“그건 또 왜? 나한테까지 사랑받아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게 아니라 따뜻한 별이······ 고마운 게······ 그런 게 있어요. 좀 어른이면 알아서 하면 안 돼요? 일일이 물어보지 말구요. 나 다음 씬 대사 볼 거예요. 스승님도 연기 집중해요.”

나 아직 어른 아닌데- 생각하다 이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3월 15일. <설산>이 마침내 600만 관객을 달성할 무렵의 일이었다.

< 62장 - 스승 이찬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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