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79화 (179/250)

< 64장 - 선배 조혁수 (1) >

2006년 4월 14일. 제 42회 백상예술대상이 개최되는 날, 조혁수는 처음으로 하늘기획의 신사옥을 방문했다.

“이찬, 나 왔다.”

“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수상자 조혁수님이네요.”

“그래,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 이찬님아.”

전년도 연말의 통화를 기억하며 주고받은 장난이었다. 그 뒤에야 조혁수는 이찬의 개인연습실을 둘러봤다.

다양한 소품이 여러 책장을 잔뜩 채운 넓은 방.

회사 사옥에 자기 이름을 달아 그런 공간을 꾸릴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간판배우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여기 참 잘 해놨네. 너 혼자 쓸 걸 뭐 이렇게까지 했냐?”

“누가 혼자 쓴대요? 제 제자들도 같이 써요.”

“아, 그래? 어쨌든 네 라인만 쓰는 거잖냐.”

“이 회사는 안정록 이사님 빼면 다 제 라인이에요.”

“하하. 안 선배님은 왜 빼냐?”

“그분은 강라인이니까. 따로 집무실 드리기도 했고요.”

“아, 그랬냐. 아무튼 빨리 준비해. 샵도 들를 거 아냐?”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면서 한 말에 이찬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가면서 수진 누나한테 봐달라고 할 거예요.”

“뭐? 그럼 운전은 누가 하고?”

“선배가 하셔야죠. 오늘 선배 차로 입장할 거예요.”

“이 자식이 사람을 기사로 부리네. 야, 아무리 같이 입장하는 거지만 SUV로 레드카펫 들어가는 게 말이 되냐?”

“그럼 가면서 리무진 하나 빌릴까요?”

“그럴 것까진 있겠냐만. 야, 네 경호원은 운전 못 하냐?”

“예. 면허도 없어요.”

“웃기는 집구석이네. 스무살 명진아도 면허 딴 마당에.”

“에코 프렌들리 몰라요? 경호원은 나만 잘 지키면 돼요.”

에코 프렌들리 말고 선배 프렌들리나 좀 해주지- 그런 생각을 숨기며, 조혁수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무튼, 걔는 어디 있어? 화장실 갔냐?”

“걔가 누군데요.”

“걔, 네 제자. 이름이 송유리랬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가물가물한 척 이름 물어보는 거, 너무 식상한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핫.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 났냐?”

“티는 안 났는데, 뻔하잖아요? 시사회 때 얘기도 나눠놓고 어떻게 잊으셨겠어요. 걔를 까먹을 기억력이면 머리 떼는 게 낫죠. 아무튼 걘 안 가요. 세트장 촬영 중이에요.”

떼는 게 낫다고 폄훼당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조혁수는 아쉬움에 침음했다.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남의 제자한테 괜한 관심 갖지 마시고······ 이제 가요. 수진 누나 일 끝났대요.”

그렇게 이찬과 매니저 경호원 등을 태운 SUV로 해오름극장을 향하며, 조혁수는 종종 조수석을 쳐다봤다.

“이름이 김도철이랬나?”

“초면에 웬 반말이시래.”

“20대라고 들었는데, 말 좀 놓을게.”

“싫은데요. 나중에 친해지면 놓으시죠.”

“······야, 이찬. 넌 좀 애가 괴상한 애들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네에?! 오빠, 저는 아닌데요? 전 완전 평범하지 않아요?”

“예, 수진 씨는 평범하죠.”

“나한테는 말 놓고 염 누나한테는 존대말? 어이 털리네.”

“아······ 거참, 골치 아프네.”

김도철과의 친밀감 형성은 그쯤에서 포기해야 했다.

조혁수는 그 대신 이찬 본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야, 이찬. 오늘 남우주연상은 네가 타겠지?”

“그렇겠죠. 죄송하게 됐어요, 선배님.”

“난 포기했다. 정후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주룩주룩>으로 주연상 싹쓸이해놓고 또 받으려고 하면 인간이 덜 된 거죠. 오늘은 무조건 제가 받을 겁니다.”

이찬이 칸 영화제 일정으로 빠진 작년 백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탄 강정후는, 올해도 <왕의 광대>로 노미네이트됐다.

조혁수 역시 <달콤한 꿈>으로 다시 한 번 후보에 올랐고.

그렇지만 세 번째 후보인 이찬은, 그 칸 일정의 핵심이었던 <친절한 살인자>와 독립영화의 신화인 <설산>의 주연.

거기엔 나라엔터 톱스타들조차 한 수 처지는 감이 있었다.

지난 청룡영화상에서 조혁수가 주연상을 꿰찰 수 있었던 건, 그러니 어디까지나 이찬이 <설산> 촬영으로 오대산에 처박혀 있었던 덕분이었다.

“흠. 나도 네가 받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구도가 참 재밌네. 조연식 선배님이 휩쓴 2004년 이후로는 계속 너랑 강정후랑 내가 주연상 나눠 갖고 있으니까. 언제쯤 신성이 등장해서 우릴 밀어내려나.”

“선배들은 몰라도 전 안 밀려나요. 이제 열여덟이라고요.”

“하핫. 난 그 남태형이란 친구가 좀 기대되던데.”

“······뭐 그 선배는 한두 번 정도 받을 수 있겠죠.”

“그 친구 신작으로 <패> 골랐다며? 그 만화 참 재밌게 봤는데. 영화도 꽤나 흥행할 것 같다.”

동명의 도박 만화 1부를 각색한 <패>는, 연내 개봉할 한국영화 중 임호준·조혁수의 <몬스터> 다음으로 기대감이 큰 대작이었다.

이찬 역시 크랭크인 직전까지 남태형의 연기를 지도해주며 괜찮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한 바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도 상은 못 탈 테니까. 7월에 <아저씨> 개봉하면 1년 동안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신인상 고정될 거예요.”

“여우신인상은 그 송유리? 그런데 남우조연상은 누구 말하는 거냐? 혹시 양진원 감독?”

“그분도 좋긴 한데, 그보다는 구진철 후배님이요.”

“진철이? 진철이가 그렇게 컸어?”

“네. 선배님 아역 맡았을 때랑은 천양지차예요. 요즘 무슨 대오각성이라도 했는지 하루가 다르게 늘더라고요.”

구진철의 드라마 데뷔작은 2003년작 <승부>. 당시 조혁수의 아역으로 출연한 게 인연이 되어 이찬의 <684>에도 캐스팅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그저 늦깍이 신인.

이찬이 남우조연상을 장담할 정도로 연기력을 갈고닦았다는 말에, 조혁수는 꽤 놀랐다.

“하, 재밌는 일이야. 어떻게 된 게 너랑 같이 작품 한번 하고 나면 전부 연기가 는단 말이지. 이번에 <설산> 신인들도 신인상 후보 올랐다면서? 뭔 약이라도 쓰냐?”

“약은 무슨. 제가 쓰는 약은 압도적 도약뿐이에요.”

“하. 넌 그 교만만 버리면 참 괜찮은 녀석인데.”

“그게 없으면 이찬이 아니죠.”

“대중들 착각처럼 인성 좋은 애가 돼볼 생각은 없냐?”

“좋은 사람 될 거긴 한데, 그렇다고 객관성도 잃을 정도로 겸손해지긴 싫어요. 내 얘기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끝을 모르는 자신감 속에서, 얼핏 불안이 엿보였다. ‘좋은 사람’을 말할 때 특히 표정이 흔들렸다.

강정후였다면 필시 그 내막을 캐물어 파헤쳤을 터.

그러나 이제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조혁수는, 진중한 선배답게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든가. 남자 후배들은 그렇고, 여배우들은 어때? 천세영은 안 선배님 영화 찍고 있다고 했고.”

“강정후 선배가 직접 캐스팅했다는데, 아마 잘하겠죠.”

“그렇겠지. 신수영은 이제 신작 골랐나?”

“골랐어요. <뉴페이스>라고, 거의 단독주연이던데.”

“아, 그걸 골랐어? 난 그거 별로던데.”

“듣던 중 다행이네요. 흥행할 수 있겠어.”

못생겼던 여자가 성형수술을 통해 미인으로 거듭나며 겪는 이야기를 그린 <뉴페이스>는, 역시 <패>처럼 흥행한 원작만화를 갖고 있지만, 내용의 상당부분을 고친 작품.

각색된 시나리오가 조혁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흥행성은 보증된 셈이었다.

“그리고 또, 명진아. 걔는 뭐 골랐냐?”

“강아지 나오는 영화를······ 아니 잠깐만.”

“강아지 나오는 영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뭘 자꾸 캐물어요? 선배 스파이예요?”

“스파이는 무슨. 나이 드니까 후배들이 궁금해서 그래.”

“그쪽 회사 후배들 챙기시면 되잖아요?”

“우리 쪽은 주목할 만한 애가 없어. 그래서 송유리나 명진아나 그런 애들이 궁금하고 그렇더라.”

“선배님, 연애를 좀 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오빠! 오빠, 저 솔로예요! 오빠 저는 어때요?”

킥 웃으며 손사래를 친 조혁수는, 이후 입을 닫고 운전에 집중했다.

이찬의 얼굴을 메이크업하던 염수진의 손길이 이후 퍽 거칠어졌다.

*

백상예술대상의 영화 부문 신인상은, 남녀 부문 모두가 <설산>의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그 수상소감이 예상치 못한 황당함마저 안겨줬다.

이기자와 남지은이라고 하면, 이찬이 키운 신인군단의 리더들이자 상식적인 행동양식에 조금 약한 인물들.

그들이 각자 황당무계한 소리들을 입에 담았다.

[아, 정말 완전 기뻐요! 제가 평생 연기 하면서 이렇게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여러분은 아셨어요? 아니, 아니지. 죄송해요. 친구들한테 물어보는 것처럼 물어보면 안 되는데. 근데 있잖아요, 너무 신나가지고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빠! 나 신인상 탔어! 엄마! 나 보고 있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아, 아니, 두 번째로 사랑해! 첫 번째는 우리 찬쌤, 찬쌤 완전 사랑해!]

“하하하. 야, 이찬. 뭐 저런 웃기는 애를 키웠냐?”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좀 흥분해서 그래요.”

“그래? 난 또 너한테 배워서 애가 이상해진 줄 알았네.”

“그럴 일 없거든요?”

대폭소 속에서 희희낙락 무대를 내려온 이기자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나지은은 짧은 몇 마디로 객석에 거대한 적막을 안겨줬다.

[감사합니다. 신인상 타서 기쁘고······ 이 영광을 하이파이브 오빠들한테 돌립니다. 사랑해요 오빠들! 하이파이브 포레버! 보고 싶어요 오빠들!]

[아······ 하하하. 신인상 여자부문, 나지은 양의 소감이었습니다. 잘 들었어요.]

[오빠들 재결합 해줘요!]

[아하하하······.]

“푸흡. 야, 저게 뭐냐? 연기 봐주듯이 수상소감도 좀 봐주지 그랬어?”

“······요새 촬영하느라 좀 바빠서요.”

[오빠들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자 자, 이만 들어가세요. 경호원, 끌어내요. 하하하.]

“······돌겠네 진짜.”

전례 없는 빠순이 수상소감의 충격이 가신 뒤, 신인감독상에 <설산>의 이연진 감독이 호명돼 이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작품상에 <왕의 광대>가, 감독상에 <달콤한 꿈> 이용빈 감독의 이름이 불렸다.

그 뒤에 남우주연상 후보로 조혁수와 강정후, 이찬이 호명됐다.

[네. 남우주연상 후보들 잘 살펴봤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죠? 하하하. 벌써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든 트로이카 경쟁구도예요. 이 세 청년······하고 소년이죠? 우리 이찬 군은 워낙 일찍 데뷔를 해서 소년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벌써 다 큰 어른 같네요. 이번에도 <친절한 살인자>와 <설산> 두 작품으로 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어요. 자, 이 세 명의 대단한 연기자들 중에서 과연 누가 주연상의 주인공이 됐을까요? 시상에는 배우 조연식 씨가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전년도의 수상자인 강정후가 다시금 후보가 되었기에, 전전년도 수상자 조연식이 불려나온 무대.

<친절한 살인자>의 압도적인 조연이기도 한 그의 음성이 마침내 백상의 주인공을 호명했다.

[최우수연기상, 남자 부문······ <친절한 살인자>의 이찬.]

[네, 축하합니다. 이찬 군은 <친절한 살인자>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악마를 용서하려 노력하는 ‘이수’ 역으로 열연해,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뒤로 국보급 배우라고 불리고 있죠? 그리고 이제······ 같은 영화에서 카리스마 악역으로 활약했던 조연식 씨로부터 트로피를 받아들고 있습니다. 자, 수상소감 부탁드릴게요.]

트로피와 꽃다발 속에서 마이크 앞에 선 키 큰 소년.

그는 묘한 감흥 속에서 객석을 바라봤다.

“음······ 일단, 이렇게 좋은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영광스럽게도 2004년 이후로 매년 백상 최우수연기상에 노미네이트가 됐는데······ 한 번도 수상한 적은 없었어요. 그랬는데, 이번에 기어코 이걸 받고 말았네요. 정말 영광입니다.”

<684>로 노미네이트된 2004년에는 조연식에게, <고등형사>로 노미네이트된 2005년에는 강정후에게 밀렸던 상이다.

여러 번 수상하는 것이 어려운 상이다보니 앞으로도 조혁수나 남태형 같은 배우들에게 밀릴 일이 많을 터.

그러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수상이었다.

‘아니······ 마지막일 리는 없지. 심사위원들이 다회 시상을 꺼린다고 하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결과로 무너뜨려버리면 그만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 자리에 설 수 있어. 그럼······ <설산> 배우들이 너무 황당한 소리도 많이 한 마당이니까, 이번에는 좀 상식적인 소감으로 마무리할까.’

“위대한 작품에 절 캐스팅해주신 박무열 감독님께 감사를 드리는 게 예의겠지만, 그건 칸 때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딱 세 분께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은 바로 여기 계신 조연식 선배님. 이제 막 걸음을 뗀 후배에게 훌륭한 연기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작년 수상자인 강정후 선배님. 항상 친형처럼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중에게 이름도 알리지 못한 시점부터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연기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조연식에게는 훌륭한 연기를 배웠고 강정후에게는 연기의 기초를 배웠다는, 돌려서 까는 말.

그러나 <왕의 광대> 테이블의 강정후는 그저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게 가면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잠깐 궁금해하다가, 이찬은 고개를 돌려 조혁수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달콤한 꿈> 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조혁수는 무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영화에서 까메오로 활약해줬던 T.O.P의 심요셉과 대화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게 살짝 괘씸하게 느껴져서, 이찬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조혁수 선배님. 데뷔작에서 만나 지금까지 참 긴 인연이죠. 그 작품으로 얻은 ‘리틀 조혁수’가 제 첫 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좀 더 크죠?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만큼 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배, 이거 하나만 좀 부탁드릴게요. 이제 연애를 하세요. 후배들 귀찮게 굴지 좀 마시고요. 연기밖에 모르는 저 혁수 삼촌한테 포근한 가정 안겨주실 마음 넓은 여성분 대모집 중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뭐라뭐라 소리치는 조혁수를 보며 씩 웃은 뒤, 이찬은 중요한 이야기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곧 하반기가 다가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때는 스크린쿼터제가 절반으로 축소되고 한 체인이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변경될 예정이죠. 아무래도 멀티플렉스의 규모가 크다보니 문화산업으로 지원을 해주기도 어려운 모양이에요. 그래서, 별 것 아닌 배우가 한 가지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좋은 영화 많이 봐주세요. 유명한 배우 없고 돈 많이 못 쓴 영화더라도, 기대하며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설산> 괴짜들의 만행마저 지워버린 수상소감이었다.

< 64장 - 선배 조혁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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