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83화 (183/250)

< 65장 - 인간 명진아 (2) >

명진아는 기다림에 익숙했다.

고향에서는 장에 가신 할머니를 기다려야 했고, 서울에 와서는 대학생인 언니를 기다려야 했으며, 연기를 시작하고부터는 아역으로서 길고 긴 대기시간을 홀로 버텨내야 했다.

기다림 자체는 그녀에게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기다리는 대상에 따라서는 기쁨까지 느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할머니나 언니가 그런 존재.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그 목록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됐다.

4시에 올 어린왕자를 기다리며 3시부터 행복할 거라 말한 여우처럼, 명진아는 이제 곧 이찬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뒷좌석에 올라타 있는 소녀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찬이 오빠는 좀 혼나야 될 것 같아요.”

송유리의 투정에, 명진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찬이는 정말 바쁘단 말이야. 배우로서도 바쁘지만 실제로는 기획자 역할도 맡고 있거든. 그래서 영화 개봉 앞두고 회의할 게 많을 거야.”

“아뇨, 지각한 거 말한 거 아닌데요?”

“응? 그러면?”

“이렇게 또 저 부른 거요. 나 숙제 많은데, 그냥 둘이 놀지.”

그 말의 방점이 ‘숙제’ 쪽인지 ‘둘이’ 쪽인지 잠시 고민하느라, 대답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나왔다.

“음······ 언니랑 같이 있는 거 혹시 싫은 거야?”

“그건 아니고요. 언니 좋아요. 언니 연기도 좋아요.”

“앗, 정말? 내 연기 본 적 있어?”

“네. 말 안 했었나? <꼬마신부> 나왔을 때 엄마아빠랑 같이 봤어요. 원래 영화 잘 안 보는데, 언니 영화는 재밌었어요. 진짜 연기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아, 히히. 되게 기쁜데? 아, 그러면 거기서 찬이 연기는? 찬이 연기도 엄청 잘했다는 거 알아봤어?”

“거기서는 연기 아니었지 않아요? 다 진심 같던데요?”

거리낄 것 없이 하는 대답에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꼬마신부>에 까메오로 출연했던 이찬의 배역은 명진아의 여주인공 배역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선배 역할.

연애가 뭔지도 잘 모를 열 살 아이의 말이긴 하지만, 그게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 같다고 얘기한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동시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진심인지 아닌지, 보면 알 수 있는 거야?”

“네? 아, 아뇨.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건데요?”

“응······ 신기하다. 난 그런 거 봐도 잘 모르겠던데. 아무튼 유리야, 혹시라도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찬이는 스타잖아. 스캔들 같은 거 생기면 정말 큰일이거든.”

“당연하죠. 그리고 스캔들 생기면 언니가 더 큰일이잖아요?”

“아하하. 그런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됐지만, 명진아는 그 화제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그렇기에 3인 데이트 중 송유리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이찬에게 질문했다.

“저, 찬아? 혹시 유리는 독심술 같은 걸 할 줄 아는 거야?”

“아, 또 이상한 질문. 누나, 그런 거 아냐. 그냥 평범하게 연기 잘하는 천재야.”

“평범한 천재가 어디 있어······.”

“아무튼 누나는 그쪽 신경 안 써도 돼. 지금 연기 정말 잘하고 있어. 이번 작품 진짜 잘될 것 같아. 그러니까 유리 쟤한테는 신경 끄고 작품에만 집중해. 그 감독님이 좀 사람이 멍하단 말이야. 주연이 확고한 신념으로 리드하지 않으면 제대로 씬 못 만들 수도 있어. 진짜 잘해야 돼. 혹시라도 희재 누나나 신혜 누나한테 밀리면, 진짜 실망할 거야.”

“으, 응. 열심히 할게······!”

일단은 그렇게 답했지만, 이후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에 또 호기심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찬아. 근데 있잖아? 유리 연기는 어떤 느낌이야?”

“어휴. 내일모레 개봉하는데 그때 보라니까.”

“치.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시사회도 못 가게 하고 대답도 안 해주고, 치사해.”

“치사하다니. 그런 게 아니라, 걔는 약간 딸 같아.”

“어? 따, 딸?”

“응. 누나랑 내가 결혼해서 딸 낳으면 저런 연기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물론 그냥 비유한 거야. 결혼하고 싶다 이런 말이 아니라. 뭔 말인지 알지?”

그 직후, 이찬은 명진아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새빨갛게 물든 볼 위로 두 눈을 몹시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크게 오해한 것 같긴 한데······ 뭐 그냥 놔둘까. 100% 오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냥 기분 좋게 두자.’

명진아의 볼은 잠들기 직전까지 홍조를 띠었고, 두 발은 침대 위에서도 자꾸만 물장구를 쳤다.

그 이튿날 <강아지> 리딩을 진행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지야, 아지야. 우리 아지는 어쩜 이렇게 귀여운 거야? 큰누나 닮아서 그런 거야, 작은누나 닮아서 그런 거야? 아니면 나 닮아서 그런 거야? 하하핫, 옳지 옳지.”

눈앞에 강아지를 대령해놔도 쉽게 나오기 힘들 만큼 온몸으로 따뜻함을 발산하는 연기에, 다음 지문을 읊어야 할 조감독이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리딩을 마치고 감독의 격찬이 그녀를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아야! 넌 정말, 진짜로 보석 같은 배우야. 어쩌면 그렇게 눈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지니? 이런 명배우가 공부 때문에 1년 넘게 작품을 쉬었다니, 한국 영화계의 손실이었어!”

“아, 하하하. 감독님, 과찬이세요. 전 그냥 평범한 배운데.”

“평범하다고? 네가? 누가 그런 소릴 해?”

“누가 그런 건 아닌데······ 예를 들면요, 찬이를 보면요, 제 연기는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찬이는, 그야, 음······ 물론 대단히 특별한 배우라고 나도 생각은 하는데······.”

<강아지> 감독은 최근에 이찬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던 경력이 있다. 그게 바로 독립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설산>.

휴식기도 없이 바로 다음 작품을 추진한 감독의 이름은, 이연진이었다.

<설산>으로 대기록을 작성하고 백상 신인감독상까지 따내며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이름이 된 여장부지만, 그녀는 성공에 도취되는 일 없이 다시 한 번 저예산 독립영화에 도전했다.

그 작품에 명진아와 임희재와 정신혜를 캐스팅하고 나서는 감격해서 며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렇게 일관성 있는 성격인 탓에, 여전히 이찬을 생각하면 멍하니 감탄만 나오는 게 그녀의 본심.

하지만 비교대상이 명진아라고 하면 조금쯤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음······ 진아야. 신인감독인 내가 감히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스운 일이긴 한데 말이야.”

“에이, 감독님은 지금 충무로 최고의 흥행감독이세요.”

“하하하. 그 흥행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찬이가 잘해서 나온 건데? 아무튼 있잖아, 난 이번 작품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

“네? 비슷해요? 유, 615만이랑요?”

“응? 아, 흥행 말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네가 잘해서 잘될 영화라고 생각해. 진짜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하는 말이야. 이찬 명진아······ 둘 중에서 한 명만 선택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하면, 난 진아 너 고를 거야. 아 물론, 내가 고를 만한 입장이 되는 날은 안 올지도 모르지만. 하하하.”

머쓱하니 웃는 감독을 보며 명진아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그녀의 생각에, 정교하고 깊으면서도 강렬한 이찬의 그 연기들은, 평생 노력한다 해도 감히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를 완벽함이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왜 아니래? 내 취향이거든? <가을하늘>에서도 그랬어. 다른 친구들은 다 이찬 보면서 너무 잘한다 천재가 나왔다 그랬지만, 난 진아 네 연기에 자꾸 가슴이 미어지더라. 특히 그 아역 시퀀스 마지막 씬 있지? 나무 아래서 멀어지는 오빠 보면서 울었던 거. 그거 보다가 진짜 눈물이 이만큼 나왔다니까?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이만큼 나왔어. 어······ 이만큼인가?”

‘그렇지만, 그때는 그냥 진심이었던 건데. 멀어지는 찬이 등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너무 슬퍼져서, 배역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내 마음대로 해버렸던 건데. 그게 어떻게 훌륭한 연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열어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이찬이 해줬던 얘기와는 달리 굉장히 쾌활하고 적극적인 감독이 끊임없이 마음을 고백해댔기에.

”나 있잖아,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 것 같아. 안 그랬으면 어떻게 이찬 명진아를 연속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겠어? 전생에 나 누구였을까? 이순신 장군님? 홍범도 장군님? 어떤 분이 됐든 최고야 최고. 이번 영화도 잘돼서, 앞으로 더 많이 영화 찍을 수 있게 될 거야!”

*

겨우 230개의 스크린으로 릴리즈된 가 일주일 만에 162만 관객을 달성한 7월 12일.

<아저씨>의 개봉일을 맞아 다시금 뭉친 <강아지>의 주연 3인방은, 강남 월계 시네마 입구에서 혼란에 빠졌다.

“어, 언니? 지금 몇 시죠?”

“지금 6시 10분······. 스크린 부족해서 시간대 최대한 확장한 게 6시 반이랬는데. 그래서 지금 온 사람들은 다 <아저씨> 관객인 건데······ 이렇게 많네.”

“조조 중에서도 극단적인 조조가, 거의 매진······.”

“진짜 대단하다. 내 아들 진짜 대단해. 찬이 영화를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거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오늘도 얼굴 잘 가려야 되겠네. 하여튼 걔 나쁘다니까요. 독립영화다 뭐다 하면서 지 엄마도 라이벌도 시사회 초청 안 하고 말이야.”

“불효자야 불효자. 뭐가 그리 바쁜지 코빼기도 보기가 힘들어요.”

이찬맘을 자처하는 임희재와 자칭 이찬의 라이벌인 정신혜가 그렇게 구시렁댄다.

셋 중 유일하게 주 1회 이상 이찬과 데이트할 권한을 가진 명진아는,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염려했다.

‘정말 큰 기대감······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는 게 느껴져. <설산>에서 느꼈던 충격보다 더 큰 감동을 예상하고 있겠지.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생길 수 있는 법인데. 이번 영화는 적은 예산으로 액션까지 구현하면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게 가능할까?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악평이 나온다거나······.’

그렇게 기대와 걱정 속에서 스크린에 들어선 뒤로 10분.

이제는 자주 봐서 익숙해진 사계 프로덕션과 투자배급사 세계의 로고가 나타났다.

“와, 와, 이제 시작해요.”

“아, 기대돼. 우리 찬이 이번엔 또 어떤 명작을 찍었으려나?”

“이찬도 이찬인데 그 꼬마 진짜 궁금해요. 송유리랬나? 이찬 수제자다 뭐다 그러던데, 나보다 못하기만 해봐.”

“후후. 못하면 어떡할 건데? 밀어내고 제자 하려고?”

“에이. 내가 걔 제자를 왜 해요? 라이벌이에요 라이벌.”

미녀들의 소곤거림을 중후한 관현악 소리가 덮고, 고급 중형차의 내부가 프레임에 잡혔다.

뒷좌석에서 약간 낮은 위치로 시작해 흔들거리며 창밖의 풍경과 옆자리의 중년 신사를 좇는다.

아마도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명진아가 송유리라는 신인배우를 생각할 무렵이었다.

[어······ 여기, 주차증요. 제가, 발렛······ 키 주세요.]

운전석 차창 밖으로 이찬이 등장했다.

잘생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추레해진 채, 어눌한 발음과 어색한 몸동작으로 종이쪼가리를 건네는 청년.

단 하나의 씬으로 연기변신을 각인시키는 그 모습에 객석의 탄성이 터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와. 와, 저건 진짜, 확실한 변신이네요.”

“그렇지? 어색하게 면도한 수염부터 시작해서 치기라곤 하나도 없는 저 제스쳐들······. 찬이는 이번 작품으로 완벽하게 성인 이미지 획득할 거야.”

“그럴 것 같아요. 작품의 타이틀부터 <아저씨>니까, 이제 자동차 광고도 들어오고 그러겠어요.”

“근데 좀 슬프긴 하다. 기왕이면 멋진 배역으로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약간 하류인생 캐릭터잖아.”

“에이. <684> 땐 멋있는······ 아. 멋있는 깡패였구나.”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명진아의 생각도 깊어졌다.

‘아마 충격요법인 거겠지. 그간 소년 나이로 맡아왔던 배역들이 거의 준수하고 리더십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처음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것 같아. 그 이후에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겠지. 정말 부러워. 그 넓은 스펙트럼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따라갈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난 아직도 순진하고 귀여운 소녀 이미지를 다 벗지 못하고 있고······. 이번 영화에서 그걸 확실히 해소를- 앗.’

차량 내부에서 이동하던 카메라의 쇼트가 1분 만에 변경되어, 드디어 바깥쪽에서 다른 주연이 조명됐다.

조심스레 차량에서 내려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눈빛.

그 표정이 평소에 봐왔던 송유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 뭐지? 너무 그대로인걸? 찬이처럼 배역에 맞게 어떤 변신을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네. 배역이 그만큼 원래 성격에 잘 맞았던 걸까?’

계열로 따지자면, 이찬 류라기보단 안정록 류였다.

그저 자신의 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내 배역을 물들이고, 정교하게 변신하지 않음에도 그 에너지 하나로 관객들을 홀려버리는, 정도 중의 정도.

그렇기에 명진아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안정록 선생님처럼 진한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진 그 수준에 닿지 못했어. 그게 문제였던 걸까? 그래서 찬이는, 나한테 유리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던 걸까?’

개인적으로 흘러가던 생각이 일변한 건, 소녀가 이찬과 함께 주차장 곳곳의 행복을 찾아다니는 시퀀스에서였다.

[죠기! 민들레! 아저씨, 민들레 있어요. 내가 이겼다!]

[어, 그건······ 꽃이 아니라 씨잖아.]

[씨? 꽃 아니에요?]

[바보 같긴. 야, 비켜봐. 이렇게 후······ 불면, 날아가지?]

[응, 다 날아갔어요.]

[그러니까 꽃 아니지. 꽃은 다 졌어. 이건 그냥 남은 씨야.]

[꽃은 다 졌어요······? 근데요 아저씨, 이것도 꽃인데요? 이렇게 예쁘게 날아가는데 왜 꽃 아니에요? 나는 있잖아요, 이것도 꽃이라고 부를래요. 아저씨도 그렇게 불러요.]

그건, 아저씨의 끝 음절인 ‘씨’와 소녀가 말하는 ‘꽃’을 대비시켜, 이후 아저씨가 민들레 씨앗처럼 자신을 희생하게 되리라는 암시.

지금껏 여러 작품을 공부해온 명진아는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앞서, 소녀는 절감해야 했다.

‘저건······ 저건, 달라. 그래서 딸······인 거야. 그래서······.’

복잡한 감회 속에서, 영화는 급격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 65장 - 인간 명진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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