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장 - 인간 명진아 (3.) >
‘하수’는 불행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족 없는 하류인생이었고, 도박장에서 조직의 마약을 훔치려다 발각당해 오른손까지 잘렸다.
그 뒤로는 빌린 적도 없는 돈을 노예처럼 갚아야 했다.
찾아주는 이도 찾아갈 이도,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죽은 청년.
주차장 앞으로 펼쳐진 허허벌판을 바라보는 일만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비록 관리하는 이가 없어 잡초만 무성한 벌판이지만, 그런 곳에도 민들레 홀씨는 날아들어 꽃을 피우곤 했다.
그 억척스런 식물을 바라볼 때면 하수는 자신도 언젠가 멀리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다.
언젠가는 사람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를 괴롭히는 빚의 족쇄를 풀고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날 내일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화원의 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건 망상이었다.
범죄조직의 마약을 건드린 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었고, 그를 찾는 건 미운 정조차 들지 않는 깡패였다.
그와 보통 사람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그렇기에 ‘재희’ 역시 그에게는 그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접하는 동화 속 요정일 뿐이었다.
순진무구한 아이와 그 사이에는 작은 접점조차 없었다.
시의원인 부친의 차를 타고 종종 골프장을 찾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터인 소녀 재희.
그녀는 그렇기에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하수가 궁금하다.
웃으면서 말을 건네도 받아주지 않는 아저씨가 이상한 동시에, 골프가 지루해져 밖으로 나올 때마다 멍한 눈으로 잡초만 보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 둘이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건 꽃이라는 화제를 통해서.
저기 꽃 피었다며 발랄하게 외친 소녀에게 그럴 리 없다고 퉁명스레 대꾸한 게 발단이었다.
거기서 내기라는 관계가 발생하고, 소녀의 억지 속에서 민들레 씨를 꽃이라고 인정하며 벌칙이 발동했다.
재희는 하수에게 자기 아저씨가 돼달라고 부탁한다.
아빠는 맨날 다른 아저씨들하고 재미없는 얘기만 하니, 골프장에 올 때마다 재밌는 이야기를 준비해달라고.
그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함 앞에서 하수는 녹아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주말마다 두 송이 꽃처럼 햇볕을 마주한다. 삭막한 주차장에서,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며.
매일같이 깡패 ‘지환’에게 두들겨 맞는 하수가 종종 웃을 수 있게 된 건 그런 까닭.
그리고 그 하수가 더는 담배를 사놓지 않음을 알게 된 지환이, 그의 변화를 흥미로워하기 시작한다.
시트콤 스타 구진철이 맡은 그 지환 역은 중견 조직원.
조직에서 마약 유통을 책임지는 ‘승원’의 부하로, 보스에게 무시당하는 설움을 자기 말에 벌벌 떠는 하수에게 푸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하수와 단둘이 있는 재희를 보게 되며 본격적으로 비극이 시작된다.
CCTV도 지키는 이도 없는 주차장의 뒤뜰은 딸을 납치해서 시의원에게 돈을 뜯어내기에 최적의 조건.
그렇게 거액을 받게 되면 중간보스인 승원을 제낄 수 있다.
생각 끝에 지환은 하수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재희를 납치한다.
현장에 떨어져 있던 라이터를 보고 지환이 범인임을 알아챈 하수는, 그러나 시의원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지환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려 들 것이기에.
학습된 공포 속에서 고개만 흔드는 참고인에게서 시의원도 곧 관심을 끄고, 납치범과의 협상에 집중한다.
그러나 협상 끝에 지환은 돈만 챙겨 달아나고 만다.
홀로 골프장을 찾아 전화만 기다리는 시의원.
그를 바라보다가, 하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옥을 벗어난다.
민들레 씨앗 하나하나를 꽃이라 불렀던 소녀를 찾기 위해, 지환이 떨어뜨리고 간 라이터를 손에 꼭 쥔 채로.
그때부터가 <아저씨>표 ‘하류 액션’의 시작이었다.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항쟁 사이에 끼어든 외팔이가 처절하고 지독한 방식으로 소녀를 찾아가는 시퀀스.
제작여건상 총기도 카 스턴트도 없이 진행되어 그저 사람뿐인 액션 씬이, 하수의 내적인 고뇌와 함께 스크린을 채웠다.
거기까지 본 상황에서, 한 관객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근육 좀 더 지웠어야 했는데. 끔찍한 꼴만 나와야 되는데, 찢긴 옷 틈으로 보이는 잔근육이 너무 선명해.’
순간적인 프레임이라 관객들은 눈치도 못 챘을 옥의 티를 찾아내면서 혼자 아쉬워하는 꺽다리 남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아저씨>를 상영한 강남 월계 시네마를 찾은, 영화의 주연배우 이찬이었다.
‘다 좋은데 참 저런 건 아쉽단 말이야. 예산이 충분했다면 CG로 좀 수정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사실은 예산이 있었다면 지저분한 칼싸움 대신 카 스턴트 넣었겠지만. 도박장 시다에 주차장 관리인으로 일했으니 운전 실력에는 개연성도 충분한데. 정말 아쉬워, 독립영화로는 저기까지가 한계라는 게. 이놈의 저예산 지겹다 지겨워.’
이미 블록버스터를 여럿 경험한 이찬이기에 당연한 한탄.
그렇지만 관객들의 감상은 전혀 달랐다.
굳이 고개를 돌려 표정을 분석하진 않았지만, 이찬은 뒷좌석에 앉은 남녀의 대화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으, 아, 와우.”
“야, 소리 좀 내지 마. 쪽팔려.”
“아니, 아우, 무서워서 못 보겠어.”
“겁쟁이냐? 피도 안 튀는데 뭐가 무서- 아우.”
“으 뭐야. 너 손 땀투성이야.”
이찬은 <고등형사>에서 정교한 일대다 액션을 선보이며 세계 영화인들을 홀린 적 있는 배우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모든 액션 씬을 감수한 까닭에, 스테디캠도 쓰지 못하고 감독이 직접 핸드헬드로 찍은 영상들조차 도리어 압도적인 현실감의 화신이 됐다.
특히 이찬이 맞는 시퀀스들은 전부 실제로 벌어진 액션.
그런 씬마다 더없이 강렬한 리얼리티가 객석을 덮쳤다.
거기에 양진원 감독이 섬세하게 세팅한 프레임이 클로즈업샷으로 얼굴을 비출 때면, 이찬은 액션의 와중에도 하수라는 인물의 내면을 얼굴 전체에 담아내곤 했다.
눈앞에서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는 듯한 현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송유리가 있었다.
지환의 손에 붙들린 채 하수와 조직원 사이의 사투를 구경하도록 강제된 소녀 재희.
이찬이 인정한 열 살의 천재가 비일상을 연기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시시각각 전율 같은 것을 느끼게 됐다.
“와, 쟤는 진짜 미쳤다. 쟤가 이찬 제자라 이거지?”
“흐, 흑. 응······.”
“열 살이 어떻게 저래? 아 씨, 우는 거 봐.”
“흑······ 응······ 진짜로.”
“아 나까지 울 것 같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하수가 버려진 구덩이로 다가온 재희가 손을 어루만지는 씬에서 정말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흘러나와 전염되는 것만 같은 슬픔.
그 앞에서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상영관 안에서 오직 이찬뿐이었다.
‘송유리는······ 쟤는 참 이상한 애야. 나 같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오히려 진아 누나가 자기 바람처럼 내 연기 스타일을 획득했을 때 저렇지 않을까 싶을 지경······.’
이찬이 스스로 관찰해온 감정들을 고스란히 묘사해서 현실감에 주력하는 연기자라면, 송유리는 환상 속의 용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관찰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여의주.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아니고서야 저렇듯 배역에 넘쳐나는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할 터였다.
‘저 방식 자체를 고스란히 흉내 낸다고 해도 내 연기는 저만큼 깊을 수 없어. 그야 절대다수의 관객들은 구분하지도 못할 만한 차이겠지만, 내게는 보여. 완벽하게 같은 표정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무언가. 평론가들은 그걸 아우라라고 부른댔나. 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표현은 쓸 만한 거지.’
연기를 시작할 무렵, 이찬은 아우라 따위의 비과학적인 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완벽하게 인간을 훔칠 줄 아는 인물에게 그런 상용구는 무의미한 현학적 장난이었다.
그 확신에 균열을 낸 것이 <가을하늘>의 조혁수였고,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린 게 명진아의 마지막 시퀀스였다.
‘느티나무 씬에서, 진아 누나의 연기는 신체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전달했어. 그거야말로 훔치는 게 불가능한 아우라구나 싶은. 하지만 그게 분석할 수 없는 무언가는 아냐. 선의 색깔 문제인 거지. 내가 훔칠 수 있는 건 실재하는 점. 그 점들을 연결해서 완벽한 서사를 이뤄가는 과정이 완전치 않아. 그래서 완벽에 가까운 천재······ 한없이 1에 가까운, 1 미만의 수인 거야.’
이찬의 재능은 순간의 단면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관찰과 재현으로 완벽한 현실을 이끌어내, 보는 이를 감탄케 하는 명장면들을 완성하곤 했다.
그러니 그의 점은 분명히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게 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어색했다.
여기저기서 훔쳐온 형형색색의 점들은, 균일한 크기로 직선상에 배치되더라도 분명하게 그 단절이 드러나고 만다.
그게 눈부시고 흥미진진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저도 모르게 감동하게 만드는 아우라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찬의 완벽은 각각의 씬에서뿐.
전체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씬들이 이어지는 인간 감정의 연결고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훔친 연기에 자신만의 색을 입히기 위해 이후로 꾸준히 인간들을 관찰해왔다.
반대로 명진아는, 이찬처럼 완벽한 점을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단조로운 색깔의 점들을 엮어 선을 완성하곤 했다.
그거야말로 안정록이 추구해온 연기의 정도.
지금은 삼각함수 그래프처럼 일렁이는 선이지만, 그게 때때로 변곡점에 다다른 시퀀스에서는 압도적인 힘이 나왔다.
거장이 늦은 나이에야 이룩한 진심의 표현.
어린 나이에 이미 그 수준에 근접하고도, 명진아는 매 작품마다 자신의 그래프를 점점 곧게 제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찬은 일반대중이 말하는 아우라를 직선이라고 부르곤 했다.
개개의 시퀀스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무언가-
극 전체에서 서사를 쌓아나가 터뜨리는 선의 강렬함이야말로, 이찬의 관찰력으로도 재현하기 힘든 환상의 무언가였다.
‘그렇기에 나는 형형색색의 직선, 그리고 진아 누나는 단색의 곡선. 서로가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사이야. 누나는 장면의 다채로움에 도취돼 나를 존경했고, 난 정석적인 단조로움을 얻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통시적으로 관찰해야 했어. 완벽한 연기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그런데 내 제자란 애는······.’
생각 와중에, 마침 또 송유리의 얼굴이 스크린을 채웠다.
하수의 어깨 위에 떨리는 손을 얹고 턱을 덜덜 떠는 클로즈업샷에 객석 곳곳에서 재삼 탄식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완벽한 점들이 균일한 색으로 이어진 직선의 연기.
관객들이 넋을 놓게 만드는 선명한 아우라였다.
‘······미쳤다니까 진짜. 나처럼 이것저것 남한테서 점을 훔쳐서는, 진아 누나처럼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이고 있어. 저거야말로 완벽한 연기라는 거겠지. 정교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동시에, 내면의 감정선을 서사라는 틀에 일치시켜서, 리미트 1이 아니라 자연수 1을 구현하려고 드는 거야.’
영화를 완성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크랭크인 때는 그저 흉내 내는 연기라고 생각했고, 한 달이 지날 때까지도 운 좋게 배역과 잘 맞았다고 치부했다.
기술시사 A프린트를 통해 그 시퀀스들이 모눈종이 위에 올려진 뒤에야 질겁하게 됐던 것이다.
‘조혁수 선배가 그간 느껴왔을 고충이 단박에 이해가 됐달까······. 그야 쟤는 이제 막 시작한 처지니까 종종 휘거나 색이 튀기도 해. 그래서 바로 알아보기 힘들었지. 하지만, 연산과정 자체가 다른 부류인 거야. 한없이 1에 가까운 수가 1이 되기 위해선 무한한 x축을 따라 이동해야 하지만, 0.9가 1이 되는 데에는 그저 0.1의 무언가만 더하면 되니까.’
아직은 이찬이나 명진아보다 낫다고 하기 힘든 연기.
그러나 얼마간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두 사람이 각각 가진 장점들을 아득히 초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딸 같다고 비유했던 건데······ 마침내 고대하던 송유리의 연기를 본 저 누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이찬은 그쯤에서 고개를 돌려 객석 구석을 바라봤다.
비극이 안타까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린 정신혜와 임희재 때문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고.
부릅뜬 두 눈을 스크린에 고정한 명진아의 얼굴에, 유쾌한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
민들레 홀씨들을 강변에 뿌리는 송유리의 풀샷 위로 크레딧이 오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장편을 연출한 양진원 감독의 파격.
그러나 그 독특한 크레딧 연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크레딧을 보지 못한 채 멍하니 송유리의 옆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명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명이 켜지고 크레딧이 끝나도록 눈꺼풀 외에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진지한 표정에 임희재와 정신혜도 가만히 기다려줬고.
덕분에 모든 관객이 빠져나가고 나서 이찬이 그들 앞에 직접 다가올 수 있었다.
“누나들, 안녕.”
“으악!?”
“이, 이, 이찬!”
“어. 그찬 아니고 이찬. 나 진아 누나랑 잠깐 비밀 얘기 좀.”
위에서 소란스레 불러대는 자칭 이찬맘과 라이벌을 무시한 채, 소년은 스크린 바로 앞에서 명진아와 마주했다.
“아······ 찬아······ 너, 왜 여기?”
“송유리 연기 보고 괜한 생각 할까봐, 같이 보러 왔지.”
“말을, 말을 하지 그랬어? 같이, 왜 따로······?”
“옆에 앉아 있으면 집중 안 되잖아. 그래서 말 안 했지.”
덕분에 첫 영화관 데이트를 블라인드로 하게 돼버린 상황에 조금 좌절한 명진아였지만, 그 상념은 길지 않았다.
“유리, 딸······ 무슨 말인지 알았어. 영화 보고, 느끼게 됐어.”
“그래, 그런 거였어. 저래서 평범한 천재라고 한 거. 누나처럼 평범한데 나처럼 천재잖아. 쟤가 이상한 거야. 누나는 그냥 누나 길 가면 돼. 그러면 분명히 닿을 수 있을 테니까.”
“응. 내가 더 빠를 거야. 나, 딸한테는 안 질 거야.”
핀트가 좀 어긋났지 싶었지만, 이찬은 어깨만 으쓱여줬다.
< 65장 - 인간 명진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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