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장 - 감독 양진원 (3.) >
2006년 7월 27일, 목요일. 비로소 <몬스터>가 개봉했다.
2000년도부터 각본이 집필되고 2005년 6월부터 제작에 들어가, 이듬해 1월에 촬영을 마치고 이후 후반작업에만 반년이 걸린 대작.
시사회 때의 호평이 무색하지 않았는지 600개를 넘는 스크린의 객석들이 착착 채워지기 시작했다.
7월 5일 개봉작인 는 340만, 7월 12일 개봉작 <아저씨>는 이미 320만에 다다른 시점.
예년 같았다면 국산 대작들의 3파전에 극장가가 전부 행복에 겨웠을 상황이지만, 2006년은 좀 달랐다.
스크린쿼터제 축소 속에서 전국 극장가가 두 부류로 갈려 있는 까닭이었다.
2위 멀티플렉스인 월계 시네마에는 <몬스터>가 걸리지 않는다. 반대로 1위 멀티플렉스 OGV 등에는 와 <아저씨>가 상영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전자는 <몬스터>의 개봉으로 소폭 감소한 객수에, 후자는 예상만 못한 초반 관객몰이에 울상을 지었다.
그런 날에 OGV를 찾은 관객 중 한 명이 <아저씨>의 연출자인 양진원이었다는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
그러나 그는 <몬스터> 상영관의 입장 행렬에는 그저 눈길만 주고 지나쳤다.
‘관객들이 꽤나 몰리긴 했는데, 예상만큼은 아니야. 확실히 월계의 선점효과가 큰 것 같아. 주요 시간대가 계속 매진된 탓에 보지 못한 나 <아저씨>를 보려고 월계 찾는 사람이 많은 거겠지. 그렇다곤 해도 결국 세 작품이 다 잘될 거야. 워낙 좋은 영화들이니까.’
임호준과 조혁수가 형제 사이로 열연한 <몬스터>는 VIP시사회에서 이미 시청한 바 있다.
동일시기 경쟁작이라곤 하지만, 50억의 CG 비용을 들여 제작했다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까닭.
덕분에 현장 사회자가 ‘한국의 놀란 감독이 와주셔서 많은 분들이 놀란 것 같네요’ 따위의 농담으로 그의 여린 마음을 괴롭히기도 했다.
‘정말 훌륭한 영화였지. 핵심적인 플롯은 괴수와 싸우는 거지만, 그 안에서 사회의 고질병에 대한 풍자와 형제애를 너무도 선명하게 영상화했어. 한미모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한다는 제준원 감독다운 작품이야. 하지만······ 고작 크리쳐 하나를 영화에 넣기 위해 들인 돈이 50억이란 말이지.’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객수로 따지자면 손익분기점이 100만 가까이 높아질.
‘그런데 찬이는, 그런 비용의 20배를 나한테 약속했단 말이야. 미국에 가서 히어로무비의 정수를 훔쳐오는 조건으로. 나한테 한국 히어로무비의 효시가 되라고 한 거야······.’
그중 중요한 건 1억 불보다도 오히려 노하우 쪽이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상주하는 헐리웃의 인프라는 공고한 아성과도 같다. 1억불 의 투자가 실제로 이뤄진다 한들 그들의 역사를 따라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 환경을 배워 강점을 취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일이야말로, 후발주자로서 취해야 할 최우선의 스탠스였다.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한 지시이긴 했는데······ 죽겠네.’
복잡한 심정으로, 양진원은 자신의 티켓을 내밀었다.
“<슈퍼맨 리턴즈> 4관, 바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연예인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마스크를 낀 그에게 직원이 눈길을 주긴 했지만, 트러블이 발생하진 않았다.
빈자리가 훨씬 더 많은 스크린 안에서 한국의 놀란은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텅텅 비었네. 3억 달러를 쓴 작품이 말이야.’
<슈퍼맨 리턴즈>는 1년 전에 개봉한 <배트맨 비긴즈>의 두 배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된 초대형 히어로무비.
그러나 그 성과는 전작에 비해 한참 못 미쳐, 개봉 후 잠깐 반짝했을 뿐 이후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국내에서도 DC 영화 최고 관객수를 갱신할 거라는 얘기가 잠깐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몬스터> 개봉 이후에 금세 스크린을 잃을 것이 뻔히 예측되었기에.
‘거대한 예산을 쓰고도 저예산 로컬 영화에 밀릴 지경인 거야. 이 감독은 이후에 또 작품을 맡기가 힘들겠지. 투자자들이 이미 학을 뗐을 테니까. 나는 어떨까? 한국의 영웅인 이찬을 캐스팅하고 충무로의 군주인 계진행의 천억으로 영화를 만들어서, 과연 흑자를 낼 수 있을까?’
답이 없는 고민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을 오마주해 친근한 히어로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동시에, DC 시네마틱 유니버스 확장을 목표로 고담 시까지 등장시킨 야심작.
그러나 그 스토리는 금세 지루함으로 점철되고 말았다.
‘답답해. 너무 답답해. 슈퍼맨이 저렇게 찌질한 짓들을 하다니. 위대한 구원자잖아?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거대한 악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지. 빌런들과 생사를 가르는 결투를 치러야지. 내 슈퍼맨은 이런 게 아냐. 내가 만들었으면 이것보단 훨씬······ 음······ 아니,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이찬한테 물든 건가?’
영상미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압도적인 예산이 CG와 로케이션에 투입되었기에,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인명구조활동을 벌이는 슈퍼맨의 모습이 경이로움마저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 내용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놀란의 배트맨은 이렇지 않았어. 내면의 고뇌를 다루면서도 액션까지 놓치지 않았고, 재빠른 전개에 섬세한 재해석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단 말이야. 아······ 진짜 만들고 싶다. 최고의 히어로무비를 만들고 싶어. 내 손으로, 최고의 몸을 가진 이찬이란 배우를 세계 최강의 남자로 만들고 싶다!’
후반작업과 홍보일정으로 그간 보지 못했던 슈퍼맨의 최신작을 감상한 뒤.
극장을 빠져나오는 양진원의 표정은, 그전과는 전혀 달랐다.
꼭 쥔 주먹은 부들거리고 두 눈엔 불길이 가득했다. 그리고 발걸음은, 슈퍼맨처럼 당당하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
“이제 결심하셨어요? 좀 늦으셨네요.”
별로 마음 졸이지도 않았다는 듯한 이찬의 말에 조금 김이 샐 뻔했지만, 양진원은 다시 기운을 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약간 구상까지 해봤는데 말이야, 이런 건 어떨까? 인간 진화의 한계에 이른 가장 강력한 인간. 개인으로서는 최강의 신체를 갖췄지만 마음은 따뜻한 한 청년이, 국회에 숨어든 초능력자 집단과 싸워나가는 거야.”
“응? 최강의 신체, 설마 저요?”
“그렇지! CG도 대역도 필요 없는 너만 할 수 있어. 넌 내가 아는 최고의 액션배우야. 이번 영화 찍으면서 뺐던 살 다시 찌우면, 비주얼로도 최강의 파이터가 될 거고. 우주에서 온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맨 오브 스틸’이 되는 거야!”
“······저기 감독님, 저 주연 맡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뭐, 뭐?!”
당황한 양진원이 입술만 달싹거린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얘기라는 듯이.
그 반응에 한숨을 내쉬고, 이찬은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요. 조혁수 선배 때문이라고. 그 선배가 주연으로 들어갈 거예요. 난 히어로무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고요. 조혁수 주연에, 사이드킥으로 초능력 소녀 한 명 들어가는 것도 좋겠죠. 유리가 잘해줄 거예요.”
“아니, 너, 네가 들어가면 수출이 뚫릴 거라면서?”
“예, 그랬죠.”
“그런데 주연을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해?”
“주연만 역인가. 전 빌런이나 해보려고요.”
“어억!?”
빌런이란, 직역하면 악역.
그렇지만 주 용례는 히어로무비에서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서 악행을 벌이는 배역을 칭할 때다.
그렇기에 조연이면서도 때로는 주연만큼이나 인상적일 수 있는 것이 그 빌런이란 존재였다.
“주연은 질리도록 하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많이 할 거고. 현실 배경의 영화에서 완전 악역을 맡기는 좀 그래요. 아무래도 이미지 문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히어로무비는 다르죠. 빌런도 영화 끝까지 살아남아서 후속편의 예고가 되기도 하던데? 그런 거 한번쯤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 아니, 이찬이 빌런이라니······.”
“그런 쪽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림도 좋잖아요? 인류 최강의 신체와 두뇌를 갖춘 악당. 그리고 그를 막는 초능력자가 둘인데, 한쪽은 나이가 어려서 후속편 주인공이 되는 거죠. 1편 끝에 충격적으로 조혁수 선배가 죽어버리면 꽤 재밌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이찬은, 양진원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고 일어섰다.
“그런 방향으로 구상을 해주세요. 이게 미국처럼 원전이 따로 있는 것도 좋긴 할 텐데, 한국에는 그럴 만한 작품이 딱히 없겠죠? 만화 본다 그러면 회초리 때리는 나라니까.”
“어, 요새는 그 정도까진 아닌데······.”
“어쨌든요. 힘내서 영어공부도 잘하세요. 혁수 선배는 <몬스터> 내리는 즉시 비행기 탈 거래요. 늦어도 9월 안쪽일 테니까, 준비해두세요.”
“어, 어어······.”
이찬이 회의실을 나선 뒤로도 양진원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연히 최강의 히어로를 연기해주리라 믿었던 소년의 배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탓.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회의실 문이 열렸다.
“양 감독? 여기서 뭐 해? 우리 회의 있는데.”
하늘기획 대표이사 정창영이었다.
그의 매끈한 삭발 머리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어 쨍하게 빛난다.
그 순간, 양진원은 문득 생각했다.
‘리브의 슈퍼맨을 보면서 아쉬웠던 게 딱 하나 있긴 했었지. 막강한 슈퍼맨과 호각을 이룰 만한 아치에너미의 존재. 괴수인 둠스데이나 다크사이드가 아니라, 주인공과 동일선상에서 서로와 치열하게 겨루며 감정을 격돌할 만한 존재. 슈퍼맨의 렉스 루터는 굉장히 매력적이긴 해도 결전의 대상은 아니었어. 그게 너무 별로였단 말이야. 난, 렉스가, 대머리 루터가 형편없이 패배하길 바라지 않았어······!’
정의로운 것만이 답이라 믿고 있던 시절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심.
소년 양진원은 사실 슈퍼맨이 아니라 그 아치에너미를 응원하고 있었다.
슈퍼맨의 초인적인 강함과 숭고한 마음은, 경외의 대상일 뿐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렉스 루터는 비루한 범죄자였으며 오직 자신의 두뇌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인물. 골방에 갇혀 있는 비디오 매니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찬이 말한 건 양진원이 꿈꿨던 바로 그 아치에너미였다.
‘이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오랜 전승 속에서 지구를 지켜온 위대한 영웅 조혁수. 그리고 그에게 선택되어 새로운 히어로로 자라나는 송유리. 그러나 번개가 치는 날 죽은 어미의 배를 찢고 태어난 인중의 악마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인류 최강의 재능과 최악의 분노를 모두 가진 이찬······’
“저기, 양 감독? 어디 아픈 거야? 젊은 사람이 너무 그렇게 고민하고 그러면 안 돼. 그러다 나처럼 대머리 된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하고 멀어지는 양진원을 보며, 정창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감독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
뜨거웠던 여름도 끝나갈 무렵, 마침내 한국영화 3파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승자는 물론 제준원의 <몬스터> 쪽.
월계 시네마에 빼앗긴 여름 관객들을 되돌리기 위해 열렬한 광고를 펼친 OGV의 전략 속에서 점차 상승세를 탄 그 작품은, 25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뒤로도 꾸준히 관객을 유치해, 마침내 1311만의 대기록으로 막을 내렸다.
다만 그게 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최대 800개 스크린까지 확대됐던 <몬스터>에 비해 한참은 더 적은 스크린에 걸린 와 <아저씨>가 여전히 50%의 좌석점유율로 순항 중인 상황.
각 작품이 800만을 넘긴 뒤로도 월계 시네마의 꾸준한 수입원이 돼주고 있었다.
물론, 그게 조혁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두 작품의 중간성적을 듣고 투덜거렸다.
“사실은 이미 둘 다 천만영화가 돼 있어야 했는데.”
“올해 천만영화 네 편이나 되게요? 됐고, 빨리 가죠 좀?”
“이 자식은 배웅하러 나와선. 좀 아쉬운 척이라도 하지?”
이찬은 대꾸 없이 고개만 돌려 다른 전별자를 쳐다봤다.
출국 라인 앞에는, 요란한 핸드폰 카메라 소리 속에서 귀여운 이야기를 나누는 양진원과 송유리가 있었다.
“혹시 유리야, 이거 타면 신발을 벗어야 되는 걸까?”
“맞아요. 그냥 버스나 기차 타는 게 아니라고요. 신발과의 마찰 때문에 여객기 내부에 진동이 전달되면, 날개가 받는 양력이 감소해서 추락하게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와······ 무섭네. 알았어. 꼭 벗고 타야지. 가면 신발장은 있겠지?”
“당연하죠. 스튜어디스 언니한테 주시면 보관해줘요.”
어느 쪽도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양진원이 비행기 경험이 없긴 해도 영화는 많이 본 인물이며, 송유리는 그의 표정을 빤히 읽을 수 있는 아이인 까닭.
무슨 이별의 의식인 건지 황당해하며 이찬이 일침을 놨다.
“슬슬 가시죠? 이러다 두 분이 연발(延發)시키겠네.”
“아, 어, 그래. 음······ 잠시만.”
캐리어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양진원은 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요?”
“어, 이미지 각인 좀 하느라고. 이대로만 자라줘. 내가 널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히어로 역을 준비해줄 테니까. 물론······ 중간중간 무서운 빌런이랑 싸우기도 해야 하지만······.”
“액션 씬이요? 잘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요.”
이찬의 액션 씬을 구경한 것만으로 이미 어지간한 액션배우 수준의 센스를 체화한 소녀의 말에, 양진원은 씩 웃었다.
“요 요 귀여운 녀석. 말은 참 잘한다. 아무튼 고마웠다 유리야. 네 덕분에 힘이 났어. 돌아오면 꼭 맛있는 거 사줄게.”
“네. 잘 갔다 와요. 다치지 말고요. 뱃살 좀 빼시고요.”
이내 조혁수와 합류한 양진원이 떠나간 뒤, 이찬이 물었다.
“야. 뭘 그렇게 말 다 받아주고 앉았냐? 그새 정들었어?”
“그새 정들었냐고요? 어······ 질문이 이상해요. 정이 안 들 수도 있어요? 3개월이나 같이 촬영했는데요?”
“3개월은 무슨, 2개월 좀 넘었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인사가 길어? 하여튼 이상한 인간들이야.”
송유리는 이상한 건 이찬 쪽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표현하지 않은 채, 양진원보다도 한참 큰 소년의 손을 끌었다. 이별을 끝낼 시간이었다.
< 66장 - 감독 양진원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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