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88화 (188/250)

< 67장 - 인간 안정록 (1) >

7월을 맞이해 발효된 스크린쿼터제 축소안.

전격적으로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전환한 월계 시네마를 제외하면 이제는 연중 20%만 한국영화를 상영해도 되니, 자연히 그 스크린 점유율이 떨어질 거라 예측되던 하반기였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3/4분기 동안 한국영화의 스크린 점유율은 무려 80%에 육박해, 약 25%에 해당하는 월계 시네마의 400개 스크린을 제외하더라도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했다.

기대작이었던 <슈퍼맨 리턴즈>의 약세에 화제작 <몬스터>의 흥행까지 겹쳐진 결과였다.

그 점유율을 객수의 비중으로 따지면 비율이 더 극화됐다.

무려 1311만을 달성하고 내려간 <몬스터>나 적은 스크린에도 800만을 넘기고 있는 와 <아저씨> 덕분에, 외화의 객 점유율은 고작 16% 수준.

한국영화가 지배한 분기였다는 평가에 누구 하나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월계 시네마는, 그렇기에 10월까지도 축제 분위기였다.

또 하나의 국산 대작인 <패>가 개봉을 앞둔 시기인 까닭.

압도적인 비주얼에 날로 늘어가는 연기력의 남태형이 주연한 그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여전히 높은 좌석점유율을 보이는 와 <아저씨>가 상영을 끝마쳐도 극장의 수익률이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측됐다.

이찬의 독촉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 시의적절했다.

“상황 참 좋죠? 천억 빨리 만드실 수 있겠죠?”

“아이고. 천억이 뉘 집 개 이름이냐?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일단 극장 사이즈 좀 불리고 나서-”

“아, 그만 늘려요. 한국영화 전용관을 뭐 어디까지 키우시려고 그래요. 무슨 흥선대원군도 아니고, 외화도 숨통이 좀 있어야죠.”

“어, 진심이야?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우선 초장부터 박살나는 꼴은 피했으니까, 이제부턴 실력으로 승부하면 돼요. 그러려면 천억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하하. 내가 ‘하수’ 된 것 같다. 빚 독촉이 이렇게 무섭구나.”

이찬이 연기했던 캐릭터에 잠시 감정이입해본 뒤, 계진행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알겠어. 대신 다음 작품까진 월계 전속으로 상영해줘. 이찬의 영화관이라는 이미지를 좀 더 강화해야 될 것 같아. 피규어 사업도 슬슬 수익이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게 수익이 나요?”

“그럼. 이번에 <설산> 타입이랑 <아저씨> 타입으로 내놓은 거 완판됐다고 내가 말 안 했나? 추가주문 들어가서 공장 풀가동 중이야. 조만간 너한테도 모델료 들어갈 거야.”

“진짜 신기하네. 다음 피규어는 더 잘 팔릴 수도 있겠네요. 이번엔 주로 벗고 나올 거니까.”

극장 CCTV에 집중하던 계진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진짜냐? 너 벌써 시나리오 결정했어?”

“시나리오는 안 정했는데, 방향은 결정했어요. 다음 영화는 무술영화로 가죠. 사극이 됐건 현대극이 됐건 한 무술의 끝을 파는 무인의 이야기요.”

“아니······ 네 액션이면 흥행성도 있을 것 같긴 하다만, 왜 갑자기? 지금까지 감정연기에 집중해왔잖아?”

“천억 때문에요.”

“아, 왜 또 거기로 가?”

“버는 거야 회장님이 버시는 건데, 저도 히어로무비 출연하려면 좀 더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죠. 본격적으로 무술을 익혀보려고 해요. 다양한 무술을 종합해서 저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거예요. 빌런의 고유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요.”

“설마, 유파를 만들겠다는 거야?”

“무슨 유파까지야. 액션감독으로서 스타일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1년 정도 수련을 떠날 예정이에요.”

갑자기 장르가 달라진 얘기에, 계진행이 진지하게 이찬의 어깨를 잡았다.

“야, 찬아.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냥 액션스쿨 팀이랑 무술가 몇 명 불러서 자문 구하면 되는 건데, 왜 다 직접 하려고 해?”

“제가 하면 더 잘할 테니까요. 액션이나 무술은 그쪽이 이해도가 높을지 몰라도, 그걸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임팩트가 클지는 제가 더 잘 알아요.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죠.”

“그러니까, 그 쓸 수 있는 걸 왜 다 쓰는데? 너 그냥 지금처럼 차근차근 해나가도 돼. 이미 국보급 액션스타잖냐?”

<고등형사>의 압도적인 일대다 롱테이크 액션에 이어서, <아저씨>에서는 처절한 개싸움으로 격찬을 끌어냈다.

이제 소년 이찬의 액션을 의심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될 상황.

그렇지만 그 본인이 만족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하면······ 천억 때문에요.”

“아, 왜 또 천억?”

“그 영화에서, 송유리를 상대할 거니까. 그 꼬맹이한테 밀리지 않으려면 저만의 무기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1년 동안은 순수하게 무도인으로 살아보려고 해요.”

10살의 생일도 맞지 않은 소녀를 경쟁상대로 두고 하는 말에, 계진행은 헛웃음밖에 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찬은 스스로 한 말에서 강정후를 떠올렸다.

‘그 인간이 내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제하려 해도 도저히 차분해지지가 않아. 한 순간도 쉴 수가 없어. 불편하면서도 짜릿한 느낌······ 이게 좀 즐겁단 말이야.’

이런 격정이라면 세계 최악의 빌런도 쉽게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묘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을 보다가, 계진행이 한탄했다.

“하, 참 난······ 이해가 안 된다. 그렇지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 정창영 대표하고는 얘기가 된 거야?”

“그 아저씨랑 얘기를 왜 해요?”

“야, 너희 회사 사장님인데 얘기를 해야지.”

“대머리 아저씨는 몰라도 돼요. 아무튼 그런 방향으로 시나리오 분류해주세요. 저 이제 가볼게요.”

대표 가슴 찢어질 소리로 계진행과의 미팅을 마친 이찬은, 그대로 로비로 나와 다음 일정에 참여했다.

남태형의 신작 <패>의 VIP시사회.

이미 오래 전 후반작업이 끝났음에도 한국영화 대작 3파전을 피해 개봉시기를 조정한 작품으로, 10월 말 상영을 예고하며 홍보전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관객들의 환호성에 웃음으로 응답하고 들어선 스크린에서는 안정록이 소년을 반겨줬다.

“찬이 이제 왔구나.”

“어? 이사님도 초청받으셨어요? 말씀하시지. 같이 올 걸 그랬네요.”

“하하, 넌 계 회장하고 논의할 게 있었잖니. 공적인 일을 방해할 수야 있나.”

“공적인 일이긴 했는데, 아저씨 우리 회사 이사님이잖아요? 같이 얘기해도 되는데.”

“이사라. 그래, 네 덕분에 내가 아주 출세를 했지.”

빙긋 웃으며 제대로 된 대답을 회피하는 안정록의 곁에 앉은 뒤, 이찬은 다른 걸 물었다.

“여긴 누구 초청이에요? 남태형 선배는 이사님한텐 죄송해서 말씀 못 드렸다고 했는데.”

“죄송하긴. 그 녀석은 마음이 너무 순해서 문제야. 개봉시기 조정해서 10월까지 피해줬으면 됐지, 더 뭘 어쩌겠다고.”

“그렇지만 천만이 얼마 안 남긴 했잖아요? 이사님 작품생애 최대의 커리어가 될 작품인데.”

“하하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니. 그저 좋은 이야기를 좋은 분들에게 보여드렸으면 그만이지. 어쨌건, 초대해준 건 최형준 감독이란다. 그 친구가 전에 내 연출부 일을 했었거든.”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004년 이후로 범죄영화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최형준이 안정록의 연출부 출신임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얘기 전혀 못 들었는데요? 거장의 제자였으면 인터뷰에서 한번쯤 언급했을 법도 한데.”

“하하하. 최 감독이 그때, 나한테 잘렸거든.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닐 거야.”

“와. 대자대비한 이사님한테 잘리다니, 자기가 만드는 영화만큼이나 막가파였나 보네요.”

“이 녀석, 모르는 소리는. 그런 게 아니야. 형준이는 올곧고 착한 아이란다. 내가 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지? 나는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 특히 막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을 시점에는 오만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주변에서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일 줄을 몰랐지. 그래서 자기 기준이 강하던 형준이하고 부딪치는 일이 많았던 거야.”

현재의 안정록을 마주보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이찬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원래 연출부는 감독 독재예요. 최 감독이 잘못한 게 맞죠.”

“원 녀석도. 누가 빌미를 제공했건, 쓰다 버린 종이컵만도 못한 새끼라고 욕한 건 내 잘못이 맞다.”

“······예? 진짜로요? 에이, 설마.”

“정말이야. 그 일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었는데, 최근에야 사과를 할 수 있었단다. 참 다행이지. 자칫했으면 저승에서도 후회할 뻔했어.”

“아니······ 아 몰라. 전 최 감독 싫어요. 이사님한테 그런 소리 들을 정도였으면 진짜 개차반이었겠네 뭐.”

“그게 아니래도. 편견은 좋은 쪽으로도 가져선 안 된단다.”

그런 대화 속에서 조명이 꺼지고, 상영이 시작됐다.

그 영화를 보며 이찬은 자주 입술을 삐죽여야 했다.

‘되게 잘 만드네. 스피디하고, 터프하면서, 섬세해. 그렇지만 별로야. 안정록 아저씨한테 욕먹을 정도면 진짜 인간 말종이지. 흥······ 그나저나 남태형 선배 연기 좋은데.’

그간 출연하는 작품마다 거의 모든 연기를 감수해줬던 것과 달리, 이번 <패>는 크랭크인 직전까지만 도와줬던 작품.

그때부터는 이찬 본인 역시 촬영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사회를 맞아서야 보게 된 시퀀스 속에서, 남태형은 진짜 주연으로 극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아쉬운 부분은 있어도 싫은 장면은 꼽기 힘든 수준이었다.

‘남 선배······ 처음엔 진짜 엉망진창이었는데. <미스 스캔들> 땐 한 편 찍고 나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까지 생각했었지. 어찌나 습득이 느린지, 거북이가 따로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아주 날아다니고 있어. 더 이상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성된 연기자야. 저기까지 올라서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참.’

배우의 근본인 감정표현조차 제대로 못 하던 청년.

그의 연기는 이찬의 손에 의해 시작되어, 마침내 더는 스승이 필요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그 스스로 방황하고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나갈 터.

그 모습이 복잡한 감회로 돌아왔다.

‘저 선배에 비하면, 송유리는 훨씬 더 빨리 새장을 벗어날 거야. 그때부터는 진짜 경쟁. 버릇없이 남 동정하기나 하는 녀석한테 추격당할 걸 생각하니까 벌써 골치가 아프네. 그래, 조혁수 선배가 칼을 갈러 미국에 간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에 비해서 이 아저씨는······.’

돌아본 곳에는, 주름에 뒤덮인 눈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안정록의 모습.

그 존재의 독특함이 처음으로 소년의 관심을 끌었다.

어린 나이지만 제자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 사뭇 그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남태형 선배보다는 좀 낫겠지만, 그래봤자 범인의 재능으로 국민배우라는 칭호까지 들었던 거야. 거기에 성격 나쁜 천재인 강정후로부터 여전히 존경만을 받고 있는 거고. 이 아저씨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남 선배처럼 좋은 스승을 만난 것도 아니고, 진아 누나처럼 대단한 라이벌과 경쟁하지도 못했을 텐데.’

이찬은 그 호기심을 영화가 끝난 직후에 입에 담았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좋은 스승’과 ‘대단한 라이벌’이란 대명사만을 배제한 채.

그에, 안정록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이거 참, 묘한 느낌이로구나.”

“뭐가 묘해요?”

“친구들에게서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 자식이 컸다는 걸 언제 실감하는지에 대해서.”

“······언제라는데요?”

“아이가 자기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할 때, 비로소 아비 된 자신을 3자로서 인식하게 된다고 하더구나. 그 전까지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탓이겠지. 그러다가 파도가 잦아들어 항해사의 질문이 자신을 향했을 때에야, 자신이 배 그 자체가 아니라 한 명의 선장임을 깨닫게 된다는 거야. 자식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그때의 감회는······ 평생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하더구나.”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이야기였다.

천부적인 이해력을 가진 소년이라 해도 세월의 풍파까지 직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까닭.

다만 이찬은 그 말에서 핵심적인 오류를 하나 발견했다.

“전 이사님 자식 아니거든요? 그런 건 강정후 선배한테나 말씀하시죠?”

“하하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정후랑도 이런 얘기를 해봐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쉽지 않구나. 그 아이에게 나는 그저 커다란 함선이니까.”

“깨야 되지 않아요? 그 선배도 이제 곧 서른인데, 자기가 아빠처럼 따르던 사람과 제대로 마주할 줄은 알아야죠.”

“그래,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하지만 어찌 쉬운 일이겠니. 생각해보렴. 평생 땅이라고 생각하며 밟아온 것이 사실은 거북의 등껍질임을 알게 되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란다.”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네요. 아무튼 대답은요?”

“내가 어떤 사람이냐라. 답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만······ 마침 잘됐구나. 내일부터 며칠 동안 여행을 다닐 생각인데, 따라와보겠니? 내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아, 그런 거면 강 선배를 데려가셔야죠.”

“하하하. 네가 잘 보고 나중에 정후에게 말해주면 되지 않겠니? 예를 들면,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말이다.”

“그때쯤엔 지가 알아서 생각을 하겠죠. 애도 아니고, 누가 옆에서 말해줘야 아나?”

“그것도 좋겠지만, 함께 추억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꽤나 큰 위로가 된단다. 그리고 넌 아직 한 명의 인간이 살아온 길을 되짚어본 적은 없지 않니? 좋은 경험일 거야.”

그렇게 들으니 공감되는 면이 많았다.

천재일 뿐 여전히 미성년자인 이찬은, <아저씨>를 통해서 성인의 이미지를 획득했다 해도 그뿐.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피상적인 연기밖에 하지 못할 터였다.

‘내 점에 더 명확한 색깔을 입히기 위해서······ 그로써 제대로 된 직선을 완성하기 위해서, 안정록이라는 어른을 파헤치는 일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나쁘진 않겠는걸. 무술 단련하러 가기 전까진 시간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소년은 무대인사를 마친 남태형에게 다가갔다.

“선배, 고생 많았어요. 영화 진짜 잘됐던데요?”

“어, 찬아! 정말이야? 정말 괜찮았어? 이상한 부분 없었어?”

“이상한 부분이야 있었지만, 잘못된 건 없었어요. 살짝 일렁이는 부분이 있긴 했어도 색깔만큼은 일관됐어요.”

“아······ 일렁이는 부분, 일관된 색깔······ 알겠어. 고칠게.”

여전히 이찬만이 정답이라 믿는 잘생긴 청년.

그는 또 언제쯤 자신을 등껍질로 보게 될지 생각해보다가, 소년은 혼자 픽 웃었다.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 67장 - 인간 안정록 (1)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