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89화 (189/250)

< 67장 - 인간 안정록 (2) >

남태형의 성장을 확인한 뒤, 이찬은 더욱 불타올랐다.

‘저렇게 가망 없을 것 같던 선배도 자기 색깔을 키워서 대단한 배우가 됐어. 내가 못할 건 뭐야? 저만큼 노력하지 않더라도 금방 송유리 압도할 수 있어. 먼저 직선을 완성하는 건 나야. 그 시작이 인간 안정록을 파헤치는 일······.’

그런 생각 속에서 짐을 싸는 동안, 송유리가 그의 방문 앞에서 계속 기웃거렸다.

“뭐야 뭐야? 오빠, 뭐 해요?”

“넌 알 거 없어. 내일부터 좀 쉬어라.”

“뭐야 진짜. 휴일이니까 나랑 연습해야죠? 혼자 어디 가요?”

“개천절이니까 자본의 개 형이랑 박물관이나 가라.”

“뭐 이 자식아?”

용케 듣고 고개를 들이민 김도철 역시, 이찬이 짐을 싸고 있다는 사실에 꽤나 당황했다.

“너 어디 가냐? 경호원 놔두고 어딜 가?”

“좀 갈 데가 있어요. 김도철 형은 쟤나 경호해요.”

“이 자식이, 지 몸 소중한 줄 모르고.”

“제가 뭘 당할 만한 상황이면 형이 백 명 있어도 별무소용이에요. 조만간 그게 천 명 수준으로 늘어날 거고.”

“이 자식이 죽을라고. 야, 나도 요즘 많이 늘었거든? 태권도 관장님이 이 정도면 1단 따도 되겠다고 했어.”

“그깟 1단, 천 명이 덤벼도 나한테 안 돼요.”

아무리 강인한 몸이라도 수효가 천까지 가게 되면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이찬은 당당했다.

백팩을 짊어지고 거실에 나섰을 때에도.

“어? 찬아, 어디 가? 무슨 일이야?”

“비밀스런 데이트예요. 사흘 휴가 드릴게요. 다들 굿바이.”

“야아, 그런 말 없었잖아? 찬아? 찬아!”

그렇게 집을 나선 이찬은, 모자와 마스크 속에서 인상을 바꿨다. 그것만으로도 주민들의 시야에서 존재감을 지울 수 있었다.

‘사실 이것도 꽤 괜찮은 무기인데. 여러 인격을 가진 배역이나 1인2역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어. 송유리한테도 가르쳐준 거긴 하지만, 그 어린애한테 그렇게 복잡한 배역을 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좋아. 다중인격 빌런을 상정해보자.’

그렇게 먼 미래를 구상하며 좀 더 걷자, 주차되어 있는 안정록의 차가 보였다.

그의 젠틀한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외제 SUV.

잘 관리되긴 했지만 연식이 오래됐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찬이 왔구나. 조수석에 타거라.”

“네, 이사님. 근데 이거 언제 사신 차예요?”

“첫 남우주연상을 받기 직전이었으니, 88년 연말이겠지.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타고 있다. 정말이지 좋은 차야. 그야, 내가 혼자 나다닐 일이 없었던 덕도 있었겠지만.”

88년이면 안정록의 나이 서른둘. KBC 공채 탤런트로서 드라마 ‘한 사람’의 주연을 맡았을 때다.

브라운관에서 활약하며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니, 당시로서 드문 외제 SUV를 산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좀 어색해. 이 아저씨는 경차 아니면 품격 있는 중형차를 타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게 안정록이 말한 편견일까 생각하며 바라보던 중에, 이찬은 조금 염려스러운 구석을 발견했다.

전날은 어두운 스크린 안이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안정록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있었다.

“저기, 이사님? 혹시 늦바람 나셨어요?”

“뭐? 하하핫. 이 녀석,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바람이냐? 연애라면 몰라도.”

“아, 그건 그러네요. 요즘 연애 하세요?”

“후후. 녀석아, 어제 네가 말했다시피 넌 내 자식은 아니잖으냐? 거기까지 답해줄 이유는 없어.”

“아니 뭐, 좋은 뜻에서 여쭤본 거예요. 요즘 백세인생이라고 하잖아요? 쉰이면 아직도 팔팔할 때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세요. 그러면 강정후 선배도 이사님한테서 좀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야.”

“아, 뭐 있으신 것 같은데? 그 표정 되게 의뭉스러워요.”

대답을 피하면서, 이번에는 안정록이 질문을 건넸다.

“찬아. 최근에 정후와 만난 적이 있니?”

“아뇨, 별로 볼 일 없었어요.”

“그렇구나. 가끔씩 만나서 차라도 한 잔 하면 좋으련만.”

“아, 왜요? 차는 이사님이랑 가끔 마시는 걸로 족해요. 그 선배랑은 같이 차 탈 이유도 없다고요.”

“하하하······. 정후가 말이다, 혁수가 떠나고 나서 좀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야. 전에 없이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주변에서 보기에도 티가 나는 모양이다.”

이찬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스승 안정록과 다시 자주 만나게 된 뒤, 강정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가면을 들추며 진심어린 관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어서, 아직까지는 조혁수와 이찬 정도만이 그의 진면모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특별한 동료가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간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자꾸만 축 처지는 기분이 들 법도 했다.

‘내 경우엔, 송유리가 갑자기 떠나버린 거랑 비슷할까. 그러면 의욕도 없어지고 다 짜증나고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지만 강정후와 함께 차를 마시겠노라 답하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짐짓 휘파람을 불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안정록이 몇 차례고 웃은 뒤에야, 두 사람을 실은 차가 대학로에 도착했다.

“아, 역시 시작은 여기네요.”

“그렇지. 스무 살에 처음 상경해서 연기를 시작한 곳이자, 군영이를 만나고, 정후를 가르쳤던 곳이니까.”

“그리고 저도 가르치셨죠. 세계 최고의 액션배우를요.”

“하하하. 널 가르친 적은 없다. 괜히 띄워줄 필요 없어.”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이찬은 괜한 소릴 또 해봤다.

“생각해보니까 유리는 극단에 보내라는 말을 안 하시네요? 걔도 한번쯤은 관객들이랑 만나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필요하지 않다, 찬아.”

“왜요? 저처럼 마음이 망가지지 않은 배우니까?”

“······그 이상이지. 네게는 그 아이를 대신해서 정말 감사하고픈 마음이란다. 그 여린 아이를 그토록 일찍 발견해줘서, 정말 고맙다. 그게 참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야 날 만난 건 삼생의 행운이지- 생각하며 이찬이 극단의 장막을 걷어올렸다.

어렴풋이 햇살이 들이친 소극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배우들이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어어? 누구······? 이찬?! 이찬이다!”

“아, 안 선배님! 선배님 오셨습니까!”

“뭐? 누구라고? 이찬에, 안정록 선배님?”

황급히 달려 나온 건 조정실의 유호진.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중년배우 한 명이 더 올라왔다.

“서,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태식이로구나. 오랜만이다. 그리고 호진아, 자주 찾아오지도 못해서 미안하다. 태식이까지 불러서 큰 공연을 준비하는 건데, 선배가 돼서 돈만 달랑 보내주고 말았어.”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선배님. 땡전 한 푼 안 보내주는 월드스타도 있는데요.”

영락없이 자신을 향한 핀잔에, 이찬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 좀 알아서 자생하시죠? 후배한테 돈 뜯어내시려고?”

“흥이다, 이놈아. 가끔이라도 찾아올 줄 알았더니 몇 년을 코빼기를 안 비쳐? 이 치사한 놈. 은혜도 몰라요 아주.”

“은혜야 제가 베푼 거죠. 앞에 보니까 이찬 배출한 극단이라고 집채만 한 현수막 걸어놓으셨던데요?”

“어, 흠. 어흠.”

현장적발된 초상권 침해의 범죄에 민망해진 유호진은, 다시 안정록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선배님?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까지 데리고 오시다니.”

“별일 아니다. 그저 바람 쐬는 중이야. 가서 연습 마저 해.”

거장 안정록과 월드스타 이찬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우들은 전에 없이 열정적으로 연극에 임했다.

특히 중년배우 유태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이찬에게는 그 모습이 퍽 해괴해 보였다.

“저 선배님은 입지도 있는 분이 갑자기 웬 연극이래요? 여기서 만날 줄 몰라서 깜짝 놀랐네요.”

“이 녀석, 연극을 매스미디어의 아랫줄에 놓으려는 거냐?”

“윗줄 아랫줄은 몰라도 돈이 안 되는 건 맞잖아요? 소극장 공연으로 뭐 얼마나 벌겠어요.”

“그렇지만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관객들과 소통하며 매일매일 한 배역을 체현한다는 건, 배우에게 있어서 축복과도 같은 일이야. 그래서 정후한테도 연극을 좀 해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만······ 그것만큼은 힘든 모양이더구나. 안 좋은 기억들 때문이겠지.”

추억인 동시에 회한이겠지-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극단을 떠나야 했던 과거로 인해 그는 무척이나 오랜 세월을 고통 받았을 것이다.

강정후와 같은 회한을 품고 살아온 안정록은, 유태식을 보며 그 단면을 토로했다.

“태식이 저 아이가 한창 잘나가던 때에, 오덕환 감독 작품에서 정후와 만난 적이 있었어. 그때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더라. 이후로는 작품 사이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극단을 찾아서 작품을 도와주곤 했던 거다.”

“그래요? 강 선배한테 된통 당했던 모양이네요.”

“그런 게 아니라, 도움을 받았던 게지. 내 후배라는 생각에 아주 살뜰히 모셨던 모양이야. 태식이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 대스타 반열에 올라 있는 강정후도 저렇게 겸허한데, 나 같은 놈이 TV 나왔다고 오만해져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몇 차례고 연극판을 찾아온 거지.”

“정작 그 강 선배는 연극 안 하는데? 희한한 논리네요.”

퉁명스레 말하지만 말투는 이미 부드러워졌다. 유태식을 다시 보게 된 탓이었다.

‘나야 연극은 다시 할 일 없겠지만, 좋아 보이긴 하네. 연어 같아. 멀리 나갔다가도 기어코 돌아오고 마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맞았을 때는, 안정록이 그 유태식에게 다가가 연기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찬의 곁으로 유호진이 접근했다.

“앗, 궁색한 단장님이다.”

“뭐? 이 자식이. 야, 내가 뭐 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연극 하는 줄 아냐? 다 후배들 양성을 위해 손 벌리는 거야.”

“알아요 알아. 저도 여유 될 때 좀 보내드릴게요.”

“어? 정말이냐? 이게 웬일이래?”

“요새 여유 있으니까 한 1억 보내드릴게요.”

“애걔? 너 영화마다 러닝개런티 받은 거 다 안다. 더 써.”

“이 조그만 극장에 뭐 돈 들어갈 데가 있다고.”

“얘가 뭐래? 그게 아니라 대학로 기금 말하는 거야. 안정록 선배님이 돈 보내주시면 내가 이 동네 연극하는 애들 전체적으로 지원해주는 거라고. 1억 갖곤 코딱지도 못 뗀다.”

해괴한 비유법으로 답하고 곁에 앉은 유호진을, 이찬은 돌아보지 않았다. 안정록의 곁에 아기 새들처럼 모인 배우들을 바라보며 그의 교습법을 훔치는 중이었기에.

그 옆모습을 흘겨보다가, 유호진이 킥 웃었다.

“이제 좀 재밌어진 모양이네?”

“예? 뭐가요?”

“연기 말이야.”

“······뭔 말이 그래요? 연기야 재밌죠.”

“그래? 너 여기 있을 땐 되게 지루해했었는데. 기억 안 나? 그때 내가 널 어떻게 키워야 할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런 시기도 있었다. 단순히 타인의 행동양식을 훔치는 것은 너무도 쉬워서 별반 흥미롭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찬은 연기의 끝을 좇는 사도 중 하나.

조혁수의 연기로부터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이제 송유리라는 거센 급류를 맞이해, 그는 드디어 진짜 길에 들어섰다.

“······그랬구나. 고민해주신 건 고마워요.”

“엇. 고맙단 소리 할 때는 또 순순하구나? 아무튼 다행이다. 어린 나이에 칸 주연상까지 따내서, 또 따분하다는 듯 하품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젠 걱정 없겠어.”

유호진이 연습 재개를 알린 뒤엔 안정록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후배들을 지도한 감흥이었을까. 이찬을 보는 시선이 조금쯤 흐릿해져 있었다.

“네가 지금······ 열여덟이지?”

“예. 왜요?”

“어느새 시간이 많이도 흘렀구나 싶어서. 처음 정후를 여기 데려왔을 때가, 지금 너보다도 어렸구나. 그 아이가 열여섯이던 무렵에 영재원에서 처음 만났으니 말이야. 그리고 채 1년이 못 되어 군영이 녀석에게 빼앗기고 말았지.”

“아, 똥구녕.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이름이에요.”

“하하하. 그렇지만······ 다행이지 않으냐? 정후를 낚아챘던 게 그나마 그 녀석이라서. 정후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다시 나와 재회할 수 있게 해줘서, 어찌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 걸 고맙다고 할 수 있는 일인지 이찬은 의구했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신사에게, 소년은 조금쯤 따뜻한 소리를 해주기로 했다.

“강 선배를 대신해서 감사하고픈 마음이네요. 그 여린 선배를 늦게나마 다시 받아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게 참 얼마나 큰 행운인지······.”

“하하, 날 따라하는 거냐? 이걸 녹음을 해뒀어야 했는데. 정후한테 들려주면 어떤 표정이 나올지, 정말이지 궁금해.”

“불법 녹취에 반대합니다. 절대 하지 마세요.”

대답 없이 웃는 안정록을 흘겨보다가, 결국 이찬도 웃어버렸다.

그렇지만 본론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찬아. 스무살에 이곳에 처음 온 나는, 너와도 달랐고, 정후와도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영이하고 오히려 닮은 점이 많았지.”

“으엑. 훈훈하게 대화 마칠 타이밍에 이러지 마시죠?”

“들어주렴. 나는······ 너희와는 달랐어. 위대한 연기에 대한 욕심은 넘쳐났지만, 그걸 실현해낼 방법이 없었지. 정석적이고 느린 방법으로는 갈망을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미치려고 노력했어. 그리하여 미쳤다. 내 주변에 서 있는 것이 인간인지 짐승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극에만 골몰해서, 대학로의 모차르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거다.”

“그건 들었어요. 이사님이 모차르트, 이군영이 살리에리. 재능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거죠?”

“그게 아니야. 사회성이 결여된 미치광이라서 모차르트라 불렸던 거다. 그 음악가의 이미지가 그쪽이지 않니.”

그래서 모차르트였던 건가- 황당한 진실을 알고, 이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믿기가 힘든데요. 자기비하는 하지 마세요. 모차르트가 어떻게 존경받는 심리학자가 되겠어요.”

“하하하. 일이 많았지. 스물다섯에 군영이가 극단을 떠났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니? 연기 좀 잘한다고 저런 개차반 미치광이와 어울려주는 이 광대소굴이 지겹다더라.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말이야. 그때부터 뭔가가 깨지기 시작했지.”

한창 흥미진진해질 무렵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야 했다.

슬슬 연극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67장 - 인간 안정록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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