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93화 (193/250)

< 68장 - 제자 강정후 (3.) >

연극 <안정록>이 마지막 공연을 연 날, 거의 120일간 상영된 도 모든 상영을 마쳤다.

그 기록은 무려 1726만.

지금껏 그 어떤 블록버스터도 달성한 적이 없는 수치였으며, 그렇기에 언제까지고 깨질 것 같지 없는 기록이었다.

그 결산을 확인하고 이찬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연극까지 이리저리 홍보하면서 최대한 끌어올렸는데, 여기까지가 한곈가. 좀 더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안정록과 강정후에 대한 호의만으로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초과수익으로 연극후원기금을 조성하고 강정후에게 장송곡과 같은 연극을 강제한 것으로 도리는 다한 상황.

이제 소년에게 그 영화의 흥행은 일종의 사회실험과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의 죽음이란 정말 압도적인 서사야. 정말로 를 보지 않으면 나쁜 놈인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었어. 거기에 작품은 또 어때? 남녀노소 모두가 눈물 터뜨릴 수밖에 없는 뜨거운 스토리를, 최고의 배우 둘이서 완성한 영화란 말이야. 거기에 여러 호조건 속에서 추석 연휴까지 포함해 120일을 상영했어. 그렇게까지 완벽한 조건이었는데도 1700만에 그쳤다는 거야······.’

그 1700만조차 순수한 객수가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시청한 경우를 포함한 통계. 실제로 영화를 본 사람은 천만에 못 미칠 터였다.

이찬은 그 현상의 원인을 심도 깊게 파고들었다.

‘대체 왜 안 보는 거지? 이렇게 등 떠밀어주는데도 안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대체 뭐야? 단순히 너무 바빠서 못 봤다거나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된 탓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는 빠르지만······ 그건 아닐 거란 말이야. 를 보지 않은 영화인구는, 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이들. 마음에 어떤 동인도 없는 까닭에 환경조차 거스른 것······.’

그런 고민 속의 소년에게 천세영이 접근했다.

강정후의 추천으로 에 출연했던 그녀 역시 안정록을 위한 연극에 참여했다.

영화에서도 조연이고 연극에서도 주로 3막에만 나오는 간단한 배역이지만, 인기 많은 청춘스타로서 두 작품의 인기에 공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찬아. 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미안해.”

“뭐가?”

“너, <아저씨> 말이야. 그 영화도 충분히 천만 관객 달성할 수 있는 영화였는데, 스크린 전부 양보해야 했잖아.”

“괜한 소리네.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이고, 그거야 천만이 들든 이천만이 들든 상관없어. 어디까지나 과정일 뿐이니까.”

“어? 과정?”

“그래. 나한테는 모든 게 과정일 뿐이야.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걸어가는 길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여관 같은 거지.”

“와······ 순례자 같은 말이네.”

순례자. 그 단어가 이찬의 귀를 사로잡았다.

“······표현 좋네. 순례자라.”

“어떤 작품이야? 네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누나는 몰라도 돼. 아무튼 그 영화는 볼 수 있는 모든 영화인구가 시청할 작품이 될 거고, 국내에서만 이천만 예정이야. 그러니까 미안해할 거 없어. 내일 화장품 CF나 잘 찍어.”

“어? 어, 응. 이런 시기인데······ 그냥 찍지 말까?”

“누나가 왜? 열심히 벌어놔. 고무신이 돈이라도 있어야지.”

“응? 고무신? 응? 어? 아, 야! 이상한 오해 하지 말래두?”

이상한 오해가 될지 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찬은 천세영을 내보냈다.

막 뭔가 방향이 잡힐 것 같았던 까닭.

‘순례······ 그래. 나는 순례자야. 그 길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한 종점에서 완벽한 영화로 태어날 거야. 배우들 사이의 관계가 영화 외적으로 형성한 서사는 절대적이지 않아. 사회적인 분위기를 넘어서 개개인이 반드시 보고 싶어할 동인을 만들어야만 해. 그러니까······ 휴머니즘과 볼거리, 둘 중 어느 쪽도 놓쳐선 안 된다는 거야.’

는 그중 후자에서 약세를 보였다.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진 배우와 까메오를 기용했지만, 그 자체로 봐야만 하는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볼거리도 없는 영화로는 현실에 찌든 장년층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CG나 액션인데······ CG 쪽은 그렇다 쳐도, 액션은 휴머니즘과 함께 잡을 수 없는 요소가 아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해. 특히 예술성을 갖춘 액션이라고 하면 그 자체로 두 마리 토끼인 셈.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비무행은 아주 의미가 크다는 거야.’

윤대흥이 즐겨보던 무협소설 속의 단어를 떠올리며, 이찬은 환하게 웃었다.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꽃다발을 든 아름다운 여인이 볼을 붉힌 채 들어섰다.

“저기, 찬아? 세영 언니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다들 너랑 인사하고 싶어해서······.”

“누구누구?”

“희재 언니랑 신혜······.”

“놔두고, 누나만 들어와봐.”

더욱 볼이 붉어진 명진아가 주춤주춤 들어온 뒤.

이찬은 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아, 앗······.”

“조용히.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

“으, 응. 이, 이거······ 저기······ 난······ 꽃다발······.”

“어, 땡큐. 누나, 나 1년 정도 해외 다녀올 거야.”

“뭐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전개에 명진아가 기함했다. 발버둥을 치면서 소년을 밀쳐내려 했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살짝 격해진 숨소리. 코가 닿을 만한 거리인 까닭에 이찬에겐 솜털의 떨림까지도 느껴졌다.

그 작은 변화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소년은 작은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리 말 안 해줘서 미안. 중요한 일이라 미룰 수가 없어.”

“······왜? 어디 가는 건데?”

“여기저기. 최고의 액션스타가 되기 위한 수행이야.”

“너, 벌써 최고의 액션스타 됐는데!”

“아직 모자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 돼.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라, 내 내면의 약한 모습도 좀 지워내고 싶어.”

“약한 모습?”

“그래.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겁이 좀 많아. 누나한테도······ 아무것도 못 하잖아. 싫어서가 아냐. 더 가까워졌다가 잘못될까봐 겁내고 있는 거야. 사실 하고 싶은 게 참 많은데.”

“하, 하고 싶은 거······?”

바들바들 떨고 있지만 밀어내는 힘은 여전히 약했다.

그 앞에서, 이찬은 그대로 붉은 입술을 빼앗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생전 처음으로 목도한 죽음의 순간 이후로 애정에 대한 갈구가 더욱 커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지. 천천히 하자. 1년 길지 않아.’

5초쯤이 지난 뒤에야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어.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돼서 돌아올 거야. 그때는 누나가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마······ 확신할 순 없지만.”

“으······ 나 외로운 거, 알고는 있었어?”

“내가 바본가? 그것도 모르게.”

“이, 이 바보야······.”

엇갈리는 말 속에서 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군대라고 생각해줘. 남들보다 훨씬 짧은 거야.”

“바보······ 진짜 군대도 갈 거면서.”

“내가? 나 군대 갈 거라고 생각해?”

“어? 응. 찬이 넌, 되게 정직하니까······.”

정직하다는 수식어가 자신과 어울리는지 생각해보려는데, 명진아의 떨리는 손이 그의 두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기다릴게.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조심히 갔다 와.”

“아하하. 이렇게 부탁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지.”

좀 더 이야기할 게 있었지만, 곧 참지 못한 정신혜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해, 포기해야 했다.

*

“너, 여행 갈 거라고? 조 선배가 그러던데.”

조혁수와의 국제전화를 방금 마친 강정후는, 차에 오르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그에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잘생겼네.”

“뭐? 놀리냐?”

“아뇨, 진심으로. 잘생긴 사람은 머리를 밀어도 잘생겼구나.”

“······그래서, 부럽냐?”

“아뇨. 잘생긴 군인보단 머리 긴 민간인이 낫죠.”

이찬의 머리라고 아주 긴 편은 아니지만, 곁에 앉은 강정후에 비하면 수십 배는 긴 편이었다.

마침내 입대일을 맞은 청년이 머리를 바싹 민 탓.

“흥. 어차피 너도 가야 된다. 지금을 즐겨둬.”

“전 지금도 즐기고 나중도 즐길 거예요. 군대 같은 데서 낭비할 시간은 없단 말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요즘 세상엔 면제 받기 힘들다니까?”

“면제는 아니고, 특례요. 저 콩쿨 노려보려고요. 화제도 되고 좋지 않겠어요? 칸이 주목한 액션배우 이찬, 이번엔 무용으로 국제 콩쿨 제패!”

운전석의 염수진도 조수석의 김도철도 입을 떡 벌렸다. 아직 그들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계획인 까닭.

두 톱스타 사이에 낀 송유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례는 뭐예요? 콩쿨 하면 뭐가 좋은데요?”

“여자애는 상관없는 거야.”

“치. 맨날 나한테만 말 안 해줘. 나도 콩쿨 할까요?”

그때쯤에야 강정후가 정신을 차렸다.

“하······ 이 새끼, 그런 걸 노리고 있었네. 그래,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게 되면 예술인 병역특례로 4주 훈련만 받으면 그만인 거고. 근데 이 꼬맹아, 이건 아냐? 3년 안에 전공 바꾸면 특례도 전부 무산된다. 바로 군대 끌려가는 거야.”

“바꿀 생각 없는데요?”

“뭐? 3년 동안 무용만 하겠다고?”

“아뇨, 영화도 찍어야죠. 중간중간 콩쿨 나가서 국위선양만 하면, 예술요원으로서 역할은 하는 셈이잖아요?”

“이 미친놈이······ 영화 찍으면서 그걸 어떻게 병행해?”

“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영화도 무용 얘기가 될 건데.”

“뭔 개소리야? 너 무술영화 찍는다며? 그러고 나서는 히어로무비 찍겠다며? 다 뻥이었냐?”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격렬한 끄덕임이 동의를 표했다.

그 모습까지 빤히 본 뒤에, 이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춤이랑 무술,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잖아요? 이런저런 춤을 섞어보려고요. 그래서 가장 화려한 무술을 완성할 겁니다.”

“······뭐라고? 너······ 뭐, 빌런 할 거라고 안 했어? 무슨 빌런이 춤이야?”

“뭐 어때서요? 그럴 수도 있죠. 낮에는 멋진 무용수, 밤에는 최강의 빌런. 재밌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니까 넌, 1년 동안 무술 단련하는 한편으로 무용 콩쿨을 제패하고 돌아와서, 무술인의 구도를 그린 영화를 찍고 다중인격 빌런 역할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기한이 찰 때마다 국제콩쿨에 나가서 수상하고 오겠다는 거냐?”

“정답입니다.”

정리해놓고 보니 더욱 황당하게 느껴지는 계획.

그렇지만 그걸 하겠다는 인물이 이찬인지라, 강정후로서는 한탄밖에 더 나오는 게 없었다.

“그래, 그래라. 넌 진짜······ 하. 네 멋대로 살아라.”

“예, 감사하네요.”

“어쨌든 그렇게······ 신 트로이카 모두가 없는 1년이 되겠네. 너 돌아오고 나서도 나랑 조 선배는 1년이 더 걸릴 거고.”

“예? 그 선배 2년이나 안 온대요?”

“그래. 대작의 후속작이라서 꽤나 길어질 것 같다더라. 2008년 완성을 목표로 제작한다던데.”

“놀란 감독이 제작까지 맡았다더니, 계획이 큰 모양이네요.”

“그래. 그렇게 우리가 비워버린 한국영화계는······.”

시선을 낮춰 송유리를 보며, 강정후는 탄식했다.

“꽤나 허전할 거야. 남자배우 풀이 팍 줄어서 오랜만에 스크린점유율이 외화에 밀리겠어. 계진행 회장이 한동안 골치 좀 썩겠는걸.”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이 순간만 기다린 사람들이 많은데요? 하늘기획 신인들이 출동할 겁니다.”

“뭐? 아, 남태형 말하는 거냐?”

<패>의 개봉으로 남태형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에는 주로 스타라 불렸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뭔가 미진해서 그 뒤에 항상 배우라는 글자가 붙게 된 것.

압도적인 비주얼에 더해 연기력까지 일가를 이뤘음을 영화인들이 인정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신 트로이카의 빈자리를 메워줄 만한 인선임에는 분명했지만, 이찬은 고개를 저었다.

“홍주석, 황상태, 현우정, 이기자, 심대범, 오남현. 그 정도는 돼야 신인이죠. 우리 때문에 오히려 기회를 못 잡고 있던 분들입니다. 이때다 하면서 새로운 주연으로 자리매김할 거예요. 계 회장님이 골치 썩을 일은 오랫동안 없을 겁니다.”

“아, 그러냐······.”

그 자신감에 눈살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곧 강정후도 하늘기획의 압도적인 배우 라인업을 인정하게 됐다.

‘빌어먹을 녀석. 이미 신인배우 풀까지 다 준비를 해놨다 이거지? 거기에······ 나까지 끼워 넣어 홍보한 연극 <안정록>의 화제 덕에, 또 무수한 꼬맹이들이 연극판에 뛰어들고 있다고 했어. 거기서 수많은 배우들이 또 탄생할 거야. 이젠 전역 후에 내 자리가 남아있을지를 염려해야 되겠는걸.’

유일한 스승을 잃은 슬픔이 반복되는 연극 속에서 보드라워지고, 이제는 마음에 차분함이 깃든 가을.

커다란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쯤 달라져 있었다.

‘자기 하고픈 것들 다 하면서도, 선생님께서 염려하셨던 한국영화계의 약점들을 채워가고 있어. 난 그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안 선생님의 의지를 이을 자격이 있는 건, 내가 아닌 이찬이야······.’

호국요람의 정문 앞에서, 무수한 팬들의 환호성을 흘려 들으며, 강정후는 소년을 올려다봤다.

“너. 훌륭하다. 인정해. 그 시꺼먼 속만 아니면 너한테 존경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안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는 나야. 한국 최고의 배우는, 내가 될 거다.”

“그러실래요? 그러시든가요.”

이찬이 속으로 ‘난 세계 최고의 배우 하지 뭐’ 따위로 대꾸했다는 것까진 알지 못한 채, 강정후는 송유리를 향했다.

“너······ 고생해라. 얘가 짜증나게 하면, 전에 봤던 세영이한테 말해. 내가 걔한테 이찬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들을 알려줬으니까. 공부도 잘하고, 연기도 잘 배워라. 알겠지?”

“또 잔소리. 정후엄마, 잘 갔다 와요. 충성!”

돌아서며, 강정후는 웃었다. 꽤 오랫동안.

< 68장 - 제자 강정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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