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94화 (194/250)

< 69장 - 신인 조혁수 (1) >

이찬은 출국 인터뷰 세례를 겪지 않았다.

기자들이 그가 출국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까닭.

그 정도 되는 스타라고 하면 어떤 일정이든 쉽게 들켜버리는 것이 상례지만, 계진행과 정창영과 명진아 등 극히 일부에게만 얘기한 계획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염수진과 김도철만을 데리고 퍼스트클래스에 오른 이찬이 향한 곳은 시카고였다.

조혁수가 몇 주째 기거 중이라는 도시.

이제 막 캐스팅만이 끝난 상황이라 당연히 헐리웃이 위치한 LA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주로 시카고에서 촬영이 이뤄진다고 하더라. 제작이 시작될 때까지 이곳에서 시민의 입장을 체화하고 싶은 거야.]

“왜 시카고예요? 고담은 뉴욕 아녜요?”

[그렇긴 한데······ 여러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좀 살아보니까 작중의 분위기와 잘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시카고를 방문한 세 사람은, 조혁수가 아닌 양진원 감독의 환대를 받았다.

“찬아! 수진이, 도철이, 반가워. 오랜만인 것 같다 참.”

“조 선배는 왜 안 나왔어요?”

“어, 몰입이 깨지는 게 싫다고 해서······.”

“몰입은 무슨. 촬영 아직 반 년 가까이 남았다면서 뭐가 그렇게 유난인 건지 모르겠네요.”

“하하하하, 동의해. 근데 말이다 찬아, 면전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도 전에 그 얘기 했다가 혼이 났어.”

그렇게 밴을 타고 도착한 곳은 시카고 도심 한복판이었다.

그곳에서, 양진원 감독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찬은 조혁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평부터 내뱉었다.

“뭐예요 이게? 하는 것도 없이 걸어다니고 있었으면서 왜 마중을 안 나와요? 고3 수험생도 아니고 진짜. 옷은 또 그게 뭐래? 번쩍거리는 은갈치 양복, 진짜 촌스러워요.”

“······오랜만에 보는데도 넌 입이 얌전해질 줄 모르는구나.”

“그게 이찬이란 배우의 캐릭터죠. 선배는 이렇게 답돌이처럼 구는 캐릭터인 거고. 그래도 좀 융통성 좀 가져봐요. 촬영까진 아직 멀었다면서요?”

“하. 너도 그 배우를 보면 그런 말은 못 할 거다.”

거리에 동양인의 모습은 드물었다. 드물게 훤칠한 청년들이 나란히 걷기 시작하자 제법 주목을 끌었다.

개중에 몇몇 정도는 이찬이 출연한 영화를 본 이들도 있을 터였지만, 소년이 인상을 바꾸고 있는 까닭에 대화에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크리스찬 베일 말이죠? 그야 잘한다고는 생각하는데.”

“······그 사람 말하는 게 아냐.”

“그럼 누구요? 설마 히스 레저?”

“그래. 그 배우는······ 아니, 그만하자. 몰입이 깨지겠어.”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라면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조커 역에 전격 캐스팅됐다고 해서 궁금하긴 했는데. 이 선배가 이 정도로 말한다 이거지? 어떤 배우인지 궁금하네.’

하지만 대화는 조혁수에 의해 사적인 부분으로 전환됐다.

“너, 이번 여행은 1년을 잡고 있다고?”

“예. 느긋하게 무술도 연구하고, 무용도 배워서 콩쿨도 나가고.”

“······그 얘기 말인데. 이제부터 영어로 대화하자. 양 감독은 아직 빠른 대화까진 못 알아들어. 그러니까······ 너, 군대 어쩌고는 대체 뭔 얘기냐?”

조혁수의 영어발음은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미국 본토 느낌이 아니라 홍콩 등지에서 흔한 억양.

그 사실에 이찬은 퍽 감탄했다.

‘홍콩의 사업가 역할이랬지. 본토 홍콩 배우들을 밀어냈다고 해서 놀랐더니······ 이 정도로 현실감을 만들어냈던 거구나. 이 선배한텐 절대 쉽지 않았을 텐데.’

이찬 본인이야 남을 흉내 내는 재능으로 미세한 억양까지도 구현해내는 게 어려울 것도 없지만, 가진 게 관찰력뿐인 조혁수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을 터.

한국에 있던 시절부터 부단히 노력했을 게 분명했다.

“조, 그 칭글리시 좋네요.”

“칭글리시가 아니라 홍콩식이야.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네가 왜 군대를 간다는 거냐? 너 고아잖아?”

적절한 지적에, 이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한민국 병역법에 따르면 5년 이상 보육시설에 있던 고아는 특례를 통해 제2국민역으로 편입된다.

소년 역시 원래는 그 특례의 대상이어야 했다.

이찬이 아닌 강동일로 계속 살아왔다면.

“고아인 것까진 알고 계셨네요?”

“그럼 몰랐겠냐? 데뷔작부터 같이 했던 사이에.”

“입 무거운 사람들만 알아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럼 그걸 왜 숨기고 있는지도 아시겠죠?”

“숨기고 싶을 거야 알지. 그렇지만 언젠가 들통 날 거다.”

“바로 그래서예요. 군영 리가 그 일에 힘을 많이 써줬죠.”

“······출생기록을 바꿨다고?”

“그 정도까진 아니고, 아주 어렸을 때 입양된 걸로 서류를 맞춰놨어요. 군영 리 라인이 참 대단하더라고요. 그런 인간도 5년형을 받아야 했던 비리란, 정말이지 무서운 범죄죠.”

코웃음을 한 차례 친 뒤, 조혁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이군영 쪽으로 입적을 하면서 보육원에서 생활했던 기록을 다 없애버렸다는 거구나. 그게 남아있으면 가족이 없다는 걸 들키기 쉬우니까.”

“예. 그걸 놔뒀다가 정후 강 그 인간한테도 들켰다고요. 지금도 권력자가 알아내려고 한다면 고아였다는 사실까지는 들키게 되겠지만······ 뭐 그렇게까지 절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일단 급한 불은 끈 거죠.”

“그 덕분에 서류 미비로 병역특례를 받을 수 없게 됐다?”

“받을 거라니까요? 무용,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이찬이 펼치는 무용에 호기심이 드는 것은 사실. 조혁수는 대체 무용의 무술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답은 그저 퉁명스러웠다.

“머저리 같은 자식. 그냥 사실대로 밝히면 편할 것을,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격이군.”

“너무하시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그러는 조야말로 얌전히 한국에서 톱스타로 군림했으면 좋았을 것을, 여기 와서 이게 뭔 생고생입니까?”

“······그냥 선배라고 불러라. 무슨 네이티브라고 자꾸 조 조.”

“발음은 네이티브잖아요, 조?”

키득거리는 이찬을 질린다는 듯 노려보다가, 조혁수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

조혁수가 머무는 호텔은 최고급 스위트룸이었다. 창가로는 멀리 바다가 내다보이고, 주변에는 마천루가 즐비했다.

“참 좋은 데서 지내시네요. 지출이 꽤 크시겠는데요?”

“돈이라면 많으니까. 맡게 될 배역이 막대한 부를 소유한 기업인인데, 이런 데서 생활을 해봐야지.”

“대단한 메소드연기네요. 그래서 은갈치 양복 입고 거리도 걸어다니고, 아예 홍콩인인 척 칭글리시도 쓰신다 이거죠?”

“칭글리시가 아니라니까. 이게 내 방식이다. 쓸데없는 잔소리나 할 거면 그냥 가버려.”

“그럴 순 없죠. 고인의 유지를 받아서 찾아온 입장이니.”

그 방의 침실에서 안정록의 유언이 재생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는 거장의 얼굴에 이찬의 입이 꾹 다물리고, 조혁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혁수야. 이렇게 영상으로만 보게 돼서 참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아마도 찬이한테 전화를 받았을 테니, 이 비디오도 미국에서 보고 있겠지. 이해해다오. 먼 곳에서 고생하는 후배를 사적인 일로 귀찮게 만들기 싫었음이니.]

리모콘으로 비디오를 정지시키고, 소년이 한숨처럼 말했다.

“괜한 걱정을 하신 거죠. 조는 귀국할 생각이 원래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헛소리. 안 선배님 부고에 어떻게 내가 귀국을 안 해? 그리고 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예, 조. 그럼 전화하길 잘한 건가? 국제전화비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아, 눈 빨개지셨네?”

“멍청한 자식. 다시 재생이나 해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부릅뜬 조혁수의 눈에, 다시금 안정록의 모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94년도에 널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게 네 데뷔작이었지. 그곳에서 널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정후와 같은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하고 있었던 까닭이야.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생각하니,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넌 아마 그때 날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조, 그러셨어요?”

“시끄러워. 정지시키지 좀 마라.”

[그렇지만 이후로 너와는 함께 작품을 하지 못했지. 지금에 와서는 그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구나. 정후와 를 완성하고 나면 이후에는 너하고도 좋은 작품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만한 시간이 남지 않아서······ 그게 참 안타깝다. 그러니 혁수야. 네게는 주책맞은 늙은이가 연기 얘기를 해주고 싶구나. 네 연기에 대한 이야기야. 정후와 같으면서도 다르고, 찬이에 비해 부족하지만 그 이상의 가능성을 가진, 네 연기 이야기. 혹시 곁에 찬이가 있다면 멀리 보내두렴.]

“조, 안 돼요. 나도 같이 볼래요.”

“꺼져, 이 자식아!”

축객령에 다른 일행이 모인 거실로 돌아가며, 이찬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그렇게 콕 집어서 보내라고 할 건 없잖아? 기껏해야 부족한 재능으로 천재들하고 어떻게 경쟁해야 할지 그런 조언이나 할 거면서. 나라고 아무 정도 없는 사람인 줄 아나······.’

*

시카고의 밤은 휘황찬란했다. 넓은 채광창으로 보이는 그 불야성이 염수진과 김도철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렇지만 그 표현방식은 서로 조금 달랐다.

“철아 철아, 여기 진짜 멋있지 않아?”

“뭐······ 좀 번쩍거리긴 하네.”

“이따 저기 나가서 한 잔 할까? 미성년자 빼놓고 우리끼리.”

“······둘이? 싫은데.”

“아, 왜? 나가서 내가 예쁜 언니들 꼬셔줄게.”

“됐거든? 그리고 여기서 밤에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야.”

“뭐? 진짜? 왜? 너 미국 와봤어?”

“와본 건 아닌데, 들었어. 한국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그런 대화의 와중에 조혁수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퍽 오래 운 듯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모습으로.

그 모습에 이찬이 냅다 놀리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청년이 서둘러 선수를 쳤다.

“정후는, 군대 잘 들어갔냐?”

“정후 강은······ 울고불고 하면서 조교들이랑 힘씨름 했어요.”

“티 안 나게 거짓말하지 마라. 헷갈리니까.”

“예 예. 잘 들어갔어요. 조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했죠.”

“흠······ 다행이네. 자, 옆 방 잡아줄 테니까 갖고 꺼져.”

갑작스런 축객령에 이찬마저 당황해야 했다.

“왜 이래요, 정 없게? 방 넓은데 같이 좀 있죠?”

“몰입이 안 되니까 하는 말이야.”

“아, 그놈의 몰입.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요?”

“너한텐 쉽겠지만 나한텐 아니다. 이번 영화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야. 여기서 제대로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면, 히어로무비에서 주연을 맡는 건 평생 불가능해.”

“제가 만들어준다니까요? 한국 돌아오면 히어로무비 주연이 조 겁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냐. 난 여기서 계속 도전할 거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그 대화를 통해 이찬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 건, 유언의 주인공인 안정록의 과거 때문이었다.

‘연기에 미쳐 있었다고 했지. 그로써 강정후라는 천재조차도 감탄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직선을 만들어냈던 거야. 혹시라도 이 선배한테 그 방법을 전수한 걸까? 그렇다면 곤란한데. 그야 물론······ 조 선배가 껍질을 깨기 위해서 그런 시간도 필요하겠다 싶긴 하지만······ 그러면, 지금보다도 더 딱딱한 선배가 돼버릴 텐데.’

예상되는 미래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찬은 읊조렸다.

“신인 마인드로 해보시겠다 이거죠?”

“그래. 그게 맞는 거지. 여기선 정말 신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내 연기를 바닥부터 다시 뜯어고칠 거다.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서.”

“너무하시네. 진짜 좋은 히어로무비 준비해드린다니까.”

“성공하고 나면 돌아갈 거야. 내가 여기서도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면.”

“······그러세요 그럼. 내가 생각할 땐 그냥 한국에서 연기해서 작품으로 해외 뚫는 게 더 낫지 싶지만, 그 멍청한 선택도 존중할게요. 사람 사는 방법은 다 다른 거니까.”

일부러 속을 긁는 말에도 조혁수는 태평했다. 그저 코웃음만 한 차례 치고, 그는 방문객들을 쫓아냈다.

“나가. 수진 씨, 도철 씨, 와줘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네, 오빠! 방해해서 미안해요.”

“거 좀 둥글둥글하게 삽시다.”

“······하. 이찬, 전화해서 옆방으로 잡아주마.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괜한 친절이네요. 돈은 내가 더 많거든요? 그건 됐고, 선배 이번 주에 시간은 언제 빕니까?”

“시간 없으니까 내일 바로 가라고.”

“그러기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요. 나는 선배하곤 다르게 신인이 아니거든요. 연기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초호화 펜트하우스 잡을 만한 재력이 있고요.”

그 말에서 묘한 어감을 느끼고, 조혁수가 눈을 부라렸다.

“너, 뭘 어쩌겠다고?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꾸미는 거냐?”

“이상한 짓이라니. 너무하시네요, 조. <친절한 살인자>로 미주 전역을 놀라게 한 선배 배우로서 친절을 베풀려는 것뿐인데요?”

“이상한 친절 그만두고 그냥 가라고.”

“이상하지 않다고요. 평범하게 아메리칸 스타일입니다.”

“아메리칸 스타일?”

“예. 조와 <다크나이트> 제작진, 출연진을 전부 초청할 겁니다. 홈파티는 아니고 펜트하우스 파티가 되겠네요. 한국의 걸출한 배우가 초호화 디너 파티를 연다고 하면, 배우들이고 스탭들이고 궁금해서라도 와보겠죠? 거기서 조가 저랑 같이 호스트를 해줘야 해요. 아, 몰입이 필요하시면 저도 칭글리시 같이 써드릴 수도 있고요.”

방을 나서던 염수진도 김도철도, 조혁수의 뒤에서 안절부절하던 양진원 감독도, 그 말에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조혁수가 헛웃음처럼 되물었다.

“파티······? <다크나이트> 팀을, 네가 불러내겠다고?”

“정답. 브루스 웨인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나름 영화계의 갑부예요. 친한 배우가 신인이 돼서 애쓰고 있다는데, 한국식으로 밥차 쏘는 것보단 미국식으로 파티 여는 게 더 좋잖아요? 그리고 조가 언급조차 피하는 히스 레저도 궁금하단 말이죠.”

씩 웃는 이찬의 얼굴이, 왠지 배트맨 속 조커처럼 느껴졌다.

< 69장 - 신인 조혁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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