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장 - 신인 조혁수 (2) >
펜트하우스를 예약한 다른 호텔로 이동하는 길에도 양진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저녁 러시아워 중에 자연스레 작품 얘기가 시작됐다.
“전화로 대충 말씀드렸지만, 제가 생각하는 빌런은 이중적인 캐릭터예요. 낮이면 강인한 근육에 유연성까지 발휘하며 세계 무용계의 황태자로 불리는 인물이죠.”
“오······ 근데 그걸, 대역 없이 할 수 있겠어?”
“당연하죠. 1년 안에 실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겁니다.”
“야, 넌 진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는 모양이다. 그 자신감에 의심이 안 드는 나 자신이 신기할 지경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양진원 감독은 영화보다 파티 얘기를 다시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찬이 허락지 않았다.
“밤마다 빌런이 되는 거엔 여러 가지 개연성이 필요할 거예요. 제 생각엔 아예 이중인격으로 설정하는 것보단 낮의 캐릭터가 연기라는 쪽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음, 그렇지. 단지 정신이 이상한 빌런이라고 하면 좀 매력이 없지.”
“그러니까요. 충분히 공감대를 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부모가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해서 사악한 인간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결심했다거나.”
“오호. <배트맨 비긴즈>의 라스 알 굴 느낌으로?”
<다크나이트>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배트맨 비긴즈>에서, 라스 알 굴은 배트맨의 스승이면서도 절대선을 위해서 한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죽이려 든 빌런이었다.
“비슷하긴 한데, 그 캐릭터보다는 더 이성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인류개조 프로젝트 같은 느낌으로요. 내가 선과 악을 갈라서 기준에 안 맞는 개인을 다 죽일 거다. 착한 놈들만 남게 되면 악의 DNA가 끊길 테니까. 그런데 그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네? 저것들은 선인이라서 죽이지는 않겠지만, 내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억제할 필요가 있겠어.”
“아! 그거 아이러니한데? 악인을 없애기 위해서 선인들과 적대한다는 거지? 그것도 하수인이나 초능력도 없이 혼자 뛰어다니면서 말이야.”
그때부터는 양진원도 파티 얘기는 잊고 가상의 캐릭터에 푹 빠져들었다.
“시퀀스가 막 떠오르는데. 히어로들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놓고서도 ‘선인이니 죽이지 않겠다. 너희가 악에 물드는 그날을 기다리마’ 하면서 돌아서는 빌런······.”
“그것도 재밌네요. 그래서 자길 다크히어로라고 믿는 녀석인데, 수단이 문제인 거죠. 죄인의 교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래. 카오틱 이블인 조커하곤 다르게, 카오틱 굿······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선을 추구하는, 절대로 힘을 가져선 안 될 존재라고 할 수 있겠네.”
D&D의 성향 분류 용어까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찬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놈이 태생적으로 인류 최강의 재능이라서 강력한 무술가가 돼버리는 거죠. 보이는 악인마다 다 쳐 죽이고 다니니까 늘 혼자인데, 그런데도 히어로 조직이 막을 수가 없는 거. 물론 걔네는 이놈 말고도 막아야 할 게 많겠지만요.”
“그렇지. 그렇다면 처음에는 우선순위가 낮을 거야. 저놈은 위험하지만 일단은 놔두자. 그래서 전반부 시퀀스에선 직접적으로 적대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긴 놈은 피해라, 그 정도로 말을 해줄 거고. 그런데 히어로가 몇 건의 임무를 수행해서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빌런이 그놈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거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갈등이 빚어지겠네요. 그러다가 마지막 시퀀스가 되면, 히어로들을 전부 피떡으로 만들고도 작은 아이가 끌어안은 범죄자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아선다거나.”
거기까지 그림을 그려본 뒤에야 양진원이 신음소리를 냈다.
“으······. 근데 그렇게 되면 그냥 다크히어로 영환데. 방식이 비뚤어졌을 뿐이지 도저히 악역이 아니잖아?”
“예? 아, 그런 게 아닌데. 관객들은 몰라야죠. 어디까지나 정의로운 혁수 조가 선량한 동료들과 함께 악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여야 돼요. 그냥 인물 배경이 그렇단 얘기였는데.”
“아하, 신비주의 빌런을 만들겠다는 얘기구나?”
“예. 동기가 빤히 보이는 적은 재미없잖아요. 히어로 집단에서 빌런에 대해 아는 인물은 딱 한 명인 걸로 해두고, 나중에 빌런이 그 사람의 행동을 오해해서 죽이게 하는 거예요.”
“아하. 좋아, 그렇게 가면 균형이 맞춰지겠어. 존경스러운 원로 히어로를 살해한 원수가 마지막에 신인 히어로 한 명을 죽이지 못해서 적을 살려 보내는 거니까. 전체적으로 특이한 그림이 나오겠는걸. 순수 인간이면서 혼자 움직이는 빌런과, 초능력자 집단인데도 그를 당해내기 힘든 히어로들······ 신선한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다.”
아직까진 구상이라고도 부르기 힘든 추상적인 얼개.
그렇지만 그 발상이 어려서부터 무수한 슈퍼히어로를 접해왔던 양진원의 머리에 끝없는 창의력을 불어넣었다.
생각에 빠진 감독이 입을 다문 뒤로 5분쯤이 지나서, 마침내 차가 호텔 주차장으로 접어들었다.
“빈 곳이 많지 않아서, 네가 말한 조건에 맞는 곳은 여기밖에 없었어. 근데 정말 괜찮겠어? 여기, 어지간한 헐리웃 스타들도 중요한 일 없으면 안 잡는 곳이라던데.”
“중요한 일 없으면 당연히 안 잡겠죠. 전 중요한 일이 있는 거고.”
“어······ 중요한 일이, 파티 말하는 거지?”
“예. 조 선배야 그냥 실력 하나만으로 인정받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나요? 기본적으로 경외와 신뢰가 없이는 애드립조차 받아주지 않는 게 이 바닥인데. 놀란 감독을 비롯해서 그 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만들 겁니다. 조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입을 벌린 채 듣다가, 양진원이 곧 픽 웃었다.
“너, 그 외화 더빙 말투 언제까지 할 거냐?”
“음······ 이제 그만할래요. 지겨워졌어.”
*
광대한 펜트하우스에 짐을 푼 이찬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낮이면 여러 무용팀을 초청해 그 공연을 관람했고, 밤에는 그간 몇 편 본 적 없는 히어로무비를 몰아서 보며 그 빌런들을 연구했다.
그러는 동안 신체의 무수한 근육이 끊임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그 질을 키워나갔다.
보통은 다양한 기구와 함께 보충제까지 마셔야 가능할 근육의 발달과정이, 천부적인 신체통제력으로 마루 운동을 수행하는 이찬의 내부에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렇게 겉으로는 한가해 보이지만 치열한 시간들을 보낸 뒤에야 기자회견의 날이 다가왔다.
지역 일간지를 비롯해 서른 명 정도의 기자단이 이국의 스타를 반겨줬다.
개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축은, 미국 전역에 송출되긴 하지만 썩 주목도는 높지 않은 CW의 취재팀.
이제 막 개국한 방송국으로서 갖는 낮은 인지도가 이찬의 위상을 설명해주는 셈이었다.
‘<친절한 살인자> 때는 여기저기서 못 모셔가서 안달이었는데, 지금은 얘기가 좀 달라졌다는 거겠지. 그나마 서부까지 송출되는 방송국이 와줘서 다행이라고 봐야 될 거야. 하지만 이게 방송되고 나면 사정이 달라질걸. 조용히 초청해도 될 걸 굳이 취재진 불러낸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정확히는 두 가지 목적에서 기인한 일.
아직은 동양의 유명인에 불과한 이찬의 초청을, 막 작품 하나를 마무리한 스탭들이 쉽게 거절할 수 있으리란 추측이 그 첫 번째였다.
그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찬은 쇼맨십을 발휘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전형이 아니라, 마치 배트맨 매니아와도 같은 차림새로 등장한 것.
배트수트를 차려입은 거구의 이찬에게 기자들이 낄낄거리며 카메라를 돌려댔다.
“반갑습니다. <친절한 살인자>에서 이수 역을 맡았던 한국의 배우 이찬입니다 이렇게 제가 시카고를 방문한 건 오직 단 하나의 목적 때문입니다. 제 동료인 배우 조혁수의 차기작인 <다크나이트> 제작진을 모시고 파티를 베풀고 싶은 까닭입니다. 저는 배트맨의 팬입니다. 그래서 굳이 <배트맨 비긴즈> 촬영 때 쓰인 것과 동일한 의상을 주문제작 했습니다. 이걸 입고 무수한 액션 씬을 소화했던 크리스찬 베일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자, 간단한 오마주 액션을 준비했습니다.”
FOX TV에서나 좋아할 법한 괴상한 기자회견 순서지만, 막 개국해서 이슈가 필요한 CW는 그 상황을 신중히 조명했다.
“이거 좀 재밌겠는데? 알지? 저 꼬마도 액션스타란 말이야.”
“예, 액션무비로 칸 주연상을 따냈죠.”
“아카데미 시상식으로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칸 대상 수상한 작품은 이쪽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어. 자네 봤나?”
“아뇨, 전 안 봤습니다.”
“거기서도 액션이 꽤 흥미로웠는데. 과연 이번엔 뭘 보여주려는 건지······ 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전날 하루 손을 맞춰본 스턴트 팀이 복면을 쓴 채 펜트하우스에 진입한다.
그들이 영화처럼 단상 위의 배트맨을 향해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이찬이 머리에 배트헬멧을 착용한 순간.
폭발적인 리얼 액션이 시작됐다.
“······와! 진짜 빠르게 움직이네요. 아, 벌써 두 명!”
“이게 뭔······? 저거, 경량화한 수트인가?”
“쿵쿵거리는 거 보면 아닌 것 같은데요? 아, 네 명!”
“아니······ 영화에 쓰인 장비와 같다면 30파운드는 나갈 텐데? 그걸 입고 저렇게 날아다니는 게 가능하다고?”
날아다닌다- 그 관용구가 거의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망토까지 14kg에 육박하는 중장비를 착용한 채, 이찬은 벽을 박차고 거의 2미터나 날아올라 단숨에 두 명의 스턴트맨을 쓰러뜨렸다.
신체의 접촉이 없어 그저 파공음밖에 나지 않았지만, 카메라가 아닌 육안으로 보면서도 정말로 두들겨 패는 것처럼 착각할 만큼 정교했다.
“와우······ 저거, 크리스찬 베일한테 싸움 거는 거죠?”
“그런 게 아냐.”
“아닙니까? 저 커다란 꼬마가 난 너랑 같은 수트 입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요?”
“아니, 대부분의 액션 씬은 베일이 직접 연기하지 않았단 말이다. 실제 격투가인 전용 스턴트맨이 수행한 거야. 어차피 투구 쓰고 싸우는 씬들이니까.”
“······아. 그러면 이건 베일에게 보내는 도전장이 아니군요.”
그러니 그건, <다크나이트> 팀 전원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너희가 격투가 데려다가 간신히 완성한 액션보다 더 완성도 있는 특급 액션을, 난 내 몸으로 직접 구현할 수 있다.
그러니 한번 와봐라. 와서 내 대접을 받고 액션영화에 대해 한 수 배워가라.
어떻게 봐도 그렇게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영화란 게 액션만 잘한다고 다는 아니지만······ 저건 진짜 매력적이네. 동양인들이 기를 사용한다는 게 그냥 오리엔탈 판타지가 아니었던 걸까. 마치 브루스 리 같은 액션을 배트수트를 입은 채로······. 내가 놀란 감독이라면 당장 날아와서 저 꼬마한테 새로운 배역을 제안할 거다.”
“에이, 캐스팅 다 끝난 이 마당에요?”
“어쨌든 정말 저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궁금해서라도 보러 올 거란 말이야. 장면 제대로 따. 영화처럼은 못 하더라도, 지금 이 현장감을 제대로 살려.”
CW 취재팀의 잡담을 듣지는 못했지만, 이찬 역시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두 번째 목적에 해당하는 것.
소년은 헐리웃의 유명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줄 요량이었다.
‘좀 조잡한 쇼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꽤 충격적이겠지. 이건 내 몸이 아니면 구현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니까. 그간 열심히 단련한 보람이 있어.’
생각 속에서 열일곱 번째 적까지 쓰러뜨린 이찬은, 숨조차 고르지 않은 채 느긋하게 몸을 세웠다.
“제 미숙한 액션이 보기에 만족스러우셨을지 모르겠네요. 다음 주중에 이곳 시카고에서 <다크나이트> 제작진을 모시겠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화려한 액션과 환영의 공연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네요.”
그 뒤로 기자들의 질문이 열기를 띠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구경하던 조혁수의 두 볼이 붉어졌다.
‘아, 쪽팔려 죽겠네. 저게 뭐 하는 짓이야? 기 세워주겠다고 하더니, 그게 아니라 사람을 완전히 우스꽝스럽게 만드네.’
마치 동네 노는 형을 불러와 위력시위를 벌인 듯한 모양새.
사실은 이찬에게 어떤 부탁도 한 바 없지만, 조혁수는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
이찬의 깜짝 액션 쇼는 미국 전역에서 화제를 끌었다.
그가 착용한 배트수트가 모양만 그럴싸한 천쪼가리였을 거란 반응이 있는가 하면, 금세 들통 날 사기를 칠 이유가 없다는 얘기도 많았다.
다만 양쪽 모두 맨몸으로도 힘든 액션을 작은 실수도 없이 수행한 점은 높이 사는 분위기였다.
한편으로 그 기자회견의 내용 자체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소자본 영화 몇 편으로 인지도를 얻은 꼬마가 방송을 사적으로 이용해 헐리웃의 주역들을 오라 가라 하는 일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던 것.
그렇지만 반감이 큰 만큼 화제성은 커져갔고, 이내 스탭들과 배우들과 시간을 조율할 때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물론 작중의 중요한 배경이 될 시카고이기에 가능했던 일.
그나마 가장 중요한 인물은 참석을 거부했다.
크리스찬 베일. 정작 배트맨 역할인 그가 사적인 이유로 불참하게 됐음을, 매니지먼트에서 알려왔던 것이다.
이찬은 그 통보에 무척이나 불쾌해했다.
“하여튼 콧대가 높네요. 뭐 비싼 얼굴이라고 밥 준다는데도 안 오는 거야?”
“누누이 말했다시피, 네가 무례했던 거다 이 꼬맹아.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도 그렇지, 정중하게 초대해도 모자랄 판에 선전포고를 하다니.”
“그게 문제였다고요? 에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촬영도 들어가기 전에 큰돈 들여서 홍보를 대신해줬는데, 어떻게 그게 불쾌한 일이 되는 겁니까?”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정후가 네 영화 홍보해주겠답시고 기자회견 나가서 네 연기를 돌려 깐다면?”
“어······ 그거 되게 기분 나쁘겠네요.”
“그런 거다. 좀 남들도 생각하며 살아라.”
“노력해보죠.”
제멋대로인 천재 꼬마는 그러나 전혀 노력하지 않고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무용 공연과 히어로무비에 심취한 채로, 그저 자신의 몸을 가다듬으며.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이 지난 날.
최고급 디너파티가 준비되는 와중에 그 누구보다 먼저 감독이 도착했다.
“리? 실제로는 처음 보네요. 반가워요, 찬 리.”
크리스토퍼 놀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는 이찬이 다 머쓱해질 정도로 밝은 태도였다.
< 69장 - 신인 조혁수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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