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장 - 신인 조혁수 (3.) >
“<고등형사>를 정말 재밌게 봤어요. 사실 극장에서 보진 못하고 DVD를 어렵게 구했는데, 개봉했을 때 보지 못했던 게 참 아쉬웠죠. 훌륭한 액션이었어요, 리.”
독립영화로 시작해서 최정상급 상업영화 감독이 된 놀란의 말에, 한국의 놀란이라 불리는 양진원 감독이 펜을 꺼낸다.
그 모습에 영화사 관계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 기자입니까?”
“아, 아닙니다. 저는 조의 매니저이자 놀란의 팬입니다. 메모는, 간직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좀 어수룩한 영어로 해명하는 그를 힐끔 본 뒤에, 이찬은 별다른 감흥도 없이 고개만 꾸벅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배트맨 비긴즈> 잘 봤어요.”
“하하. 동양의 액션스타에겐 좀 어설펐을까요? 나이가 맞지는 않지만, 당신은 내가 생각한 라스 알 굴의 이미지에 잘 어울립니다. 혹시 내 영화에 출연해볼 생각이 있습니까? 조가 맡을 ‘라우’에게도 보디가드 한 명쯤 넣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이 까메오로 나와준다면······?”
“내년엔 제가 좀 바빠서 안 될 것 같네요.”
“하하하. 당혹스럽군요. 제 팬이라고 들었는데.”
그거야 여기까지 불러내려고 한 말이지- 이찬은 속으로만 불퉁거렸다.
크리스토퍼 놀란으로 말하자면 독립영화 스타일을 상업영화 스케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명장.
그렇지만 이찬에게는 무수한 헐리웃 감독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세계 영화의 중심에서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조혁수와 달리, 소년은 자신의 나라를 세계 영화의 중심으로 만들 셈이기에.
다만 표정만큼은 금세 공손해졌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정말 바쁠 예정이에요.”
“어떤 일을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그건 잠시 후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아하. 기대되네요.”
그 뒤로도 속속 도착하는 스탭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마침내 이찬이 기다린 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히스! 늦었군.”
“당신이 너무 일찍 온 거 아닌가요, 크리스?”
감독의 이름을 약칭하는 히스 레저는, 목소리는 육중하지만 표정은 해맑았다. 20대의 젊음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게 이찬에겐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평범한데. 좋게 보려 해도 나 같은 천재는 아냐. 저런 사람이 조커를 맡는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코믹스 속의 조커는 광인이다.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그 성향을 조금쯤 재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히스 레저는 그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목소리나 태도나 히어로에 더 잘 어울려. 그렇지만 <스파이더맨> 제의는 거절했다고 했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이상한 사람은 활기찬 발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와 이찬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 반가워요. 인상적인 액션 잘 봤어요.”
“아, 예. 반갑습니다. 조에게서 얘기 들었어요.”
“오, 조. 내 멋진 친구. 그는 어디 있죠? 첫 미팅 때 보고 보질 못했는데, 설마 시카고에 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일찌감치 와 있었다고 하네요. 지금도 환영공연을 위해서 뒤에서 준비 중이고요.”
“훌륭하네요. 벌써부터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니. 사실은 나도 비슷한 계획이 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한두 달 정도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해요. 조용한 모텔방에 들어가서 나를 조커로 제련하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해가 바뀌기도 전부터 시작할 생각은 못 했어요. 조가 더 존경스러워지네요.”
그 대화로 히스가 천재가 아님을 재확인하며, 이찬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두 사람이 비슷하군요. 대단하시네요.”
“리, 당신도 대단해요. <친절한 살인자>는 정말 소름끼치는 작품이었죠. 많지 않은 대사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예, 감사합니다.”
“거기서 악역을 맡은 배우도 조였죠? <오이디푸스>의 연식 조. 혹시 그가 혁수 조의 부친입니까?”
“아, 하하. 아녜요. 조는 한국에서 흔한 성입니다.”
“그런가요? 연기를 잘하는 가문인 모양이군요.”
그 뒤로 마이클 케인, 개리 올드먼, 모건 프리먼 등 헐리웃이 자랑하는 위대한 배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이찬의 액션을 추켜세우며 <고등형사>나 <친절한 살인자>를 입에 담은 데서 칸 영화제의 위명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이쪽에 어필하려면 영화제 성과가 필요하다는 거지. 다만······ 칸으로는 좀 부족해. 영화인이라 부르기 힘든 대중마저 찬탄하게 만들려면, 아카데미를 공략해야만 하는 거. 그러려면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아서 적어도 미주 1억불 이상의 흥행실적까지 낼 필요가 있어······.’
그걸 달성한다 해도 쉽지는 않을 일이었다.
보통 오스카 상이라고 불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상식 개최지인 LA에서 상영된 영화면 모두 후보에 오를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헐리웃 제작 영화가 아니면 주목받기 힘들다.
3대영화제의 수상작도 아카데미만 가면 물을 먹는 게 그런 까닭.
특히 외국어영화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작품이 아니고서야 1차 후보로도 잘 오르지 못했다.
그나마 오리엔탈판타지의 중심과도 같은 일본 영화가 58년의 여우조연상을 포함해 십여 회 수상하며 자존심을 세우고 있을 뿐, 한국영화는 아예 언급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덕분에 영화인들의 찬탄을 불렀던 <고등형사>와 <친절한 살인자> 모두 외국어영화상 1차 후보에 만족해야 했다.
그를 넘어서 BIG5(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 위해선, 압도적인 흥행이 필수였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파티가 중요한 거지. 대다수가 AMPAS(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 회원으로서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권을 가진 이 참석자들에게, 나와 조혁수 선배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해. 그래야 낯선 한국 히어로무비로 아카데미를 노릴 수 있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이찬이 광역 도발로 시선을 끌며 다크나이트 제작진을 불러들인 최종 목표.
동양의 배우로서 게스트가 아닌 호스트의 이미지를 각인하기 위해서, 그는 큰돈을 써가며 파티를 주최했다.
‘정말 돈 많이 썼지. 그러니 오늘의 환영공연은 완벽해야만 해. 이 시퀀스가 3년 뒤 공개될 우리 히어로무비의 프리퀄이라는 건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만, 그 영화가 공개되면 부지불식간에 기시감을 느끼게 될 거야. 그 감각이 공고해지도록, 실수 없이 마쳐야만 한다.’
생각 끝에 때가 무르익어, 이찬이 파티장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렇게 제 초청에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차기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팬이자, 한국의 배우인 이찬입니다. 영화계의 개척자들을 위해서 제가 작은 환영공연을 준비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쪽에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단상에 올라, 이찬은 아주 우아하게 걸었다. 그리고 전날 설치한 음향장비가 내뿜는 음악에 걸음을 맞춰갔다.
그때부터는 현대무용의 영역이었다.
“아······ 리가 무용을 준비했군. 무용을 좀 아나, 히스?”
“글쎄요. 전 그리 즐기지 않는데, 크리스는요?”
“군중 씬 연출을 위해 가끔 보긴 하지만, 독무는 처음이군. 어떤 걸 준비했는지 궁금한데.”
크리스토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환영공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양적인 의례라고 생각한 탓.
그렇기에 그는 곧 히스를 돌아보며 담화에 집중했다.
“리의 액션, 솔직히 어땠나?”
“음······ 그 인터뷰 참 여러 번 봤지요. 그 개인의 액션도 정교했지만 전체적인 싸움이 무척 현실적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효과음만 붙인다면 멋진 영화가 될 것처럼 느껴졌어요.”
“리는 최근 작품에서 모든 액션 씬을 감독했다고 알려져 있어.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말이야.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상당히 재밌는 작품일 것 같아.”
“미국에는 개봉하지 않았답니까?”
“그렇더군. 영화제에도 출품하지 않은 모양이던데. 상당히 독특한 액션들이 많았다고 했······ 히스?”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젊은 히스 레저도 수십 년 경력의 마이클, 개리, 모건도 모두 단상 쪽에 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대체 뭘 봤길래? 아, 잠깐. 이 음악은······?’
베테랑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한스 짐머가 작업한 <캐리비안의 해적> OST가 흘러나온다. 그 음악에 맞춰 이찬의 움직임 역시 기존의 무용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멋지다고는 생각되던 그 춤이, 전율적인 동작 속에서 예기치 못한 형태를 띠었다.
‘저건 마치······ 무술 같은데? 배트맨의 전투와는 다른, 마치 브루스 리 같기도 하고······ 아니, 저건 그냥 무용 같기도.’
그런 생각의 와중에 조명이 암전됐다.
이미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게스트들이 이벤트를 기대하며 침묵을 지킨 5초 뒤에 다시 불이 켜졌을 때는, 배트수트를 차려입은 누군가가 창가에 서 있었다.
‘누구지? 베일? 아니, 체격이 달라. 혹시 조?’
“조예요. 조가 배트수트를 입었군요. 그럼 이제부터······?”
히스 레저의 탄성이 기점이 된 것처럼 음악이 급변해 <배트맨 비긴즈>의 OST로 전환됐을 때.
동양의 신비로운 무용수와 배트맨의 결투가 시작됐다.
단적으로 말해 피가 튀기는 혈투는 아니었다.
이찬이 기자회견에서 보였던 액션 쇼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공방은 아주 작은 타격조차도 없이 상대의 몸을 겉돌았다.
그렇지만 그 거리는 겨우 몇 센티미터.
눈의 착시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실제 배트맨과 빌런의 전투인 것처럼 착각될 지경이었다.
‘조의 배트맨은, 훌륭한 수준이야. 비긴즈 때 베일의 액션을 빼다 박은 듯한 모습. 한 방을 중시하는 파괴적이고 실용적인 무술이지. 언제 저만큼 연습했는지 모르겠는걸. 그렇지만 리는······ 저 무술은 도저히 실용적이지 않은데. 차라리 조커에 가까울 정도로 기괴하고 아크로바틱한데, 그러면서도 액션에 군더더기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춤인 동시에 살인무술······. 저게 대체 무슨 유파지?’
대결은 무승부로 마감되었다.
배트맨의 펀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무용가가 발레 동작처럼 유려하게 몸을 빼내는 것으로 끝.
환영공연과 연결된 오마주 액션이 거센 박수세례를 받았다.
그렇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무대가 별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요즘 나름대로 손보고 있는 무술인데, 역시 최고의 격투가들이 검수한 배트맨 스타일에는 못 미치는 모양입니다. 열심히 해봤는데 결국 졌네요.”
“······이봐요, 리? 호흡을 맞춘 액션인 게 아니었습니까?”
히스 레저가 외쳐 물은 말에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요? 실제로 싸운 겁니다. 그렇죠, 조?”
배트헬멧을 벗고 수려한 얼굴을 드러낸 조혁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허탈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리는 제게 단지 배트맨의 액션을 흉내 내어 공격하라는 부탁만을 했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그가 피하고, 그가 못 맞추는 척했죠.”
“그게 실제 싸운 거라고요! 말도 안 돼. 합을 맞춰도 쉽지 않은 혼전이었는데?”
황당해하는 히스의 말에 대다수가 동의하는 와중에, 이찬을 빤히 보던 중년 남성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확실히 맞춘 액션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한번 확인해봐도 될까요?”
“예. 당신이라면 확실히 알아주시겠죠.”
바비 홀랜드 핸튼. 크리스찬 베일의 더블(특정 배우의 전문 스턴트 배우)을 맡은 격투가였다.
그가 이찬에게 접근하며,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긴장감 속에서 결투가 시작됐다.
바비가 잽을 뻗자, 이찬이 손등으로 건드리듯 밀어내며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킨다.
그 발길질이 아슬아슬 머리카락을 스칠 때쯤 바비가 로우킥을 내뻗고, 그 위에 발을 얹은 이찬이 팽이처럼 돌면서 주먹으로 적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덩치가 상당한 두 배우의 액션이 마치 영화처럼 실감나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저게 연기일 리 없어. 바비는 바로 오늘 낮에 이곳 시카고에 도착했단 말이야······.’
크리스토퍼의 생각대로 그건 연기는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반사신경과 신체능력이 만들어낸, 이른바 손속에 사정을 두는 대련일 뿐.
이내 주먹을 거둔 바비가 곧 그 사실을 공언했다.
“미치겠군. 보셨다시피, 공격이 안 먹힙니다. 이런 소년이 정말 빌런으로 등장한다면 배트맨에겐 큰 위협이겠군요.”
“위협이 될 리가 있나요? 텀블러로 밀어버리면 전 쪽도 못 쓸 텐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핸튼. 잘 배웠습니다.”
이후 무수한 스탭들이 이찬과 대화하기 위해 모여들었으나, 소년은 피로를 이유로 들어 그 모두를 피했다.
자연히 조혁수가 그들의 관심을 대신 받아야 했다.
“조, 도대체 리는 배우야, 무술가야?”
“고작 열여덟인데 저런 무술가가 될 수 있는 건가?”
“태권도에서 파생된 건가? 그게 아니면 기 수련?”
“라스 알 굴의 수련과 비슷한 걸 받은 거야?”
“혹시라도, 리가 현실의 어둠의 사도 중 한 명인 거 아냐?”
황당무계한 질문들 속에서 조혁수는 한참 고생해야 했다.
이찬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X맨도 오랜 전승을 이어받은 마샬아츠의 마스터도 아님을 한참 해명한 뒤에는, 히스 레저가 그를 구출해서 발코니로 나섰다.
“조, 당신은 참 대단한 친구를 뒀군요. 정말 충격적이에요.”
“흠, 좀 그렇죠. 당신도 친구가 된다면 좋을 겁니다.”
“그러기엔 절 피하는 눈치던데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조, 내일 시간 어때요? 점심이나 함께하죠. 그러면서 리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 말에 조혁수의 가슴은 소녀처럼 설레었다.
다만 그 감동은 이내 감독의 전언으로 인해 깨졌다.
“그리고 크리스가 그러던데, 액션 계속 연습해보라네요. 작중에 몇 씬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것도 맞는 얘기인 게, 사실 웃기잖아요? 배트맨은 동양 스타일로 수련해서 최강이 됐는데 막상 그 동양에서 온 라우는 돈밖에 없는 약자라는 게. 한번 잘해봐요, 조.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나도 연말쯤에 시카고로 넘어오······ 조? 이봐요, 조! 괜찮습니까? 많이 놀란 겁니까?”
그저 부패한 기업인으로 등장할 예정이었던 헐리웃의 신인배우 조혁수가, 히어로무비의 액션 씬을 따낸 순간이었다.
< 69장 - 신인 조혁수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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