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장 - 스타 송유리 (2) >
DC코믹스의 신진 작가인 제임스 밀러와의 미팅은 진취적이고 열성적으로 진행됐다.
그 끝 무렵에는 제임스와 양진원이 서로를 왈칵 끌어안았을 정도로.
그렇지만 만화가가 떠나간 뒤, 이찬은 뚱한 표정으로 양진원을 흘겨봤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어? 아, 잘하는 거야. 정말이라니까?”
“그야 감독님 이름 원작자로 넣긴 했지만, 이래서야 DC코믹스 하위분류가 돼버리는 거잖아요. 내 초상권까지 내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영화 판권 가져올 수 있었잖아? 이거 정말 대단한 일이야. 이걸로 우리 영화는 DC가 공인한 히어로물이라는 배경을 얻게 됐어. 사실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선 단지 영화만으로 어필하긴 힘들단 말이야. 그렇지만 주요 인물들과 배경이 다 한국인 DC 히어로무비를, 한국에서 제작해서 세계에 배급한다? 그러면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을 세계에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거지.”
“그걸 아니까 반대 안 한 건데, 그래도 기분은 나쁘다는 거죠. 영화만으로 코를 팍 눌러줘야 되는데.”
기분이야 어쨌든 양진원의 말 쪽이 정론이었다.
비록 워너브라더스 측에서 동양인 히어로의 영화화에 관심이 없었기에 득을 본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찬의 초상권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양한 이득을 얻게 된 셈.
우선 DC코믹스의 만화작가와 협업하며 보다 탄탄한 히어로물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게 첫째.
그리고 그 만화를 통해서 그들이 만들어갈 세계관을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 둘째.
그를 통해서 공인된 히어로물이라는 인식이 확보되면 보다 많은 대중이 새 영화에 관심을 가지리라는 가능성이 셋째.
마지막으로, 양진원이 무척이나 설레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거기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번 <슈퍼맨 리턴즈>에 고담 시티가 언급된 것처럼 각 히어로무비 사이의 크로스오버가 이뤄진다면, 그게 하나의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돼서 여러 히어로가 활약하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때 슈퍼맨 배트맨과 함께 한국인 히어로와 빌런이 활약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돈으로 추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될 거야.”
“아 예. 그거 참 대단하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다른 세계관에 짓눌리지 않고 사건 해결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강력한 초능력들을 구상할 거야.”
“정말 잘해주셔야 돼요. 저야 영상으로 배트맨하고 비등한 빌런이라는 이미지 만들었지만, 우리 히어로들은 그 빌런보다는 약해야 되니까.”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양진원은, 이후 본격적인 히어로 양성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넓은 펜트하우스에 혼자 남은 이찬의 생각 또한 깊어졌다.
‘DC코믹스 산하의 빌런 더 댄서······. 이름이 좀 평이하단 말이야. 그야 탈을 쓰고 춤추듯이 펼치는 무술이 특징이면 다른 이름이 없지 싶긴 한데. 아무튼 히어로가 잘 나와 줘야 해. 더 댄서라 불리는 신비의 빌런을 추적하는 히어로들 이야기가 주가 될 테니까. 독자들이 이입할 대상이 빌런이어선 안 된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명진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은 이제 아침이 됐을 시각이었다.
“어, 누나. 잘 잤어?”
[응! 찬아, 있잖아? 유리랑······ 음, 어제 얘기를 해봤는데.]
“어, 해봤는데?”
[유리는 <폭동>이 제일 하고 싶은 모양이야.]
잠시 밝아졌던 표정이 굳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그걸? 중반에 죽어서 시체 되는 역할이라며?”
[응. 그 죽는 장면이 시놉시스 상으로는 굉장히 긴장감 있는 추격 씬이 될 건데, 유리는 그게 마음에 들었나 봐.]
“그게? 추격 씬이? 희한한 녀석이네.”
[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내가 왜? 내 제자 평가도 못 해?”
[그게 아니라 너한테 배운 것 같아. <아저씨>에서 유리 구하려고 조직을 추적하는 역할이었잖아? 그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영화 잘 안 보던 어린애잖아? 그러다가 처음으로 현장에서 목격한 게 네 연기였으니까······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까끌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야 그랬을 법도 하네. 나도 처음엔 조혁수 선배 연기 보면서 이겨먹겠다는 생각 많이 했지. 뭐 그 꼬맹이야 아직은 추격자 역할 같은 거 맡기 힘든 나이지만. 2008년 돼서 초능력 소녀로 히어로무비 찍을 때 마침내 꿈을 이루겠지.’
그렇게 판단한 소년은 이후 복잡한 문제 쪽을 고민했다.
<폭동>이라는 제목이 잘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
‘지난 정부 이후로 과거사 바로잡기가 수행돼서 5.18도 이미지 전환이 됐다곤 하지만, 여전히 일부에겐 폭동이라고만 불리고 있어. 그런 민감한 소재를 반어적으로 다룬 <폭동>은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가 될 거야. 거기다 극적 효과를 위한 왜곡이나 특정인의 명예훼손 문제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굳이 그런 걸 할 필요는 없는 시점인데.’
그렇지만 다음 순간에 유세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재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던 96년도에 5.18의 비극을 다룬 영화로 데뷔한 그녀는, 충격적인 연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청룡에서 최연소 신인여우상을 따낸 바 있었다.
‘그건······ 꽤 매력이 있겠는데. <아저씨>는 첫 작품인데다 수동적인 캐릭터여서 신인상이 좀 애매할 거야. 내년에라도 논란의 작품에서 활약해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운다면? 이찬의 제자다운 이력이 되겠지. 그렇지만 걸리는 점이 아직 하나 더 있는데······.’
“누나. 요즘 시국이 좀 어때? 다음 정권은 어느 쪽이 될까?”
[어? 갑자기? 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계 쪽에 별다른 뉴스는 없지?”
[어, 부동산 쪽에서 정부 싫어하는 것 같긴 하던데.]
“그거야 처음부터 그랬고.”
[다른 건, 북한 핵실험 문제?]
“아 그거. 그게 좀 걸리네. 대화 잘 안 되면 중립층이 등을 돌릴 텐데.”
이해하기 어려운 이찬의 혼잣말에, 명진아는 퍽 당황한 듯했다.
[찬아? 왜 그러는 거야? 정권이랑 영화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래도 야당이 이런 문제에 민감하잖아. 그쪽이 집권하면 현 야당 전신이었던 군부의 치부를 다룬 영화를 좋아하진 않을 거란 말이지.”
[어······ 하지만 이번 정권은 2008년까지인데?]
“영화 자체를 어떻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집권하고 나서 그 영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거란 말이야.”
[어? 에, 에이. 설마 그러겠어? 그냥 영화일 뿐인데.]
“설마 그럴 수도 있겠더라고. 전에 이군영 비리 관련해서 알아보다가 확인한 거야. 국정원에 배우들 정치 성향 정리해서 기록한 파일이 있대. 나이 어린 유리야 뭐 정치색 같은 걸로 엮일 일 없지만, 누나는 성인 됐잖아. 혹시라도 그런 문제로 곤란 겪진 않았으면 좋겠어.”
부장검사 신성운이 확인해준 부분이기에 분명한 일.
집권당이 바뀌는 순간 진보적 영화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은 명약관화였다.
그런 마당에, 자신의 예비 연인이 정치색을 띤 영화를 맡는다는 것이 영 염려됐던 것이다.
그런 그의 염려를 듣고, 명진아는 해사하게 웃었다.
[아, 후후후. 찬이 바보.]
“뭐? 왜 이래? 이거 진짜 확실하다니까?”
[그런 게 아니라, 괜한 걱정이잖아? 사실을 왜곡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건 나쁜 거지? 반대로 진실을 드러내는 영화에 나오는 건 좋은 거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잘되냐 아니냐의 문제야. 자칫하면 죄도 없이 몇 년 동안 작품 못 할 수도 있어.”
[고마워, 찬아. 하지만 찬아,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맞아. 너는 그럴 거야? 찬이 넌, 정권이 싫어하는 영화라면 내용이 마음에 들어도 출연 안 할 거야?]
타의에 의해 제약되는 것은 이찬이 썩 좋아하지 않는 상황.
소년은 반사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나야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은 영화 찍지. 그 다음에 오히려 나 싫어하는 정부가 못 들어서게 만들겠지.”
[앗. 그건 좀 너무 큰데? 후후. 나도 그래, 찬아. 사실은 네가 유리랑 같이 작품 해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 벌써 <폭동> 잡았을 거야. 알잖아? 내 고향, 어딘지.]
“아······.”
[나야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셨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아이들 집으로 데려다주다가, 그렇게 되셨대. 그래서 나한테는 그런 문제야. 옳은 영화인가 아닌가. 왜곡이 없는 영화라면, 출연하고 싶어.]
가족을 가져본 적 없는 이찬은 유족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명진아 본인 역시, 만나본 적 없는 조부의 죽음이 진한 감상으로 남은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과거는 과거에 묻고 현실을 생각하라고 권해도 이상할 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진아 누나는 이런 누나야. 언제나 하나의 색깔로 자신을 물들이는 누나 연기는, 이렇게 진한 내면의 따뜻함으로부터 우러나온 것. 이걸 현실을 들어서 말리는 건 내 마음조차 배신하는 일이 되겠지.’
그렇듯 생각은 길었지만, 대꾸는 간략했다.
“······그래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응! 찬아, 혹시 화난 거 아니지?]
“전혀.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사랑해.”
이찬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혹시라도 이걸 문제 삼아 누나한테 불이익을 주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때는 전쟁이야. 시간낭비 같은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다 막을 거야. 그때는 확인해볼 수 있게 되겠네. 칸 뚫은 국보급 배우가 센지, 경선 뚫은 대선후보가 센지.’
*
스피커폰 통화를 마친 뒤, 명진아는 새빨갛게 된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유리 너도······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두 분 사랑의 밀어를 나누시라고 빠져드린 건데요?”
“아, 아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사랑해, 그랬는데요?”
“그거야······ 그냥 동료애, 그런 거야.”
“잘도 그러겠다. 저도 알 거 다 알거든요?”
알 거 다 안다는 10세의 말에 잠깐 당황하다가, 명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렇게 됐어. 아침부터 언니 찾아온 보람이 있니?”
“응. 만족스러운 도청이었어요.”
“도청이 아니라······ 인사를 했어야지, 바보야. 너 찬이랑 통화 잘 안 하지?”
“응. 매일 사진 보내라고 해서 보내긴 하는데요, 대화는 주로 문자로 해요. 국제전화 비싸다고.”
“아······ 정말 이상한 사제야. 사실은 서로 되게 소중하면서, 왜 표현을 안 해?”
“약간 기싸움 같은 거예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제자라고 했으면 자기가 먼저 전화를 해야 되는데, 한 번을 안 걸어요. 그래서 나도 안 걸어요. 아쉬우면 자기가 전화하겠죠.”
아이다운 치기라는 생각에 마침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송유리가 어색한 태도로 명진아의 손을 쥐었다.
“언니······ 이거 진짜 하고 싶어요?”
“응? 얘는, 다 들었으면서.”
“응. 들었는데, 난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거면 더 하기 싫지 않아요? 찍으면서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연기는 즐거우려고 하는 거잖아요? 왜 마음 아픈 거 찍어요?”
정신분석학 방어기제의 승화 이론이나 역사적 사명감 등의 대답을 잠깐 고려해보다가, 명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아이가 이해하기 쉬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빠랑 할머니가 겪었을 아픔이니까.”
“아······.”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이 겪은 비극이니까. 나만 모르는 건 치사한 것 같아.”
“······이상해요.”
“후후. 유리야, 찬이는 있잖아? 지금까지 계속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해왔어. 가족을 잃은 아이, 나라에 버림받은 청년, 몸을 잃어버린 형사, 누명을 쓴 살인자, 복수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린 남자, 세상에서 찾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로운 아저씨까지. 그치?”
“응. 그런 것 같아요.”
“난 그런 찬이가 참 좋아. 하이틴스타라서 부잣집 아들처럼 행복한 역할만 해도 될 텐데, 항상 또 다른 아픔을 연기하려고 해. 그건 아마······ 내가 맡으려는 배역보다 훨씬 더 아팠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명진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송유리는 문득 물었다.
“언니는, 찬이 오빠 그거 알아요?”
“그거? 어, 그게 뭔데?”
“아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아팠을 거라고 한 것 같아. 예를 들면 <미스 스캔들>에서 심지호 배역 같은 거요.”
반짝이던 어른의 눈동자가 팽글팽글 흔들린다.
어린이는 말을 잇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알았어요. 잘됐네 잘됐어. 저는 남들 아픈 것까지 막 이렇게 책임져줘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 좋아요. 언니랑 같이 출연해서 더 좋아요. 잘해봐요 우리.”
“아, 출연은 아직 몰라. 이 감독님이 유명 배우도 오디션 보고 뽑으시는 경향이 있는 분이어서.”
“언니랑 전 무조건 합격이에요. 오디션을 보든 뭘 보든. 왜냐하면, 언니는 완전 짱배우니까.”
“짜, 짱배우······? 아······ 하하하.”
*
이찬이 모건 프리먼, 개리 올드먼과 함께 미국 TV쇼에 출연하게 됐다는 이슈로 반도가 떠들썩해진 가을날.
명진아와 송유리가 <폭동>에 출연하게 됐음이 공표됐다.
며칠 뒤에는, 강정후와 조혁수가 떠난 나라엔터로 적을 옮겨 새로운 대표이사가 된 조연식 역시 그 영화에 참여하게 됐음을 밝혔는데, 그의 인터뷰 내용이 꽤나 이목을 끌었다.
“이 영화는······ 그 시기에 학생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민이 많이 되는 작품이었죠. 원래는 출연할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그랬는데 우리 김 감독도 그렇고, 명진아 배우랑 송유리 배우까지 와서 열심히 설득을 하더군요. 그 둘이서 나보고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떼를 쓰는데, 내가 별 수가 있나. 허허 웃다가 하겠다고 한 거죠. 이찬이가 친구들은 참 잘 뒀어요. 귀염성도 없고 딱딱하기만 한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친구들하고 가까워졌을까? 복도 많아요 참.”
네 배우의 팬들이 그 인터뷰에 무척 즐거워했다.
그렇게 <폭동>의 배우 라인업이 착착 갖춰져 나갔다.
< 71장 - 스타 송유리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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