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장 - 스타 송유리 (3.) >
최형준 감독의 <패>는 전국 관객 684만 명을 동원하며 청불 영화 중 손에 꼽히는 실적을 올렸다.
그를 통해 남태형이 이른바 ‘수후찬’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청년배우임을 입증할 무렵엔, <강아지>가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설산>과 <아저씨>의 독립영화 흥행돌풍을 이어갔다.
상업영화로 따지자면 대단한 성과는 아닌 객수.
그렇지만 두 번째 괴작 독립영화로 다시금 수백 배의 매출을 올린 이연진 감독의 위상은 한없이 솟구쳤다.
그 주연으로서 충격적인 연기변신을 선보인 명진아 역시, 톱스타 이미지를 완성하며 은행이나 아웃도어 등 성인층을 타겟으로 삼는 광고에도 러브콜을 받게 됐다.
바로 그 무렵에 제27회 청룡영화상이 개최됐다.
독립영화의 약진 속에서 한국영화 전용 극장 체인이 굳건한 입지를 이루고,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초호화 CG 블록버스터 영화가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깨지지 않을 것 같은 흥행성적으로 영화계를 뒤흔든 2006년.
그야말로 별과 같은 영화와 스타들이 각축전을 벌인 한 해의 결산을 맞아 무수한 시선이 여의도 KBC홀에 쏠렸다.
그 무렵에 부대 측의 배려로 강정후가 첫 휴가를 맞았다.
대충 민 머리와 거칠어진 피부를 손질한 뒤에, 그는 회사에서 보내온 리무진에 타서 송유리를 픽업했다.
“정후엄마, 엄청 탔네요? 훈련 많이 힘들어요?”
“가을 햇볕이 좀 뜨겁더라. 그런데 이찬은 왜 안 오냐?”
“상 못 받을 잔치는 굳이 갈 거 없다고 했어요.”
“웃기는 자식. 남은 국방의 의무 중에도 나왔는데, 뭐 대단한 일 하고 있다고 초청받고도 안 오는 건지 원.”
“그쵸? 진짜 못됐어요. 저 신인여우상 후보도 됐고, 자기도 주연상은 못 받더라도 인기상은 확실히 받을 텐데. 못된 오빠예요. 정후엄마가 혼내주세요.”
“······엄마라고 그만 부르면 안 되겠냐?”
“응?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아, 모르겠다.”
강정후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이찬이 그런 호칭을 썼다면 당장 화부터 냈겠지만, 송유리가 부르는 엄마의 어감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건 됐고, 넌 <폭동> 촬영 들어갔다고?”
“응. 거기서 총 맞아 죽는 역할이에요.”
“······그런 거 말고 좀 정상적인 작품을 고르지 그랬냐.”
“왜요? 저는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안 될 거야 없지. 너야 이찬 같은 녀석이니까.”
“그건 좀 싫어요.”
“스승과 닮았다고 하면 칭찬인 거야.”
“저희는 지금 냉전 중이니까, 칭찬 아니에요.”
냉전의 소녀는 리무진이 여의도에 접어들 무렵에 질문했다.
“정후엄마는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뭐? 그딴 건 왜 물어보는 거야?”
“궁금해서요. 사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양날의 검 같은 거지. 보상받을 때는 그렇게 행복한 일이 또 없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끔찍한 비극이야. 일방적이어선 안 되는 감정이거든.”
“그렇구나.”
“왜 물어본 건데? 설마 좋아하는 남자 생겼냐?”
“저 말고 아는 사람이요.”
“혹시 이찬 말하는 거야?”
“에이, 그 오빠가 누구 좋아할 사람인가?”
“그럴걸. 명진아랑 잘돼가고 있다고 하던데.”
스승의 비밀을 감춰주려던 송유리는, 그렇지만 강정후가 사실을 알고 있음을 확인한 뒤로는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찬이 오빠는 진아 누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럴걸. 잘은 모르겠지만.”
“왜 잘 몰라요? 잘돼가고 있다고 말해준 거 아니에요?”
“그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놈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왜요? 왜 그런 건데요?”
“그건 내가······ 그놈이 나랑 닮았다고 생각했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놈이 아니지 싶었던 거야.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지긴 했지.”
“왜요? 왜 달라진 건데요?”
“그놈 하는 짓이 이상해서. 어쩌면, 혹시, 나랑은 다를지도 모르지. 너 역시도.”
“난 사랑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엄마아빠랑 셋이서만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래, 원하는 대로 살아라.”
퉁명스레 대꾸하며, 강정후는 천세영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찬의 혈육일 가능성이 크기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제는 하나뿐인 스승의 유언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의식하게 되는 여인.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멀리하게 된 존재였다.
‘천세영 그 녀석이야 이미 나한테 꽤 빠져들었지. 나 역시 유지를 받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지만······ 가능할까? 내가 정말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혹시 잠깐의 불장난이 돼서 내 부모처럼 불륜이나 일삼는 관계가 되진 않을까?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그리고 같은 순간, 송유리는 이찬과 명진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사랑해, 그렇게 말했어. 그 오빠가 그렇게 따듯한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어. 듣는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졌어. 하지만 이상한 오빠야.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한국엔 오지도 않잖아? 시상식이라는 핑계도 있으니까 와서 같이 있고 그러면 좋을 텐데 말이야. 사랑이란 건 이상한 것 같아. 난 그냥 엄마아빠가 제일 좋아.’
이기적인 스승을 상기하며 복잡한 연애관을 형성하던 소녀는, 강정후의 부름에 곧 정신을 차렸다.
“야, 송유리. 도착했다. 내가 문 열어줄게. 매무새 정리하고 있어.”
“저 에스코트 해주는 거예요?”
“그래. 드레스 밟지 않게 주의하고, 차분하게 웃어. 하차 직후가 기사 사진 가장 많이 나오는 타이밍이니까.”
“저도 알아요. 근데요 정후엄마. 기사 사진 예쁘게 찍히면 뭐가 좋아요?”
“인기가 많아져서 팬들이 또 생길 수 있지.”
“인기가 많아져서 팬들이 또 생기면 뭐가 좋아요?”
“그러면 더 많은 개런티를 챙길 수 있고, 광고도 많이 찍을 수 있고.”
“그런 거 말고는요?”
“원하는 작품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지.”
“그게 다예요? 저는 아무거나 다 잡을 수 있는데. 그리고요, 영화만 잘 찍으면 팬은 어차피 많아질 거잖아요? 저는 이제부터 천만영화 많이 찍을 거란 말이에요.”
이찬 같은 소릴 하는 소녀를 보며 픽 웃은 강정후는, 이찬 같지 않은 소리로 그에 대꾸해줬다.
“영화를 통해 팬이 된 사람과 인간 송유리의 팬은 조금 다를 수 있어. 예를 들면······ 그래. 좋은 연기를 아끼는 팬들의 마음은 일종의 예술 애호에 해당하지. 그렇지만 배우 개인의 일상을 알며 행복해하는 팬들은······ 말하자면, 사랑과도 같은 거야.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 전 엄마아빠만 있으면 돼요.”
“바보 같은 꼬맹아, 아이 같은 소리 하지 마. 지금이야 엄마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겠지만, 평생 새끼 캥거루처럼만 살 수는 없는 거다. 언젠가는 독립해야지. 그리고 널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야 하는 거야.”
엄마처럼 잔소리 많은 강정후의 손에 의해 레드카펫에 올라선 순간.
끝없는 플래시 세례가 소녀와 톱스타를 반겼다.
*
[2006년 청룡 신인여우상의 주인공은······ <아저씨>의 송유리 양! 축하해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송유리는 속으로 자신의 스승을 비웃었다.
‘바보 오빠. 절대 못 탈 거라고 그러더니 보기 좋게 틀렸네. 거 봐. 다른 부문에서 상 못 주니까 이례적으로 나한테 줘서 체면치레 해주는 게 이상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근데······ 으. 수상소감 준비 안 했는데.’
키 작은 소녀는 스탭들이 황급히 들고 나온 계단형 단상 위에 올라서서야 스탠드마이크와 키를 맞출 수 있었다.
[어······ 고맙습니다. 저 상 받을 줄 몰라서요, 준비 안 했어요. 엄마아빠 사랑하고요, 양진원 감독님 고맙고요, 찬이 오빠 고마워요. 그리고······ 어······ 저 좋아해주시는 팬 여러분도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진짜 있겠죠?]
송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테이블에 자리한 무수한 영화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에 중견배우인 조연식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우유빛깔 송유리! 사랑해요 송유리!”
[와······ 저는 아저씨들한테 인기가 많나 봐요. <아저씨>에 출연해서 그런 걸까요?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앞으로도 연기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요, 이거는 찬이 오빠 대신 말하는 건데요, 5.18은 폭동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누군가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말을 소녀가 덧붙인 것에 잠깐 적막해졌던 장내의 분위기는, 조연식이 다시금 환호성을 지르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유리는 무대를 내려오며 <강아지> 테이블에 앉은 명진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 해서 대신해준 건데······ 언니가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지금은 당황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야.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아니겠지?’
소녀의 마음이 살짝 불안해진 그 시점부터, 한 작품의 이름이 반복해서 불리기 시작했다.
[여우조연상은, 의 천세영 씨. 축하드립니다.]
[각본상, 의 고 안정록 감독님. 축하드립니다. 작품의 원안을 마련한 계준성 씨가 대리수상하겠습니다.]
[남우주연상은 공동수상입니다. 시상자 개인의 견해지만······ 이 트로피를 몇 개 더 만들어 드려도 부족할 것 같네요. 최고의 연기였습니다. 의 고 안정록 감독님과 강정후 씨. 축하드립니다. 고인의 소속사 대표이사인 정창영 씨가 대리수상하겠습니다.]
몰아주기라고 비난할 법도 한 상의 편중에도 불협화음은 없었다. 그보다는, 그 정도의 명예밖에 헌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당해의 심사위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올해도 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청룡영화상은, 93년과 94년을 제외하곤 매 해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구분해서 시상해왔습니다. 그 93년도 첫 대상 수상작이 어떤 작품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소리의 빛>. 이제는 다시 뵐 수 없게 된 분의 작품이었습니다. 이례적으로, 올해 다시금 작품상과 감독상을 통합하려 합니다. 제27회 청룡영화상,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상입니다. 의 고 안정록 감독님. 고인의 제자인 강정후 씨가 대리수상하겠습니다.]
청룡의 마지막 대상을 첫 번째 대상 수상자였던 이를 위해 바치겠다는 발표.
스포츠의 영구결번과도 같이, 그것은 무한한 명예와 존경만을 담은 헌사였다.
강정후는 그 상황에 당황해서 어설프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무대에 도달하지 못하고 비틀 주저앉고 말았다.
천세영과 심요셉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계단을 오르는 스타의 뒷모습을 보며, 송유리는 생각했다.
‘저런 걸까? 사랑이란 건, 저런 마음일까? 너무 소중해서 그 사람의 업적에도 같이 기뻐지는 마음······?’
복잡한 심경으로 돌아본 주변의 모습이 천부적인 관찰력의 소녀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분분히 일어서는 감독과 배우들.
수백에 달하는 옷은 누구 하나 밝지 않고 오직 검다.
그와 같이, 그들의 얼굴 위에도 짙은 흑색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최형준 감독을 비롯한 수십 명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을 감춘 이들 역시 비통함과 안타까움으로 괴로워한다.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나마 최고의 영예를 바칠 수 있음에 기뻐할 따름이었다.
‘······와. 이건, 이럴 수 없는 건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공통된 마음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건데. 어떻게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한테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송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마이크 앞에 선 강정후는,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이찬이나 조혁수와 함께 있을 때만 보여줬던 민낯.
낯설지만 자연스러운 표정 속에서, 정신적인 고아가 된 청년이 작은 숨을 토했다.
[후······. 고인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참 많지만······ 지금은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선생님. 내 선생님. 평생 심려만 끼쳐드렸던 못난 제자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당신께서 바라신 훌륭한 배우가 되지 못했고, 여전히 예전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당신께 실망을 안겨드리는 일이 없도록, 조금씩 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켜봐주세요.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걸어갈 길을 지켜봐주세요. 언제나, 사랑합니다.]
소감 끝에 진한 눈물을 떨구는 제자를 향해 검은 물결이 파도처럼 박수갈채를 선사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무수한 별들의 추모.
한때 주변을 돌아볼 줄 몰랐다고 자평했던 거장은, 그러나 그야말로 별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다.
‘이런 걸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이런 모습인 걸까? 그런 거라면······ 좋을 것 같아.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어. 엄청 연기 잘한다 이런 말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어. 이렇게 말하면 찬이 오빠는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연기나 파라고 하겠지만······ 흥. 우린 냉전 중이야. 나는 사랑받는 배우가 될래. 그래서 나중에는 안정록 선생님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울고 웃게 할 거야.’
안정록의 강정후와는 달리 스승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를 일으킨 제자는, 방송이 끝나고 회장이 정리될 무렵에 명진아의 습격을 받았다.
“야, 야, 유리 너······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이 바보······.”
“왜요? 저 왜 바보예요?”
“바보지, 바보야. 그렇게, 공식석상에서 민감한 얘기를 하면, 유리 너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순간, 송유리는 생각했다.
과거였다면 그 말이 정말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사람들의 시선은 무서워. 날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하지만······ 그렇지만······ 난 할 수 있어. 날 싫어하려던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어. 그럴 수 있는 힘을 줬어, 찬이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하게 웃는 소녀에게, 명진아는 더 이상 나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작은 몸을 끌어안고 여러 차례 고맙다고 읊조렸다.
송유리는 그 감촉을 즐기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소녀는, 마침내 스타가 될 준비를 마쳤다.
< 71장 - 스타 송유리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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