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장 - 댄서 이찬 >
2007년이 밝은 날, 이찬은 미국을 떠났다.
2개월에 걸친 체류 동안 그가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입지전적인 흑인 배우이자 마성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대배우 모건 프리먼에게서 무수한 배역들에 대해 들었고, 레옹과 제5원소의 강렬한 악역에 이어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청렴한 경찰로 활약하고 있는 개리 올드만에게선 그간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연기론을 배웠다.
그리고 그 두 거인과 함께 TV쇼에 출연하며 헐리우드가 주목하는 한국 배우라는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한편으로 남는 시간을 활용해 절권도 등 유명한 유파의 체육관에 나가며 대련을 벌여나갔다.
그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금세 퍼져, 제2의 브루스 리가 나타나서 강자들을 격파하고 다닌다는 소문으로 변질됐다.
이찬의 영화를 본 적 없는 이들이 그를 기행을 일삼는 괴짜라고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외적으로는 DC코믹스의 제임스 밀러와 양진원이 마침내 큰 틀에서 세계관의 합치를 이뤘다.
그를 통해 한국 배경 히어로 코믹스의 타이틀이자 히어로집단의 이름이 <선비(Seonbi)>로 결정됐다.
유교 대두 이후로 변질되었으나, 본디 심신을 단련하며 덕으로 세상을 교화하는 이들을 일컫는 순우리말이었다.
그렇게 세는 나이로 열아홉 살이 된 하이틴스타는, 이후 멕시코와 브라질을 거쳐 유럽과 중동, 아시아를 순회해 아프리카를 거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약 3개월의 시간 동안 23개국을 통과한 여행.
그 과정에서 루차 리브레와 카포에라와 발리 투도, 레슬링과 사바트와 복싱과 삼보와 시스테마와 팡크라티온, 야울 귀레시와 크라브 마가, 무에타이와 칼리 아르니스와 실랏과 공수도와 유도와 태극권과 형의권과 팔괘장과 영춘권과 홍가권과 우슈와 부흐, 누바와 낙바부카와 세베까를 익혔다.
100일도 안 되는 기간에 손과 발과 몸과 각종 무기를 사용하는 수십 개의 무술을 체화한다는 것은 언어도단.
그렇지만 이찬에게 있어서는 단어 몇 개를 배우는 것처럼 쉬운 일이어서, 비록 무도의 극의까지 익힐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실전만큼은 분명히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이찬의 매니저와 경호원은 그렇게 뉴욕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배우가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은, 그때에도 끝을 맺지 못한 채였다.
“저건 인간이 아냐. 염 누나, 잘 들어. 저런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
“넌 진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구나? 찬이는 습득이 빠른 거지 이상한 게 아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본 내가 잘 알아.”
“외계인일 거야. 저게 인간이라면······ 세상에 슈퍼맨도 있고 엑스맨도 있고 그러겠다. 겨우 몇 시간 구경한 걸로 유파 최강자들을 쓰러뜨리고 다니는 저놈이 사람이라고? 잘도 그러겠다.”
“아 진짜! 그거야 체급이 달라서 그런 거잖아? 찬이 사람 맞거든? 넌 자본주의의 개라서 모르는 거야.”
“뭐? 아니 그게 뭔 상관······ 야! 염 누나! 아 씨. 어이없네.”
호텔의 거실까지 들리는 그 언쟁에 이찬은 키득거렸다.
‘사람이 맞다고 말하기도 민망하지. 솔직히 이번 일정도 나한테는 너무 여유로웠으니까. YAGP 예선 치르느라 길이 꼬인 것도 있지만······ 도중에 수진 누나가 풍토병으로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도 서너 개의 유파를 더 숙달할 수 있었을 거야. 아니, 그보다 전용기가 있었다면 훨씬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빨리 돈을 더 벌어서 전용기 몰고 다녀야 되겠어.’
일찌감치 일정을 마감하고 뉴욕으로 넘어온 건, YAGP(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건 9-19세의 전 세계 청소년 중 매년 250명만이 선별되어 장학금과 명예를 걸고 경쟁하는 최대의 발레 콩쿨이었다.
스위스에서 치른 예선을 통해 그 결선에 오른 이찬은, 그 YAGP의 시니어 부문 그랑프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
[사우스코리아의 스타 배우 이찬이 YAGP의 그랑프리를 차지했습니다. 2005 칸 국제영화제에서 로 황금종려상을, 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찬은, 짧은 기간 액션배우로 활약해온 17세의 소년입니다. 그는 발레를 시작한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다고 밝혀 평단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마스터클래스조차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어떤 기대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상을 마친 뒤 YAGP의 심사위원장은 “그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몸의 선이 돋보이는 동작을 선보였으며, 비록 감정선의 표현에서 감점요인이 있었지만, 고난이도의 곡을 모든 동작에서 완벽하게 수행하여 만장일치로 그랑프리에 선정됐다”고 평가했습니다. YAGP는 논란을 우려해 이찬이 수행한 2분간의 영상을 곧바로 공개했습니다. 이 Unbelievable dancer의 퍼포먼스를 확인하시죠.]
미국 전역에 보도되고 있을 속보를 시청하며, 조혁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 자식······ 부문 1위도 아니고 시니어 그랑프리라니, 가도 너무 갔잖아? 대체 어떻게······ 하. 정말 언빌리버블한 녀석 같으니.’
그런 생각을 할 무렵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찬일까 생각했지만, 드러난 번호는 크리스찬 베일의 것이었다.
“아, 베일.”
[조, 방금 뉴스 봤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음······ 예상하고 있던 일이야.”
[진심이야? 조, 농담을 잘하는 성격이었나?]
“난 그 꼬마가 뭔가를 결심하고도 실패하는 일이야말로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는 징조라고 생각해.”
[······하하. 너흰 참 신기하군. 알겠어. 이따 봐.]
간단하게 통화가 끝난 건 곧 모든 제작진이 한 데 모일 예정인 까닭이었다.
그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기행. 그는 촬영 돌입 직전에 <캣 피플> <블랙 선데이> <배트맨 비긴즈> 등 다수의 영화를 함께 시청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출연진에게는 그저 권장사항이었지만, 베일도 조혁수도 그 자리에 불참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기행이 진행될 소극장에 도착했을 때에야 조혁수는 이찬의 전화를 받게 됐다.
“이찬? 너 이 자식, 별안간 충격적인 뉴스를 냈더라?”
[보셨나 봐요?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죠. 한국에서도 긴급속보 편성됐다고 하네요.]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돌아다닌 거냐? 1년도 안 돼서 그랑프리라니, 그게 말이 되는 거야?”
[되니까 했죠. 아무튼 지금 어디에요? 잠깐 인사나 드리러 갈까 하는데.]
“필요 없어, 이 자식아. 목표 이뤘으면 얼른 한국 가서 기자회견이나 해라.”
[선배 말고 모건 아저씨랑 개리 아저씨한테 인사한다는 건데요. 혹시 헐리웃이에요?]
“······그래. 나흘 뒤에는 시카고로 옮길 거다. 그 모건 아저씨가 <원티드> 촬영도 병행하게 됐거든.”
[아, 그랬지. 참 열정적인 분이시라니까. 그럼 촬영 시작할 때쯤에 그쪽으로 갈게요. LA는 너무 머니까.]
그렇게 닷새가 지난 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현장을 찾아온 그랑프리 수상자는, 느긋한 태도로 조혁수와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에요, 조. 잘 지냈죠? 액션 씬 준비는 잘 됐고요?”
“그럭저럭.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인터넷 보니 또 복싱 도장 여럿 깨고 다녔나 보던데. 끌려다니는 저 친구들 불쌍하지도 않냐?”
“미스 염과 미스터 킴? 저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고마운 분들이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염수진과 김도철을 쉬라고 놔둔 채 조혁수와 함께 길을 걷다, 이찬은 촬영 안내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뭐죠? <로리의 첫키스> 현장이라고 적혀 있는데.”
“<다크나이트> 촬영장이라고 알려지면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 있으니까. 미국에서 배트팬 팬덤은 어마어마하다.”
“한국의 이찬보다 더 파급력이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전통이 다른데.”
“더 노력해야 되겠네요. 지고는 못 살지.”
조혁수는 가상의 슈퍼히어로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왜요? 뭐요?”
“아니······ 새삼 고맙다. 날 괴롭히지 않아줘서.”
“저야말로. 제가 크지 못하게 막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네가 막는다고 안 클 놈이냐.”
“그럴 놈은 아니죠. 하지만 종종 고민이 된단 말이에요. <폭동> 촬영 마치고 나서 조연식 선배님이 그러셨대요. 송유리는 이미 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배우라고. 저한텐 그런 소리까진 안 했었는데 말이죠. 자꾸만 고민하게 돼요, 그 꼬맹이를 확 눌러줄 방법이 없을까.”
어느 하나 황당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조연식이 송유리에게 했다는 말도 그렇고, 열아홉 살 꼬마가 열한 살 꼬마를 두고 하는 생각도 그렇고.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제자를 두고 그딴 생각을 해서야 되겠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암수를 써서 이겨봐야 기분만 더러워질 텐데 뭐. 조만간 더 클 거예요. 배트맨보다도 슈퍼맨보다도 유명해져서, 살아있는 전설이 될 거예요. 그 정도면 꼬맹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범접할 수 없겠지.”
“Living legend라······. 그래,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조는 어때요? 액션 씬 추가되면서 혹시 안 죽는 쪽으로 바뀌셨을까요?”
“그럴 리가. 놀란 감독이 그런 걸 허락할 사람은 아냐. 예정대로 불타 죽을 거다. 다만 좀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될 뿐.”
“별로네요. 얼른 한국으로 돌아오셔야 되겠어.”
건물 안에 접어들자,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던 스탭이 다가오는 조혁수를 알아봤다.
그리고 그는 잠시 후에 이찬 또한 알아봤다.
“찬 리, 맞지?”
“맞아요.”
“아, 맞군. 어디서 많이 봤다 했어. 조와 함께 있어서 확신했지.”
“예. 같이 좀 들어갈게요. 인사드릴 분들이 계셔서.”
“그래. 아, 혹시 출연할 예정이야?”
“아뇨. 그냥 구경만 할 거예요.”
“아쉽군. 재밌게 보고 있어. 더 댄서의 액션이 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동양적인 표현들이 흥미롭더군.”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거 다 현실이 될 거예요.”
“응?”
고개를 갸웃거린 스탭은, 이찬이 자기 말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닌지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그날 촬영될 내용은 웨인 인더스트리의 투자자 미팅.
‘미스터 라우’로 분한 조혁수와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 역할의 크리스찬 베일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씬이었다.
그 촬영을 앞두고 이찬도 베일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이찬입니다.”
“그래, 반가워. 얘기는 많이 들었어.”
“저한테 불쾌하셨다고 들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불쾌했다고? 내가?”
갸웃거리며 돌아본 곳에 조혁수가 낄낄대며 웃고 있다.
한 방 먹었다는 걸 알게 된 이찬이 멍해질 무렵, 베일이 조혁수에게 질문했다.
“조, 무슨 얘기야? 내가 불쾌할 게 뭐가 있지?”
“음. 네가 파티에 오지 않은 게 꼬마의 퍼포먼스를 싫어해서 그랬던 거라고 설명했지.”
“아, 그랬어? 너흰 정말 모를 사이야.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거지? 꼬마는 완전히 믿어버린 것 같은데?”
“잘 안 속는 꼬맹이라서 쉽지 않았어. 그래서 언젠가 곯려주고 싶었던 거야. 나한테는······ 일종의 버킷리스트였지. 아야.”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고 이찬의 로우킥을 맞은 조혁수는, 자신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게 투정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살려줘서 고맙다, 꼬마.”
“boy라고 좀 부르지 마요, 조.”
“너도 조라고 부르잖아. 한국 돌아가고 나면, 그때는 이찬이라고 불러주마. 아무튼 둘이 대화 나눠. 난 좀 더 체크할 게 있어.”
그렇게 조혁수가 떠난 뒤에야 베일이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꼭 가고 싶었어. 대체 어떤 식으로 수련하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 그래서 핸튼에게 자세히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는데, 네가 그날 퍼포먼스를 마치고 곧장 방에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하더군. 인상적이었어, boy.”
“으······ boy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하하하. 나도 한국에 가고 나면 더 댄서라고 불러주지. 우리가 나중에 같이 촬영할 기회가 있을까?”
“없을걸요. 한국에서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실 생각이 있다면 모를까. 전 헐리웃에 아무 관심 없어서요.”
“정말? 충격적인걸. 이런 얘길 들으면 오기가 생긴단 말이야. Boy, 내기 하나 할까? 이번 영화가 공개되고 나면, 넌 분명히 헐리웃에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날 거야. 아니라면 내가 한국으로 가서 네 영화에 출연해주지.”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황당한 내기.
말을 마친 베일을 내려다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데. 그야 놀란 감독이 실력 있는 인물이고 아이맥스 카메라의 영상미가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헐리웃 싫어하던 사람의 마음마저 바꿀 거라고 믿는다는 거야? 그게 말이 되나? 이제 촬영 막 시작한 참인데 말이지.’
그날 아침에 진행된 촬영의 내용이 히스 레저와 크리스찬 베일이 마주하는 씬이었다는 걸, 이찬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저 누구에게도 지기 싫은 자존감을 담아 대답했다.
“일방적인 내기는 하기 싫은데요. 제가 다음에 만들 히어로무비를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걸 보고 나면 당신 쪽이 충무로에 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러지 않는다면, 그때 제가 배트맨 시리즈에서 악당 역할 해드릴게요.”
“어······ 미안한데, ‘춘무러’가 뭐지?”
“충, 무, 로. 잘 기억해두세요. 조만간 헐리웃의 전통을 대체해 세계 영화계의 중심이 될 영화의 거리니까.”
“어, 어. 하하, 대단한 말이야. 하지만 그게 오만하고 무례한 말이라고 판단하는 건······ 영화를 보고 나서 해도 되겠지. 그 내기 받아들일게. 그리고 기대할게, boy.”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은 나지막한 대화.
그렇기에 그 내기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궁금해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명배우도 기행의 댄서도, 내기의 승자가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찬은 미국을 떠났다.
2007년 5월. 약속한 1년의 기한을 반이나 남기고 귀국한 소년은, 그러나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길었던 비무행의 종지부를 찍을 여행.
한국 전통무용을 총망라하기 위한 반년 간의 전국일주였다.
그 뒤에야, 이찬은 비로소 자신의 댄스를 완성했다.
< 72장 - 댄서 이찬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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