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장 - 감독 성진만 (1) >
2006년, 네 명의 배우가 한국 영화계를 떠났다.
오랜 시간 국민배우로 활약하며 대체불가의 존재가 됐던 안정록은 하늘나라로.
선 굵은 연기로 드라마와 영화를 종횡무진하던 조혁수는 헐리웃으로.
섬세한 메소드 연기와 압도적인 비주얼로 여성팬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강정후는 군대로.
나이를 초월해 무수한 배역에서 활약하던 이찬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조용히.
이후 남태형의 <패>와 신수영의 <뉴페이스>가 모두 700만 관객에 육박하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단기간에 넷이나 되는 톱스타가 떠나간 공백은 작지 않았다.
그렇기에 떠나간 이들의 근황이 언제나 큰 관심을 끌었다.
강정후의 경우 군인으로서 소식을 전하기 어려운 처지. 그렇지만 휴가 때 찍힌 사진들이 매번 인터넷을 달궜다.
남태형도 좋지만 역시 최고의 미남은 강정후라는 댓글이 인터넷기사에서 호응을 끌곤 했다.
조혁수는 종종 외신의 보도로 소식을 전했다. 특히 놀란 감독이 촬영 중 조혁수의 연기에 놀랐다는 인터뷰는, ‘조혁수한테 놀란 놀란’이란 언어유희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가 액션 씬까지 소화한 <다크나이트>가 2008년 7월 개봉 예정이라는 기사가 포털 메인에 오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찬의 경우, 세계 방방곡곡에서 올라오는 목격담과 세계무용콩쿨 대상 수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이어지던 근황이 어느 날 문득 끊긴 것이다.
2007년 5월 이후, 이찬의 이름은 웹 게시물이 아니라 지식검색 트렌드검색어로 군림했다.
「 찬이오빠 어디에있나요ㅠㅠㅠㅠㅠㅠ
이찬 분쟁지역갔다가 죽었다던데 사실인가여?
찬오빠 생존신고해줘여ㅠㅠ 너무너무걱정돼여ㅠㅠ
이찬오빠 지금 어디가있는거예요??? 」
질문과 소문은 무수했지만 대답은 언제나 궁색했다.
소속사인 하늘기획 측에서는 정기적으로 통화하고 있다며 루머의 확산에 경종을 울렸지만, 전 연령대에 걸쳐 분포한 이찬의 팬덤이 매일같이 그를 수소문하길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른 12월.
이찬이 나타났다.
서울 한복판에, 도포를 차려입은 모습으로.
*
“어디요? 어디라고요?”
[청계천 근천데, 지금 이동 중이야. 명동 쪽으로 가나······.]
“계속 따라붙어주세요. 저 금방 가요.”
[어, 그래. 팬들이랑 인사 나누면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긴 한데, 너무 몰려들어서 오래 저러진 못할 것 같다 야.]
“알았어요. 지금 택시 와요.”
<폭동> 때 친해진 신인배우의 전화를 끊고 택시에 올라탄 송유리는, 자신을 빤히 보는 택시기사에게 냅다 외쳤다.
“저 <폭동> 나온 걔 맞고요, 지금 명동으로 빨리 가주시면 저보다 유명한 배우 보실 수 있어요.”
“어, 어, 맞네. 어······ 명동? 서울 명동?”
“네. 빨리 가주세요!”
“어, 알았다······.”
초등학교 근처에서 태운 꼬마손님이 서울까지 가달라고 하는 상황은 20년 운전경력의 그에게도 첫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 장거리 뛰고 오면 추운 날씨에 좀 일찍 귀가하는 게 가능해진다. 사당쯤에서 혹시 수원 가는 손님을 태운다면, 그 직후에 퇴근해도 좋을 터였다.
자연히 액셀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만 20년 경력 처음으로 태운 스타 배우를 향해 눈이 가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니, 니 이름이 송유리제? 야, 니 연기 참말 잘하데. 그 영화 재밌더라. 니 어렸을 때부터 연기 했나?”
“연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됐어요.”
“맞나? 와, 대단하네.”
“아저씨는 수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수원? 아, 니 경상도 말 티 나서 그라는 기가? 20대 때 서울 올라와가, 수원 온 지는 20년도 더 됐다. 그래 해도 말투는 안 바뀌데.”
“아, 그렇구나. 근데 그 영화 괜찮으셨어요? 정치성향 때문에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랬는데.”
“하하하, 똘똘하네. 그랄 수도 있을 끼다. 그래 해도, 봐라 유리야. 만나보모 다 똑같은 사람 아이겠나. 편 가른다꼬 영화 재밌다고도 몬 하겠나. 그라고 감독 글마도 대구 아드마. 내는 부산인데, 대구 아가 만든 영화를 못 볼 게 뭐꼬?”
송유리는 히죽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 택시기사처럼 생각한 관객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일 터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800만 관객이라는 대단한 기록은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라고······ 니는 사투리 다 고친나?”
“저요? 저 사투리요?”
“그래. 니 광주 아 아이가?”
“아니에요. 저 수원에서 쭉 살았어요.”
“뭐어? 맞나? 참말이가? 그라모 부모님이 전라도 분이가?”
“아뇨, 강원도 분들이신데.”
“허어······ 희한타. 사투리를 그래 잘하는데?”
“연기를 위해서 연습 많이 했어요.”
“대단타, 대단해. 배우들을 다 글나? 허허허.”
이번엔 어깨만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억양이라는 건 노력한다고 해서 바꾸기 쉽지 않은 것. 그렇기에 <폭동>에 시민군 역으로 출연한 배우들은 송유리를 제외하면 모두 전라도 출생이었다.
‘아마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 나랑 찬이 오빠 둘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그 오빠는······ 전국을 유랑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이제는 팔도 사투리에 능통해졌겠지? 근데 생각하니까 또 화나네. 서울에 왔으면서도 제자한테는 문자 한 통 없었다고? 아, 진짜 나빠. 완전 나빠. 만나기만 해, 내가 가만히 두나 봐.’
“아, 그라고 니 그 말은 뭐꼬? 명동에 뭐가 있나?”
“어······ 찬이 오빠가 나타났대요.”
“뭐어? 니 금방 뭐라캤노? 니 이찬 말한 기가?”
“네. 찬이 오빠가 뭐 하려는 것 같아요.”
“와······ 이 뭔 일이고? 이찬이가 은제 한국에 온 기고? 쪼매 기다리레이. 금방 간다. 야, 우리 아가 이찬 글마 광팬이라 안 하나.”
서울에 진입할 무렵부터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빗방울이었던 것이, 날이 쌀쌀해짐에 따라서 싸락눈처럼 변하고, 이후 그치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강우 이후로 겨울이 더욱 차가워진 밤이 돼서야 택시가 명동에 도착했다.
“다 왔다. 여 어데고?”
“저쪽 청계천 방향······ 아, 저쪽에 사람 많아 보여요.”
“맞네. 차로는 몬 드간다. 내리라. 내캉 같이 가자.”
덩치 좋은 택시기사 덕분에 인파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꽤 수월했다.
그때는 이찬에게 배운 수법으로 얼굴의 근육을 변모시키고 있어, 소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물론 이찬은 달랐다.
반원형으로 둘러선 시민들 가운데 소녀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이찬의 눈이 순식간에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 정말 뭘 잘했다고 웃는 거야? 제자 걱정이나 시키고······ 어······ 근데 저 오빠, 뭐 하고 있는 거래?’
보이는 것은 간단했다. 이찬은 춤을 추고 있다.
그렇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좀 더 복잡한 수식이 필요할 터.
벌써 30분 넘게 쉬지도 않은 채로, 그리고 관객들이 추위를 느낄 만한 지루함도 주지 않은 채로, 그는 무수한 감정으로 점철된 전통무용을 계속하고 있었다.
송유리를 기다렸던 배우 오종만이 그 사실을 전해줬다.
“계속 저러고 있었어. 따로 뭘 설명하지도 않고, 음악도 안 틀고, 내내 춤만 추더라. 그런데 신기하지?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평범한 아리랑 계속 추는 건데, 이상하게 눈이 계속 가는 거야. 잠깐이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신명나는 느낌인데도 한이 서린 것 같은······ 뭔가 신기한 걸 보고 있는 기분이야. 역시 천재 연기자는 춤에서도 뭐가 다른 걸까?”
송유리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 무용을 시작했을 무렵, 이찬의 발레는 동작만 정확할 뿐 감정선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천재배우의 유일한 약점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요즘 점점 느끼고 있단 말이야. 그때 그 발레는 여기저기서 동작을 훔쳐다가 기워서 만든 작품이었을 거야. 아마 무용수마다 각기 장단점이 있으니까 가장 잘하는 동작만 가져다 썼던 거겠지. 그래서 표현은 좋았지만 감정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심사를 들었던 거고. 그런 반면에 지금 저 춤은, 동작은 평범한데, 감정이 진해. 그렇다면 오빠는······ 그때의 약점을 극복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찬의 춤이 멎었다.
그는 회색 도포를 풀어헤쳤다. 그 아래에는 새까만 빛깔의 코트가 있었는데, 그리 두꺼워 보이지는 않았다.
빠르게 의상을 전환한 뒤에는 움직임이 현대무용의 영역으로 전환됐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터무니없이 빠르고 정교하며 경이로운 동작들.
허리를 뒤로 꺾고 손을 내뻗다가 백덤블링을 한 뒤에 벽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관객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잠시 뒤에 송유리가 자신의 추측을 수정했다.
‘아······ 아직은 아니구나. 아직은 다가가는 중이구나. 지금 추는 춤은, 발레 때만큼은 아니지만 어딘지 어색해 보여. 구멍을 메꾸는 일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거야.’
그와 비슷한 생각을 이찬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내 고개를 흔들고 춤을 멈췄다. 그는 춤을 계속하는 대신 코트 안쪽에서 긴 목검을 뽑아냈다.
“오랜만이다, 꼬마!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그 외침의 시선을 따라 군중이 한곳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수백 명이 일제히 송유리를 쳐다봤다.
‘아, 뭐지? 뭐야? 왜 갑자기 아는 척? 진짜 못됐다. 들은 척이나 해주나 봐라- 으앗!’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는 거구의 남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유리는 생각에 앞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그의 칼끝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곁에 있던 오동만이나 택시기사가 다칠까 싶어서 앞으로 굴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 왜 그래요! 뭐 잘못 먹고 미쳤어요?”
열이 뻗쳐 아무렇게나 외친 말을 듣고, 이찬이 씩 웃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내 제자.”
“으······ 난 보기 싫었어요. 완전 짜증나.”
“오냐. 열한 살 송유리 만날 기회를 간신히 안 놓쳤네.”
“치. 뭐라는 거야. 바보 같아요.”
커다랗고 검은 스승에게 안긴 채, 송유리는 한참 투덜댔다.
*
골목을 돌아돌아 사람들을 따돌리고 미리 빌려둔 식당에 들어선 뒤, 이찬은 키득거리면서 소회를 털어놨다.
“형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딱 네 나이였지. 열한 살의 겨울이었어. 그때도 이렇게······ 이런 날씨였는데.”
눈 같기도 하고 비 같기도 한 것이 그친 뒤의 밤.
이찬은 한 형사를 만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지금 송유리와 나누려는 것과 비슷한 대화를.
“오늘 그 영화 봤다. 정말 많이 늘었더라.”
“와······ 그걸 이제 봤어요? 진짜 말도 안 된다. 무책임해요.”
“무책임은 무슨. 네가 나 없다고 안 클 놈이냐?”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한번 연락을 안 하냐는 거예요. 완전 치사해. 내가 얼마나······ 흥.”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그 말 하려고 했지?”
“아닌데요?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오빠 진짜 싫어요.”
그때 대화와는 좀 다른가- 생각하며 이찬은 또 웃었다.
“미안하다니까. 사적인 통화를 하기엔 좀 중요한 시기였어.”
“아 그러세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진아 언니랑만 통화를 하셨구나? 아, 이제 이해가 되네. 정말 공적이네요.”
“그건 매너지, 인마. 연인한테도 연락 안 하면 쓰레기잖아.”
“제자한테 안 하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게 말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스승님 보러 왔네?”
“아······ 이건······ 이렇게 해주려고 그랬어요 왜!”
팔뚝을 한 대 맞은 뒤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약한데. 너 운동 너무 안 한 거 아니냐?”
“살살 친 거거든요? 난 착하니까요. 오빠처럼 진짜 죽일 것처럼 달려들지 않는다고요.”
“연기였어. 설마 진짜 맞으라고 했겠냐.”
“그게 연기였으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타시겠네요.”
“어. 조만간 그거 받을 거야. 일단은 조연상부터 가겠지만.”
“아, 미친 것 같아. 한국에서 영화 찍어서 그게 될 리가 있어요? 나랑 같이 찍으면 몰라. 안 그래요? 바보바보바보야.”
“반사.”
“······와아아. 진짜 이런 걸 사람들이 알아야 되는데. 어떻게 모르는 거지? 완전 철없고 못된 사람인 걸?”
“그야 연기를 잘하니까.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돼보려고. 언젠가는 나도 너처럼······.”
끝말이 생략됐지만, 뜻을 짐작하기 어려울 건 없었다.
하릴없이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야······ 내가 착한 건 아나 보네. 흥······ 하여튼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런 대화의 와중에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송유리가 이내 그를 알아봤다.
“어? 성진만 감독님?”
“하하하, 유리 안녕? 오랜만이다. 야 찬아, 내가 진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거다. 사람들에 치여서 카메라 잃어버릴 뻔했단 말이야. 진짜 너무하지? 나도 나름 액션스탄데,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인상이 평범하셔서 그런 거겠죠. 그렇지만 이번 영화 완성되고 나면 좀 다를 거예요. 감독으로 많이들 알아볼 테니까.”
“오······ 그러지 말고 내 배역 하나만 만들어주면 안 될까? 악역으로라도······ 진짜 잘할 수 있는데······.”
“감독님은 안 돼요. 감정이 너무 안 나와. 땡 탈락.”
그 대화의 끝에, 송유리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뭐야! 뭔데! 영화 벌써 정했어요? 나한테 말했어야죠!”
“미안 미안. 합 맞추는 건 다음 영화에서 하자.”
씩 웃으며, 이찬은 요리를 시작했다.
< 73장 - 감독 성진만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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