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장 - 감독 성진만 (2) >
액션스쿨의 수장이었지만 이제는 감독 겸 액션배우인 성진만은, 이찬과는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이찬 100만 팬덤의 주춧돌이 된 <어사>로 처음 만난 뒤에 <684>와 <고등형사>에서도 손발을 맞췄던 것.
그 작품들을 통해 유명세를 떨친 무술감독으로서, 그는 이찬에게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절한 살인자>부터는 이찬이 스스로 액션 씬을 감독하게 되며 연락이 잠시 끊겼다.
바로 그 무렵에 성진만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그간 연출해온 다양한 액션 시퀀스의 정수를 모아 최고의 액션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액션 동작을 만들어낼 줄은 알지만 시나리오도 장면 연출도 깊이 아는 바가 없는지라, 그 자신이 주연으로 나선 연출작 <레디 액션>은 액션밖에 볼 게 없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 이후에야 액션스쿨 대표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기에 개최된 제3회 찬 영화제에 내보낸 시나리오가 채택되어 이찬을 주연으로 세울 수 있게 된 것을, 성진만은 과거의 인연 덕분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착각임을 확실히 아는 부분.
“쟤가 뭐라고 했는지 아냐? 감정선도 엉망진창이고 뭐 하나 기대할 게 없는 진부한 스토리라서! 마음에 들었대. 순수하게 액션만으로 어디까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사회실험이라나. 특히 연출 면에선 기대가 하나도 안 되니까 사계 프로덕션에서 베테랑 조감독 붙이겠다더라. 편집도 그 친구가 주로 해줄 거라던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진만은 불쾌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 사실이 송유리에게는 희한하게 느껴졌다.
‘작가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초급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아는 까닭······이라고 말하기엔 좀 이상하지 않나? 이 아저씨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 베테랑일 텐데.’
제작사 측의 간섭으로 감독이 창작욕을 잃는 건 흔한 일.
영상으로 만들어지고 나서도 평이 갈리는 게 영화이니 제작 단계에서는 그보다도 훨씬 많은 이견들이 나오게 된다.
거기서 제작사가 심어놓은 인물이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게 되면, 불쾌한 입씨름 속에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독님은······ 앨런 스미시가 되셔도 괜찮아요?”
“응? 야, 너 아는 게 많구나? 난 최근에 배운 건데, 그거.”
앨런 스미시란 작품의 편집권 침해를 상징하는 이름.
오래 전 <총잡이의 죽음>이란 작품을 연출한 감독들이 편집권의 침해를 이유로 크레딧에 자신들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을 것을 요구해, 하는 수 없이 대충 아무렇게 써넣은 게 그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후 상업적인 이유로 창작의 권한을 빼앗긴 감독들의 대명사로서 무수한 앨런 스미시들이 크레딧에 올라가곤 했다.
“근데 난 괜찮아. 이건 기회니까.”
“기회요?”
“그래. 내 부족한 연출력을 전문가들의 보조 속에서 실전적으로 키워나갈 기회. 무술이랑 비슷한 거야. 처음부터 자기 유파를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니? 다들 기존의 무도인들로부터 배워서 자기 길 찾아가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불쾌할 게 없는 일이야. 이찬이라는 걸출한 액션배우랑 그 녀석이 신뢰하는 스탭들 데리고 영화 찍어서, 앞으로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걸 뽑아낼 수 있게 성장하는 거지.”
무술인의 사고방식이란 건가- 송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감독들에겐 무척이나 불쾌할 일이지만, 출발점이 다른 이들에겐 그것조차 오히려 기회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싶었다.
‘오빠도 무술 수행하면서 그런 사고방식을 배우게 된 걸까? 그래서 성진만 감독님의 성장을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그 추측을, 잠시 후에 잡탕 찌개를 끓여서 들고 온 이찬이 깨부숴줬다.
“사실 만족스러운 시나리오가 없어서 그냥 내가 쓸까도 고민했었어. 요즘 세상에 무술가 이야기란 게 그만큼 황당한 소재라는 거겠지. 그나마 이 아저씨라도 있어서 다행인 거야.”
“하하하. 네 스승이 이런다. 만날 때마다 상처야.”
“아······ 감독님은 찬이 오빠 자주 만나셨던 거예요?”
“자주는 아니고 종종. 태백산 바위 위에서 한번 봤고, 그 다음이 설악산이었고, 그 다음에는 지리산이었나······. 내가 얘 때문에 산악인 될 뻔했다.”
“거기서 무슨 얘기들 나누셨던 거예요?”
“그냥 무술에 대해서. 이찬이 새로 만든 전통무예 보여주면 내가 그걸 기반으로 액션 씬 만들어보고, 다음에는 다른 무술로 또 다른 씬 짜보고.”
황당함과 서운함이 섞인 감정으로, 송유리는 이찬의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그렇지만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아······ 피했어? 어떻게 피했어요?”
“어떻게는. 빤히 보이니까 피했지.”
“보였어요? 테이블 밑에서 찔렀는데?”
“근육의 움직임을 보면 그림이 그려져. 그게 요 1년 동안 얻은 성과 중 하나야. 예전에는 순간순간의 의도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1초 정도의 흐름이 보여.”
“미래를 예견한다는 거예요?”
“미래까진 아니고. 인간 근육과 동작의 인과관계를 꿰뚫었다는 건데, 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거다.”
“치. 나도 가르쳐줘요.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데요?”
“시끄럽고, 먹기나 해. 이게 지리산 송이도사님 특제 찌개야. 보기엔 이래도 맛이 기막혀.”
정말 기막힌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놀린 송유리는, 이내 맛에 감동해서 모든 불만을 털어버렸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에야 스승에게 물었다.
“1년 동안 얻은 성과, 또 뭐 있었어요?”
“궁금하냐?”
“궁금하죠. 제자는 버려두고 혼자 뭐 먹고 다녔나.”
“궁금하면 보러 와. 곧 촬영 들어갈 거야. 저쪽 배트맨 영화 완성될 때쯤에는 이쪽도 개봉해야 되니까.”
“그게 돼요? 저쪽은 벌써 다 찍었다는데요?”
“후반작업 긴 블록버스터랑은 다른 거야. 우리 영화는 CG 하나도 안 쓸 거거든.”
“그럼 재미없는 거 아니에요? 기대 안 돼요.”
“기대해도 돼. 내 영화의 액션에는 혼이 있을 테니까. 네가 만드는 직선······ 그러니까 감정들처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송유리는 이후 열두 살이 된 뒤에야 깨달았다.
도포를 입은 이찬의 춤이, 그 자체로 무술이었다는 사실을.
*
[오늘 제가 만나볼 스타는, 명동 깜짝 공연으로 화제를 모은 국보급 배우죠? 바로 이찬 씨입니다. 2000년에 혜성처럼 데뷔한 뒤로 언제나 놀라움을 안겨줬던 이 소년이, 스무 살을 맞이해 어마어마한 액션영화로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바로 촬영장으로 가보실까요? 안녕하세요, 이찬 배우!]
[예. 안녕하세요, 이찬입니다.]
[우리 이찬 씨는 올해로 드디어 스무 살이 됐어요. 성인이 된 소감부터 한번 여쭤볼까요?]
[열두 살에 데뷔해서 이제 스물이네요. 성인이 되니까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서 좋아요.]
[하하하. 어려서부터 술 좋아하면 못 쓰는데?]
유쾌하게 진행되는 현장 인터뷰를 보며, 강정후는 코웃음을 쳤다.
“인터뷰에서 주정뱅이 같은 소릴 하다니.”
“하하. 강 상병님도 술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후임 병사의 질문에 스타 사병은 고개를 저었다.
“나야 혼자 생각할 일 있을 때 마시는 거지, 저 녀석처럼 아무 때나 홀짝거리진 않아.”
“어······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이찬 이제 막 성인 됐는데.”
“전에 통화해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고.”
안정록의 장례식장에서 이찬이 몰래 먹어치운 맥주캔의 숫자에 황당해졌던 경험은 가슴속에 묻어뒀다.
스타 배우가 미성년자 때부터 술고래였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으니.
[우리 시청자 여러분께 이찬 배우는 또 해명하셔야 하는 일이 있죠?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명동 이벤트 뒤로 기자회견도 없이 바로 작품 준비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오늘만큼은 꼭 들어야 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간 이번 영화 준비를 위해서 전국을 떠돌았어요. 반년 동안 해외의 움직임들을 배웠으니 이젠 한국의 움직임을 팠던 거죠. 그렇지만 해외 때처럼 소문내면서 다니면 지역 주민들께 민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철저하게 행적을 감춰야 했습니다.]
[야, 하여튼 생각 깊은 건 여전하네요. 그러면 방금 얘기한 움직임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지는데요?]
[그건 이제부터 보여드릴게요. 곧 리허설 시작이거든요.]
그 질문 직후에 붙여진 리허설 장면의 내용은 짧은 액션.
도포를 입은 이찬이,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복색을 한 일곱 명의 적과 좁은 세트장 안에서 맞서는 씬이었다.
숫자로 따지자면 <고등형사>의 17:1 액션에 비해 한참 긴장감이 떨어지는 대치이며, 동시에 그 움직임 역시 철저하게 정적이어서, 스펙터클한 액션을 기대하고 본다면 좀 아쉬울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그 장면이 20대 장병들의 심금을 울렸다.
“와 씨! 존나 멋있는데?”
“저거 미쳤네! 와, 어떻게 저러냐?”
“쩐다 쩔어!”
“방금 보셨습니까? 저거 완전 이소룡 아닙니까?”
갓 스물이 된 후임병의 말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보다는 좀 더 이소룡 세대에 가까운, 그리고 몇몇 영화를 위해 실전무술을 배운 적 있는 강정후에게는 그 사실이 명백했다.
‘이소룡도 아니고 이연걸도 아냐. 적을 제압하기 위한 살상무술과는 결 자체가 다르다. 저건 어딜 봐도 춤이야. 그저 속도와 힘이 다르고 스텝이 없을 뿐이지, 흔해빠진 살풀이춤. 그런데······ 저게 저렇게 멋있을 일인가.’
멋. 그렇게 불릴 만한 시각적 즐거움이 폭발한다.
이런저런 카메라워크도 없이 그저 풀샷으로 찍고 있는 7:1의 액션이, 꼿꼿이 선 채로 오직 두 손만을 춤처럼 움직여 적들을 쳐내고 날려버리는 움직임들이, 충격적으로 멋졌다.
‘······고수의 느낌. 그러니까, 어렸을 적 심심풀이로 봤던 무협지 속의 고수가 정말 현실에 나타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게 비결인 거야. CG도 없고 발차기 같은 큰 액션도 없지만, 그저 애달픈 표정으로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는 모습에서 어떤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그게 무술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시각적이고 정신적인 쾌감을 주는 거야······. 블록버스터급 히어로무비에 대항하기 위한 네 답은, 그거였냐.’
말로 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유일한 비결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있어 보이는 무술로 좋은 액션배우가 될 수 있을 터.
문제는 그 경지가 진짜 자신의 것이냐는 점일 터였다.
‘어설프게 따라해봐야 풀샷으로 감동을 줄 수는 없어. 편집으로 긴장감을 키우고 CG와 폴리로 현장감을 줘야 간신히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저놈은 연예정보프로그램 카메라와 지향성 마이크만으로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그 말은, 이미 저 무술이 자신의 것이 됐다는 말이겠지. 진짜 고수가 돼버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게 다라고 말할 수도 없을 거야.’
그 추측이 리허설 뒤의 인터뷰에서 확인되었다.
[야, 정말 잘 봤습니다! 엄청나게 리얼했어요. 이게 이찬표 액션영화의 진수군요. 어렸을 때 봤던 무협 영화도 생각나고, 막 괜히 제가 손에 땀이 쥐어지던데요?]
[그러셨어요? 다행이네요. 이 장면 만들기가 좀 힘들었어요. 시청자 여러분은 보시면서 어떤 장면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완전 클라이막스였지?”
“최고의 강적 일곱 명을 쓰러뜨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약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긴 한데······.]
“앗! 병장님, 쟤 또 스포하려나 봅니다!”
“아이 씨······ 이거 꺼야 되나?”
[적들의 말단을 회유하는 장면이거든요.]
“어······ 어? 저게?”
“뻥 아냐?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진짜 무술 잘하시는 액션배우 분들한테는 중요한 역을 부탁드린 상황이라, 방금 촬영한 분들은 액션스쿨 갓 들어온 초심자예요. 하나하나 가르쳐드리느라 고생했죠. 기존에 무술 해보신 분들이라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말예요.]
[아······ 이찬 씨가 다른 배우 분들 교습도 담당하고 계시다는 얘기군요?]
[예. 이번 작품에 나오는 모든 무술이 열 몇 가지가 되는데, 대부분 기존에 없던 것들이거든요. 익히고 계신 분들이 없다 보니까 일일이 봐드려야 돼요.]
[아니, 기존에 없던 무술이라고요?]
[예. 제가 직접 만들어낸 형태들입니다. 그래서 혹시 조금 어설픈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아마 감독님께서 잘 편집해주시겠죠? 각종 무술에 통달하신 분이시니까.]
[정말 너무 궁금한데, 좀 더 보여주실 수 없을까요?]
[하하. 그러려고 오시라고 한 건데요. 정용태 선배님! 저분이 여기서 제일 몸 잘 쓰시는 분이라서 제일 난이도 높은 걸 알려드렸는데······ 이제 보여드릴게요.]
멋들어진 도복을 차려입은 장년 한 명이 다가와 인사하고, 이후 이찬과 그의 대련이 펼쳐졌다.
그게 마치 용과 호랑이의 생사결처럼 보였다.
정용태의 공격은 화살이 쏘아지는 것처럼 재빨랐고, 그에 이찬도 손만 쓰는 게 아니라 전신을 움직이며 눈으로 쫓기도 힘든 공격들을 하나하나 쳐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방영되는 동안 내무반은 정적에 휩싸였다.
감탄사조차 없이, 숨 쉬는 소리조차 없이 조용한 상태에서 20초가 지나고, 마침내 전역을 하루 앞둔 병장이 소리쳤다.
“야 씨발 존나 멋있다! 와, 저거 배우고 싶네! 정후 형, 안 그래? 이찬 쟤 진짜 무술가가 돼서 돌아왔나 봐. 물론 연기용이니까 실용성은 없겠지만, 저거 배우면 진짜 멋있겠지?”
강정후는 그에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실용성이 없겠다고? 지랄하네. 저거면 유단자 열 명이 달려들어도 날려보낼 수 있겠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오버한 부분이 있긴 해도, 그 움직임까지 다음 동작에 힘을 싣는 발판으로 쓰고 있어. 저건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냐. 이 영화가 잘된다면, 그건 전부 다 액션배우들 덕분일 거다. 불쌍한 인간들. 이찬한테 매일 얼마나 시달리고 있을지······.’
그의 추측대로였다. 액션배우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딴 영화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옛 수장 성진만 때문이었다.
“야. 너희들 진짜 그동안 고생 많았지? 스타들 더블이나 서고, 맨 뒷모습만 보여주고 말이야. 근데 이제 안 그래도 돼. 이찬한테 무술 배워서 이번 영화 제대로 만들면, 너희도 이제 스타 되는 거다. 그날을 위해 애써보자. 진짜 액션, 해보자!”
그 제자들이야말로 그가 감독으로 전향한 가장 큰 이유.
70인의 액션배우는, 그렇게 악독 천재의 손을 잡게 됐다.
< 73장 - 감독 성진만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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